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디딩 띠디딩….


익숙한 가락의 기타 소리가 들렸다. 60 중반은 족히 넘었을 노파가 로망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무대가 아니다. 전통 시장이었다. 검게 탄 얼굴, 투박한 손, 거기에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노파가 로망스 연주라니…. 노파는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기타 연주에 도취되어 있었다.


아내와 둘이서 끝까지 연주를 들은 후 박수를 쳤다. 노파는 약간은 부끄러운 듯 약간은 자랑스러운 듯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내가 멋있다고 추임새를 넣었더니, 노파가 갑자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내가 예전에는 꽤 잘나갔지. 결혼식이 열릴 때면 항상 초대받았다우. 기타를 가르치셨던 ㅇㅇㅇ 선생님은 정말 유명한 분이셨어…."


그렇다. 비록 지금은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별볼일없는(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오해 없으시길) 노파지만, 이 노파에게도 한 때 밤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투주호심 산월입렴 수수영롱 신수재화도간(投舟湖心 山月入簾 水樹玲瓏 身遂在畫圖間)'이라고 읽는다. '호수 한 가운데 배를 띄우니 / 산에 뜬 달 발 안으로 들어오네 / 물가의 나무들 영롱한 빛 발하니 / 이내 몸 그림 속에 들어온 듯'이라는 뜻이다.

 

호수 한가운데 배를 띄웠다는 것으로 보면 여름 철이 아닌가 싶다. 발이 등장한 것도 이런 추정에 신빙성을 보탠다.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꺽인 여름 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호수에 배을 띄웠다. 내실(內室)에 발을 드리우고 앉아 있는데 산에 둥근 달이 떠올라 내실 안까지 환하다. 가만히 있기 어려워 발을 걷고 밖으로 나와보니 호숫가 나무들이 에 비친 달빛을 되받아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몽환적인 풍경이다. 


시인은 이 몽환적인 풍경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찾은 표현. 이내 몸 그림 속에 들어온 듯 하구나! 


그런데 "그림 속에 자신이 들어온 듯 하다"는 표현은 한시에서 매우 흔하게 사용하는 진부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 표현을 누군가 처음 사용했을 때는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랬기에 진부하도록 사용한 것 아니겠는가. 시인은 마지막 구절 표현을 두고 양가의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진부한 표현을 답습할 것인가, 새로운 표현을 찾을 것인가. 결국 진부하지만 이 이상의 표현을 찾기 어려워 답습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진부는 항상 타파해야 할 부정적 대상으로만 취급받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맞는 말도 아니다. 진부가 한때 참신의 아이콘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서 취할 수 있는 에스프리도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바로 이런 태도를 표현한 말 아니겠는가. 


낯선 자를 두어자 자세히 살펴보자.


簾은 竹(대 죽)과 廉(모 렴)의 합자이다. 집의 한 측면에 바람과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대나무를 쪼개 엮어 만든 설치물이란 뜻이다. 발 렴. 竹을 뜻을, 廉은 뜻과 음을 담당한다. 簾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珠簾(주렴), 垂簾聽政(수렴청정) 등을 들 수 있겠다.


玲은 王(玉의 변형, 구슬 옥)과 令(아름다울 령)의 합자이다. 옥소리란 뜻으로도 사용하고, 아름답다란 뜻으로도 사용한다. 옥소리 령. 아름다울 령. 王은 뜻을, 令은 뜻과 음을 담당한다. 玲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玲琅(영랑, 옥이나 쇠붙이가 쟁그렁 울리는 소리), 玲玲(영령, 옥이 울리는 소리. 곱고 투명한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다.


瓏은 王(玉의 변형, 구슬 옥)과 龍(용 룡)의 합자이다. 본래는 기우제 때 사용하던 구슬이란 의미였다. 王은 뜻을, 龍은 뜻과 음(룡→롱)을 담당한다. 龍은 비를 부르는 신물(神物)이기에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후에 王에서 뜻이 연역되어 '환하다'란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 뜻으로 주로 사용한다. 환할 롱. 瓏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瓏(영롱), 瓏(농롱, 광채가 찬란한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다.


