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향                                                            



 고향을 생각하면 먼저 낡은 흑백사진 속, 한 가족이 떠 오른다.두텁고 거친 모직물, 더불버튼 료마이 쟈켓을 입고 정중앙에 자리해 근엄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아버지와 옆으로 정수리 위 반듯한 가리마와 가즈런한 눈섭, 흰 얼굴, 흰옷차림 어머니가 있다. 앞 줄 의자에는 성긴 흰수염 할아버지와 오목진 입매,볼이 홀죽한 할머니는 하강한 신선 같다. 그 주위를 위성처럼 둘러싼 우리 육남매, 할머니 무릎 위에는 어린 내가 앉아 있다.

예뻣던가, 귀여웠던가 희미한 기억에 검은 통치마 시무룩한 얼굴로만 상상된다.

엄격한 집안 식구들의 위계질서 속에서 내 편안한 안식처는 오직 할머니의 치마폭 속에서였다. 할머니의 염랑 주머니에서 엿도 나왔고,떡도 나왔고 특별한 소꼽살이 빨래방망이도 나왔다. 내 어린 시절 빨래를 많이도 했다. 방 한 구석에서, 손에 닥치는대로 수건과 양말 손수건들을 몰아서 주무르고 방망이로 두드리고 그리고 비틀어 짰다. 엄마들 하는대로 쉭쉭 힘 돋구는 소리까지 내면서.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할머니 임종시에도 할머니 이불 속에서 같이 잤다고 했다. 할머니 운명 후 조용히 안방으로 옮겼다지만 나는 할머니의 따뜻하고 아늑한 품만 생각난다.


 내 동네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고 그 건너 맛맛한 작은 동산이 있었다.그 등 넘어 공동묘지가 있어 아이들에겐 금기지역이었다. 가장 공포의 핵심곳은 생여도가였다.그곳은 동네 상사가 있을 때 필요한 상례 물품을 공동 저장하는 일종의 마을 창고인 셈인데 우리는 그곳에 늘 귀신이 죽치고 있는듯 엄청나게 두려워 했다. 피치 못하게 그곳을 지날 땐 멀리 돌아 진땀을 흘리며 뛰어야 했다. 여름 밤, 마당에 쑥불을 놓고 어른들 입담에 잠이 가물가물할 때 공동묘지 뒷등성에서 '어흐잉께갱 어흐잉께갱" 하는 요사한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저게 무슨 소리야?" 묻노라면

"아이구야, 여우가 애기 무덤 파먹을려고 내려 왔나부다" 하며 어른들은 가장 최근 장례를 치른 무덤에  대하여 수근수근 걱정들을 한다. 아이들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후다닥 일어나 아직 한낮의 열기가 남아 후덕지근한 방안으로 들어와 버석거리는 홑이불에 코끝을 묻는다.


 아직 일곱 살 어린애에게 시오리,학교 길은 너무 멀다. 내를 따라 동네를 벗어나 조나 수수,콩밭이 이어진 밭길을 건너고 억센 풀이 종아리를 간지르는 농로를 지나 번화한 읍내로 들어서면 또 무서운 경찰서 앞을 지나야 했다.보초 선 순경 아저씨가 한눈 파는 사이 잽싸게 그 앞을 뛰어 지나면 건조한 사각형 면사무소 건물이다.면사무소를 싸고 도는 담벼락을 거쳐 읍내를 벗어나면 비로소 멀리 학교가 보인다. 학교는  언덕길을 한참 올라 높은 지대에 있다. 그래도 언덕 위 학교를 보면 다 온 느낌이 들어 마음이 놓인다.씩씩거리고 뛰어 올라 학교 건물 기다란 복도에 다다르면 그때사 까먹고 하지 않은 숙제가 생각난다. '아 선생님이 아침 첫 시간에 숙제 검사하는데'생각이 미치면 그대로 복도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공책을 꺼낸다.연필에 침 발라가며 개발새발 꾹꾹 눌러 공백을 메꾸곤 이젠 당당하게 자리에 가 앉는다.

그래도 봄 가을은 친구들과 오가며 장난치는 재미라도 있지,겨울은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다. 눈이 대지를 뒤덮어 길이 안 보이고 칼바람마져 얇은 옷을 할퀴면 절로 눈물이 난다. 집을 봐도 멀고 먼 길, 학교도 멀기만 한 길, 중간에서 발에 걸친 뻣뻣한 고무신은 눈길에 자꾸 미끄러져 철버덕 벗겨지고 어린 꼬마는 마냥 울음이 터진다. 함께 가던 언니가 손을 잡고 끌어주어 억지로 억지로 가는 등교길, 눈물 콧물로 범벅되고 얼어 굳어진 몸으로 들어선 교실, 아 담임 선생님은 벌써 오셔서 장작불로 뜨겁게 난로를 달구어 놓았다.

