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비애감을 느껴!”

 

동료 교사 한 사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점수 확인을 하는데, 서답형 채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학생이 인상을 써가며 대들 듯이 채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만성화된 현상이건만 동료 교사는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 것 같았다. 비슷한 나이라서 그럴까, 나도 동조했다. “맞아! 정내미가 뚝뚝 떨어지지.”

 

채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 제기하는 태도이다. 채점이 잘못된 듯한 상황이 되면 순간 학생이 아닌 불만 가득한 고객으로 돌변한다.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 톤을 높인다.

 

학생만 탓할 현실이 아니란 걸 모르지 않는다. 내신으로 진학을 하니 성적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불만 가득한 고객이라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는 법이다. 더구나 고객 이전에 배우는 처지에 있는 학생 아닌가.

 

그러나 공염불이다. 교육 현장은 점점 더 이전투구의 시장판이 돼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애감이 느껴지고 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학생들은 뭘 배우고 교사들은 뭘 가르치는 걸까?

 

사진의 한자는, 탕화쿵푸(汤火功夫)라고 표기돼있는데, 앞부분[汤火]은 우리 발음으로 표기했고, 뒷부분[功夫]는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했다. 우리 발음으로만 표기한다면탕화공부라고 해야 하고, 중국어 발음으로만 표기한다면 탕후어쿵푸라고 해야 한다. ‘탕후어는 낯설고 쿵푸는 익숙하기에 반반 섞어서 표기한 듯하다. ‘뜨거운 물과 불로 공들여 만들어 낸 요리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쿵푸(功夫)’라는 단어이다. 학생들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듣는공부(工夫)’라는 단어의 중국어 발음도 이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국어에서는 발음이 동일하면 뜻도 상통해서 쓰기에 공부는 곧 쿵푸라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쿵푸는 단순히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암기하는 지식의 습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익히는 몸의 단련을 의미한다. 아울러 쿵푸를 익힐 적에는 혼자 수련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스승에게서 지도를 받는다. 스승은 몸의 단련을 완성한 사람이기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

 

이는 곧 공부와도 상통한다. 공부란 본디 성정(性情)을 조절하고 인격을 쌓는 몸의 단련을 의미한다. 지식의 습득이란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공부 역시 혼자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스승에게서 지도를 받는다. 스승은 성정을 조절하고 인격을 쌓은 사람이기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

 

목하(目下) 교육 현장이 시장판처럼 된 것은 공부의 본질을 망각하거나 곡해한 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의 습득과 평가는 공부의 본질이 아니고 수단일 뿐인데, 지금은 수단이 본질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그러니 교육 현장이 시장판처럼 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공부한다고 하지만 공부하지 않고 있고, 교사들은 공부시킨다고 하지만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침소봉대한 지나친 평가일까?

 

이 낯설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자.

 

의 간체자이다. (의 변형, 물 수)(볕 양)의 합자이다. 햇볕을 쬐면 뜨겁듯이 그처럼 온도가 높은 물이란 의미이다. 끓인 물 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溫湯(온탕), 沐浴湯(목욕탕) 등을 들 수 있겠다.

 

(장인 공, 본래 자[]를 그린 것으로 규준이나 법도의 의미를 내포)(힘 력)의 합자로, 국가가 요구하는 일정한 규준과 법도에 맞게 세운 업적이란 의미이다. 공 공.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功績(공적), 成功(성공) 등을 들 수 있겠다.

 

인성교육진흥법이란 것이 제정되어 학교 현장에서 의무적으로 인성 교육을 하게 되어 있다. 취지는 이해되나 교과와 인성 교육을 유리(遊離)시키고 별도로 인성 교육을 하라는 것은 옥상옥(屋上屋)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법의 제정없이 일상의 교과 활동에서 자연스럽게 인성 교육이 강화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점점 시장화되는 교육 현장에서 과연 그런 교육이 가능할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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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살던 동네 이름은 '과디'였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후일 이 말이 원래 '구아대(舊衙臺)' 라는 걸 알았다. 옛 관청 터라는 의미였다. 살던 곳의 지명 의미를 아는 순간 우리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동네 이름의 의미도 이해가 됐다. 그 동네는 '옥거리'라고 불렀는데, '옥'은 바로 '감옥'의 의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리지 않았다.

