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 2
( 책장파먹기9-2)
다빈치 코드 2번째 이야기다. 1권에 이어서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랭던과 소피 느뵈는 경찰에 쫒기며 도와줄 누군가를 찾아가게 되는데, 그는 바로 영국 여왕의 작위까지 받은 티빙 레이(경)라는 인물이었다.
랭던과 소피가 티빙과 만나 나누는 이야기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 중에서도 호기심을 불러들일만한 이야기들은 어쩌면 인간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책 이야기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아주 잠시만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볼까싶다. 질문 하나를 여기에 적는다. 예수를 따르던 12명의 제자 중에서 예수가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제자는 누구였을까? 새벽닭이 울긴 전에 3번 부인한다했던 소심한 겁쟁이의 베드로였을까?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였을까?
'예수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그런 차원의 사랑을 이어갔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만인에게 똑같은 사랑을 나누어주었던 신이었으니까' 라는 생각은 내 고집이다. 그렇긴한데 책이 지적한대로 해석하자면 기득권 층에 의해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종교관에 갇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 따위일지도 모를 일이다. 책에 대한 해석은 개인의 이해와 판단에 의해 달라질 일인 분명하다. 여기에서 언급해야 할 것은 기독교의 진실여부가 아닌, 소설과 작품으로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접근하는 부분이어야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어쩌자고 자꾸만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는지 개구쟁이 어린 아이의 반항심 같은 것일까.
딴 생각은 잠시 미루고 다시 책에 집중해보자. 티빙의 서재에서 그들은 성배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는 남자가 아닌 여자 그리고 다빈치에 의해 베드로의 시샘을 받아 칼로 위협까지 받는 듯한 인물로 소개한다. 그림은 최후의 만찬이었다. 소설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려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앉은 이가 바로 예수의 여자로 즉 막달라 마리아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어디 한두 명일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작가는 예수의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소설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로 표기한다)로 설정했을까. 소설은 가톨릭교회가 신이 아닌 인간 예수의 행적을 역사에서 지워가는 과정에서, 여성의 신성함 예수의 선택을 받은 존엄한 여성성을 왜곡하고 지워나가기 위해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를 격하시켰다는 설정으로 줄곧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흥미로운 설정이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꽤 좋은? 발상인 셈이다.
사람들은 이중적이어서. 아니다. 이중적이라기보다는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해야 될 것 같다. 이를테면 의혹을 갖고 진실을 알아가고자 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있는 그대로를 믿고 추종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서 보면 티빙과 같은 인물과 시온집단을 지켜내는 이들과의 대립과 같은 것이라고 할까.
소설에서 티빙과 랭던 그리고 소피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옮겨가며 성배의 진실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처음 랭던을 범인으로 생각했던 경관 파슈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알리는 인물. 그리고 알비노 청년. 또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로 늘 긴 장막 뒤에 숨어있는 듯한 스승이라는 존재. 반전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사건을 이끌었던 스승의 존재는 누구일까.
소설은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을 해결해가면서 개인의 신념과 불신 내지는 누군가 기억하는 역사와 종교 혹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역사와 종교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준 작품이다.
더불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뉴턴 같이 시온교회와 연결된 이들의 이야기까지 풍부한 소재와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진 작가의 준비과정의 노고가 보여지는 듯도 하다.
이제 남편과의 논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이중적 이미지를 지녔다. 시어머니가 처음 암 판정을 받으셨을 때 대신 중보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으며, 내가 첫 아이를 유산했을 때에는 내 옆에서 성경을 읽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그가 어떤 종교적 신념을 붙잡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나의 판단이 그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까닭으로 자리하게 했을 법하다.
또 한편으로는 소설은 소설일 뿐. 저마다의 종교적 신념은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을 올곧게 지탱해온 그 신념의 옳고 그름을 과연 어느 누가 판단 할 수 있을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