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네스뵈의 <블러드 온 스노우>를 읽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펄프 소설 도전
작가들은 펄프 소설(갱지에 인쇄한 B급 통속소설)에 대한 향수가 있는 듯 하다. 스티븐 킹도 1973년을 시간배경으로 조이랜드(Joy Land)를 그런 회고적인 과거향수에 젖어 펄프 소설스러운 표지로 출간한 일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요 네스뵈다.
네스뵈는 펄프 작가군중에서도 [내 안에 살인마]같은 누아르 소설의 걸작을 쓴 '짐 톰슨'을 특히 좋아했으니, 이번에 독자들에게 보여준 과감한 시도에는 적잖게 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본작은 [오슬로 1970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단숨에 읽고난 소감은,-비유적으로- 펄프 소설의 값싼 재질의 펄프(pulp)보다는, 펄프잡지들이 나오던 당시(1900대초부터 1950년대까지)에 상대적으로 훨씬 비쌌던 슬릭(Slick)이나 글로시(Glossy)같은 광택이 많이나는 고급 종이에 인쇄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펄프 픽션을 표방했지만, 궁극적으로 일급 작가다운 아름다운 산문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세련된 작품이 나왔다고 할까. (새로운 시도를 위해서일까,영어 번역본은 해리홀레 시리즈를 늘 번역해주던 Don Bartlett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학을 연구한 Neil Smith가 맡았다. )



네스뵈의 창작 스타일 그리고 스노우맨을 떠오르게 만드는 분위기

요 네스뵈는 세부적으로 이야기의 계획을 짜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가야할 방향과 해야할 일을 정확히 알게되며,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글을 쓸 때는, 뭔가를 창조하고 있는게 아니다. 나는 그저 이미 그곳에 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내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해준다. 왜냐하면, 내가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지더라도 언제나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입장에 있게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앉아봐. 들려 줄 엄청난 이야기거리가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이번 작품도, 요 네스뵈는 비록 백열하는 상태에서 창조성을 분출하며 짧은 시간동안 작품을 완성했다고는 했지만, 이 이야기는 늘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는 그저 부유하던 이야기를 정돈하여 받아적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짧지만 완성도 높은 이 작품에 요 네스뵈의 팬들은 올라브가 코리나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렸듯이, 속절없이 매료되고 만다. 특히 배경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오슬로의 차디찬 겨울인지라, 어쩔수 없이 작가의 대표작인 [스노우맨]을 여러번 떠올리게 되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단란한 가족의 삶이 정원의 눈사람과 대조되었다. 결국 소년은 눈사람을 만드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거나, 약간의 물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아주 제대로 만든 눈사람이었다. 모자를 썼고,검은 돌로 된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으며, 나무 막대로 만든 팔은 이 부패한 세상과 거기서 일어나는 미친 짓을 모두 포용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p.166))
눈내리는 스칸디나비아의 차가운 겨울이라는 배경은, 이쪽 미스터리에 취향을 공고히 한 독자들이 은연중에 기대하게 되는 전형적인 분위기임에 틀림없다. 마치 아이스크림하면, 시원함을 기대하는 것이 자명하듯 말이다. 그 기대를 저버릴수 없다는 듯, 요 네스뵈는 눈내리는 노르웨이의 겨울 이미지를 마음껏 이용한다.

 

클리셰 그리고 올라브

해리 홀레라는 캐릭터의 일부는 배트맨의 영향을 받았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정의감, 결코 포기하지 않는 면, 특히 충동적이면에서) 요 네스뵈는 한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해리홀레'(Harry Hole)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 당시, 홀레의 일부는 '닐스 아르네 에겐(Nils Arne Eggen)'이라는 노르웨이의 괴짜 축구 코치에서, 일부는 프랭크 밀러가 창조한 배트맨(Batman)의 조합물이었음을 밝힌다.
(한 인터뷰에서 네스뵈는 가장 좋아하는 가공의 영웅으로 '배트맨'을, 가장 좋아하는 악당으로 '조커'를 꼽았다. 프랭크 밀러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
거기에 더하여 작품을 쓸 수록 작가 본인의 이미지가 주인공인 홀레에 투영되어 갔다. ('모든 작가는 자신에 대해 쓸수 밖에 없다는 헤닝 만켈의 말처럼, 이것은 피할수 없는 일.부지불식간에 작가는 해리 홀레에게 자전적인 요소를 심어넣게 되었다. 정확히는 해리 홀레 시리즈 세번째인 [레드브레스트]때부터.) 결국 해리 홀레는 Nils Arne Eggen이란 축구코치에 배트맨 그리고 요 네스뵈 자신을 뒤섞어 만든 인물인 셈이다.
작가가 줄기차게 해리 홀레를 주인공으로 10권의 책을 쓴 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 올라브(Olav)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전에 일관되게 유지하던 주파수와는 사뭇 이질적이다. 다시말하면 올라브는 해리 홀레와는 매우 다른 인물이다. 장 필립 투생의 말처럼, 쓴다는 것은 우주와의 만남. 작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우주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삶의 모질음, 삶의 전망없음으로 버무려진 고독한 킬러 올라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그를 통해서 응시하고 가닿고자 하는 어떤 장소에 다다를 수 있다.
(특히 그 아름답게 쓰인 종결부는 한동안 올라브의 녹아내리는 눈물처럼, 쉬 마르지 않고, 마음속을 계속해서 흘렀다.)


