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시민 불복종 (합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허버트 웬델 글리슨 사진 / 현대지성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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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시민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이다. 나는 그를 잘 몰랐다. 월든이라는 호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지만 세상 끝날 때까지 한번은 읽어봐야 할 책이 이렇게도 많다는 사실을 재차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지 싶다.

그는 젊은 나이에 적극적이며 의도적 고립을 선택한 삶을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그가 숲에 머물렀던 시기는 대략 2(22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왜 숲으로 들어갔던 것일까.

책은 소로의 철학과 사상과 일상의 모든 것을 담아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다른 수식을 차치하고 오로지 소로 한 사람의 존재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마다, 오묘한 생각에 빠졌던 것을 기억한다. 이 사람은 자기만의 강단과 현명함을 지녔으면서도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엉뚱한 구석이 있어보이더란 말이다. 그는 생각도 많고, 말도 많고, 또 글도 잘 썼던 사람이 아닌가. 거기에 고집스러운 면모까지 있던 사람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의 이미지들을 나열해보자. 우선 그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또 고독을 기꺼이 즐길 줄 알고, 그 신념으로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당당했던 사람이었다. 책은 그가 월든 호수 근처에 오두막을 옮겨와 살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서서히 물들어간다는 생각은 개인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에 물들어간다는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일까. 이 사람 소로가 생각하는 그만의 자유, 고독, 신념, 용기, 관념들?

그는 말이다. 숲과 호수를 사랑했고,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을 아꼈으며, 이 모든 삶의 가치를 발견해가는 일상의 모습들을 소중히 여겼다. 그에게 있어 자연이란, 순간순간 옥죄여오는 삶의 형식과 크고 작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이자 안식처의 개념이었다.

 


그의 사상은 어떨까. 그의 철학을 논함에 있어서는 조금 조심스럽다. 여러 가지 방향성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의 의식은 어쩌면 자연 그 자체에 동화되는 인간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더불어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자신만의 신념에 따른 주체적인 삶을 선택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어 보인다. 이 부분은 시민 불복종에 언급되고 있는 정의와 법 그리고 노예제 폐지와 같은 개념까지 확장해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가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먼저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의보다 법률을 더 존중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언제 어디서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p449



소로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철학과 사상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 까닭에 많은 이들이 반대했던 그 고립의 길도 과감히 선택한 게 아니었던가. 그렇다고해도 딴은 그가 마냥 까칠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또 아니다. 그의 오두막에는 늘 그를 찾는 존재들이 있었다고 책은 이야기한다. 그 존재감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이웃의 주민이기도 했으며, 그의 오두막을 찾아오는 동물들이기도 했다. 때로는 이른 새벽의 부는 바람과 한겨울 월든 호수에서 들려오던, 쩡쩡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였을 법도 하다.

 


그는 모두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기를 기꺼이 자처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을 선택했으나, 정신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그는 모두에게 친근한 이웃이으로 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숲속에서의 삶은 그가 바라는대로 가장 자연적이면서도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타인의 도움 없이 직접 밭을 갈아 콩을 심어 농사를 짓고, 난방을 위한 목적으로 굴뚝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호수를 관찰하고 물의 수심을 예측하면서, 그만의 감성과 지성이 서로 교차되어 지나가는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그만의 시선이 머무는 월든 호숫가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책은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삶의 모습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만의 사상과 정치적 입장까지 이 모든 요소가 오로지 이 책 한 권에 들어차 있기에, 읽는 이에 따라 조금은 버거울 수도 있을 것도 같다.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그리고 기다림이다. 그의 사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게도 역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다.

책은 모두가 한 번쯤 용기를 가져 볼만한 도전의 가치, 아니 가치의 도전을 보여주는 소로의 담백한 고백서인 동시에 자연으로의 초대장이다. 진득하게 시간을 두고 오래도록 반복해서 읽어볼 책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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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12-30 0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대딩시절에 사놓고,
몇번을 시도했는데 이상하게 몇장을 넘기지 못하더라고요.
올해 한국 가서도..다시 한번 시도했는데, 어김없이 실패했어요.
이분의 숲 생활이 궁금해서...책을 매번 손에 들긴하는데, 그 삶을 들여다 볼때까지는 저도 시간이 좀 필요한 가봐요.

월천예진님, 올한해 감사했습니다.^^
해피뉴이어!!

