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무슨 고대 로마 황후라도 되는  양 고개를 꼿꼿이 들고 새하얀 비단가운을 펄럭이며 안채로 뛰어 들어가는  마리의 도발적이고  볼륨있는 몸매를  바라 보며 나는 새삼 피식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이렇게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태산에 깔린 듯  마음이 무거워 진다.

‘ 저 잘나고 멋진 여자를 나는 어째야 좋을까’

마리는 꽤 괜찮은 여자다.

아름답고 재능있고  언변도 좋아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택스타일디자이너다.

독자적으로  그녀 자신의 사무실을 차려  그 방면에 전망있는 젊은이들을 고용하고 그들과 함께 새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종합하여 만든 새롭고 훌륭한 작품을 각 섬유회사에 공급한다. 언제나 첨단으로 개발해 내는 그녀의 상품은 고급화 특성화를 지향하는 대형 섬유회사에 좋은 가격으로 넘겨진다. 경영 , 상담, 어느 하나 막힘없이 잘 나가는 그녀의 사업이 그녀를 더욱 방자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녀의 바람기는 천성적인 것일까.

나는 한국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아내인 마리를 먼저 미국으로 보냈었다.

마리는 1980 년대 당시 새로이 각광받는 택스타일 디자이너로서의 첨단 컴퓨터 작업을 공부하기 위해 한 시가  급하다고 조바심치고 있어서였다.

나는 나대로의 피치 못할 일이 있어 내 일을 마무리짓고  8 년 후에나 미국으로 건너와 마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만난 마리는 두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하나는 검은 머리 6 살 ,  남자애  엘리옷, 하나는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 4 살 여자아이  샤론, 누가 보아도 내 자식은 아니다.

나는 오랜만에 반갑게 영접해 주는 마리에게 최대한의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을 찾아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 저 아이들을 우리의 아이라고  입적시킨 것이요?”

마리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재차 묻자

“ 당신이 원한다면 이혼해도 좋아요”하던게  그 대답이었다.

“ 그래, 저 아이들의 아비와는 아직 관계가 있소 ?”

“ 그건 아니얘요, 그들은 자기 아이들이 있는지조차 몰라요. “ 마리는 다소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리고 휙 내 앞을 떠나 그녀의 작업실로 가 버린다.

아, 마리 당신 철면피요? 바보요 ? 내 맘 속의  지옥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마리, 나의 갈등은 아랑곳 없이 , 저녁 잠자리에  뜨겁게 파고 든다.


“ 당신이 내게 온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내 아빠가 2 년 전 돌아가시고 난 다음, 난 혼자 남아져 있다는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마리는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철저히 아빠 의존형이었다. 일찍 엄마를 여읜 후 아빠는 재혼도 안하고 오직 외동 딸 마리에게 사랑을 쏟았다.마리가 원하는 거라면 그녀의 아빠는 무조건 < 예스 >였다. 그래서 마리가 아직 대학 졸업 전이건만 마리의 고집으로 우리는 비교적 수월하게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마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마리 아버지는 한국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마리 따라 미국으로 와서 마리 곁에 살았다. 아직도 아빠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해 의지없이 바들바들 떨며 내 품으로 파고 드는 마리에게 나도 모르는 측은함과  애처러움을 느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리의 분방함은 내 존재가 있음에도 바뀌지 않았다. 사업상이라며 바에서 사람들과 모여 이성을 잃을 전도로 술을 마시고 함부로 아무하고나 어울리며 밤을 지새우는 윤리나 도덕이라는 의식은 아예 없느듯한 그녀의 생활,

도대체 네가 왜 이렇게 사는거니? 미국이라는 사회가 이 따위인거니?

나의 생활은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울화가 치밀 때면 차를 타고 이정표도 안 보고 한없이 하이웨이를 달리거나,

또는 말 없이 한국으로 휙 건너가거나,

그러나 갈등이 깊어질수록 내 마음은 마리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제 자리로 돌아 올 뿐이다. 그리고 무럭무럭  천진하게 자라나는 내 생소한 아이들에게 아빠로서의 자상한 역할을 해낸다. 아이들은 사랑스럽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이들이 진급하는   하이스쿨은 아예 집에서 먼 기숙학교로 보내 집에서 떠나 있다

멀리 떠나보낼 수 밖에 없는 황당한 이유는 마리의 너무 지나친 주벽 때문이다.

마리는 마음 속에 불평이나 불만이 쌓이면 영락없이 술을 만땅으로 들이켜고 들어와 엄청난 주정으로 날을 지새우는 것이다.

‘ 나는 죄 많은 여자, 나를 동정하지 말고 나를 떠나라. 난 아빠만 있으면 된다. 내 맘 속의 아빠는 여전히 친절하시고 다정하게 나를 지켜 주신다.

“ 야, 나석 선배, 위선 떨지 말고 나를 떠나라. 생판 모르는 남의 자식 둘을 기르는게 너는 괜찮니?”  알고 보면 마리는 내게 깊이 주늑 들어 있다.

마리, 제발 기 죽지 마라. 이왕 네가 저지른 것 너답게 뻔뻔하게 당당하게 살아라. 그게 너다운 모습이고 나에게도 납득이 간다. 네 약한 모습으로 나를 헷갈리게 하지 마라.

나는 말도 안 되는 위로랍시고 주절대며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자리에 눕힌다.


때때로 마리 그녀는 문득 거치른 방황 중에  제 정신이 들어온 소녀처럼 말갛게 씻은 얼굴, 생머리를 느러뜨리고 내 품으로 온다. 마치 신혼초, 처음 남자품에 안기는 수줍은 신부처럼,

나는 그녀를 물리치지 못하고 지옥불같은 정념으로 으스러질듯 껴안으며 마구 짓밟는다. 사랑이여, 미움이여 나를 태워 버려라. 마리의 흐느끼는 소리에 나는 까무륵이 정신을 잃는다.

아침, 날이 새고 나를 떠나기 전 마리는 내게 속삭인다.

“ 당신 때문에 나는 힘이 나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요, 떠나지 마요. “

나는 거기에 마주 미소짓고 입 맞출 수 없다. 마리도 알고 있겠지.나는 네 너그럽고 관대했던  아빠가 아니야.

나는 돌아 눕는다

그러면서 나는 삶의 목적과 생기를 잃고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다.


때로는 내 힘과 의지력의 최후를 보겠다고 중노동의 틈으로 들어서가도 한다.

집 리모델링을 하는 건축현장에서 페인팅, 루핑, 사이딩을 무조건  하던지 , 또는  드라이클리닝 훽토리 에서 프레스대를 잡던지 , 가리지 않고 가혹하도록 감당하기 힘든 육체노동의 한계, 거기에 나는 도박처럼 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 지리멸렬한 인생의  좌표는 < 절망 >이란 표지 앞에  머무를 뿐이다.

아, 나는 왜 여기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마리의 분방함, 마리의 나를 향한  어이없는 신뢰,

그래, 네 왕성한 삶의 의욕 , 그 편안한 삶의 공식 앞에 차라리 내가 내 삶을 접는다.

나는  내 진심으로 원하지 않던  죽음의 덫으로 차츰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마음이 끌리고 집중되는  일을 찾았다.

우연찮케도 초목이 눈으로 덮혀  막막한 산  속에서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소박하고 청초한  설란,

그 여자를 알게 됐다.

내 죽음의 종착역을 조금 유예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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