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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년 ,

나의 큰 딸 지니는 스물일곱 살,활짝 핀 다알리아꽃 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그 곁에 서면 향그럽고 싱그러운 바람에 스쳐 나마저 덩달아 신바람이 들었다.

예쁜 몸매를 만드느라 먹성좋은 입맛을 절제하기도 하고 

피부관리를 한다고 시커먼 마스크로 나를 놀래키기도 한,

친구들과 만나 맛난 걸 먹으며 까르륵 웃고 잡담하는 걸 꽤나 즐기던,

 최신의 책을 읽으며, 특히 인문학,고고학 신화와 전설,판타지아에 통달하여

내가 물으면 척척 대답해 주던 움직이는 인문학 사전이었던 그 애.


유난히도 햇살이 따갑게 무르녹는 가을의 끝자락 어느 날,

그 애는 '안녕'할 새도 없이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났다. 

누가 알았으랴, 그런 이별.

언제나 귀가하던 그 애의 방, 새벽이 오도록 적막했다.

뷰잉에서 거품같은 레이스 관 속에 누워있는 그 애의 모습을 보며 

비로소, 네가 여기 있구나 탄식하면서도 반가웠다.


그 애가 떠난 후 나날, 난 살아있어도 사는게 아니었다.

맨 먼저 드는 생각, 내가 뭔 죄를 지어서 이 참담한 일을.

세상 보기가 부끄러웠고 하나님 보기도 죄스러웠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그 원망과 부끄러움으로 그늘졌던 나날. 

난 죄인이었다. 죄인으로 여호아 앞에 감히 나설 수 없어

교회도 끊었다.


나는 그 애를 만나려 죽음도 생각했다.

그러나 둘 째 딸 엘리아 , 약혼을 하고 이듬 해 오월 혼인 날짜도 잡아 놨는데,

내가 자살을 하고 나면 둘째의 원망에 저승가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에.

이왕 살거면 남들에게 우울 끼치지 말고 웃으며 살자 , 내 슬픔 깊이 묻어두고 명랑하게 살자 하였다. 


그런 인고의 세월,어느 날, 문득 생각되더라.

그 애는 확실히 순백이었고 어여쁜 젋음 , 

 틀림없이 천당에 가 있을 줄 알았다.

네가 천당에 있다면 난 너를 꼭 찾아가 만나 볼거야.

꼭 천당에 가야할 이유가 생겼다.

마침 그 때 심방 왔던 목사님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나, 지니 보러 꼭 천당에 가야겠어요. 


그러기  위해 주일 지키기,

 십일조 헌납, 

그리고 죄 안 짓고 살기, 세 가지를 꼭 지키리라 결심했다.

--- 거짓말 안 하고 속이지 않고,착하게 살아야지.


남편은 마음을 돌리지 않고 교회 가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나는 다음 주일 날 ,

홀로 차를 몰고 교회로 향햇다.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세찬 비바람이 하이웨이의 길을 하얗게 가로 막았다.

그러나 나는 악을 쓰며 하나님을 외치며 교회로 향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까지 교회에 열심으로 다니며, 그리고 밝게 웃으며 산다.

 못 잊을 내 가슴 속 지니, 

너를 만나러 다달이 노란색 프린세스 로즈를 한다발 들고 네 머문 곳을 찾는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단다.

네 동생 앨리아는 세 아들을 낳고 발칙하고 당당하게 잘 살고 있구나.

네 아비 어미도 곤욕스러운 나날을 나름 잘 견디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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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4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1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25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1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1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꽁트



< 그래서 어쩌라구 ? 나보고 뭐 어쩌라구 >

혜민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중

----->       그 사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누구의 고의도 아니었으며, 그리고 나에게도 너무 큰  상실이었고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다.

네 살 딸 아이가 유치원 버스 밑으로 들어가 꼬물꼬물 놀고 있을 때 아이를 미처 보지못한 운전기사가 버스를 후진한 것이다. 딸은 왜 그 시간에  그 차 밑에 들어가 혼자서 조용히 놀고 있었을까. 그리고 난 그 때 왜 하필  유치원생 엄마들과 잡담에 빠져 딸아이의 움직임에 부주의했던가.

남편은 나의 부주의를 가장 크게 꼬집고 비틀어  추궁하고 닥달하더니,

" 너하곤 끝장이야" 소리를 지르고는  

끝내 짐을 싸 들고 집을 나가버렸다.


( 나쁜 시간, 나쁜 장소)였다는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않은 채.



