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왔어요!”     



조나라의 예고된 공격에 전전긍긍하다 묵가 집단에 성의 수비를 의뢰한 양성의 성주. 그러나 간절한 양성 성주의 기대와 달리 묵가 집단에선 혁리 한 사람만이 양성을 찾을 거라 통보한다. 조나라의 공격이 목전에 다가온 날 혁리는 양성을 찾는다.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양성의 코앞에 이른 조나라 군대를 보고 혁리는 잠시 하늘을 쳐다본 뒤 햇빛을 등지고 조나라 군대 대장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그 화살이 자신을 향하는 줄 모른 채 밝은 햇빛 속에 날아오는 화살을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는 조나라 장군. 화살이 예기치 않게 자신의 투구에 맞자 방심했던 조나라 장군은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진다. 순간 조나라 군대는 술렁거리고, 예기를 꺾인 조나라 장군은 잠시 퇴각을 명한다. 영화 「묵공」의 첫 장면이다.     



전쟁하는 나라들의 시대, 세상을 풍미했던 묵가의 사상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겸애주의(兼愛主義)’였다. 좀 더 쉬운 말로 바꾼다면 박애와 평화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성의 수비를 맡거나 전쟁 자체를 무산시키는 유세를 펼쳤다.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던 약소국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메시아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풍미했던 묵가는 전쟁하는 나라들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영화 「묵공」의 마지막은 혁리가 조나라 군대를 물리쳤지만 양성 성주의 배신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이후 전쟁고아들을 데리고 양성을 떠나는 장면인데, 묵가 집단의 소멸을 오버랩시키는 장면이다. 강대국들이야 묵가의 사상을 옹호할 이유가 없고 약소국들도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묵가 사상을 옹호하여, 전쟁의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더구나 무력으로 ―묵가의 사상은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묵가의 사상은 태생적으로 소멸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겸애주의란 너무도 이상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금이 흔적 없이 사라져도 대상에 스며들어 그 맛이 지속되듯, 묵가의 사상 또한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의미는 이후 다른 사상들에 스며들어 지속됐다고 본다. 일례로, 유가의 이상인 ‘평천하(平天下)’ ‘대동(大同)’을 겸애주의와 완전히 분리시켜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진의 한자는‘박애(博愛) 화평(和平)’이라고 읽는다. 묵가 ‘겸애주의’의 다른 버전일 터이다. 베트남에 갔다 화상(華商)들의 모임 장소인 ‘광조회관’에서 저 문구를 본 적이 있는데, 사진의 간판 역시 화상들의 모임 장소에 붙인 간판이 아닐까 싶다(사진은 군산에서 찍었다). 상인들이 내건 박애와 화평이란 아무래도 그 의미가 본래의 취지에 부합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무자비하게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한 허름한 간판에서 소금물처럼 스며든 묵가의 사상을 읽는다. 묵가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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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공북루의 시문 편액>




아버지는 항상 주말이면 출타를 하셨다. 어디 가시냐고 여쭤보면 때로는 제천, 때로는 조치원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말마다 출타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속을 끓이셨지만, 어린 나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며 받는 용돈이 좋아 은근히(?) 아버지의 출타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대는 지명에 그다지 믿음이 없으셨던 것 같다. 종종 발견되는 아버지의 가방 속 마권(馬券)을 그 근거로 삼으셨다. 마권은 서울서 살 수는 있는 거지 제천이나 조치원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천이나 조치원에 아주 안 가신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곳의 건재 약방 달력을 가져오신 적도 있고, 그곳 건재 약방에 글씨를 써 준 적도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두 분 다 고인이 되신 지금, 난 이따금 어머니의 생전 속 끓임에 관계없이 아버지가 가셨다고 말씀하신 제천이나 조치원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혹여 그곳에서 아버지의 빛바랜 글씨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을 읽으며 아버지의 속 뜰을 한번 되짚어 보고 싶다. 그리고 이런 질문도 드리고 싶다. ‘아버지, 왜 무슨 이유로 그렇게 어머니에게 무심하시고 가정을 등한시하셨던 것인지요?’ 아버지의 글씨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와 만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

 


사진은 공주 공산성 공북루(拱北樓)에 걸린 시문 편액이다.

