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요일,

화창한 날씨,  맑고 싱그러운  공기.

어디선가 복숭아  익어가는 냄새가 공기 속에 섞여 있다.

나 석은 케주얼 면바지, 반소매 버튼다운 셔츠로 단정하게 차려입고  교회로 간다.

아직 예배시간에 참석은 안 하고 예배가 끝나면 볼 수 있는 설란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납작한 일층 짜리 교회 건물 뒤는 널다란 청소년들의 체육장이 있고 그 주변은 키 큰 나무들,

사이사이 바베큐를 굽고 식사를 할 수있는 야외  식탁테이불이 여러 개 있다.

그는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설란을 기다린다. 매미가 한가하게 목청을 돋구며 여름의 절정을 노래한다.


낮예배가 끝나고 좀 시간이 지난 뒤 설란이 뛰어 온다. 앞자락을 덮는 에프론을 걸치고 있다.

들고 온 커피를 내려 놓으며 ,

“저  오늘, 주방 봉사하는 날이얘요, 교인들의 식사 자리가 끝나려면 한 삼십 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지루하지 않으시겠어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 기다려야지, 먼 이 곳 까지 왔는데 그냥 가라구 ?

“ 아니, 제가 미안해서요, 그럼 좀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마치자 팔랑팔랑 뛰어간다.

나석은 빙그시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먹는다.쓴 불랙의 맛 다음에 길게 혀 끝을 감아도는 깊고 구수한 여운 , 이 맛에 세상 사람들이 커피에 열광하는걸까.

그는 가방에서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스케치를 시작한다. 오늘은 세밀화를 그려볼까

발 밑에 작은 크로바, 굵은 나무 밑둥을 타고 올라가는 포이즌아이비, 그러다 그는 풀숲에 핀 작은 보라색 꽃을 발견한다. 아기 손톱만한 작은 꽃이지만 다섯 개  또렷한 꽃잎, 노란 꽃술, 쭉 뻗은 조그만 잎새, 난을 축소해 놓은듯 , 앙증맞고 귀티난다. 나석은 그 작은 꽃을 그리느라 골몰하다.

얼마 후 설란이 뛰어 온다.  

그림을 보며 “ 아,예뻐요.   내고향에 < 애기방울 난초 > 비슷한데  더 작으네요. 참, 귀엽고 신기해”

하며 반색을 한다.

“ 시장하지 않으세요? 오늘 교회 메뉴는 콩나물국밥이랍니다 “ 하며 스트로폴 국 그릇을 두 개를  내려 놓는다.  

“ 밥을 아주 말아 넣었으니 그냥 후르륵 드시면 돼요 “

설란은 시범삼아 한 숟깔 크게 떠서 입에 넣고 오물댄다. 오늘 설란은 세탁소서 일하던 때와 달리 하얀색 바탕에 꽃무늬 드레스, 머리는 가지런히 빗어내려 이마 위에 반짝이 작은 핀 을 꼽았다. 좀 촌스럽지만 그런대로 사랑스런 모습, 나석은 흐믓하게 바라 본다. 그 때

“ 하항 ! 여기 계셨구만, 웬 교회에 출석이신가 했더니 여기서 연애질을 ."

고음에 쇳소리, 거기 마리가 서 있다.

“ 아니 당신이 여기 왜 왔지 ?” 낭패한 나석의 목소리,

“ 당신의 가는 곳마다 바로  내 손 안에 있지요 “ 하며 손바닥 펼쳐 보이는 마리의 손 안에 스마트 폰이 있다.  이제 위치추적 장치까지 이용하다니 나석은 머리를 흔든다.

“ 마리 바쁜 당신이 왜 여기까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려 “ 나석의 말에

마리 도전적으로 눈섭을 꼿꼿이 세워 설란을 꼬나 보며

“ 저 숙녀분를 먼저 소개해 주시는게 순서 아닌가요 ?”

설란이 말한다.

“ 내 이름은 설란, 나화백님을 교회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구요.”

뒤이어 낭자한 마리의 웃음이 쏟아진다.


“ 화백님은 무신론자얘요, 아마 이 세상 현실의 구원자를 찾아 나섰겠지요.” 

하며 매우 고자세로 나석을 째려 본다. 

설란은 침착하게 자리를 가리키며

“ 좀 앉으세요, 혹시 식사를 안 하셨다면 갖다 드릴께요 “

“ 아니, 식사는 됐어요. 그렇지만 좀 앉을께요.’

하얀 바지를 입은 마리는 걸상 바닥을 살피며  손수건을  꺼내 펼쳐서 깔고 앉는다.

“ 마리, 당신 넘겨잡지 마시요, 설란은 내게 그림 주문을 한 의뢰인이고, 나는 그림에 대하여 의논하고자 만난 것이요 “

궁색한 변명은 말에 힘이 서지 못하고 목넘어로 흐지부지 사라진다.

“ 둘 다 틀린 말은 아닐텐데 어쩐지 내겐  완벽하게 납득이 안 되네요 . 좀 더 이해가 되도록 진심으로  얘기해 주실까요 “

마리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피고인을 닥달하는 검사처럼 위압적이다.


설란은 나석과 그의 아내라는 여인의 서슬퍼런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저 불상한 남자는 왜 저 여자 앞에서 한없이 기가 죽고 초라해질까. 그래서 그는 늘 꺼칠하고 영혼이 외출한듯 텅빈 얼굴로 힘든 일에 스스로를 던져 넣었다는 것인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다. 그 침묵의 시간을 매미의 유장한 울음 소리가 덮는다.