월천예진 2021-12-30 13: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벌써 한해가 다 가버렸지뭐예요. 너무 아쉬운 순간이네요. ^^; 저 또한 정말 감사했습니다. 소통의 부재로부터 저를 건져주셨어요. 고맙습니다.♡♡♡
 
국어교사
유디트 타슐러 지음, 홍순란 옮김, 임홍배 감수 / 창심소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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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사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오래전 어느 강연장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가. ‘소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 이미 셰익스피어 시대에 모든 소설의 이야기를 끝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소설은 새로 쓰이고 또 새로 읽히고 있다. 아마도 그의 이야기가 빗나간 모양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닌가 보다.

모든 장르를 통틀어보더라도 예술이라는 장르는 인간의 삶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만 뭐랄까. 외관상으로 보이는 형식이 달라질 뿐이라고 할까.

 


이번 소설 유디트 타슐러의 국어교사는 새로운 형식 혹은 낯선? 형식으로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전통적인? 스토리 전개에 익숙한 나로서는, 작품을 읽으면서 신선함 가운데 조금 산만하다는 생각이 적지 않게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긴한데 이쯤에서 살짝 뒤로 물러나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 까닭인즉 새로운 것에 약간의 거부감을 갖게 되면서 그런 어정쩡한 나이가 되어간다는 현실적인 자괴감도 없진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야기에 집중해보자.

 


소설은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다. 연애와 사랑. 그리고 배신에 대한 복수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작가의 메시지는 화해였다.

인간사는 어디든 다 비슷비슷한가 보다.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세계공통의 스토리다. 그들의 관계가 서로 평등한 관계든, 애증의 관계든, 주종의 관계든 간에 그 안에서 생겨나는 남녀의 이야기는 참 복잡미묘하지 않은가 말이다.

과거의 연인이었던 남자 크사버와 여자 마틸다는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조우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하게 된다. 각각 작가라는 지위와 선생님이라는 사회적 신분으로 말이다. 다시 만난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교환하며 스토리를 이어가는 게임을 시작한다. 마치 교환일기 같은 느낌이랄까.

이들 남녀의 이야기는 상대에게 정작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과거 어디쯤의 후회와 미련이 담겨 있다. 그들에게 있어 의도치 않게 잊혀진 이야기였으며, 의도된 채 감추어진 진실이 녹아 있음을 독자는 알아가게 된다.

 


조금 더 들어가보자. 크사버와 마틸다의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묘하게 이들의 이야기는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크사버가 전해주는 형식의 이야기 전개에서 독자는 크사버의 먼 선대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리하르트 잔트와 도로시. 리하르트 잔트와 안나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 마틸다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을 접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두 사람이 왜 애증의 관계 안에 있게 되었는지, 두 사람의 갈등의 시작은 무엇이었는지 서로가 교환해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다.

 


각설하고 나는 무엇을 찾아야 했을까? 이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진실한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되는가도 싶다. 그렇게 사랑의 가치와 삶의 가치를 반추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의미를 갖는 것 같기도하다. 그 반추의 경험들이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는 해석이 될 수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들은 오묘하게 오버랩되는 듯,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관통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를테면 크사버와 마틸다와 관계와 크사버와 데니스의 관계를 보면서 솔직하지 못한 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남녀의 관계는 상처로 각인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데.... 다소 씁쓸한 이들의 경험은, 시간이 흘러 서로에 대한 배려와 진심 가득한 관계를 되찾아 가는데 귀한 밑거름이 되는 게 아니었을까.

 


딴 생각이기도 한데 늘어놓으면 이런 것들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다가도 또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용서하는 모습들이 보여주는 모든 관계라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인가 보다. 문득 어린 왕자에게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던 사막여우가 생각나는 건 여담이고 사족이다. 길들인다는 것, 익숙해진다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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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과해서 책을 너무 많이 신청했던가보다

읽어야 할 책이 많다는 건 행복한 일이기도하지만.. 그만큼의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한권의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서평을 남기고나면

그 남은 기운? 뭐랄까.. 책을 읽고난 후에 남아있는 감정에 보통은 그날 하루정도는 더 머물고 싶은 욕심이 큰데

읽어야 할 책들이 많으면.. 서둘러 남아있는 감정을 정리해야만한다

좋은건 아닌거 같아.


주인공 이름이 틀렸다. 바보같이...

내 머리속에서는 확실히 엉뚱한 무언가가 존재하는건가

인식은.. 고착화되면 수정하기 어렵다

객관적 입장에서 거리감을 확보해야하는데 이따금.. 너무 몰입하는 경향이 크다

위험한 순간이다


새벽 한시 반에 잠이 들었다가 천명음 때문에 한시간 만에 다시 일어났다.