 

  

鷄嶽秋雲傍馬頭 계악추운방마두    계룡산 가을 구름 말머리 곁에서 피어나는데

 

偶携旌節到雄州 우휴정절도웅주    정절(행차 앞의 깃발)따라 웅주[공주]에 이르렀네

 

南巡王氣今雙樹 남순왕기금쌍수    남순(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가 한양에서 공주에 온 일)했던 임금의 기

 

                                                   운은 쌍수(인조가 기대어 쉬었다는 두 그루 나무)에 어려있고

 

北望臣心此一樓 북망신심차일루    북망(임금이 계신 곳을 생각함)의 신심은 이 공북루에 어려있어라

 

逈枕漫漫長路走 형침만만장로주    아득히 달려온 먼 길을 바라보다

 

平臨滾滾大江流 평림곤곤대강류    누각 앞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

 

酒酣落筆酬前債 주감낙필수전채    취기 올라 붓을 들고 그대의 시에 화답하노니

 

奇絶男兒特地遊 기절남아특지유    멋진 사내가 특별한 곳에서 놀았도다

 

歲丙子仲秋 세병자중추    병자년 중추에

 

觀察使 洪受疇 관찰사 홍수주       관찰사 홍수주 읊다

 

  

홍수주(1642-1704)는 충청 관찰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충청 관찰사 감영이 공주에 있었으니, 이 시는 관찰사로 공주에 부임한 후 공북루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해 지은 시로 보인다. 공주로 오는 과정[1, 2], 공주에 도착해 느끼는 정서[3, 4], 공북루에서 바라본 풍경[5, 6], 그리고 시를 짓게 된 경위[7, 8]를 읊고 있다. 이 시의 핵심은 5, 6구의 공북루에서 바라본 풍경이다(누정이란 본시 풍경 감상에 주안을 둔 건물이기 때문). 강 건너 자신이 지나온 먼 길과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렸다.



<홍수주가 공북루에서 봐라 봤을 금강 전경(前景) >



그런데 사실 이 시는 그리 대단한 시가 아니다. 핵심이 되는 시구도, 위에서 칭찬하는 듯한 말을 했지만, 누정시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시구이다. 그렇다면 이 시문 현판은 무의미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건물[공북루]을 찾는 이들에게는 이 시문 현판의 존재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싶다. 300여 년 전 이 건물에서 지어진 시를 300여 년 뒤에 이곳을 방문한 이가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은 시의 가치 유무를 떠나 매우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예와 이제를 연결하는 타임머신격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문을 읽으며 당시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을 견줘보고 지은이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을 함께 헤아려 본다면 그 특별함은 더욱 특별해질 것이다. 이 시문 현판이 없다면 공북루는 그저 옛 모습을 지닌 건물에 불과할 터이다.

 

  

우리 문화유산엔 기록 문화유산이 많다. 서책류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에도 기록이 있다(현판이나 주련 또는 편액 등). 문제는 이 기록 유산들이 대부분 한자로 쓰여졌고 여기다 한자 교육을 경시하다 보니 이 유산들을 많은 이들이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의미 이해는 차치하고). 읽지 못하는 기록 문화유산은 없는 것과 진배없다. 미국은 나라의 역사가 짧아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들도 보존하려 애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반면 우리는 멀쩡한 문화유산도 읽지 못해 사장시키고 있는 형편이니, 이건 조금 아니 많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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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 하나 주세요!"


주말과 일요일 아침 겸 점심은 꼭 외식을 한다. 산에 갔다 오는 길에 아침 겸 점심을 사 먹고 집에 들어가는 것. 그런데 함밥이 아니고 혼밥이다. 아내와 동행을 하려면 아침 등산 시간이 늦어져― 뭘 그리 준비하는지 ―언제부턴가 혼자 등산을 하다 보니  혼밥이 됐다. 한동안은 집에 들어와 먹은 적도 있는데, 아내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혼밥 외식을 하게 됐다. 혼밥인지라 메뉴는 단순하다. 순대국밥 아니면 육개장인데, 최근엔 육개장을 즐겨 먹는다.  


