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십장생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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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십장생도  >


설란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초대했다.

와서 그림이 전시될 공간을 보고 계획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이다.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이 번에야 말로 정말 불세출의 뛰어난 걸작을  만들고 싶다.

설란의 외삼촌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은 정말 입구부터 남다른 세심한 손길이 느껴진다.

프리이빗 도로에 명자나무 울타리가 가지런히 자라 있고  집 앞에는  작으마한  연못에, 화사한 대리석 분수에서 무지개 빛 물이 뿜어져 나온다. 높다란 대리석 석주가 아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육중한 티크소재 현관문, 어딘가 졸부의 조급한 염원이 애처럽다는  느낌. 아니다, 선입감은 금물. 여하튼 미니어쳐 신전같이 귀엽다.


설란과 그녀의 와삼촌은 매우 반갑게 그를 맞이한다.

설란의 외삼촌은 아마 70에서 중반 쯤   넘었을까? 아직 꼿꼿하게 형형한 눈빛, 그리고 자못 경계하고 감찰하는 날카로운 눈빛이다. 널다란 응접실, 짙은 갈색  가죽 소파에 좌정한 후에도 그는 나를 샅샅히 훑어보고 있다. ‘ 설란 넌 나를 어떻게 소개한 거니’ 속으로 가파른  비명을 지르며 등허리에 진땀이 밴다.

그러나 나는 예의 바르게 준비해 간 작품첩을 보이며 내 소개를 한다.

“ 저는 한국화 화가인 나 석입니다. 창천 선생의 문하에서 21 년을 배웠고 대한민국 미술 공모전에 세 번, 그리고 미국 오기 전 1995 년 개인전을 한 번 했습니다.”

“ 저의 대표작품을 사진으로 담아 놓은 것인데 참고삼아 보십시요 ‘

노인은 작품집을 찬찬이 살핀다.

“ 주로 소나무를 많이  그렸군, 소나무를 좋아하시오?”

“ 네, 저는 소나무 그림을 그리려고  전국의 잘 생긴 소나무를 찾아 산골짝마다 누비고  다녔지요.”

“ 소나무가 맘에 드네, 십장생에서도 소나무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지. 두툼한 밑둥에 쭉 뻗어 올라간 붉은 소나무가 장수의 기백을 보이지 않던가?”

노인은 꽤나 만족한듯 말한다.


“  설란이가 화백님  얘기를 많이 하더라구. 난 설란을  완전 신용해요. 원, 그애는 꾸밀 줄을 몰라요. 그게 좋기는 하지만 때로  걱정이 되서리.”

노인의 궁시렁거리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좀 의아하며

“ 어르신 암투병 중이시라던데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잘 치료받고 계시지요?”

그게 생체 순환이 빠른 젊은이들과는  달리 노인네는 천천이 천천이 진행된다더군, 별다른 치료는 무슨, 설란이가 해 주는 자연 밥상이 약이 되니봐. 설란이 곁에 있어 큰 위안이 되네”.

“ 어르신, 언제 미국에 왔으며 가족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 허어! 나는 월남 파견  근로자로 갔다가 월남 패망 1970 년 중반 쯤   미군 철수를  따라 미국 땅을 밟았어요,

그 때만해도 미국에는 건설 현장이 많았다오. 큰 숲을 밀어내고 타운하우스를 짓고

아파트를 짓고, 또 커다란 상가를 짓느라  일거리가 많았다오. 나는 장가갈 생각을 할 새도 없이 현장을 따라다니며 죽도록 일만 했어요.”

외삼춘은 말할 거리가 생긴 것이 기쁜듯,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먼 눈을 하고 회상에 잠겨 다시 말을 계속한다.

“ 오십이 다 되어서야    건설현장에서 밥을 해  나르던 멕시코 여인과 인연이 되어 동거를 하게 되었소. 멕시코 여인이 이상하게 우리나라 옛 여인네처럼 정겹던거요. 그런데 내가 박복한건지 삼 년을 못 채우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소.  그 후 나는 마음을 두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며 정처없이 살았다오. 아마 설란이 내 곁으로 오지 않았다면 이제까지도 나는 집없는 떠돌이로  행려병자가 되었겠지.”


마침 설란이 외삼촌을 부른다.

“ 식사 준비됐어요, 어서들 오셔서  식사하세요 “

가지런히 차려진 밥상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여기가 한국의 지리산 골짜기인가.

싱싱한 배추김치, 물이 잘박한 열무김치, 어린 상추 겉절이, 나물무침, 명태조림, 알 수 없는 이파리와 뿌리를 삭힌 장아찌,그리고 버섯과 두부를 넣어 자글자글 끓는 된장 뚝배기, 검은 콩이 다문다문 섞인 하얀 찰밥, 곁들인 소고기 사태와 무를 참기름에 볶아 말갛게 끓인 국,

미국에 와서 이십여 년을 살아 오며 이렇게 맛깔스러운 한국의 집밥을 먹은 적이 있었나?

어느 하나의 음식도 간은 슴슴하고 담백하며 느끼하지 않아  똑 떨어지는 일미이다.

“ 이거 다 설란씨가 만든 음식입니까?”  

설란은 다만 쑥스럽게 웃는다. 대신 외삼촌이 설명한다.

“ 설란은 강원도 양구 심심산천에서 태어나 이런 음식만 해요. 그리고 그로서리도 잘 안 가요. 자연 채취로 밥상을 차리지요. “

“ 자연 채취라니요?, 여기서 이런 식재료가 다  나옵니까?”