전형성의 극복과 스칸디나비아 범죄소설

그런데, 요 네스뵈는 이번에 '보스의 여자를 사랑하는 킬러'라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소재를 들고 나왔다. 클리셰로부터 벗어나려는게 보통의 작가들의 태도인데, 요 네스뵈는 정 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이 점은 해리 홀레라는 작가의 분신과 같은 캐릭터를 만들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알콜중독에, 여자를 좋아하고, 시니컬하면서 로맨틱한 인물인 해리 홀레. 작가는 이 모든 특징이 중년의 남자 형사에게 있어서 지독하게 상투적인 특징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이 때 그는 자신의 역할 모델이었던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말을 떠올린다. "상투성을 껴안고, 그것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렇게 상투성을 넘어서서 탄생한 캐릭터가 바로 우리가 열광하는 해리 홀레다.
본작 [블러드 온 스노우] 역시, 전혀 새롭지 않은 소재에서 출발하지만, 전형성과 진부함을 극복하고, 미적 긴장감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펄프픽션을 표방한 범죄소설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왔지만, 우리가 흔히 규정하는 장르의 전형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그 경계를 지운다. 그저 단순히 오락거리로 읽는 평면적인 책 (이런 책은 깊이가 없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에서, 당대의 상황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개인 실존에 관한 삶의 숨겨진 비밀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입체적인 책으로 육박하며 다가온다.
이에 관련하여 요 네스뵈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칸디나비아 산(産) 범죄소설 (crime fiction)은 다른 나라의 범죄 소설보다 약간은 독자들에게 도전의식을 북돋아준다. 스칸디나비아에서만들어진 책 표지에 "범죄 소설"이란 딱지를 보게된다면, 그것은 '펄프 픽션' (싸구려 통속소설)과 동의어는 아니다. 물론 펄프 픽션이면서, 가벼운 읽을 거리일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사람(entertainer)으로 보고 있지만, 하지만 오락거리(entertainment)가 꼭 가벼운 오락거리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내가 만든 오락물을 꽤 진지하게 여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것이 스칸디나비아 범죄 소설가를 타국의 범죄소설가 사이에 차별성이 존재하는 지점이다. 그들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이러한 권한을 갖는다. 모든 책들이 작가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간에 정치적이다."

 

블러드 온 스노우 & 레미제라블

혹자는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이야기하는 난독증을 갖고 있는 청부킬러 올라브가 독자들을 노르웨이 범죄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인도했다라고 말하면서 요 네스뵈가 썼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어둡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 혹자는, 올라브의 가슴 찢어지도록 애절하게 망가진 영혼을 통해, 그 주름진 영혼을 통해 새어나온 슬픔과 도달할 길 없는 속죄에 대한 희구가 이 책 [블러드 온 스노우]가 갖는 매혹의 발원지점이라고 보기도 한다. 거기에 요 네스뵈는 70년대 오슬로의 어두운 분위기와 빙하기를 방불케하는 차가운 노르웨이의 겨울 이미지를 실로 솜씨있고 요령있게 뒤섞으면서, 이 작품을 살인과 사랑에 관해 잊기힘든 서글픈 동화의 층위로까지 끌어올린다.
이 작품에서 반복등장하는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가 살짝 감추고 있는 이 이야기 전체의 맨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집에 책은 딱 한 권 뿐인데요?"
"도서관에서 빌려 봐요. 책은 자리를 차지하니까. 게다가 난 짐을 줄이는 중이라서요."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레미제라블? 무슨 내용이에요?"
"아주 많은 것에 대한 이야기죠."
그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가장 큰 줄거리는 한 남자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과거를 보상하며 여생을 보내죠."
"흠, " 그녀는 책을 들어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꽤 무겁네요. 이안에 로맨스도 있나요?"
"네."
(p.57)