<  물음: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나: 내 자신을 견딥니다. >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중


----->        강원도 오지의 산골짝 , 낮고 부드럽게 속살거리며 계곡물이 흐른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피톤치드 성분 충만하여 신선하고  차가운 대기, 도시의 불볕 더위는 저 멀리 소란일 뿐 .여긴 서늘하고 적막하다. 속살거리는 물소리가 끊임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녀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차양막 아래 평상에 꼼짝 않고 누워 있다. 죽은듯이 반듯하게 누워있지만 가슴의 높낮이가 미약하게 오르내린다.아마도 서서이 죽어가는지도 모른다.


< 우리의 일상은 얼다가 녹다가하는 일의 반복이예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요 오직 견디는 것뿐  >     이성복의 ‘무한화서’중


----->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아침부터 잠이 드는 밤까지 그저 견디기만 했다.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고 싶은 평범한 일상들은 아름다웠고 너무 멀리 있었다.


인기척이 가까이 다가온다. 중년의 여인이 곁으로 와서 한숨처럼 말한다.

“ 이것아,언제까지나 굶을라고 ? 산 사람은 살어야지 . 그 어린게 제 명이 짧아 그리 간걸 . 누굴 원망하겠니? “  중년여인이  바구니에서 주섬주섬 꺼내 놓은 것은 닭죽이다.

“영계 한 마리에 인삼 한 뿌리, 찹쌀 넣고 푹 끓인 죽이니까 몇 술 뜨고 기운 차려야지"

엄마는 달래듯 부드럽게 말하며

꿈지럭 꿈지럭 부시시 일어나는 내게 숟가락을 쥐어준다. 며칠 동안 굶주려 창자가 꼬집히는 듯한 허기에  쌉싸름한 인삼과 구수한 닭죽의  냄새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 움마 !’ 그녀는 외치며 짐승같이 운다. 금방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다.

그러며 입을 벌려 닭죽을 한 숟갈 떠 넣는다.


< 이런게 인간이었어?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면서,이런게 인간이었어 ?하면서 헤매는것, 헤매는것에 흥미를 느끼는 것 >



----->     가장 모르는게 인간이고 가장 알아야 하는게 인간이기 때문에 소설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겠다.


물음: 당신은 소설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

나의 대답 ; 인간을 보았다.



이런게 인간이었어 하면서 헤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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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k0501 2017-02-23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시군요. 작가냄새가 풀풀 납니다.
왜 합작품이라고 하셨는지 알겠는데요, 그건 인용에 불과하니
합작이 아니에요.

완성된 한 편의 글을 멋지게 뽑아내고 용기내어? 이렇게
올림을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잘읽었습니다.
로그인해서 다시 들르겠습니다. 페크입니다.

성에 2017-02-23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통하신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숨김없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연대와 협조 그리고 조언
부탁드립니다.

페크pek0501 2017-02-23 21:52   좋아요 0 | URL
과분하게 받는 부탁인 것 같습니다. ㅋ 감사합니다.

2017-02-23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에 2017-02-24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지난 여름 가장 더운 때 쓴겁니다.
그러며 여러 번 고치고 퇴고하고.시간이 지나며,
원문이 좀 헷갈린거 같습니다.김영하의 발췌문도 있었는거 같았는데 -갸우뚱-
얼릉 <김영하>이름 내렸어요.
꼬랑지 내리고 죄송!!! ---- 문 2 답.

제가 영화나 드라마를 좀 과분하게----ㅋㅋ
때로는 감독이나 카메라맨의 영이 씌어 앵글을 드리댑니다.
<나>를 객관화시키며 이미지로 독자에게 어필하려는 의도에서--
그게 난해했나???
근데 내 글에선 그런 장면이 많아요. 어떤 땐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기도 하구요.
이게 과연 가당키나 한 수법인지
올바른 조언 기대합니다. ---- 문1 답

정말 고맙습니다.

2017-02-24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1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은 일요일,

화창한 날씨,  맑고 싱그러운  공기.

어디선가 복숭아  익어가는 냄새가 공기 속에 섞여 있다.

나 석은 케주얼 면바지, 반소매 버튼다운 셔츠로 단정하게 차려입고  교회로 간다.

아직 예배시간에 참석은 안 하고 예배가 끝나면 볼 수 있는 설란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납작한 일층 짜리 교회 건물 뒤는 널다란 청소년들의 체육장이 있고 그 주변은 키 큰 나무들,

사이사이 바베큐를 굽고 식사를 할 수있는 야외  식탁테이불이 여러 개 있다.

그는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설란을 기다린다. 매미가 한가하게 목청을 돋구며 여름의 절정을 노래한다.


낮예배가 끝나고 좀 시간이 지난 뒤 설란이 뛰어 온다. 앞자락을 덮는 에프론을 걸치고 있다.