설란이 까르륵 웃는다.

“ 외삼촌이 작은 채소밭을 가꾸세요. 우리 밥상에 필요한 걸 손수 심으세요. 그리고 나는   뒤안 나무 숲으로 가서  야생 나물들을 찾아요. 한국산과 좀 틀리지만 그래도 난 그걸로 반찬을 만들려고 연구해요”

“ 여기에서 어떤 야생나물을 뜯습니까?”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다.

“ 눈 여겨 자세히 살피면 습습한 응달에 고사리가 지천이고 , 민들레, 담배나믈, 취나믈, 산파, 봄 5,6 월은 성찬이지요 또 가을에는 살진 고들빼기로 겨울 김치를 담그기도 해요. “

정말 소박하지만 맛난 점심을 먹고 외삼촌은 십장생도를 걸어 둘 공간으로 안내한다. 리빙룸 널찍한 방에 고귀하고 값지게 보이는 페르시안 카펫, 묵직하고 검은 가죽 카우치 세트가 자리잡고 대리석으로 된 테이불 세트,

그런데 하얀 벽은 텅 비어 있다.

“ 여기 삼면으로 십장생 연작을 그려 주구려. 나야, 공사판에나 쫒아다니던 놈이 뭐 아는게 있나? 화백님의 안목과 식견에 전적으로 맡기겠소.”

그런데 어르신 요즘은 별로 잊혀져가는 십장생에 애착을 느끼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강한 흥미를 느끼며 묻는다.

“내 어린 시절에 선친의 사랑채에 가면 십장생 병풍이 있었소 운치있게 뻗어 올라간 낙낙장송, 선학, 기이한 사슴의 무리, 영생불사 천도 복숭, 영지, 영특하게 물을 뿜어내는 거북, 뿐이요?

붉은 해, 폭포수 물, 바위, 구름과 청산, 모든게 신비해 보였소, 그 세상은 아마도 생과 사를 뛰어넘는 신선의 세상이 아닌가, 옥황상제와 구름옷 선녀를 상상하며 하염없이 보았었소.

어느 날 문득 나는 늙고 병든 내 자신을 알았을 때, 내 인생이 너무 좁다랗고 답답하게  느꼈지요. 십장생이 어우러진 선경으로 들어가면 내 본향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거요.

아마 이것이 완성되기 까지 나는 소망과 기대로 사는 보람이 있을 거요”

곁에 와 섰던 설란도 한 마디 거든다.

“ 것 보세요, 우리 외삼촌은 정말 십장생의 세상을 원하고 계시다구요.

이제 바깥 정원공사도 얼추 끝나고 이 벽면을 채울 십장생도만 완성되면 우리 외삼촌 더욱 기를 받으시고  행복한  건강 백세 이루실 거얘요 “

“ 백 살 씩이나 뭐, 원, 난 설란 니나 시집 보내면 죽어도 원없겠다 “

“ 아니, 외삼촌 또 그 소리, 제가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걔들 시집 장가 보낼 때까지 오래오래 사시라니까요”

외섬촌 조카의 유쾌한 농담을 들으며 머쓱한 내게 외삼촌은

“ 나는 이제 좀 피곤하구려, 난 올라가 쉬려니 화백 선생은 설란과 뒷뜰에 나가 차라도 한 잔 하시시요”


“ 무슨 차를 내올까요?  나화백님,”

“ 향그러운 꽃차 ? “ 나는 농담으로 말했는데 설란 반색을 한다.

“ 아, 있어요, 있어요. 민들레 꽃차. “

설란은 안으로 들어가 오래지 않아 팔각 목반에 찻잔과 차주전자를 들고 온다.

찻잔에는 마른 민들레 꽃봉오리가 대여섯 담아있고 설란은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미구에 민들레 노란꽃이 펼쳐지며 아련한 꽃향과 풋풋한 풀내가 풍긴다.

“ 내 생전 처음 마시는 꽃차군요 “ 나는 천천이 조금씩 마셔서 혀 안으로 굴린다.

다시 연상으로 당겨지는 눈 속의 설란 -- 설란의  향.


차를 다 마신  후 설란은 평소 자기가 자주 다니며 야생 나물들을 채취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는  뒤안 숲으로 인도한다.

“ 외삼촌은 이 숲  삼사백 에이커 쯤을 사셨어요.그냥 숲으로 지키시겠대요. 이 근처에는 인가가 없어요. 우리만의 왕국이요.”

“ 식구도 별로 없으시면서 왜 이렇게 큰 규모의 저택을 지었을까요 “

“ 저도 잘 모르지요. 내가 십여 년 전 외삼촌에게 왔을 때 외삼촌은 허술한 아파트에 사셨어요. 금방이라도 이사하는데 지장 없도록 아주 단촐하게요, 근데 내가 와서 외삼촌에게 식사랑 살림 뒷치닥거리랑 하게 되니까, 외삼촌은 삶의 활기를 찾으셨나 봐요. 그래서 살아갈 거리를 찾으시면서 한평생하시던 건축 기술로 당신의 집을 근사하게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까요?”

설란은 일껒 설명하다 끝마무리는  말의 톤을 살짝 올려 미확인의  의문형으로 맺는다.

나무는 울창하고 좁다란 산길은 그늘이 깊다. 어디선가 조용히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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