 

밀도를 높인 군더더기 없는 작품

 

기가 질릴정도로 두꺼웠던 전작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단어들만을 사용하여 군살없는 작품을 만들었다. 마치 무너진 탄광에 갇힌 광부가 남은 공기가 얼마남지 않아, 숨을 아끼듯 작가는 최대한 단어 수를 줄이고 하고 싶은 말을 아꼈다. 작가는 작심한 듯이, 낭비한 문장이 없이, 필요한 말들만 배열하여 밀도와 순도를 높였다.
그러나 독자를 향해 깜짝 놀랄만큼 강력한 감정적 펀치를 날린다. 묵직하고 둔중한 펀치다. 휘청, 그렇다. 휘청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책장을 덮어도, 잠시동안 세계의 공기가 진동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 눈송이가 솜털처럼 춤을 췄다. 정처 없이, 위로 올라가야 할지 아래로 떨어져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그저 몸서리치게 차가운 칼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p.5)
'마치 그의 몸에 얇은 얼음 살갗이 돋아나고, 그 아래로 얇고 푸른 정맥이 생겨난 것 같았다. 피를 흠뻑 빨아들인 눈사람처럼.'(p.196)
'그녀는 봉투가 떨어졌던 자리를 보았다. 눈과 피를 보았다. 희디흰 눈. 붉디붉은 피.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왕의 망토처럼. '(p.197)

보다시피 시처럼 아찔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산문이다. 이것은 마치 노래 가사 같다. 요 네스뵈가 작가생활을 하기 이전에 밴드 생활을 하며, 자신의 노래에 작사를 하던 음유 시인이었음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되는 대목이다.
어떤 장면에선 감정적으로 무뎌져 굳게 닫혀 있던 문(門)조차 어찌할 바 모를 정도의 짙은 슬픈 방향으로 밀어젖힌다. 누군가가 감정적으로 들썩거리고 있는 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고 토닥거려 주었으면 하는 느낌을 한동안 받았다. 이것은 스릴러이기 이전에 이것은 우아하고 솜씨좋게 세공된 사랑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여지껏 읽었던 요 네스뵈가 쓴 어떤 글보다도 슬픈 발라드같다는 생각. 비록 겉모습은 몸속의 신경다발을 쥐고 흔드는 흥미진진한 스릴러이지만, -그 장르의 이름을 한꺼풀 벗겨내고 바라보면-어떤 장면에선 작가가 육성으로 들려 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한 듯 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작가에 의해 씌어진 말은 길지 않지만, 책을 읽은 후, 독자에 의해 씌어질 말이 길어지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쓰고, 독자는 책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읽는다. 작품의 중간중간 복원되는 올라브의 과거와 유년의 기억은 상처를 헤집으며 주인공 내면에 펼쳐진 폐허의 풍경을 보여준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기억의 방울들이 밤송이처럼 아프게 쏟아진다.
"불신보다 더한 외로움이 어디 있을까?" ..이 책 어딘가에 나온 조지 엘리엇이 말한 이 문장은 먼 훗날 온 힘을 다해 이 책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그리워질 문장일 듯 싶다. 불우했던 과거를 가진 올라브였던 도피처이자 구원의 희망이었던 코리나는 쓸모없어진 파리행 비행기표처럼, 올라브 삶에서 돌연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는 올라브. (거리는 형태와 방향이 사라지고 사자갈기 해파리의 촉수가 되어 부드럽게 흔들렸기 때문에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계속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아무것도 그대로 남아 있으려고 하지 않는 이 고무 도시에서는 내가 어딘지 알기 힘들었다. p.180)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던 버팀목에 대한 배신이 한 남자를 진한 외로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장면에 마음이 안타까웠다.삶이 올라브를 조롱하고 내동댕이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이 특히 중요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올라브가 현실로부터 도망치며 도모하려 했던 구원(여기서는 코리나와의 행복)이 '사이비 구원' 혹은 '유사 행복'이었던 것 뿐이라는 축축하고도 씁쓸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초반과 중반에 코리나 호프만에 대한 묘사를 보자. '팔과 얼굴, 가슴, 다리의 희디흰 살결, 맙소사, 마치 햇빛에 반짝이는 눈(雪) 같았다. 보는 사람의 눈(目)을 몇 시간 동안 멀게 만들 정도로 반짝이는 눈(雪).(p.28)'에 비유하며, 설맹(雪盲)이 되어버린 올라브와 희디흰 코리나를 구원의 대상처럼 작가가 설정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마치 달빛을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p.85)'
'내 아래에서 그녀의 가슴이 하얗게, 새하얗게 빛났다."(p.107)
어둠을 밝혀줄 구원의 달빛이라 여겼던 코리나의 본연의 모습은 들춰진 잔인한 현실이었고, 주인공은 돌연 자신의 희망을 의심하며 가장 고독한 세계로 등떠밀리게 된다.
그 압도적인 행/불행의 색깔대비가 흰 눈위에 떨어진 붉은 색의 피만큼이나 분명하다.

