環顧六尺身 환고육척신 기껏 여섯 자 밖에 안되는 몸뚱이
一日能幾食 일일능기식 하루에 몇 끼나 먹는다고
尙營口腹謀 상영구복모 아직도 그 몸뚱이 먹여 살리려
未去雲山碧 미거운산벽 구름 낀 푸른 산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단 말가
<이규보(1168-1241), 「우음(偶吟)」>
누구나 한 번 쯤은 큰 결단의 순간에 선다. 시의 주인공 역시 그런 결단의 순간에 섰다. 지겨운 밥벌이 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그만 둘 것인지?
그런데 시의 주인공은 결단의 순간에서 망설이고 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그간의 삶과는 확연히 달라지는 새로운 삶이 전개될텐데.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일까? 어떤 삶이 펼쳐지든 그것을 수용할 자세가 갖춰져 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왜 망설이는 걸까? 간단하다. 그간의 삶에서 힘들었지만 단맛을 보았고, 그 단맛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힘들기만 하고 단맛도 보지 못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새로운 선택이후의 삶이 이전의 삶보다 나아질 확률이 더 높을테니 말이다. 결국 시의 주인공은 그저 그렇고 그런 자기 위안 혹은 기만의 푸념을 늘어 놓고 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주인공은 나약하다고 비난받아야 할까?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자기 위안 혹은 기만의 푸념이 외려 강한 결단의 삶보다 나을수도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많은 이들이 갈림길에서 흔들리지만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일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밥벌이 때문이 아닐까? 위 시에서는 밥벌이를 아주 하찮게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밥벌이만큼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숭고한 것이 없다. 하루에 세끼 밥 먹는 것을 사흘만 멈춰보라. 담 안넘는 사람 없다. 그런 밥을 버는 일이 어찌 하찮은 것이라 말할 수 있으랴. 여기 구름 낀 푸른 산은 그저 환상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다. 구름 낀 푸른 산이 내 입에 무엇을 넣어준다 말인가.
그래서 그랬을까, 결국 이 시의 주인공(지은이인 이규보)도 다시 제자리에 남았다. 비난하지 말자. 누구나 그런 자기 위안 혹은 기만의 푸념은 한 두 번쯤 해봤을테니.
사족. 요즘 산에다 멋진 집을 짓고 여유있게 지내는 이들이 많다.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이들이 자기 기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산에다 멋진 집을 짓고 온갖 편의 시설 들여놓고 사는 것은 산에 대한 모독이다. 산에 산다면 최소한의 집에 최소한의 시설로 자연에 흠을 내지 않고 살아야 한다. 편의 시설은 시정에 어울린다. 시정의 편의와 대자연의 소박함을 함께 누리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양다리 걸치면 잘못하다 가랑이가 찢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