사진은 즐겨 찾는 육개장집 상호를 찍은 것이다. 이화수(怡和秀). 조어(造語)인데, 정치 깡패 이름[임화수(林和秀)]과 유사한  재미있는 상호이다(첫 글자만 다를 뿐, 나머지 글자는 발음도 한자도 동일하다). 육개장은 아무래도 중년층이 즐겨 찾는 메뉴인만큼 정치 깡패 임화수를 아는 중년층을 겨냥하면서 작위적 의미를 부여해 만든 상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작위적 의미가 그럴듯하다. 기쁨과 즐거움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곳. '기쁘고 즐겁게 좋은 음식을 먹는 곳'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이름만으로 보면 이곳은 혼밥보다는 함밥에 어울리는 곳이다. 그런데 이름과 달리 이곳엔 나처럼 혼밥을 먹는 이들이 꽤 눈에 띈다. 밥을 먹으며 이따금 그들을 살짝 쳐다보는데, 얼굴에 그늘이 져있다. 저들도 나를 본다면 내가 본 그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보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혼밥은…. 


한자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자. 


怡는 忄(心의 변형, 마음 심)과 台(기쁠 이)의 합자이다. 기뻐하다란 의미이다. 忄으로 뜻을 표현했다. 台는 음과 뜻을 담당한다. 台는 怡의 원형이다. 본래 台로 사용하다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忄이 추가되었다. 기쁠 이. 怡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怡豫(이예, 기쁘게 놂), 怡怡(이이, 기뻐하는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다. 


和는 口(입 구)와 禾(벼 화)의 합자이다. 마음이 잘 맞아 상호 간에 말이 잘 통한다는 의미이다. 口로 뜻을 표현했다. 禾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벼이삭이 잘 익어 아래로 늘어진 모양을 그린 것이 禾인데, 여기에는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이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화합할 화. 和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和合(화합), 和睦(화목) 등을 들 수 있겠다. 


秀는 禾(벼 화)와 乃(仍의 약자, 당길 잉)의 합자이다. 벼에서 당겨 나온 것, 즉 이삭이란 의미이다. 이삭 수. '당겨 나왔다'란 본뜻에서 '빼어나다'란 의미가 연역되어 '빼어나다'란 의미로도 사용한다. 빼어날 수. 秀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俊秀(준수), 秀作(수작)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민락(與民樂)'이라는 전통음악이 있다. 사신의 연향이나 임금의 거동 때 행악(行樂)으로 사용되던 음악인데, '여민락'은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긴다란 의미이다. 이는『맹자』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무릇 즐거운 것은 (왕) 혼자 즐기는 것보다 (백성과) 함께 즐기는 것이 더 낫다란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일상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맹자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것이 이런 경험을 반영한 말 아니겠는가.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 중의 하나가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이 보다더 즐거우려면 아무래도 혼밥보다는 함밥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앞으로는 아내의 치장을 기다리는 인내심을 길러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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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호에겐 자연의 모든 것이 요리 재료이다. 우리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솔방울과 돌옷[이끼]으로 국물을 내고 독초가 아닐까 염려되는 풀들로 반찬을 만든다. 먹을 수 없다면 무의미하겠지만 먹는 이들의 얼굴에 한결같이 놀라움의 기색이 역력하니 분명 못 먹을 음식은 아니다. 아니 맛있는 음식이다. 그는 어떻게 이런 요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얼마 전 그가 급서(急逝)한 후, 황교익이 추모 글에서 그 비결을 밝혔다.