들고 온 커피를 내려 놓으며 ,

“저  오늘, 주방 봉사하는 날이얘요, 교인들의 식사 자리가 끝나려면 한 삼십 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지루하지 않으시겠어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 기다려야지, 먼 이 곳 까지 왔는데 그냥 가라구 ?

“ 아니, 제가 미안해서요, 그럼 좀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마치자 팔랑팔랑 뛰어간다.

나석은 빙그시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먹는다.쓴 불랙의 맛 다음에 길게 혀 끝을 감아도는 깊고 구수한 여운 , 이 맛에 세상 사람들이 커피에 열광하는걸까.

그는 가방에서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스케치를 시작한다. 오늘은 세밀화를 그려볼까

발 밑에 작은 크로바, 굵은 나무 밑둥을 타고 올라가는 포이즌아이비, 그러다 그는 풀숲에 핀 작은 보라색 꽃을 발견한다. 아기 손톱만한 작은 꽃이지만 다섯 개  또렷한 꽃잎, 노란 꽃술, 쭉 뻗은 조그만 잎새, 난을 축소해 놓은듯 , 앙증맞고 귀티난다. 나석은 그 작은 꽃을 그리느라 골몰하다.

얼마 후 설란이 뛰어 온다.  

그림을 보며 “ 아,예뻐요.   내고향에 < 애기방울 난초 > 비슷한데  더 작으네요. 참, 귀엽고 신기해”

하며 반색을 한다.

“ 시장하지 않으세요? 오늘 교회 메뉴는 콩나물국밥이랍니다 “ 하며 스트로폴 국 그릇을 두 개를  내려 놓는다.  

“ 밥을 아주 말아 넣었으니 그냥 후르륵 드시면 돼요 “

설란은 시범삼아 한 숟깔 크게 떠서 입에 넣고 오물댄다. 오늘 설란은 세탁소서 일하던 때와 달리 하얀색 바탕에 꽃무늬 드레스, 머리는 가지런히 빗어내려 이마 위에 반짝이 작은 핀 을 꼽았다. 좀 촌스럽지만 그런대로 사랑스런 모습, 나석은 흐믓하게 바라 본다. 그 때

“ 하항 ! 여기 계셨구만, 웬 교회에 출석이신가 했더니 여기서 연애질을 ."

고음에 쇳소리, 거기 마리가 서 있다.

“ 아니 당신이 여기 왜 왔지 ?” 낭패한 나석의 목소리,

“ 당신의 가는 곳마다 바로  내 손 안에 있지요 “ 하며 손바닥 펼쳐 보이는 마리의 손 안에 스마트 폰이 있다.  이제 위치추적 장치까지 이용하다니 나석은 머리를 흔든다.

“ 마리 바쁜 당신이 왜 여기까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려 “ 나석의 말에

마리 도전적으로 눈섭을 꼿꼿이 세워 설란을 꼬나 보며

“ 저 숙녀분를 먼저 소개해 주시는게 순서 아닌가요 ?”

설란이 말한다.

“ 내 이름은 설란, 나화백님을 교회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구요.”

뒤이어 낭자한 마리의 웃음이 쏟아진다.


“ 화백님은 무신론자얘요, 아마 이 세상 현실의 구원자를 찾아 나섰겠지요.” 

하며 매우 고자세로 나석을 째려 본다. 

설란은 침착하게 자리를 가리키며

“ 좀 앉으세요, 혹시 식사를 안 하셨다면 갖다 드릴께요 “

“ 아니, 식사는 됐어요. 그렇지만 좀 앉을께요.’

하얀 바지를 입은 마리는 걸상 바닥을 살피며  손수건을  꺼내 펼쳐서 깔고 앉는다.

“ 마리, 당신 넘겨잡지 마시요, 설란은 내게 그림 주문을 한 의뢰인이고, 나는 그림에 대하여 의논하고자 만난 것이요 “

궁색한 변명은 말에 힘이 서지 못하고 목넘어로 흐지부지 사라진다.

“ 둘 다 틀린 말은 아닐텐데 어쩐지 내겐  완벽하게 납득이 안 되네요 . 좀 더 이해가 되도록 진심으로  얘기해 주실까요 “

마리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피고인을 닥달하는 검사처럼 위압적이다.


설란은 나석과 그의 아내라는 여인의 서슬퍼런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저 불상한 남자는 왜 저 여자 앞에서 한없이 기가 죽고 초라해질까. 그래서 그는 늘 꺼칠하고 영혼이 외출한듯 텅빈 얼굴로 힘든 일에 스스로를 던져 넣었다는 것인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다. 그 침묵의 시간을 매미의 유장한 울음 소리가 덮는다.

설란이 깊고 곧바른 눈으로 마리를 향하여 말한다.

“ 난 당신을 잘 알지 못해요. 그러나 여기서 처음 보는 당신은 행복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사람으로 보이네요.”