설란이 깊고 곧바른 눈으로 마리를 향하여 말한다.

“ 난 당신을 잘 알지 못해요. 그러나 여기서 처음 보는 당신은 행복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사람으로 보이네요.”

“ 그게 무슨 뜻이지요 ? “ 면도날처럼 들이대는 마리의 반문.

“ 스스로는 완벽하다고 자부하겠지요, 그 거만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갈등과 번민이 있어요. 그래서 당신의 위장된 허세는 내 눈을 속이지 못해요 “

마리는 눈을 내리깐다. 꼿꼿한 속눈섭이 뺨 위로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다. 잠시 후 마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석을 향해 묻는다.

“ 솔직히 말해 봐요, 나는 당신을 잡지 않았는데 왜 나를 떠나지 않았지요?”

“ 우린 어린 시절에 만나 결혼을 하였소. 난 당신을 끝까지 지켜야 할 책임도 맡은거요. 당신은 아버지의 과잉보호 아래서  나약하게 자랐소, 겉으로는 거센듯 기를 쓰지만 당신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오. 차마 나의 발목을 잡은 이유는 그것이요.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은 아빠가 필요하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의 하나요.

--- 그런데 이제 나도 지쳐가오.”  나석은 한숨같이 말을 끝낸다.


“ 당신네 부부는 공평하지 않군요, 잘난 아내를 위해 한 번 뿐인  자신의 인생과 뛰어난 능력을 포기한다는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돼요.

설란의 신랄한 비판에 둘은 말이 없다. 그러나 마리, 질 수 없다. 억지라고 부려야 한다.

“ 설란, 너는 우리보다 한참 어린 것이 선무당 사람 잡듯하네. 네가 뭘 안다고 주절대니?”

뺨이라도 한 대 칠듯 거칠고 세차게 말한다.

“ 나도 결혼을 했었지요. 산골짝 촌에서 도회지 부짓집으로요, 그런데 너무 색다른 환경에서 적응이 안 되는거얘요. 거기에다  나를 위하고 도와주어야 할 신랑이 바람이 났어요. 의지가지 없는 냉냉한 시집살이에서 이건 아니다 생각하고 친정집으로 뛰쳐 나왔어요. 시집간 지 삼 년도 안 되서였어요. 집으로 돌아와 마음을 못 잡고 들로 산으로만 내닫는 나를 내 어머니가 이 곳 외삼촌 댁으로 보내 주시어 이만큼이나마 사람처럼 살고 있어요.

난 나 화백님 같은 남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게 믿기지 않아요. 내가 겪은 남자는 아주 고약하고 달랐으니까요”

가만가만 낮은 목소리로 설란이 말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흐르고 여름의 한낮은 서서히 기울고 있다.

나석은 설란의 내력도 처음 듣는 내용이지만 자신의 살아온 세월도 껍질이 홀랑 벗겨져 맨살로 관찰당하는 듯  부끄러움과 모멸감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절망으로 인해 이미 죽음도 생각했던 것 아닌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자리가 고름을 쥐어짜듯 후련하기도 하다. 세 사람의 주변으로 썰렁한 바람이 휘돌고, 설란의 팔뚝으로 오소소 한기가 돈다.

이들 일에 내가  낑겨서 긴장할 필요는 없어 , 그냥 가 버릴까 하는데,

적의로 자못 도전적이던 마리가 정말 의외로 선선히 말한다.

“ 설란 씨, 내 부탁이 있어요.”

“ 말씀해 보세요, “ 설란도 눌라움에 눈을 깜박이며 말한다.

“ 저이의 아이를 낳아 주세요, 난 이미 가임기가 끝나서 저이의 아이를 낳아주지 못해 언제나 미안했거던요 “

이게 무슨 소린가. 그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일을 이렇게 쉽게 얘기하다니. 설란과 나석은 어이없이 마리를 바라 본다.

“ 좋아요, 엉뚱한 내 말을  나도 알아요.그런데도  나는 당신들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기 위해  어떤 서포트도 하겠어요, 필요하다면 법적 문제도 포함해서 말이지요.”

“ 뭘 믿고 제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청을 하십니까?” 설란이  정중하게 묻는다.

“ 난 좋은 사람을 알아 볼  줄 알아요. 저이는 참 좋은 사람이얘요, 차라리 나쁜 사람이라면 내 결단도 더욱 쉬웠을 거얘요, 그리고 설란 당신도 참한 사람이란 걸 알았어요. 나는  저이가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 하고  있다는 걸  벌써 알았어요. 그게 누군가 알려고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왔지요”  마리는 유쾌하게 웃는다.

나석은 당황하고 뜨거워지는 얼굴로 설란을 얼핏 살핀다.

“ 아니, 아니, 지금 당장 결정할 건 없어요, 난 이쯤 내 소견을 밝히고 당신들이 알아서 전진하시든지, 스톱하시든지, 맘대로 하시라구요 ,

알아요 ? 우린 각자 섬처럼 외롭게 떠돌다 서로 소통하는 가교로 이어지는 거얘요.”

마리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하이톤으로 외친다.

“ 내가 생각했던 제일 유쾌 한 결론으로 맺는 오늘의 자리는 이 편과 저 편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 무지개 다리 > 로 이름 붙칩시다 “


마리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까르륵 까르륵 웃음 소리를 남기고 차키를 짤그랑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차장 쪽으로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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