“그에게 천재의 기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요리는 똑똑한 머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물에 불어 있는 손과 칼질로 단련된 그의 어깨가 이를 증명했다. “밤낮없이 몰아의 지경에서 요리만 해대었더니 문득 요리의 세상이 열리었다”라는, 작두 탄 무당이나 할 만한 그의 말을 나는 믿는다. 자신을 끝장내듯 몰아쳐 본 사람들은 이 경지를 안다. 열리면, 그다음은 노는 일밖에 없다. 그에게 주방은 놀이터였다. 먹일 사람이 있으니 더 신이 났다. 임지호는 신명 나게 놀다가 갔다.” (시사IN 719호(2021.6.29.) 67쪽)   

  

너무 쉽게 요리 재료를 구하고 그것으로 뚝딱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었던,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유희에 가깝게 음식을 만들었던 그의 솜씨는 하루아침에 달성된 것이 아니고 지난(至難)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 지난한 과정을 ‘간절함’이라 이름 붙여 본다. 그리고  간절함으로 하여 얻은 결과를 '자유'라 이름 붙여 본다. 나아가 ‘간절함’이 있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다소 무리한, 결론을 도출(導出)해 본다.     


사진은 '퇴설당(堆雪堂)'이라고 읽는다. 당호(堂號)인 퇴설은 ‘눈이 쌓이다’란 뜻인데, ‘진리를 구하는 간절함’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유래가 있다.   

  

선종 제 2조인 혜가(慧可, 487~593)는 속명이 신광(神光)인데, 도가와 불가의 서적을 두루 열람하고 수행하던 중 소림사에 주석하고 있던 초조(初祖)인 달마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달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신광은 가르침을 청하며 눈 오는 밤에 소림사 마당에 서 있었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그러자 비로소 달마가 물었다. “눈 속에 그토록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신광이 말했다. “바라건대 감로(甘露)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구해주소서.” 달마가 말했다. “부처님 도는 오랫동안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데 어찌 작은 지혜와 가벼운 마음으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헛수고일 뿐이다!” 달마의 말을 들은 신광은 홀연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잘랐다. 눈 위에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달마가 말했다. “부처님들은 법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었다. 팔을 잘라 내놓으니 이제 도를 구할 만하구나.” 달마는 그를 제자로 거두고 혜가라는 법명을 내렸다.     


혜가는 결코 잘려 나간 팔에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갈망하던 도를 얻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그의 자유는 결코 한가하게 앉아 명상하면서 얻어진 자유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얻은 자유였다. 혜가는 간절했기에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堆는 土(흙 토)와 隹(새 추)의 합자이다. 작은 언덕이란 뜻이다. 土로 뜻을 나타냈고, 隹로 음(추→퇴)을 표현했다. 언덕 퇴. 쌓이다란 뜻으로도 사용한다. 쌓일 퇴. 堆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堆積(퇴적), 堆肥(퇴비) 등을 들 수 있겠다.     


雪은 雨(비 우)와 彗(빗자루 혜) 약자의 합자이다. 빗자루로 쓸 수 있는 비가 응고되어 내린 물체, 즉 ‘눈’이란 뜻이다. 눈 설. 雪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積雪(적설), 雪寒(설한) 등을 들 수 있겠다.     


堂은 土(흙 토)와 尙(숭상할 상)의 합자이다. 집안 건축물 중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는 건물이란 의미이다. 집 당. 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堂號(당호), 殿堂(전당) 등을 들 수 있겠다.     


대가(大家)의 유치한(?) 작품이 어린아이의 유치한 작품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대가의 유치한 작품은 애써 정밀한 과정을 삼제(芟除)하고 고갱이만 남겨 놓은 것이고, 어린아이의 유치한 작품은 그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천진(天眞)이나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그러기에 값지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한 축인 ‘자유’도 그렇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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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산을) 밀어버릴 거에요!”

 

수련회를 다녀온 딸 아이가, 산행을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며 하이톤으로 말했다. “그려웃으며 대답했다. 수년 전 일이다.