“ 그게 무슨 뜻이지요 ? “ 면도날처럼 들이대는 마리의 반문.

“ 스스로는 완벽하다고 자부하겠지요, 그 거만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갈등과 번민이 있어요. 그래서 당신의 위장된 허세는 내 눈을 속이지 못해요 “

마리는 눈을 내리깐다. 꼿꼿한 속눈섭이 뺨 위로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다. 잠시 후 마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석을 향해 묻는다.

“ 솔직히 말해 봐요, 나는 당신을 잡지 않았는데 왜 나를 떠나지 않았지요?”

“ 우린 어린 시절에 만나 결혼을 하였소. 난 당신을 끝까지 지켜야 할 책임도 맡은거요. 당신은 아버지의 과잉보호 아래서  나약하게 자랐소, 겉으로는 거센듯 기를 쓰지만 당신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오. 차마 나의 발목을 잡은 이유는 그것이요.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은 아빠가 필요하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의 하나요.

--- 그런데 이제 나도 지쳐가오.”  나석은 한숨같이 말을 끝낸다.


“ 당신네 부부는 공평하지 않군요, 잘난 아내를 위해 한 번 뿐인  자신의 인생과 뛰어난 능력을 포기한다는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돼요.

설란의 신랄한 비판에 둘은 말이 없다. 그러나 마리, 질 수 없다. 억지라고 부려야 한다.

“ 설란, 너는 우리보다 한참 어린 것이 선무당 사람 잡듯하네. 네가 뭘 안다고 주절대니?”

뺨이라도 한 대 칠듯 거칠고 세차게 말한다.

“ 나도 결혼을 했었지요. 산골짝 촌에서 도회지 부짓집으로요, 그런데 너무 색다른 환경에서 적응이 안 되는거얘요. 거기에다  나를 위하고 도와주어야 할 신랑이 바람이 났어요. 의지가지 없는 냉냉한 시집살이에서 이건 아니다 생각하고 친정집으로 뛰쳐 나왔어요. 시집간 지 삼 년도 안 되서였어요. 집으로 돌아와 마음을 못 잡고 들로 산으로만 내닫는 나를 내 어머니가 이 곳 외삼촌 댁으로 보내 주시어 이만큼이나마 사람처럼 살고 있어요.

난 나 화백님 같은 남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게 믿기지 않아요. 내가 겪은 남자는 아주 고약하고 달랐으니까요”

가만가만 낮은 목소리로 설란이 말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흐르고 여름의 한낮은 서서히 기울고 있다.

나석은 설란의 내력도 처음 듣는 내용이지만 자신의 살아온 세월도 껍질이 홀랑 벗겨져 맨살로 관찰당하는 듯  부끄러움과 모멸감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절망으로 인해 이미 죽음도 생각했던 것 아닌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자리가 고름을 쥐어짜듯 후련하기도 하다. 세 사람의 주변으로 썰렁한 바람이 휘돌고, 설란의 팔뚝으로 오소소 한기가 돈다.

이들 일에 내가  낑겨서 긴장할 필요는 없어 , 그냥 가 버릴까 하는데,

적의로 자못 도전적이던 마리가 정말 의외로 선선히 말한다.

“ 설란 씨, 내 부탁이 있어요.”

“ 말씀해 보세요, “ 설란도 눌라움에 눈을 깜박이며 말한다.

“ 저이의 아이를 낳아 주세요, 난 이미 가임기가 끝나서 저이의 아이를 낳아주지 못해 언제나 미안했거던요 “

이게 무슨 소린가. 그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일을 이렇게 쉽게 얘기하다니. 설란과 나석은 어이없이 마리를 바라 본다.

“ 좋아요, 엉뚱한 내 말을  나도 알아요.그런데도  나는 당신들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기 위해  어떤 서포트도 하겠어요, 필요하다면 법적 문제도 포함해서 말이지요.”

“ 뭘 믿고 제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청을 하십니까?” 설란이  정중하게 묻는다.

“ 난 좋은 사람을 알아 볼  줄 알아요. 저이는 참 좋은 사람이얘요, 차라리 나쁜 사람이라면 내 결단도 더욱 쉬웠을 거얘요, 그리고 설란 당신도 참한 사람이란 걸 알았어요. 나는  저이가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 하고  있다는 걸  벌써 알았어요. 그게 누군가 알려고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왔지요”  마리는 유쾌하게 웃는다.

나석은 당황하고 뜨거워지는 얼굴로 설란을 얼핏 살핀다.

“ 아니, 아니, 지금 당장 결정할 건 없어요, 난 이쯤 내 소견을 밝히고 당신들이 알아서 전진하시든지, 스톱하시든지, 맘대로 하시라구요 ,

알아요 ? 우린 각자 섬처럼 외롭게 떠돌다 서로 소통하는 가교로 이어지는 거얘요.”