 

지명은 그 지역을 상징하는 표기이기에 의미가 담겨있다. '과디'는 아무래도 길지(吉地)의 의미가 짙고, '옥거리'는 아무래도 흉지(凶地)의 의미가 짙다. 그런데 한글 전용 매진후 지명에 스민 의미가 다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불필요한 차별이 사라졌으니 좋은 것도 같고, 의미가 사라진 채 단순 표기로만 사용되니 뭔가 허전하여 나쁜 것도 같기 때문이다.

 

사진의 한자는 '장(獐)'이라고 읽는다. '노루'란 뜻이다. 서산시의 외곽에 위치한 동네 이름이다(장동이라고 부른다). 서산에 거주하니 '장동'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장동'의 의미는 이 간판을 보고서야 알았다. 웃어야 할지, 허탈하다고해야 할지 살짝 헛갈렸다. 한자 지명이 대개 그렇듯 이곳도 원래는 한글 지명이었다가 한자 지명으로 바뀐 것 아닐까 싶다. 원래 이름은 '노룻골'이 아니었을까? 장동보다는 차라리 노룻골이 더 정겹고 의미도 있어보인다. 노루가 살던 곳이라니, 한가하고 외진 곳이란 의미가 아니겠는가. 장동은 한자로 표가하지 않는한(혹은 병기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저 어느 지역을 알리는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가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사진에 나와 있다시피, 이 로고를 사용하는 업체는 철물을 파는 곳인데 주인이 이 곳 토박이거나 이 곳에 애정이 많은 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이름 의미를 한자로 분명히 명시했다는 것은 마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읽을 수 있는 이들이 흔치 않을텐데도 말이다. 침소봉대한 생각일까?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獐은 견(犭, 개 견)과 章(문채 장)의 합자이다. 노루라는 뜻이다. 犭으로 뜻을 표했다. 章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외양이 사슴처럼 아름답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노루 장. 麞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麞은 鹿(사슴 록)과 章의 합자이다. 사슴과 유사한 외양을 지닌 아름다운 동물이란 의미이다. 보다 의미가 분명하다.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獐牙(장아, 노루의 어금니. 벼의 별칭), 獐香草(장향초, 마늘) 등을 들 수 있겠다.

 

한글 전용이 대세를 이루면서 마을 이름이 단순 표기로 전락되어 생긴 우스운 마을 이름들을 소개한다. 외지인들이야 그저 웃고 말겠지만 그곳에 사는 분들은 분통이 터질 것 같다(오래된 자료이다. 지금은 변경됐을수도 있다. 감안해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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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가곡으로 더 잘 알려진 이은상(1903-1982)의 봄처녀이다. 새봄의 미감을 싱그러운 모습의 아가씨로 환치하여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확실히 봄은 그런 면모가 있다. 그런데 싱그러운 아가씨가 간직한 아름다움은 멀리서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이지 가까이 바라보며 손에 닿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봄에는 그런 면모도 있다. 그것을 막연한 아름다움이라 이름 붙여 본다.

 

사진의 시는 이제현(李齊賢, 1288-1367)용야심춘(龍野尋春, 용야에서 봄을 찾다)이다.

 

偶到溪邊藉碧蕪(우도계변자벽무) 시냇가 이르러 봄풀 위에 앉았더니

春禽好事勸提壺(춘금호사권제호) 좋은 일 있다며 새들이 술 가져오라 하네

起來欲覓花開處(기래욕멱화개처) 일어나 꽃 핀 곳 찾으렸더니

度水幽香近却無(도수유향근각무) 물 건너온 그윽한 향 문득 사라지네

 

따스한 봄 날씨가 시인을 유혹했다. 집 밖을 나와 이리저리 거닐다 시냇가 풀밭 위에 앉았다. 그때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그런데 시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또 유혹의 소리로 들린다. “저를 따라오세요. 술 마시기 좋은 곳이 있어요. 꽃이 활짝 피었답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시인은 그곳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꽃을 찾을수록 꽃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시는 봄날의 따스함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묘한 아름다움을 그린 시이다. 앞서 말한 막연한 아름다움을 그린 시라고 할 수 있다. 딱딱한 정형시 속에 이토록 섬세한 미감을 담아냈다는 것이 놀랍다.

 


낯선 한자를 서너 자 자세히 살펴보자.

