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가곡으로 더 잘 알려진 이은상(1903-1982)의 「봄처녀」이다. 새봄의 미감을 싱그러운 모습의 아가씨로 환치하여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확실히 봄은 그런 면모가 있다. 그런데 싱그러운 아가씨가 간직한 아름다움은 멀리서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이지 가까이 바라보며 손에 닿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봄에는 그런 면모도 있다. 그것을 ‘막연한 아름다움’이라 이름 붙여 본다.
사진의 시는 이제현(李齊賢, 1288-1367)의 「용야심춘(龍野尋春, 용야에서 봄을 찾다)」이다.
偶到溪邊藉碧蕪(우도계변자벽무) 시냇가 이르러 봄풀 위에 앉았더니
春禽好事勸提壺(춘금호사권제호) 좋은 일 있다며 새들이 술 가져오라 하네
起來欲覓花開處(기래욕멱화개처) 일어나 꽃 핀 곳 찾으렸더니
度水幽香近却無(도수유향근각무) 물 건너온 그윽한 향 문득 사라지네
따스한 봄 날씨가 시인을 유혹했다. 집 밖을 나와 이리저리 거닐다 시냇가 풀밭 위에 앉았다. 그때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그런데 시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또 유혹의 소리로 들린다. “저를 따라오세요. 술 마시기 좋은 곳이 있어요. 꽃이 활짝 피었답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시인은 그곳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꽃을 찾을수록 꽃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시는 봄날의 따스함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묘한 아름다움을 그린 시이다. 앞서 말한 ‘막연한 아름다움’을 그린 시라고 할 수 있다. 딱딱한 정형시 속에 이토록 섬세한 미감을 담아냈다는 것이 놀랍다.
낯선 한자를 서너 자 자세히 살펴보자.
邊은 辶(걸을 착)과 自(부터 자)와 方(방위 방)의 합자이다. 자신이 있는데서[自] 걸어가[辶] 어렵지 않게 이를 수 있는 곳[方]이란 의미이다. 가 변. 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川邊(천변), 周邊(주변) 등을 들 수 있겠다.
壺는 병의 모양을 그린 것이다. 윗부분은 뚜껑, 아랫부분은 몸체이다. 병 호. 壺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投壺(투호), 壺中物(호중물, 술) 등을 들 수 있겠다.
覓은 爪(손톱 조)와 見(볼 견)의 합자이다. 정체를 드러내기[見] 위해 파본다[爪]는 뜻이다. 구할 멱. 覓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覓索(멱색, 찾음), 覓得(멱득, 구해 얻음) 등을 들 수 있겠다.
却은 卻의 속자이다. 卻은 卩(무릎 꿇을 절)과 谷(골 곡)의 합자이다. 뼈마디 사이의 간극이란 뜻이다. 卩로 뜻을 표현했다. 谷은 음[곡→각]을 담당하면서, 두 산 사이의 간극이란 의미로 본뜻인 뼈마디 사이의 간극이란 의미를 보충한다. 틈 각. 본뜻보다 ‘물리치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물리칠 각. 본 시에서는 ‘도리어’란 뜻으로 사용됐는데, 동음을 빌미로 뜻을 빌어 쓴 것이다. 도리어 각. 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退却(퇴각), 却下(각하) 등을 들 수 있겠다.
봄날을 노래한 것 중엔 희망 섞인 것도 많지만 아쉬움을 토로한 것도 많다. 얼핏 떠오르는 것이 익숙한 대중가요 「봄날은 간다」이다. 봄날이 아쉬운 것은 봄날이 갖는 저 ‘막연한 아름다움’과 상관성이 깊은 것 같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막연한 아름다움'은 얼마나 아쉬운, 아니 허망한 것인가! 봄날이 주는 그 아쉬움과 허망함의 아름다움 때문에 봄날의 인간사도 그러한 것 아닌가 싶다.
사진은 아내가 받아놓은 어떤 분의 명함 후면에 있는 것을 찍은 것이다. 낙관에 있는 내용은 오른쪽의 전서체를 행서체로 바꾸어 다시 쓰고 쓴 분의 호와 이름을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