마리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하이톤으로 외친다.

“ 내가 생각했던 제일 유쾌 한 결론으로 맺는 오늘의 자리는 이 편과 저 편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 무지개 다리 > 로 이름 붙칩시다 “


마리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까르륵 까르륵 웃음 소리를 남기고 차키를 짤그랑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차장 쪽으로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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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십장생도 >





십장셍도.jpg


<  다시 십장생도  >


설란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초대했다.

와서 그림이 전시될 공간을 보고 계획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이다.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이 번에야 말로 정말 불세출의 뛰어난 걸작을  만들고 싶다.

설란의 외삼촌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은 정말 입구부터 남다른 세심한 손길이 느껴진다.

프리이빗 도로에 명자나무 울타리가 가지런히 자라 있고  집 앞에는  작으마한  연못에, 화사한 대리석 분수에서 무지개 빛 물이 뿜어져 나온다. 높다란 대리석 석주가 아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육중한 티크소재 현관문, 어딘가 졸부의 조급한 염원이 애처럽다는  느낌. 아니다, 선입감은 금물. 여하튼 미니어쳐 신전같이 귀엽다.


설란과 그녀의 와삼촌은 매우 반갑게 그를 맞이한다.

설란의 외삼촌은 아마 70에서 중반 쯤   넘었을까? 아직 꼿꼿하게 형형한 눈빛, 그리고 자못 경계하고 감찰하는 날카로운 눈빛이다. 널다란 응접실, 짙은 갈색  가죽 소파에 좌정한 후에도 그는 나를 샅샅히 훑어보고 있다. ‘ 설란 넌 나를 어떻게 소개한 거니’ 속으로 가파른  비명을 지르며 등허리에 진땀이 밴다.

그러나 나는 예의 바르게 준비해 간 작품첩을 보이며 내 소개를 한다.

“ 저는 한국화 화가인 나 석입니다. 창천 선생의 문하에서 21 년을 배웠고 대한민국 미술 공모전에 세 번, 그리고 미국 오기 전 1995 년 개인전을 한 번 했습니다.”

“ 저의 대표작품을 사진으로 담아 놓은 것인데 참고삼아 보십시요 ‘

노인은 작품집을 찬찬이 살핀다.

“ 주로 소나무를 많이  그렸군, 소나무를 좋아하시오?”

“ 네, 저는 소나무 그림을 그리려고  전국의 잘 생긴 소나무를 찾아 산골짝마다 누비고  다녔지요.”

“ 소나무가 맘에 드네, 십장생에서도 소나무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지. 두툼한 밑둥에 쭉 뻗어 올라간 붉은 소나무가 장수의 기백을 보이지 않던가?”

노인은 꽤나 만족한듯 말한다.


“  설란이가 화백님  얘기를 많이 하더라구. 난 설란을  완전 신용해요. 원, 그애는 꾸밀 줄을 몰라요. 그게 좋기는 하지만 때로  걱정이 되서리.”

노인의 궁시렁거리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좀 의아하며

“ 어르신 암투병 중이시라던데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잘 치료받고 계시지요?”

그게 생체 순환이 빠른 젊은이들과는  달리 노인네는 천천이 천천이 진행된다더군, 별다른 치료는 무슨, 설란이가 해 주는 자연 밥상이 약이 되니봐. 설란이 곁에 있어 큰 위안이 되네”.

“ 어르신, 언제 미국에 왔으며 가족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 허어! 나는 월남 파견  근로자로 갔다가 월남 패망 1970 년 중반 쯤   미군 철수를  따라 미국 땅을 밟았어요,

그 때만해도 미국에는 건설 현장이 많았다오. 큰 숲을 밀어내고 타운하우스를 짓고

아파트를 짓고, 또 커다란 상가를 짓느라  일거리가 많았다오. 나는 장가갈 생각을 할 새도 없이 현장을 따라다니며 죽도록 일만 했어요.”

외삼춘은 말할 거리가 생긴 것이 기쁜듯,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먼 눈을 하고 회상에 잠겨 다시 말을 계속한다.

“ 오십이 다 되어서야    건설현장에서 밥을 해  나르던 멕시코 여인과 인연이 되어 동거를 하게 되었소. 멕시코 여인이 이상하게 우리나라 옛 여인네처럼 정겹던거요. 그런데 내가 박복한건지 삼 년을 못 채우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소.  그 후 나는 마음을 두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며 정처없이 살았다오. 아마 설란이 내 곁으로 오지 않았다면 이제까지도 나는 집없는 떠돌이로  행려병자가 되었겠지.”