제목의 상징성, 그리고 코리나

제목의 상징성을 색채적으로 풀어보면, 피의 적색과 눈의 흰색의 대비.
적색은 피, 상처, 죽음의 고통, 희생, 사랑, 승화와 관련되고, 흰색은 용서와 순수,천국, 영원의 세계를 의미한다.
킬러인 올라브는 피와 죽음, 고통의 상징적 존재에서 사랑과 희생을 통해, 용서와 구원을 받고자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환상을 대하는 냉혹한 현실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올라브의 구원에 대한 헛된 희망을 작가는 무너져 내리는 눈(용서와 구원)에 비유한다.

'내린 지 얼마 안 된 눈에 양 손바닥이 따가웠다. 양손을 움직여 보슬보슬한 눈을 긁어모았다. 하지만 보슬보슬한 눈으로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순백색이고 아름답지만 그걸로 뭔가 오래가는 걸 만들기는 힘들다. 뭐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뭘 만들든 결국에는 무너진다. 손가락 사이로 무너져버린다.(p.183)'

코리나는 곧 무너져내릴 아슬아슬한 현실 세계의 찰라로 존재하는 유사(거짓)행복일 뿐이다. 그것으로 영혼을 감싸안을 수는 없다.

요 네스뵈가 독자들에게 전언하는 비극적 세계인식은 후반부에 독자들의 마음을 몽땅비처럼 닳게 만든다. 작가가 주인공을 난독증 겪고 있는 인물로 상정한 것은, 열매맺음에 실패한 불모의 사랑을 통해 세상 읽기에 실패한 한 고독한 사내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일 듯 싶다. (내겐 더이상 저들이, 일반인들이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저 음파, 산호초에 부딪혀 사라져버리는 저 음파를 해석할 도구가 없었다. 나는 뜻이 통하지 않는 세상, 일관성 없는 세상을 내다보았다. p.179)

"하지만 글자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읽을 수가 있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가끔씩 잘못 보죠. 그래서 다시 봐야 해요." 나는 눈을 떴다. 그녀의 손은 아직 내 팔에 있었다.
"하지만...잘못...잘못 봤다는 걸 어떻게 알죠?"
"대개는 말이 안 되는 단어들을 보고 알아요. 하지만 가끔씩 한 참 후에야 단어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죠. 그래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알 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책 한 권 값으로 두 개의 이야기를 읽는 셈이죠."
그녀가 웃었다. 큰 소리로 꺄르르. 옅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누군가에게 내가 난독증이라고 말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그에 관해 계속 물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p.81)
어떻게 생각하면, 코리나라는 존재가 잘못 인식한 단어같은 존재. 한참뒤에야 올라브는 그녀를 완전히 잘못 읽었다는 걸 깨닫는다.결국 코리나는 그가 화해의 리듬을 이루고 싶은 '세상'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헛된 욕망.
세상에 대한 오독(誤讀). 세상과의 불협화음을 겪고 있는 올라브는 자신이 원하는 시선으로 세상을 읽고 싶어한다. 이것이 영민한 작가가 주인공을 난독증을 갖고 있게 설정한 또다른 이유일 터이다. 자신이 내키는대로 세상을 읽는 것. 그것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어내고픈 바램에 다름아니다.
"더는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없어요.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지어낼 순 없을 거에요." (p.192)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지어낼 순 없다."...
이 아름다운 책에서 단 한 문장의 문장만 허락된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과거의 적나라한 무서운 기억들로 점철된 나쁜 스토리 안에서 살고 있던 남자가 그 기억들과의 만남을 유보하고, 다시 쓰고자했던 이야기.
"죽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엄마, 난 그냥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어요.(p,142)"
잔인하게도 작가는 올라브가 갖고 싶었던 최소한의 온기를 느낄수 있는 아랫목같은 세상을 독자가 살짝 엿보게 해준다. 그 이룰 수 없는 따스한 이야기를 읽고 난 독자는, '나'와 '등장인물' 간의 거리두기를 지우고, 기적적으로 책이라는 공간 속에서 주인공과 내가 어떤 느낌 안에서 함께 만나는 짧지만 소중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마리아 미리엘