전통 시장을 찾을 때면 항상 그 노파가 있는 곳을 방문한다. 단골이 된 것. 로망스를 연주하는 야채장수 노파라니, 얼마나 멋진 노파인가! 참신은 진부하고, 진부는 참신하다. 사진은 한 만두집에서 지인이 찍어 보낸 사진중 일부인데, 고금도서집성(청대에 발간된 일종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을 필사한 것이다. 어허, 만두집에 고서(古書, 옛 글씨)라니. 이 또한 참신하면서 진부하고, 진부하면서 참신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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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선 자리. 생각보다 멋진 남자가 나왔다. 살짝 호감이 가는데, 남자도 내게 호감이 가는지 말수가 많아졌다. 처음부터 말수가 많으면 안 될 것 같아, 남자의 말에 적당히 호응을 보이며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무슨 유머를 꺼냈는데(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크게 웃고 말았다. 순간, 남자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속으로왜 그러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남자의 어두워진 얼굴빛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남자는 말수가 차츰 줄어들더니 급기야 급한 약속이 좀 있다며 자리를 떴다. 내심 저녁을 사주길 기대했는데 실망이 컸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맞선 상대는 어땠냐며 물었다. 시큰둥하게 그냥 그랬어.”라고 말한 뒤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었다. 문득 정면의 거울을 보며 아까 그 남자 앞에서 웃었던 웃음을 지어봤다. 그 남자가 나의 웃음 끝에 얼굴색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앞니 사이에 빨간 고춧가루가 끼어 있었다!

 

실화가 아니다. 하지만 일어남직 한 일 아닐까? 이 경우 고춧가루는 옥에 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티의 옥이라고 할 것이다. 옥에 티는 웃음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티의 옥은 웃음으로만 치부하기엔.

 

사진은 부여 무량사에 찍은 극락전 주련 해설 내용 중 하나이다. 우리 말 풀이 극락당에 해당하는 한문 원문은極樂堂으로 써야 한다. 극락당이 건물이기에 집이란 의미의 을 써야 하는 것. 잘못 쓴 은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옥에 티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게는 티의 옥으로 보였다.

 

고찰의 주련에 잘못된 해설 내용을 붙이는 것은 여인의 이에 낀 고춧가루를 보는 느낌이 든다. 주련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고찰 전체에 대한 이미지도 떨어뜨리는 것. 차라리 붙이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련의 내용은 정확히 모르지만, 왠지 모를 신비감이라도 간직하게 말이다. 과도한 생각일까?

 

문제가 된 을 자세히 살펴보자.

 

은 밭(: 밭 전)과 밭이 서로 맞닥뜨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은 음()을 담당한다. 당할 당.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應當(응당), 該當(해당) 등을 들 수 있겠다.


(흙 토)(숭상할 상)의 합자이다. 토석의 기반 위에 높고 크게 지은 중심 건물이란 의미이다. 집 당. 높고 큰 중심 건물이란 의미에서 연역하여 당당하다란 의미로도 사용한다. 당당할 당.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堂上(당상), 堂堂(당당) 등을 들 수 있겠다.

 

서양 건축 문화유산과 달리 우리 건축 문화유산에는 기록물이 많다. 건물마다 붙어있는 현판과 주련이 그것. 현판과 주련은 건물과 일체를 이루는 기록물이라 그 내용 이해는 건물 감상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기록물을 읽지 않고 건물만 감상하는 것은 맨살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옷 입힌 살을 만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현판과 주련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는 점. 한글로 번역된 것을 붙여놓고 읽는 것도 좋겠지만 원문 그대로를 보는 것이 더 좋은 감상법일 터이다. 얼마간의 노력을 기울여 한문을 익히고 우리 건축 문화유산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 필요한 일 아닐까?

 

아쉬움을 표했던 주련의 본모습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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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 제힘으로 밥벌이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총선 당시 황교안 씨가 여당 후보들을 싸잡아 비난하던 단골 평이다. 현실 감각이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국정을 맡길 수 있겠냐는 조롱이었다. 금수저 출신이 많은 당 대표가 할 소리인지 의문이었지만(현실감 없기는 금수저 출신이 더하지 않겠는가), 말 자체는 귀담아들을 만했다. 정치는 현실과 이상의 길항체이다. 어느 한 방향만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여당의 이상적(?) 정책을 견제하려는 황 씨의 현실 감각 주장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사진의 한자는 청극부지한(淸極不知寒)’이라고 읽는다. ‘맑음의 극한은 추위를 모른다란 뜻이다. 한겨울에 피는 매화의 모습을 상찬한 문구이다. 매화는, 군자의 상징으로, 많은 이들이 칭송하는 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매화는 칭송만 받아야 하는 꽃일까?

 

매화는 철부지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계절에 저 홀로 꽃을 피우니, 철부지도 이만저만한 철부지가 아니다. 이런 철부지를 군자에 비유했다면, 군자 또한 철부지란 말이 된다. 군자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큰아이일 수도 있다.

 

매화의 가치를 왜곡한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 본 것은 매화의 가치를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되려 온전히 보기 위해서이다. 일면만 존재하는 것은 없다. 항상 이면이 존재한다. 양면을 함께 보아야 온전히 보는 것이다. 매화를 군자 같은 꽃으로 상찬하면서도 철부지 같은 꽃으로 측은하게 볼 수 있을 때 매화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지나친 억설일까?