마침 설란이 외삼촌을 부른다.

“ 식사 준비됐어요, 어서들 오셔서  식사하세요 “

가지런히 차려진 밥상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여기가 한국의 지리산 골짜기인가.

싱싱한 배추김치, 물이 잘박한 열무김치, 어린 상추 겉절이, 나물무침, 명태조림, 알 수 없는 이파리와 뿌리를 삭힌 장아찌,그리고 버섯과 두부를 넣어 자글자글 끓는 된장 뚝배기, 검은 콩이 다문다문 섞인 하얀 찰밥, 곁들인 소고기 사태와 무를 참기름에 볶아 말갛게 끓인 국,

미국에 와서 이십여 년을 살아 오며 이렇게 맛깔스러운 한국의 집밥을 먹은 적이 있었나?

어느 하나의 음식도 간은 슴슴하고 담백하며 느끼하지 않아  똑 떨어지는 일미이다.

“ 이거 다 설란씨가 만든 음식입니까?”  

설란은 다만 쑥스럽게 웃는다. 대신 외삼촌이 설명한다.

“ 설란은 강원도 양구 심심산천에서 태어나 이런 음식만 해요. 그리고 그로서리도 잘 안 가요. 자연 채취로 밥상을 차리지요. “

“ 자연 채취라니요?, 여기서 이런 식재료가 다  나옵니까?”

설란이 까르륵 웃는다.

“ 외삼촌이 작은 채소밭을 가꾸세요. 우리 밥상에 필요한 걸 손수 심으세요. 그리고 나는   뒤안 나무 숲으로 가서  야생 나물들을 찾아요. 한국산과 좀 틀리지만 그래도 난 그걸로 반찬을 만들려고 연구해요”

“ 여기에서 어떤 야생나물을 뜯습니까?”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다.

“ 눈 여겨 자세히 살피면 습습한 응달에 고사리가 지천이고 , 민들레, 담배나믈, 취나믈, 산파, 봄 5,6 월은 성찬이지요 또 가을에는 살진 고들빼기로 겨울 김치를 담그기도 해요. “

정말 소박하지만 맛난 점심을 먹고 외삼촌은 십장생도를 걸어 둘 공간으로 안내한다. 리빙룸 널찍한 방에 고귀하고 값지게 보이는 페르시안 카펫, 묵직하고 검은 가죽 카우치 세트가 자리잡고 대리석으로 된 테이불 세트,

그런데 하얀 벽은 텅 비어 있다.

“ 여기 삼면으로 십장생 연작을 그려 주구려. 나야, 공사판에나 쫒아다니던 놈이 뭐 아는게 있나? 화백님의 안목과 식견에 전적으로 맡기겠소.”

그런데 어르신 요즘은 별로 잊혀져가는 십장생에 애착을 느끼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강한 흥미를 느끼며 묻는다.

“내 어린 시절에 선친의 사랑채에 가면 십장생 병풍이 있었소 운치있게 뻗어 올라간 낙낙장송, 선학, 기이한 사슴의 무리, 영생불사 천도 복숭, 영지, 영특하게 물을 뿜어내는 거북, 뿐이요?

붉은 해, 폭포수 물, 바위, 구름과 청산, 모든게 신비해 보였소, 그 세상은 아마도 생과 사를 뛰어넘는 신선의 세상이 아닌가, 옥황상제와 구름옷 선녀를 상상하며 하염없이 보았었소.

어느 날 문득 나는 늙고 병든 내 자신을 알았을 때, 내 인생이 너무 좁다랗고 답답하게  느꼈지요. 십장생이 어우러진 선경으로 들어가면 내 본향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거요.

아마 이것이 완성되기 까지 나는 소망과 기대로 사는 보람이 있을 거요”

곁에 와 섰던 설란도 한 마디 거든다.

“ 것 보세요, 우리 외삼촌은 정말 십장생의 세상을 원하고 계시다구요.

이제 바깥 정원공사도 얼추 끝나고 이 벽면을 채울 십장생도만 완성되면 우리 외삼촌 더욱 기를 받으시고  행복한  건강 백세 이루실 거얘요 “

“ 백 살 씩이나 뭐, 원, 난 설란 니나 시집 보내면 죽어도 원없겠다 “

“ 아니, 외삼촌 또 그 소리, 제가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걔들 시집 장가 보낼 때까지 오래오래 사시라니까요”

외섬촌 조카의 유쾌한 농담을 들으며 머쓱한 내게 외삼촌은

“ 나는 이제 좀 피곤하구려, 난 올라가 쉬려니 화백 선생은 설란과 뒷뜰에 나가 차라도 한 잔 하시시요”


“ 무슨 차를 내올까요?  나화백님,”

“ 향그러운 꽃차 ? “ 나는 농담으로 말했는데 설란 반색을 한다.