 

(걸을 착)(부터 자)(방위 방)의 합자이다. 자신이 있는데서[] 걸어가[] 어렵지 않게 이를 수 있는 곳[]이란 의미이다. 가 변.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川邊(천변), 周邊(주변) 등을 들 수 있겠다.

 

는 병의 모양을 그린 것이다. 윗부분은 뚜껑, 아랫부분은 몸체이다. 병 호.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投壺(투호), 壺中物(호중물, ) 등을 들 수 있겠다.

 

(손톱 조)(볼 견)의 합자이다.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파본다[]는 뜻이다. 구할 멱.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覓索(멱색, 찾음), 覓得(멱득, 구해 얻음) 등을 들 수 있겠다.

 

의 속자이다. (무릎 꿇을 절)(골 곡)의 합자이다. 뼈마디 사이의 간극이란 뜻이다. 로 뜻을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하면서, 두 산 사이의 간극이란 의미로 본뜻인 뼈마디 사이의 간극이란 의미를 보충한다. 틈 각. 본뜻보다 물리치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물리칠 각. 본 시에서는 도리어란 뜻으로 사용됐는데, 동음을 빌미로 뜻을 빌어 쓴 것이다. 도리어 각.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退却(퇴각), 却下(각하) 등을 들 수 있겠다.

 

봄날을 노래한 것 중엔 희망 섞인 것도 많지만 아쉬움을 토로한 것도 많다. 얼핏 떠오르는 것이 익숙한 대중가요  봄날은 간다이다. 봄날이 아쉬운 것은 봄날이 갖는 저 막연한 아름다움과 상관성이 깊은 것 같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막연한 아름다움'은 얼마나 아쉬운, 아니 허망한 것인가! 봄날이 주는 그 아쉬움과 허망함의 아름다움 때문에 봄날의 인간사도 그러한 것 아닌가 싶다


사진은 아내가 받아놓은 어떤 분의 명함 후면에 있는 것을 찍은 것이다. 낙관에 있는 내용은 오른쪽의 전서체를 행서체로 바꾸어 다시 쓰고 쓴 분의 호와 이름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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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없어요!”

먹고 살기 바빠서

 

너무 바쁘고 복잡한 상황일 때와 뒤늦은 후회를 피력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두 말의 공통점은 속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이 말이 전하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겠다. 빠르게 살면, 제정신에 못살고 후회하게 된다! 개인적 경험에 기댄 말이지만, 기업이나 사회로 환치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은일신월이(日新月異)’라고 읽는다. ‘날로 새롭고 달로 다르다란 뜻이다. 익히 알려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모 기업체 로비의 거울에 쓰여있는 문구인데, 사원들의 혁신 마인드를 북돋기 위해 써놓은 것 같았다. 문구를 보며, 기업의 생존이 빠른 변화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꼭 옳은 방향이기만 할까, 하는 기우(杞憂)를 살짝 해봤다.

 

가 낯설다. 자세히 살펴보자.

 

(도끼 근)(나무 목)(의 약자, 매울 신)의 합자이다. 나무를 베어 땔감을 장만했다는 의미이다. 으로 의미를 표현했다. 은 음을 담당한다. ‘새롭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새 땔감을 장만했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땔감 신, 새 신.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新舊(신구), 新聞(신문) 등을 들 수 있겠다.

 

는 얼굴에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 다르다기이하다라는 뜻을 나타냈다. 다를 이, 기이할 이.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異人(이인), 驚異(경이) 등을 들 수 있겠다.

 