 

이 낯설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자.

 

(나무 목)(빠를 극)의 합자이다. 용마루란 뜻이다. 으로 뜻을 표현했다. ‘다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유추된 의미이다. 용마루는 최정상부에 사용되는 목재이기 때문. 은 음을 담당한다. 용마루 극. 다할 극.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窮極(궁극), 太極(태극) 등을 들 수 있겠다.

 

(집 면)(풀 초)의 약자와 (사람 인)(두 이)의 합자이다. 궁벽진 곳에 살아 너무 추워서 위아래로 풀을 덮어 온기를 유지하려 애쓴다는 의미이다. 축약하여 차갑다란 의미로 사용한다. 찰 한.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寒氣(한기), 酷寒(혹한) 등을 들 수 있겠다.

 

황 씨는 여당이 이상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는 전제로 현실 감각을 주문()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과연 여당이 이상적인 정책을 펴긴 펴고 있는 걸까? 내 눈에는 건전 보수 정책을 펴고 있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실 감각이 출중한(?) 자유한국당의 후신 국민의 힘은 어떨까? 내 눈에는 현실 감각이 지극히 무딘국민의 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정치에 (실험을 전제한) 이상적인 면은 부재한다. 사진은 동료들과 하룻밤을 묵은 한 질척한(?) 모텔에서 찍은 것이다. (질척한 모텔에 매화 그림이라니, 여기서도 '모든 것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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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顧六尺身 환고육척신  기껏 여섯 자 밖에 안되는 몸뚱이

一日能幾食 일일능기식  하루에 몇 끼나 먹는다고

尙營口腹謀 상영구복모  아직도 그 몸뚱이 먹여 살리려

未去雲山碧 미거운산벽  구름 낀 푸른 산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단 말가


<이규보(1168-1241), 「우음(偶吟)>


누구나 한 번 쯤은 큰 결단의 순간에 선다. 시의 주인공 역시 그런 결단의 순간에 섰다. 지겨운 밥벌이 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그만 둘 것인지? 


그런데 시의 주인공은 결단의 순간에서 망설이고 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그간의 삶과는 확연히 달라지는 새로운 삶이 전개될텐데.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일까? 어떤 삶이 펼쳐지든 그것을 수용할 자세가 갖춰져 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왜 망설이는 걸까? 간단하다. 그간의 삶에서 힘들었지만 단맛을 보았고, 그 단맛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힘들기만 하고 단맛도 보지 못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새로운 선택이후의 삶이 이전의 삶보다 나아질 확률이 더 높을테니 말이다. 결국 시의 주인공은 그저 그렇고 그런 자기 위안 혹은 기만의 푸념을 늘어 놓고 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주인공은 나약하다고 비난받아야 할까?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자기 위안 혹은 기만의 푸념이 외려 강한 결단의 삶보다 나을수도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많은 이들이 갈림길에서 흔들리지만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일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밥벌이 때문이 아닐까? 위 시에서는 밥벌이를 아주 하찮게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밥벌이만큼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숭고한 것이 없다. 하루에 세끼 밥 먹는 것을 사흘만 멈춰보라. 담 안넘는 사람 없다. 그런 밥을 버는 일이 어찌 하찮은 것이라 말할 수 있으랴. 여기 구름 낀 푸른 산은 그저 환상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다. 구름 낀 푸른 산이 내 입에 무엇을 넣어준다 말인가.


그래서 그랬을까, 결국 이 시의 주인공(지은이인 이규보)도 다시 제자리에 남았다. 비난하지 말자. 누구나 그런 자기 위안 혹은 기만의 푸념은 한 두 번쯤 해봤을테니. 


사족. 요즘 산에다 멋진 집을 짓고 여유있게 지내는 이들이 많다.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이들이 자기 기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산에다 멋진 집을 짓고 온갖 편의 시설 들여놓고 사는 것은 산에 대한 모독이다. 산에 산다면 최소한의 집에 최소한의 시설로 자연에 흠을 내지 않고 살아야 한다. 편의 시설은 시정에 어울린다. 시정의 편의와 대자연의 소박함을 함께 누리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양다리 걸치면 잘못하다 가랑이가 찢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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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이세요~”

 

주말, 부모님 산소에 벌초하러 갔더니 당질뻘 되는 종손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멋쩍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 가을 두 차례 산소를 찾는 것뿐인데 정성이라니. 하긴, 부모님 산소를 돌보지 않는 이들도 많다고 하니 그런 이들에 비하면 정성을 들인다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

 

산소 돌보는 일을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어렵기도 하고 의미도 못 느끼기 때문이란다. 수긍 가는 면이 있다. 모처럼 쉬어야 할 주말에 산소에 가서 일해야 하니 힘들기도 할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로 죽으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팽배한 세상에서 망자를 모신 산소를 관리한다는 것에 의미 또한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기만 할까?