두시 반... 그리고 세시...

다시 잠이 든 건 네시쯤이었을까.

고달픈 순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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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12-18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공 이름 틀린 걸루 바보라니요 ㅋㅋㅋ 그러면 천지에 바보...ㅎ

월천예진 2021-12-18 12:46   좋아요 0 | URL
그.~그런가요. ^^;;;;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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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 선택과 책임

 

 


 

책은 다 읽었는데 좀처럼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해서 글로 표현해낸다고도 하던데, 그런 일과는 거리가 먼 나로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각적인 것에 의지해야만 한다. 물론 그 감각이란 현학적이면서 찰나적이지만 딴은 지나칠정도로 지루하고 논리적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내겐 정해진 흐름이 없는 것 같다.

지금 머릿속에서는 과부하에 따른 부작용이 넘치고 넘친다. 어떤 흐름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는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이다. 여성이 등장한다. 여성의 이야기다. 어머니와 딸.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인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페미니즘에 국한되기보다는 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1960년대부터 40여년이 지난 시점까지. 한 여성 아니 두 여성. 아니다. 미안하다. 틀렸다. 다시 정리해보자. 소설은 주인공 조지와 그녀의 친구 부르주아 태생의 앤. 그리고 가출했다가 돌아온, 조지의 동생 솔랜지까지를 모두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크게 봤을 때 세 여성의 이야기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시대적 변화와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소설은 간단하지 않았다. 깊이 몰입해 들어갈수록 많은 것들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음을 느끼게 된다고 해야할까.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혼돈 속에 묶여 있다. 하나씩 그 갈래를 풀어갈 때마다 생각하고 번민하고 또 우리가 주지해야 할 그 무엇을 대면하게 되는 듯하다는 인상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앞에서 나는 앤을 소개할 때 부르주아라는 단어를 썼다. 이번 책이 왜 구태여 부르주아라든지 프롤레타리아라는 언어와 인식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가에 대한 이 지루한 의문은 책이 지니는 성향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인물에 대한 성향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두 가지를 다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아직 모르겠다.

대학에서 룸메이트로 만난 조지와 앤은 서로 다른 가정환경과 사회적 환경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시작부터 어쩔 수 없는 대립각을 사이에 둔 대치 상태에 놓이게 된다. 불행한 가정사를 상처로 끌어안은 조지와 달리 앤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앤에게 있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실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하고 싶은 치욕스러운 치부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그녀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부르주아의 개념은, 부끄럽고 창피하며, 비인간적인 것이라는 인식으로 가득했다. 차라리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랐더라면, 자신이 핍박받는 유색인종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자기만의 생각 속에서, 집착과 애착의 면모를 보이는 앤의 이미지는 그렇게 낯설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잠시만 쉬어가자. 잠시만. 그리고 잠깐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미국사회를 생각해보자. 미국이라는 단어 앞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론하는 일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기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를 표방해온 미국이란 나라에서조차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태동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는 것 또한 사실인 듯하다. 혹자는 이러한 급진 사상들이 인종차별에 따른 사회적 갈등의 문제로 뻗어나가, 전반적으로 사회 문제로 변형되었음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그리드 누네즈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시대적 사회적 배경으로 국한시켜 바라보는 게 합리적일 듯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반체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개념과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인물의 성향과 시대적 요소와의 갈등을 대비해 잘 보여주고 있는 작가만의 장치로 보면서 일절 넘어가는 게 좋아보인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할 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적 문제로만 들여다보기에는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의 모습이 무척이나 이채롭기 때문이다. 어떤 시각으로 작품을 평가할지에 대한 문제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 아닐까싶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을 옮겨적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함이란 무엇일까.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가는 게 일상이라는 틀 안에 넣어볼 수 있는 모습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한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선택. 그 선택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들이 이어진다.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걸까. 어쩌면 말이다.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사회지만 개개인은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고민에 빠져든다는 설정을 해보자. 이때 뒤돌아보지 않으며 그대로 앞으로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지와 과거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한순간 자신이 포기했던 또 다른 참모습을 찾아간다는 선택지는,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개념 보다는 두 가지 다 공이 가치가 있는 선택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싶은 거다.

 


작품에서 보이는 사랑의 개념 결혼의 개념은 살짝 뒤로 밀어둔다. 작품을 보는 나의 관점은 혼란한 시기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개개인의 선택한 삶의 방향성에 집중되어 있다.