"성애야 어서 와라,춥지? 우선 와서 난로에 손을 녹이거라"

선생님 말씀에 이미 마음은 스르르 녹아 들었다.


 동네 어구에 시골스런 예배당,종각에선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뎅뎅 울렸다. 우리 어린 것들은 뜀박질로 교회를 향해 달린다.엄마가 헌금하라고 주신 일원짜리 지전을 손에 꼭 쥐고서.

유년 주일학교를 초딩시절 꾸준히 다녔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은 그때 배운 것이 그대로 밑바탕 지식이다.찬송가를 고래고래 소리 높여 부르고 요절을 경쟁적으로 외우고 성경 말씀을 듣고,무한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참 열심히 다녀서 졸업장과 상장도 탔다.

중학생이 된 담에는 학생회에 들었다.학생회에 든 다음에 나는 갑자기 외모에 신경쓰고 동작도 조신한 여학생이 되었다.학생회 회장을 남몰래 좋아했던 것이다. 나보다 삼 년 위 조광원은 눈빛이 서늘하고 깊으며 대체로 조용했다. 우리 또래 사이에선 그가 같은 동급생 원미애 언니와 사귀는 사이라고 속닥거렸다.그런들 어떠랴,둘은 회장과 부회장으로서 진지하고 겸손하며 신앙심도 깊어 학생회를 잘 이끌어 갔다.학생회 예배 때 가끔 광원오빠가 짧막한 설교를 할 때면, 버릇처럼 사춘기의 까칠한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슬슬 문지르며 바리톤의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너무 멋있어 가슴을 울리며 호감은 더욱 짙어져 갔다.

내가 중 삼학년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를 가며 가장 서운한 것은 광원 오빠를 못 만나는 것이다.이왕 떠나게 된 마당에 오빠에게 내 마음만이라도 전하고 싶어,뭔가 특별한 이별을 계획해 보았다.

이사하기 전 마지막 수요일 저녁 예배가 끝난 뒤,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빠, 나 혼자라 밤길이 무서운데 좀 바래다 줬으면"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결심한 듯 앞장을 섰다.밤하늘은 밝은 달빛으로 온 세상이 금가루를 뿌린듯 황홀하고 별들도 더 반짝였다. 나는 심장이 부풀어 가슴과 목을 넘어 입까지 차오른듯 말문이 막히고 숨도 못 쉬도록 쫄아 있었다. 얼마의 침묵이 이어지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 너네 집 서울로 이사간다며?"

"네 요번 토요일 떠나요"

"서울 가 살아도 가까운 교회 꼭 다니며 신앙을 잃어선 안 된다"

"네" 하는 내 순한 대답 뒤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있다.

"오빠 원미애 언니와 결혼도 할 거얘요?" 가슴 속 깊이 묻었던 의문이 풀썩 드러난 것이다.

앞서 가던 그가 획 돌아섰다. 나는 겁에 질려 우뚝 멈춰 섰다.

"성애야,우리는 아직 할일이 많은데 그런데 관심을 둘 새가 어디에 있겠니? .먼저  믿음을 굳건히 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게 중요해. 그리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선 잡념에 빠지지 말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지?"

내가 의도했던 대답은 아니지만 그 뜻은 알송달송하고 나는 마냥 부끄럽고 무안했다.

"너네 집에 다 왔구나,언젠가 만나게 되면 서로 좋은 모습으로 보자꾸나"

조광원은 입꼬리를 조금 올려 희미한 웃음을 띄운 후 돌아서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좋았던 오빠야, 좋았던 내 고향아 모두 안녕,내 행복한 어린 시절도 함께 안녕.'

그렇게 고향을 떠나며 그 후 나는 고향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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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오늘>                                                                  


  오늘,

처음 만나 반가운 인사.

지중해 깊은 불루, 드넓은 하늘

푸르른 대지 사이로

설레임 가득 꽃향기.


 어제는 잊었고

내일은 알 수 없는

오직 앞에 확실한 오늘

반짝이는 금강석으로

품 안에 왔다.


 한아름 끌어안은

소중한 선물로

부뜨막에서 요리를 한다.

소금 한 줌,

참기름 한 숟깔.


 가족과 함께 먹는

일용한 양식

더도,덜도 아닌

꼭 그만큼 분량인데

느끼는 허기.


 노을따라 부스스

떠나려는 손님,

옷자락 잡지만

손가락 새로 흩어지는 모래알

끝내 아쉬어 등불만 지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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