 

사진은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읽는다. ‘한 자손이 여러 조상을 모신 묘지란 뜻으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초기 제주에서 (불온분자) 예비 검속에 걸렸다가 집단총살된 132분의 무덤 표지석이다. 총살 직후 가족들에게 시신이 인계되지 않고 종전 후 시신이 인도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자 무작위 무덤을 조성하고 후손되는 이들이 함께 위령제를 지내게 되어 이런 표지석을 세우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는 이념과 전쟁으로 얼룩져 한 인물의 공과를 쉽사리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건 무리한 공권력으로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무덤에 있는 이들이 설혹 사상적으로 위험한 이들이었다 해도 정당한 절차 없이 집단총살했다는 것은 과도한 공권력 행사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들 중에 사상적으로 무리한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이들 또한 없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그러한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과거의 일이니 번거롭게 들먹이지 말고 이들의 시신을 묻은 무덤도 누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니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잘못된 과거의 일은 늦게라도 바로 잡아야 하고, 그런 잘못된 과거의 일을 보여주는 무덤을 보전해야 교훈이 되어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산소 관리와 산소의 의미로 돌아가 보자. 산소 관리하는 일이 번거로워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한다. 산소 하나 관리하는데 드는 시간은 1시간 남짓이다. 1년에 한, 두 차례 산소를 방문하여 1시간 남짓 보내는 것이 그렇게 번거로운 일일까? 산소 관리가 번거롭다는 것은 실제 일이 번거롭다기보다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심리적 불편을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심리적 불편은 산소의 의미와 관계가 깊다.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죽으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사회에 팽배하여 산소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백조일손지지처럼 교훈을 얻기 위해서 정체(定體)를 유지하는 것처럼,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산소를 유지한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음속에 간직하면 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눈에서 안 보이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산소라는 정체(定體)가 없으면 자신의 뿌리를 점차 잊게 된다. 산소라는 정체를 유지하여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때로는 그곳을 찾아 하소연도 하며 심리적 어려움을 털어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번거로운 일이 없게 모든 것을 없애고 마음에서도 지워버리는 것이 좋을까?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볼 일이다. (산소에 대한 부정적 주장에는 앞에서 언급한 관리의 어려움이나 무의미 외에도 토지 문제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간 보고 느낀 가장 일반적인 이유만을 대상으로 나의 의견을 제시해 보았다. 허점이 많을 것이다. 너그러이 보아 주시길!)

 

이 약간 낯설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자.

 

는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 본래 이 글자는 하나로 표기했으며, 는 남근을 그린 것이다. 이는 생식 혹은 생산을 주관하는 신을 표현한 것이다. . (의 약자, 귀신 신)(버금 차)의 합자로, 시조신을 모신 사당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으로 뜻을 표현했고, 는 음()을 담당한다. 두 설명에서 공통된 의미는 신으로, 이 글자는 일반적으로 시조신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조상 조.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祖上(조상), 始祖(시조) 등을 들 수 있겠다.

 

(아들 자)(이을 계)의 합자이다. 아들의 피를 이어받은 자, 즉 손자란 의미이다. 손자 손.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子孫(자손), 孫女(손녀) 등을 들 수 있겠다.

 

올해는 부모님 산소에 보태어 그간 잘 돌보지 않는 듯이 보이는 증조부 산소와 고조부 산소도 함께 벌초했다. 세 기를 깎는데 들인 시간은 세 시간 정도. 깨끗하게 손질한 산소에 절을 하며 내년 봄에 다시 뵙겠다고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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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9-18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원묘지 아니면 산소가기 힘들지요.게다가 서울등 대도시에 살고 있는데 묘소가 시골에 있다면 더더욱 가기 힘듭니다.저만해도 할아버지등 여러 조상의 산소가 시골에 있는데 서울에서 차로 가도 4시간 이상 걸리는데다 묘소가 이산 저산에 흩어져 있어 등산하듯이 올라가서 돌다보면 5~6시간 걸린 정도니까요.그래 벌초하러 한번가면 새벽에 나와 자정에 올라올 정도입니다.이러니 시골에 가면 후손이 돌보지 않는 묘소가 부지기수 있지요.

찔레꽃 2020-09-18 15: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 ^ 저도 공감해요. 다만 저는, 단지 그.런. 이유들이 산소 불유지의 진짜 이유인가를 한 번 자문겸 타문해 본 거랍니다. 올해는 벌초를 가시나(가셨나) 모르겠네요? 코로나19로 권장하지 않는 추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