목하 우리는 속도 전쟁 속에 살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강박감에 사로잡혀 산다. 그런데 그 종착점은 과연 어떠할까? 분명 잘살아 보자고 한 것인데 외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역설적이게도 바쁘고 빠를수록 더더욱 자신개인이 될 수도 있고 기업이나 사회가 될 수도 있다을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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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범인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숨겨진 범인이 누구일까 궁금해 자꾸 책장을 넘기게 된다. 따라서 범인을 알고 있는 추리소설은 재독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감춘다는 것은 신비감을 간직하는 것이고, 그 신비감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매력이 된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본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밀로의 비너스상'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낀다. 물론 그림 자체가 훌륭하고 조각 솜씨가 뛰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감출 곳을 적당히 감췄기에 아름답게 느껴진다. 감출 곳을 다 드러낸 '비너스의 탄생'이나 '밀로의 비너스상'은 처음에는 눈길이 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미감은 반감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여성분들이 이 부분을 읽고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짐승 같은 놈이라고 욕하며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한시에는 당시풍과 송시풍이라는 두 작풍(作風)이 있다. 당나라에서 지어진 시를 당시라 하고 송나라에서 지어진 시를 송시라 하는데 두 시대의 작풍은 차이가 분명했고, 이후 이런 작풍을 따라 지은 시들을 당시풍 혹은 송시풍이라 했다. 당시풍은 정()을 중심으로 하고, 송시풍은 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사물을 접할 때 정과 의가 함께 일어나지만, 당시풍은 정에 더 중점을 두고 짓고, 송시풍은 의에 더 중점을 두고 짓는다. 그러다 보니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시작법에서도 차이가 생긴다. 정에 기반한 당시풍은 대상에서 느끼는 미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정을 사물의 묘사 속에 감추어 놓는 작법을 택한다. 미묘한 감정은 드러내어 말하기도 어렵지만 말하는 순간 미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의에 기반한 송시풍은 대상에서 느낀 생각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경물은 이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한 부수적(극단적으로 말하면) 재료로 사용한다.

 

사진은 소식(蘇軾, 1036-1101)제서림벽(題西林壁, 서림사 벽에 쓰다)이란 시이다. (서림사에 있는 작품인데, 글씨는 소식이 쓴 것이 아니고 이 절의 스님이 쓴 것이다. 현대 작품이다.)

 


橫看成嶺側成峰 횡간성령측성봉    가로로 보면 산줄기 세로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각부동    멀고 가까움높고 낮음에 따라 제각각

不識廬山眞面目 불식려산진면목    여산의 참모습 알지 못함은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    이 몸 산 속에 있기 때문

 


이 시는 시인의 그 어떤 생각을 여산(廬山)의 모습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그 어떤 생각은 무엇일까?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시인이 직접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며, 이런 차별적 파악은 궁극의 이치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궁극의 이치를 체득할 때라야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의 소재로 등장한 여산(서림사에서 바라 본)은 시인의 이런 생각을 촉발시킨 것이지만, 정작 여기에서 중심이 된 것은 여산이 아니고 시인의 생각이다. 여산은 시인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재료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전형적인 송시풍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을 해본다. 당시가 맛있을까, 송시가 맛있을까? 하나 마나 한 질문을 왜 하냐고 할 것 같다. 그렇다. 하나 마나 한 질문이다. 당연히 당시가 맛있다. 시인의 미감을 사물의 묘사 속에 숨겨 놓았기에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궁금증을 가지고 자꾸 읽게 되기 때문이다. 숨겨 놓은 범인이 궁금해 계속 추리소설을 읽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송시는 어떨까? 그렇다. 이미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기에 별맛이 없다. 범인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추리소설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소식의제서림벽은 서림사를 소재로 한 시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로 꼽힌다. 그래서 그런지 찬양 일색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저 소식이라는 유명 문인이 지었다는 것 빼고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시이다. 맛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반론을 할 것 같다. 그럼, 송시풍의 시는 다 보잘것없다는 것이냐?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송시풍의 시는 시를 통해 교화를 이루려는 동양의 전통 문학론에 충실한 시이다. 결코 허투루 볼 시풍의 시가 아니다. 다만 도덕적인(철리적인) 면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당시에 비해 미감이 떨어지고 맛이 우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뿐이다.

 

여담. 당시풍이나 송시풍은 시대의 사상 조류와 관련이 깊다. 당대는 불교(선종)가 성했던 시기이고, 송대는 도학(성리학)이 성했던 시기이다. 당시가 불필요한 사설을 배제하고 경물 묘사에 치중하고, 송시가 사설을 앞세우고 경물을 뒤에 놓은 까닭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는 한시에서 꽃에, 송시는 열매에 비유되기도 한다. 당 이전 송 이후 시가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두 시풍이 한시의 모든 것을 발화시켰고 결실을 맺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풍으로 지은 시서림사에서 바라본 여산의 풍경 를 위 소식의 시와 나란히 소개하면 좋았을 터이다. 당시풍과 송시풍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아쉽게도 그만한 시를 찾지 못했다. 과문(寡聞)한 탓이다.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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