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지호에겐 자연의 모든 것이 요리 재료이다. 우리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솔방울과 돌옷[이끼]으로 국물을 내고 독초가 아닐까 염려되는 풀들로 반찬을 만든다. 먹을 수 없다면 무의미하겠지만 먹는 이들의 얼굴에 한결같이 놀라움의 기색이 역력하니 분명 못 먹을 음식은 아니다. 아니 맛있는 음식이다. 그는 어떻게 이런 요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얼마 전 그가 급서(急逝)한 후, 황교익이 추모 글에서 그 비결을 밝혔다.
“그에게 천재의 기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요리는 똑똑한 머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물에 불어 있는 손과 칼질로 단련된 그의 어깨가 이를 증명했다. “밤낮없이 몰아의 지경에서 요리만 해대었더니 문득 요리의 세상이 열리었다”라는, 작두 탄 무당이나 할 만한 그의 말을 나는 믿는다. 자신을 끝장내듯 몰아쳐 본 사람들은 이 경지를 안다. 열리면, 그다음은 노는 일밖에 없다. 그에게 주방은 놀이터였다. 먹일 사람이 있으니 더 신이 났다. 임지호는 신명 나게 놀다가 갔다.” (시사IN 719호(2021.6.29.) 67쪽)
너무 쉽게 요리 재료를 구하고 그것으로 뚝딱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었던,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유희에 가깝게 음식을 만들었던 그의 솜씨는 하루아침에 달성된 것이 아니고 지난(至難)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 지난한 과정을 ‘간절함’이라 이름 붙여 본다. 그리고 그 간절함으로 하여 얻은 결과를 '자유'라 이름 붙여 본다. 나아가 ‘간절함’이 있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다소 무리한, 결론을 도출(導出)해 본다.
사진은 '퇴설당(堆雪堂)'이라고 읽는다. 당호(堂號)인 퇴설은 ‘눈이 쌓이다’란 뜻인데, ‘진리를 구하는 간절함’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유래가 있다.
선종 제 2조인 혜가(慧可, 487~593)는 속명이 신광(神光)인데, 도가와 불가의 서적을 두루 열람하고 수행하던 중 소림사에 주석하고 있던 초조(初祖)인 달마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달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신광은 가르침을 청하며 눈 오는 밤에 소림사 마당에 서 있었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그러자 비로소 달마가 물었다. “눈 속에 그토록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신광이 말했다. “바라건대 감로(甘露)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구해주소서.” 달마가 말했다. “부처님 도는 오랫동안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데 어찌 작은 지혜와 가벼운 마음으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헛수고일 뿐이다!” 달마의 말을 들은 신광은 홀연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잘랐다. 눈 위에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달마가 말했다. “부처님들은 법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었다. 팔을 잘라 내놓으니 이제 도를 구할 만하구나.” 달마는 그를 제자로 거두고 혜가라는 법명을 내렸다.
혜가는 결코 잘려 나간 팔에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갈망하던 도를 얻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그의 자유는 결코 한가하게 앉아 명상하면서 얻어진 자유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얻은 자유였다. 혜가는 간절했기에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堆는 土(흙 토)와 隹(새 추)의 합자이다. 작은 언덕이란 뜻이다. 土로 뜻을 나타냈고, 隹로 음(추→퇴)을 표현했다. 언덕 퇴. 쌓이다란 뜻으로도 사용한다. 쌓일 퇴. 堆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堆積(퇴적), 堆肥(퇴비) 등을 들 수 있겠다.
雪은 雨(비 우)와 彗(빗자루 혜) 약자의 합자이다. 빗자루로 쓸 수 있는 비가 응고되어 내린 물체, 즉 ‘눈’이란 뜻이다. 눈 설. 雪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積雪(적설), 雪寒(설한) 등을 들 수 있겠다.
堂은 土(흙 토)와 尙(숭상할 상)의 합자이다. 집안 건축물 중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는 건물이란 의미이다. 집 당. 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堂號(당호), 殿堂(전당) 등을 들 수 있겠다.
대가(大家)의 유치한(?) 작품이 어린아이의 유치한 작품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대가의 유치한 작품은 애써 정밀한 과정을 삼제(芟除)하고 고갱이만 남겨 놓은 것이고, 어린아이의 유치한 작품은 그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천진(天眞)이나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그러기에 값지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한 축인 ‘자유’도 그렇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