 

유가에서는 교육을 중시한다. 정서 함양에 요긴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교 영향을 짙게 받은 우리나라에서 초학자 교재로 사용한 것 중에 추구(抽句)가 있다. 오언(五言)의 가언(佳言) 대구(對句)를 모아놓은 것인데, 첫머리에 천고일월명 지후초목생(天高日月明 地厚草木生)”이란 구절이 나온다. “하늘은 높아 해와 달이 빛나고, 땅은 두터워 초목이 생겨나네란 뜻인데, 대구를 잘 맞춘 그 이상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 뭘까?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을 그렸으니 자연스럽게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이는 확대하여 사람 역시 천지간의 존재로 천지를 부모로 하여 생겨난 존재다라는 생각이나 정서가 자연스럽게 우러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학습자가 이런 지경까지 이르겠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해도 은연중 이와 같은 생각이 내면에 씨앗처럼 뿌려져 결국은 그렇게 발화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은청산불묵만고병 유수무현천년금(靑山不墨萬古屛 流水無絃千年琴)”이라고 읽는다. “청산은 먹으로 그리지 않은 만고의 병풍이요, 유수는 줄이 없는 천고의 거문고라네라는 뜻이다. 추구의 내용과 흡사한데, 이 글귀를 되풀이하여 읽으면 어떤 정서가 함양될까? 청산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유수를 훌륭한 가락으로 여기는(여기려는) 심미감이 함양되지 않을까? (사진은 길거리 전봇대에 붙어 있는 것을 찍은 것인데, 길거리 예술 작품의 일환으로 붙여놓은 것이다. 취지는 좋은데, 한자 문맹이 대다수라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싶었다. 작게라도 해설을 덧붙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교(詩敎)는 전통 교육 방식이지만 한 번 되돌아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환경의 위기가 문제시되는 오늘날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파한 시를 되풀이 읽다 보면 자연스레 자연 애호의 마음이 싹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연과학적 분석과 관찰만으로는 자연 애호의 마음을 싹틔우기 어려울 것 같다. 딸 아이의 저 말은 우리 교육의 자연을 대하는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웃었지만, 그저 웃고 말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 , , 이 낯설다. 자세히 살펴보자.

 

(검을 흑)(흙 토)의 합자이다. 서사(書寫)의 재료가 되는 검은 색의 안료[]라는 뜻이다. 먹 묵.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墨刑(묵형, 죄수에게 죄목을 새기는 형벌), 墨畫(묵화) 등을 들 수 있겠다.

 

(의 약자, 집 옥)(나란할 병)의 합자이다. 집 내부를 가리는 물체라는 의미이다. 으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병풍은 집과 함께 있을 때 의미 있는 물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병풍 병.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屛風(병풍), 翠屛(취병, 꽃나무의 가지를 이리저리 휘어서 문이나 병풍 모양으로 만든 물건) 등을 들 수 있겠다.

 

(실 사)(검을 현)의 합자이다. 현악기에 사용되는 줄을 뜻한다. 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현악기의 줄이 내는 소리는 그윽하고 미묘하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악기줄 현.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管絃樂(관현악), 弄絃(농현, 거문고나 가야금 따위 한국 전통 음악의 현악기 연주에서, 왼손으로 줄을 짚어 원래의 음 이외의 여러 가지 장식음을 내는 기법) 등을 들 수 있겠다.

 

은 거문고를 그린 것이다. 아랫부분은 판, 윗부분은 안족과 줄을 그린 것이다. 거문고 금.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伽倻琴(가야금), 琴瑟(금슬) 등을 들 수 있겠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즐거움을 잘 그려낸 시 한 편을 읽어 본다. 되풀이 읽으면 뭔가 형언(形言)하기 어려운 미감을 느끼게 된다. 최충(崔沖, 984-1068)의 시이다.

 

滿庭月色無煙燭 만정월색무연촉   뜰에 한가득 달빛 켜고

入座山光不速賓 입좌산광불속빈   산 그늘을 손님으로 맞았네

更有松絃彈外譜 갱유송현탄외보   솔바람 반갑다 연주하니

只堪珍重未傳人 지감진중미전인   이 맛을 그 뉘가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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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6-19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너무나 귀여우신데요^^

찔레꽃 2021-06-21 08:55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가요? ^ ^ 아이들이 자연과 접하는 경험이 많아야하는데 갈수록 그 반대인 것 같아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