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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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 선택과 책임

 

 


 

책은 다 읽었는데 좀처럼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해서 글로 표현해낸다고도 하던데, 그런 일과는 거리가 먼 나로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각적인 것에 의지해야만 한다. 물론 그 감각이란 현학적이면서 찰나적이지만 딴은 지나칠정도로 지루하고 논리적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내겐 정해진 흐름이 없는 것 같다.

지금 머릿속에서는 과부하에 따른 부작용이 넘치고 넘친다. 어떤 흐름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는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이다. 여성이 등장한다. 여성의 이야기다. 어머니와 딸.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인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페미니즘에 국한되기보다는 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1960년대부터 40여년이 지난 시점까지. 한 여성 아니 두 여성. 아니다. 미안하다. 틀렸다. 다시 정리해보자. 소설은 주인공 조지와 그녀의 친구 부르주아 태생의 앤. 그리고 가출했다가 돌아온, 조지의 동생 솔랜지까지를 모두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크게 봤을 때 세 여성의 이야기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시대적 변화와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소설은 간단하지 않았다. 깊이 몰입해 들어갈수록 많은 것들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음을 느끼게 된다고 해야할까.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혼돈 속에 묶여 있다. 하나씩 그 갈래를 풀어갈 때마다 생각하고 번민하고 또 우리가 주지해야 할 그 무엇을 대면하게 되는 듯하다는 인상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앞에서 나는 앤을 소개할 때 부르주아라는 단어를 썼다. 이번 책이 왜 구태여 부르주아라든지 프롤레타리아라는 언어와 인식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가에 대한 이 지루한 의문은 책이 지니는 성향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인물에 대한 성향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두 가지를 다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아직 모르겠다.

대학에서 룸메이트로 만난 조지와 앤은 서로 다른 가정환경과 사회적 환경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시작부터 어쩔 수 없는 대립각을 사이에 둔 대치 상태에 놓이게 된다. 불행한 가정사를 상처로 끌어안은 조지와 달리 앤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앤에게 있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실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하고 싶은 치욕스러운 치부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그녀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부르주아의 개념은, 부끄럽고 창피하며, 비인간적인 것이라는 인식으로 가득했다. 차라리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랐더라면, 자신이 핍박받는 유색인종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자기만의 생각 속에서, 집착과 애착의 면모를 보이는 앤의 이미지는 그렇게 낯설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잠시만 쉬어가자. 잠시만. 그리고 잠깐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미국사회를 생각해보자. 미국이라는 단어 앞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론하는 일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기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를 표방해온 미국이란 나라에서조차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태동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는 것 또한 사실인 듯하다. 혹자는 이러한 급진 사상들이 인종차별에 따른 사회적 갈등의 문제로 뻗어나가, 전반적으로 사회 문제로 변형되었음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그리드 누네즈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시대적 사회적 배경으로 국한시켜 바라보는 게 합리적일 듯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반체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개념과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인물의 성향과 시대적 요소와의 갈등을 대비해 잘 보여주고 있는 작가만의 장치로 보면서 일절 넘어가는 게 좋아보인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할 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적 문제로만 들여다보기에는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의 모습이 무척이나 이채롭기 때문이다. 어떤 시각으로 작품을 평가할지에 대한 문제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 아닐까싶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을 옮겨적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함이란 무엇일까.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가는 게 일상이라는 틀 안에 넣어볼 수 있는 모습이란 말인가.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한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선택. 그 선택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들이 이어진다.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걸까. 어쩌면 말이다.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사회지만 개개인은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고민에 빠져든다는 설정을 해보자. 이때 뒤돌아보지 않으며 그대로 앞으로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지와 과거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한순간 자신이 포기했던 또 다른 참모습을 찾아간다는 선택지는,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개념 보다는 두 가지 다 공이 가치가 있는 선택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싶은 거다.

 


작품에서 보이는 사랑의 개념 결혼의 개념은 살짝 뒤로 밀어둔다. 작품을 보는 나의 관점은 혼란한 시기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개개인의 선택한 삶의 방향성에 집중되어 있다.

이쯤에서 드는 질문은 왜 제목이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인가 하는 것이겠다 싶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부류는 개개인이 선택한 다양한 삶과 그 맥락이 이어진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굳건한 가치와 신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 언젠가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부디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에게 결여된 건 삶의 잔혹성이나 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함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대처하는 메커니즘이었다.”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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