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 공북루의 시문 편액>




아버지는 항상 주말이면 출타를 하셨다. 어디 가시냐고 여쭤보면 때로는 제천, 때로는 조치원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말마다 출타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속을 끓이셨지만, 어린 나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며 받는 용돈이 좋아 은근히(?) 아버지의 출타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대는 지명에 그다지 믿음이 없으셨던 것 같다. 종종 발견되는 아버지의 가방 속 마권(馬券)을 그 근거로 삼으셨다. 마권은 서울서 살 수는 있는 거지 제천이나 조치원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천이나 조치원에 아주 안 가신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곳의 건재 약방 달력을 가져오신 적도 있고, 그곳 건재 약방에 글씨를 써 준 적도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두 분 다 고인이 되신 지금, 난 이따금 어머니의 생전 속 끓임에 관계없이 아버지가 가셨다고 말씀하신 제천이나 조치원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혹여 그곳에서 아버지의 빛바랜 글씨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을 읽으며 아버지의 속 뜰을 한번 되짚어 보고 싶다. 그리고 이런 질문도 드리고 싶다. ‘아버지, 왜 무슨 이유로 그렇게 어머니에게 무심하시고 가정을 등한시하셨던 것인지요?’ 아버지의 글씨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와 만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

 


사진은 공주 공산성 공북루(拱北樓)에 걸린 시문 편액이다.

 

  

鷄嶽秋雲傍馬頭 계악추운방마두    계룡산 가을 구름 말머리 곁에서 피어나는데

 

偶携旌節到雄州 우휴정절도웅주    정절(행차 앞의 깃발)따라 웅주[공주]에 이르렀네

 

南巡王氣今雙樹 남순왕기금쌍수    남순(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가 한양에서 공주에 온 일)했던 임금의 기

 

                                                   운은 쌍수(인조가 기대어 쉬었다는 두 그루 나무)에 어려있고

 

北望臣心此一樓 북망신심차일루    북망(임금이 계신 곳을 생각함)의 신심은 이 공북루에 어려있어라

 

逈枕漫漫長路走 형침만만장로주    아득히 달려온 먼 길을 바라보다

 

平臨滾滾大江流 평림곤곤대강류    누각 앞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

 

酒酣落筆酬前債 주감낙필수전채    취기 올라 붓을 들고 그대의 시에 화답하노니

 

奇絶男兒特地遊 기절남아특지유    멋진 사내가 특별한 곳에서 놀았도다

 

歲丙子仲秋 세병자중추    병자년 중추에

 

觀察使 洪受疇 관찰사 홍수주       관찰사 홍수주 읊다

 

  

홍수주(1642-1704)는 충청 관찰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충청 관찰사 감영이 공주에 있었으니, 이 시는 관찰사로 공주에 부임한 후 공북루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해 지은 시로 보인다. 공주로 오는 과정[1, 2], 공주에 도착해 느끼는 정서[3, 4], 공북루에서 바라본 풍경[5, 6], 그리고 시를 짓게 된 경위[7, 8]를 읊고 있다. 이 시의 핵심은 5, 6구의 공북루에서 바라본 풍경이다(누정이란 본시 풍경 감상에 주안을 둔 건물이기 때문). 강 건너 자신이 지나온 먼 길과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렸다.



<홍수주가 공북루에서 봐라 봤을 금강 전경(前景) >



그런데 사실 이 시는 그리 대단한 시가 아니다. 핵심이 되는 시구도, 위에서 칭찬하는 듯한 말을 했지만, 누정시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시구이다. 그렇다면 이 시문 현판은 무의미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건물[공북루]을 찾는 이들에게는 이 시문 현판의 존재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싶다. 300여 년 전 이 건물에서 지어진 시를 300여 년 뒤에 이곳을 방문한 이가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은 시의 가치 유무를 떠나 매우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예와 이제를 연결하는 타임머신격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문을 읽으며 당시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을 견줘보고 지은이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을 함께 헤아려 본다면 그 특별함은 더욱 특별해질 것이다. 이 시문 현판이 없다면 공북루는 그저 옛 모습을 지닌 건물에 불과할 터이다.

 

  

우리 문화유산엔 기록 문화유산이 많다. 서책류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에도 기록이 있다(현판이나 주련 또는 편액 등). 문제는 이 기록 유산들이 대부분 한자로 쓰여졌고 여기다 한자 교육을 경시하다 보니 이 유산들을 많은 이들이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의미 이해는 차치하고). 읽지 못하는 기록 문화유산은 없는 것과 진배없다. 미국은 나라의 역사가 짧아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들도 보존하려 애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반면 우리는 멀쩡한 문화유산도 읽지 못해 사장시키고 있는 형편이니, 이건 조금 아니 많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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