이쯤에서 드는 질문은 왜 제목이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인가 하는 것이겠다 싶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부류는 개개인이 선택한 다양한 삶과 그 맥락이 이어진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굳건한 가치와 신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 언젠가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부디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에게 결여된 건 삶의 잔혹성이나 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함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대처하는 메커니즘이었다.”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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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고도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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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고도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일본작가 모리사와 아키오의 작품이다. 푸르고 외로운 섬. 원제는 Blue Isolated Island이다.

주인공 고지마 다스쿠는 이벤트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다. 그의 속사정을 좀 들여다보자. 그는 회사에서 인정받기보다는 쓸모없는 놈취급을 받는 인물로, 스스로도 자격지심과 자신의 업무에 대한 회의감에 젖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외로운 섬으로 가게 된 것 역시 억지로 떠밀려 가게 된 상황이었다. 그는 많은 샐러리맨의 애환을 상징하는 준비된 사직서끼고 섬으로 향한다. 흔들리는 페리.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게 하는 뱃멀미. 그리고 절세미인.

 


다스쿠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인물은 뱃멀미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물을 건네주던 루이루이 씨다. (이하 루이루이라고 하자)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가장 매력적인 케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인물이 바로 이 루이루이다. 남성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외적인 모습. 더불어 통통튀는 듯한 목소리와 상큼발랄한 이미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청순함과 상상력을 잃지 않은 독특한 매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작가로부터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은?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은 다스쿠가 외롭고 고독한 섬에 고오니가시마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주된 갈등 요소는 섬의 동서 분립이다. 작은 섬이 동과 서, 또는 서와 동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이어온 배척과 이질감으로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려 든다. 그러나 한가지 서로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가운데 일심동체?가 되어 바라는 목표가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섬의 발전을 바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작품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뭐랄까. 일본문화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부분이라 굳이 어색해 할 것은 없지만, 지극히 현대적 감각으로 쓰여진 이번 작품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전통적인 무녀의 존재를 들 수 있을 것도 같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 전달해주는 무녀의 역할은, 신과 인간의 중간지대에서 두 영역과 공간을 이어주는 중간자 입장이다. 그것이 전형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무녀의 역할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반면에 이번 작품에서 등장하는 무녀의 역할은 전형적인 것과는 달리 보다 더 현실적인 동시에 희극적이다.

미지의 세계인 드넓은 우주에 우주선을 띄우고 위성을 쏘아 올리는 우리 시대에, 전통을 이어가는 무녀의 역할이 그들만의 공간에서 얼마나 든든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들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결과물이 자못 다르기 때문이다. 또 받아들이는 주체 즉 누가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더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알게 된다. 아마도 섬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진지함으로 다가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소설은 갈라진 섬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몇몇 이들이 뭉쳐 지구방위군을 구성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이 유쾌하게 이어진다.

사정이 참 많아’. 누구에게나 말하지 못할 사정은 있는 법이라는 이 전제는, 바꿔 말하면 누구나 평범하고 또 누구나 살면서 다양한 문제로 힘들어한다는 표현으로 이해 가능하다. 루이루이가 늘 하던 이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라는 위로가 담긴 작가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연 많은 이들이 모여 섬의 화합을 이끌어내고, 다스쿠도 섬의 일원이 되어 푸른 고도의 꿈을 꿈꾸게 된다는 이번 소설은 희망을 담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도 그럴 것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은 언제나 희망적이지 않은가말이다. 물론 무엇이든지간에 경중의 문제는 있겠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기꺼이 즐기며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이지만 단숨에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책의 힘이 느껴진다. 책 속에 방탄 소년단의 노래가 소개되는 것도 내심 반가운 일이다. 내친김에 매직 숍뮤직비디오까지 찾아봤었던 것 같다.

문화란 이렇게 거대한 것이었던가. 문화의 힘이 세계를 넘어 세대를 넘어 깊이깊이 물들어간다는 것을 보는 일은, 내게는 벅찬 일인 동시에 그저 신기한 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순박함 그리고 독특한 개성을 잘 살린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소설 푸른 고도에서, 이제 감히 루이루이를 제외하고 가장 사랑하고 싶은 인물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그는 누구일까? 두 손에 꽃을 쥔 기분으로 주먹밥을 먹겠다고 하던 이 사람. 세월의 풍파도 얌전히 비껴갔던 것인지, 어린아이의 감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순수함을 발견하게 되는 이 사람. 나는 왜 이 인물에게 꽂혔을까. 그건 비밀이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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