“ 아, 있어요, 있어요. 민들레 꽃차. “

설란은 안으로 들어가 오래지 않아 팔각 목반에 찻잔과 차주전자를 들고 온다.

찻잔에는 마른 민들레 꽃봉오리가 대여섯 담아있고 설란은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미구에 민들레 노란꽃이 펼쳐지며 아련한 꽃향과 풋풋한 풀내가 풍긴다.

“ 내 생전 처음 마시는 꽃차군요 “ 나는 천천이 조금씩 마셔서 혀 안으로 굴린다.

다시 연상으로 당겨지는 눈 속의 설란 -- 설란의  향.


차를 다 마신  후 설란은 평소 자기가 자주 다니며 야생 나물들을 채취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는  뒤안 숲으로 인도한다.

“ 외삼촌은 이 숲  삼사백 에이커 쯤을 사셨어요.그냥 숲으로 지키시겠대요. 이 근처에는 인가가 없어요. 우리만의 왕국이요.”

“ 식구도 별로 없으시면서 왜 이렇게 큰 규모의 저택을 지었을까요 “

“ 저도 잘 모르지요. 내가 십여 년 전 외삼촌에게 왔을 때 외삼촌은 허술한 아파트에 사셨어요. 금방이라도 이사하는데 지장 없도록 아주 단촐하게요, 근데 내가 와서 외삼촌에게 식사랑 살림 뒷치닥거리랑 하게 되니까, 외삼촌은 삶의 활기를 찾으셨나 봐요. 그래서 살아갈 거리를 찾으시면서 한평생하시던 건축 기술로 당신의 집을 근사하게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까요?”

설란은 일껒 설명하다 끝마무리는  말의 톤을 살짝 올려 미확인의  의문형으로 맺는다.

나무는 울창하고 좁다란 산길은 그늘이 깊다. 어디선가 조용히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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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무슨 고대 로마 황후라도 되는  양 고개를 꼿꼿이 들고 새하얀 비단가운을 펄럭이며 안채로 뛰어 들어가는  마리의 도발적이고  볼륨있는 몸매를  바라 보며 나는 새삼 피식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이렇게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태산에 깔린 듯  마음이 무거워 진다.

‘ 저 잘나고 멋진 여자를 나는 어째야 좋을까’

마리는 꽤 괜찮은 여자다.

아름답고 재능있고  언변도 좋아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택스타일디자이너다.

독자적으로  그녀 자신의 사무실을 차려  그 방면에 전망있는 젊은이들을 고용하고 그들과 함께 새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종합하여 만든 새롭고 훌륭한 작품을 각 섬유회사에 공급한다. 언제나 첨단으로 개발해 내는 그녀의 상품은 고급화 특성화를 지향하는 대형 섬유회사에 좋은 가격으로 넘겨진다. 경영 , 상담, 어느 하나 막힘없이 잘 나가는 그녀의 사업이 그녀를 더욱 방자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녀의 바람기는 천성적인 것일까.

나는 한국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아내인 마리를 먼저 미국으로 보냈었다.

마리는 1980 년대 당시 새로이 각광받는 택스타일 디자이너로서의 첨단 컴퓨터 작업을 공부하기 위해 한 시가  급하다고 조바심치고 있어서였다.

나는 나대로의 피치 못할 일이 있어 내 일을 마무리짓고  8 년 후에나 미국으로 건너와 마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만난 마리는 두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하나는 검은 머리 6 살 ,  남자애  엘리옷, 하나는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 4 살 여자아이  샤론, 누가 보아도 내 자식은 아니다.

나는 오랜만에 반갑게 영접해 주는 마리에게 최대한의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을 찾아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 저 아이들을 우리의 아이라고  입적시킨 것이요?”

마리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재차 묻자

“ 당신이 원한다면 이혼해도 좋아요”하던게  그 대답이었다.

“ 그래, 저 아이들의 아비와는 아직 관계가 있소 ?”

“ 그건 아니얘요, 그들은 자기 아이들이 있는지조차 몰라요. “ 마리는 다소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리고 휙 내 앞을 떠나 그녀의 작업실로 가 버린다.

아, 마리 당신 철면피요? 바보요 ? 내 맘 속의  지옥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마리, 나의 갈등은 아랑곳 없이 , 저녁 잠자리에  뜨겁게 파고 든다.