올라브가 더 낫게 고쳐 쓰고자했던 바로 이 대목.
줄기차게 작품 내에서 울림을 갖는 레미제라블의 이야기.
"장 발장은 프랑스 전체에 수배령이 내려진 악명 높은 살인자다. 그리고 가여운 매춘부 팡틴을 사랑했다.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기꺼이 했다. 그가 한 일은 모두 다 그녀를 위해, 그녀를 향한 사랑, 광기,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기의 부도덕한 영혼을 구원하거나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아름다움에 굴복했을 뿐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치아도 머리카락도 없이 망가지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 매춘부의 아름다움에 굴복하고 순종한 것이다. 아무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 못한 여인에게서 그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랬기에 그 아름다움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아름다움의 것이었다." (p.142)

그런데 이 이미지와 후반부에 매춘부 출신의 마리아 미리엘에 대한 묘사가 절묘하게 포개진다.

"슈퍼마켓 계산대에 앉아있고, 그가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여자, 왜냐하면 그는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불완전하고, 결함과 하자가 있고, 늘 스스로를 희생하고,사랑의 한심한 노예가 되고, 그저 다른 사람의 입술을 읽을 뿐 결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모르고 스스로를 누군가에게 굴복시키고 거기서 보상을 얻는 여자.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가 원치 않았던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그 자신의 굴욕이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최고의 인간이자 가장 아름다움운 피조물이었다. (p. 191)

결국 올라브에게 있어서 마리아 미리엘은 자신을 되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악몽의 산실인 과거의 기억에 매몰된 출구없는 존재. 폭력과 절망적인 삶의 구덩이에서 허덕이는 존재.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추레한 모습. 올라브는 마리아인 동시에 올라브가 어릴 때 오슬로 공공도서관에서 빌린 [동물의 왕국]이란 책에 나오는 비쩍마른 상처입은 하이에나같은 존재라고도 할수 있다. 이형 동질체같은 것. 부정하고픈 진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올라브는 그런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존재"라고 말하기도 하고, 팡틴에게 빗대어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찾아냈다"고도 말한다.
마리엘은 올라브의 보듬어야할 상처이자 응시해야할 자아였던 것이다. 결국 작품 내에서 팜므파탈임으로 확인된 코리나는 구원의 영토가 아닌 거짓 희망이었다. 따라서 관속에 들어가는(후반부에 올라브가 장례식장의 관속에 숨어있는 장면을 상기할것) 유사 죽음으로는 악몽속에서 구원의 출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상처를 비껴가려는 행위이므로 진정성이 획득되지 않는다. 코리나가 나타나기 전에 마리에 미리엘은 이미 있었다. 올라브의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그녀. 그것은 그녀가 올라브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자신과의 불화와 화해하고, 집요하게 상처를 응시하는 것, 그리고 그안에서 의미를 찾는것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자기구원에 이르는 일임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과 속죄는 올라브가 피를 흠뻑 빨아들인 눈사람처럼, 가게 앞에서 마리아가 앉게 될 자리를 응시하다 생의 맨홀을 닫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대부분의 구원이 그러하듯, 희생에 의해서. 그의 상처입은 영혼을 가두던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벽에 부딪칠 때 울리는 소리를 듣고 벽 뒤에 또 다른 방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 희망이 반짝 생겨난다.

우리를 조금씩 갉아먹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끔찍한 희망.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죽음에 의미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리라는 희망.(p.30)

벽 뒤에 또 다른 방이 있다고 믿으며, 반짝 빛나는 희망을 꼭 쥐고 있던 이 고독한 남자의 소원은 이루어졌는가.

