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되어 한 때 산삼처럼 구하기 힘든 책이었던 [불야성]..북홀릭의 정식 출간 소식에 기뻐했던 사람이 나 말고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은 이름 값이 헛되지 않을 정도의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악인 열전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독한 인간군으로 채워져 있는 비정한 암흑가의 혈투를 그린 내용이었죠. 작품의 어떤 장면에선 정면으로 응시 할 수 없어 실눈을 뜨고 바라볼 만큼 잔인하고 어떤 장면에선 파묻힐 정도의 관능을 선사했었습니다. 각오는 하고 읽었지만, 이 작품이 내게 들이민 충격은 컸습니다. 어쩌면 독자는 악의 현현이라 할 수 있는 책의 주인공들에 공감하기 힘들고, 금수와 같은 야비함에 개인적인 친연성도 찾기 힘들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엔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이 있지요. 모험이 거세한 범속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이질적인 세계를 엿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는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이렇게 자극적인 작품을 읽으면 다른 작품들은 놀랄 만큼 밋밋하고 진부해질 것 같아 걱정이 될 정도의 작품입니다. 작가가 주인공이 마초 스타일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일반 독자들처럼 공포와 위기 때 움츠러드는 스타일로 설정한 점이 감정이입을 통한 몰입감을 높여주었지요. 게다가 투박할 것이라 예상했던 문체도 오랫동안 다듬어왔던 단단한 문장력이어서 놀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작가가 이런 암흑가의 이야기가 치닫는 일반적인 결말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시종 냉정하고, 냉혹하게 마무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감정의 과장이나 미화 따윈 없다는 듯이.
(북홀릭에서 만든 [진혼가]의 표지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진데다가, 작품 또한 큰만족감을 줘서 순수한 팬심으로 <건널목>, <비에 젖은 거리>, <밤>이라는 키워드로 표지사진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국내표지와 거의 흡사하게 흉내내 본 것입니다.^^아아.. 흉내쟁이라고 비난하지 말아주시길..ㅋㅋ 표지가 너무 맘에 들어서..^^)
암흑가의 피비린내나는 배신과 암투로 가득찬 비정한 세계의 한 축도(縮圖)를 가감없이 날것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전작인 [불야성]보다 더 강하고 센 작품이라는 말이 저는 홍보를 위한 빈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에누리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불야성도 쉴새없이 정말 빨리 읽었는데, 이 작품도 끊임없이 페이지를 넘기며 읽었지요.
단 한순간도 지루한 부분이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넘어갑니다.
퇴로를 좀처럼 주지 않아서, 활로를 찾기위해 숨가쁘게 앞으로 내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전작에 비해 기법적 쇄신이나, 형식의 정형성을 탈피한 부분은 없었습니다만, 약간의 변화는 있었습니다. 바로 문체입니다.
통독하면서 떠오른 일차적인 소감은, 전작 [불야성]에서 하세 세이슈의 문체에는 다분히 문학적 수식을 머금고 있었고 또 그것을 작가가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진혼가]에는 그 부분을 완전히 소거해 버렸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 더 속도감이 붙습니다. 하세 세이슈가 의도적으로 -잠시도 독자가 다른 생각이 안들게 할 요량으로- 수식이나 직유는 거의 배제해 버린것 같습니다. 매우 속도감있는 건조한 문체를 추구했다고 할까요.
전반적으로 매우 잘 만들어진 암흑가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책에 활자화 되어 있는 내용 그대로 영상으로 만들기는 절대로 어려울 것입니다. 잔인함도 잔인함이지만, 성애 묘사도 거의 하드코어를 방불케합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면, 이 책을 읽기 전에 주의 하실 점은, 전작인 [불야성]을 먼저 읽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2편 격인 [진혼가]에 [불야성]의 결말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자주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충격이라 할 만큼 잔혹한 장면과 19금스러운 장면이 계속적으로 나오기에 이런 이야기에 잘 적응하기 힘드신 분들은 분명 당혹스러우실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이 말초신경을 자극을 통해 독자를 사로 잡으려는 작가의 은밀한 욕망과 손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작품이 정식 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사건이네요.
하세 세이슈의 암흑사회와 인간에게 잠재된 성충동에로의 경도와 침윤이 낳은 성과작이자 문제작임에 확실합니다.
진혼가는 전작 [불야성]의 주인공인 '류젠이'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새로운 두 주인공 킬러 '추성'과 전직 형사 '타키자와'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저는 하세 세이슈가 새로운 주인공을 등장시킬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류젠이'의 이야기는 이미 [불야성]에서 대부분 쏟아 내었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야기의 신선함을 유지하고 수급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3편격인 [장한가]에도 새로운 주인공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 않을까,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진혼가]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빼어난 필력을 보았을 때, [장한가]도 기대에 보답할 것 같습니다. 기다려지네요.
잔잔하고 무미건조하기 까지 한 일상이, 이런 와일드한 작품으로 순식간에 출렁이는 격랑의 바다로 이끌립니다. 분명 이런 책의 미덕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