“ 당신이 내게 온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내 아빠가 2 년 전 돌아가시고 난 다음, 난 혼자 남아져 있다는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마리는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철저히 아빠 의존형이었다. 일찍 엄마를 여읜 후 아빠는 재혼도 안하고 오직 외동 딸 마리에게 사랑을 쏟았다.마리가 원하는 거라면 그녀의 아빠는 무조건 < 예스 >였다. 그래서 마리가 아직 대학 졸업 전이건만 마리의 고집으로 우리는 비교적 수월하게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마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마리 아버지는 한국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마리 따라 미국으로 와서 마리 곁에 살았다. 아직도 아빠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해 의지없이 바들바들 떨며 내 품으로 파고 드는 마리에게 나도 모르는 측은함과  애처러움을 느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리의 분방함은 내 존재가 있음에도 바뀌지 않았다. 사업상이라며 바에서 사람들과 모여 이성을 잃을 전도로 술을 마시고 함부로 아무하고나 어울리며 밤을 지새우는 윤리나 도덕이라는 의식은 아예 없느듯한 그녀의 생활,

도대체 네가 왜 이렇게 사는거니? 미국이라는 사회가 이 따위인거니?

나의 생활은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울화가 치밀 때면 차를 타고 이정표도 안 보고 한없이 하이웨이를 달리거나,

또는 말 없이 한국으로 휙 건너가거나,

그러나 갈등이 깊어질수록 내 마음은 마리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제 자리로 돌아 올 뿐이다. 그리고 무럭무럭  천진하게 자라나는 내 생소한 아이들에게 아빠로서의 자상한 역할을 해낸다. 아이들은 사랑스럽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이들이 진급하는   하이스쿨은 아예 집에서 먼 기숙학교로 보내 집에서 떠나 있다

멀리 떠나보낼 수 밖에 없는 황당한 이유는 마리의 너무 지나친 주벽 때문이다.

마리는 마음 속에 불평이나 불만이 쌓이면 영락없이 술을 만땅으로 들이켜고 들어와 엄청난 주정으로 날을 지새우는 것이다.

‘ 나는 죄 많은 여자, 나를 동정하지 말고 나를 떠나라. 난 아빠만 있으면 된다. 내 맘 속의 아빠는 여전히 친절하시고 다정하게 나를 지켜 주신다.

“ 야, 나석 선배, 위선 떨지 말고 나를 떠나라. 생판 모르는 남의 자식 둘을 기르는게 너는 괜찮니?”  알고 보면 마리는 내게 깊이 주늑 들어 있다.

마리, 제발 기 죽지 마라. 이왕 네가 저지른 것 너답게 뻔뻔하게 당당하게 살아라. 그게 너다운 모습이고 나에게도 납득이 간다. 네 약한 모습으로 나를 헷갈리게 하지 마라.

나는 말도 안 되는 위로랍시고 주절대며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자리에 눕힌다.


때때로 마리 그녀는 문득 거치른 방황 중에  제 정신이 들어온 소녀처럼 말갛게 씻은 얼굴, 생머리를 느러뜨리고 내 품으로 온다. 마치 신혼초, 처음 남자품에 안기는 수줍은 신부처럼,

나는 그녀를 물리치지 못하고 지옥불같은 정념으로 으스러질듯 껴안으며 마구 짓밟는다. 사랑이여, 미움이여 나를 태워 버려라. 마리의 흐느끼는 소리에 나는 까무륵이 정신을 잃는다.

아침, 날이 새고 나를 떠나기 전 마리는 내게 속삭인다.

“ 당신 때문에 나는 힘이 나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요, 떠나지 마요. “

나는 거기에 마주 미소짓고 입 맞출 수 없다. 마리도 알고 있겠지.나는 네 너그럽고 관대했던  아빠가 아니야.

나는 돌아 눕는다

그러면서 나는 삶의 목적과 생기를 잃고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다.


때로는 내 힘과 의지력의 최후를 보겠다고 중노동의 틈으로 들어서가도 한다.

집 리모델링을 하는 건축현장에서 페인팅, 루핑, 사이딩을 무조건  하던지 , 또는  드라이클리닝 훽토리 에서 프레스대를 잡던지 , 가리지 않고 가혹하도록 감당하기 힘든 육체노동의 한계, 거기에 나는 도박처럼 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 지리멸렬한 인생의  좌표는 < 절망 >이란 표지 앞에  머무를 뿐이다.

아, 나는 왜 여기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마리의 분방함, 마리의 나를 향한  어이없는 신뢰,

그래, 네 왕성한 삶의 의욕 , 그 편안한 삶의 공식 앞에 차라리 내가 내 삶을 접는다.

나는  내 진심으로 원하지 않던  죽음의 덫으로 차츰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마음이 끌리고 집중되는  일을 찾았다.

우연찮케도 초목이 눈으로 덮혀  막막한 산  속에서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소박하고 청초한  설란,

그 여자를 알게 됐다.

내 죽음의 종착역을 조금 유예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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