[블러드 온 스노우] 읽기는, 결국 이 남자가 도망치려했던 현실과, 지름길 찾기에 대한 실패를 묵묵히 들여다 보는 일에 다름아니다.

종결부의 숨막히는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의 감수성은 참을수 없을만큼 예민해진다.

책을 덮은 후에도 한 동안 우리 주변에 이 외로운 남자의 긴 그림자가 서성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모험 그리고 기대

몇 몇 독자들은 이 작품이 너무 짧다고 불평하지만, 개인적으로 [블러드 온 스노우]는 이 정도의 길이(중편 소설)가 더 어울리는 작품이었다고 본다. 기존에 쓰던 장편소설보다 이야기의 주제와 더 부합되는(더 몸에 잘 맞는) 장르를 작가는 개척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짧은 시간동안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독자 사이에 교감과 몰입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읽어본 사람만이 안다. 견고한 장르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어떤 부분을 일그러뜨리며 지루한 되풀이를 피했다. 참신성은 그 맥락에서 태어 났다.
작가의 새로운 모험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에 기존 틀을 지우고, 다른 방향성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스릴러가 아닌 다른 장르도 도전하고 싶은 작가적 욕심을 드러냈다.
요 네스뵈에 따르면,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총에 관한 이야기인 [The Gun]이란 소설을 구상중이라고 한다. 톨스토이풍의 대하 역사소설. 독자들은 총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총. 이걸 통해 작가는 폭력의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것은 요네스뵈가 최초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머리 속에 맴돌던 이야기였다고 한다. 독자에게 꼭 쓰고 싶다고 약속했으니 언젠가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기대된다.

 


조만간 번역되어 나올 [미드나잇 선] 오슬로 1970 시리즈 두번째 작품이다.

 

[블러드 스노우]와 요 네스뵈 작가의 해리홀레 시리즈 & 또다른 스탠드얼론인 [아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와후와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비채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후와후와'는 구름이 가볍게 둥실 떠 있는 모습이라든지, 소파가 푹신하게 부풀어 있는 모습이라든지, 커튼이 살랑이는 모습이라든지, 고양이털처럼 보드랍고 가벼운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라고 책의 맨 앞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출판사 측은 푹신푹신한 느낌을 주려고 쿠션감이 느껴지는 하드커버 재질로 책 표지를 제작했습니다. (이점은 일본어 원서와도 차별성을 둔듯 합니다. 대단!)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릴적 길렀다는 집 고양이 '단쓰'와의 추억을 시적인 언어로 아름답게 써 나간 '후와 후와'.

이 작품을 위해 지인의 고양이가 저의 집을 친히 방문하여 촬영에 임해주었습니다.


고양이의 이름은 '아치'...

고양이 종은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걸 감안하면, 묘한 우연입니다.

'아치'의 주인은 아치가 너무 푹신푹신해서 자주 안아준다고 하는데, [후와후와]라는 제목이 연상되는 대목이네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수많은 삽화를 그렸던 '안자이 미즈마루' (1942-2014).

하루키가 '이 세상에서 마음을 허락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라고 고백했을 정도로 개인적으로도 친했다고 하네요.

안자이 미즈마루씨의 본명이 '와타나베 노보루'라는데, 하루키의 팬들이라면 너무도 친숙한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루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와타나베 노보루' ;와타나베'란 이름은 바로 안자이 미즈마루씨의 본명이었던거죠. 그정도로 하루키가 애정을 품었던 친구였네요.)

이제 안자이 미즈마루씨가 고인이 되어, [후와후와]는 이 세상에 유일작으로 남은 '무라카미 하루키 & 안자이 미즈마루 콤비'가 만든 그림책이 되었습니다. 

 

미즈마루씨는 이 그림책을 제작할 당시, 일러스트레이트를 의뢰받고, 매일 매일 '푹신푹신'에 대해서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푹신푹신한 질감의 느낌을 더 잘 살리기 위해서 미즈마루씨는 고양이의 몸 전체를 그리기 보다는 부분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림책을 넘겨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고양이의 꼬리나, 등, 얼굴 일부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푹신푹신한 느낌을 더 살리기 위해 철저하게 그림에서  (고양이는 물론이고, 다른 사물조차도) 그림자는 배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고양이 몸의 일부만 사진에 등장시켜 푹신한 느낌을 강조했답니다.

 

'매력적인 그림이란 그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역시 그 사람밖에 그릴 수 없는 그림이 아닐까요. 그런 걸 그려가고 싶습니다.' 안자이 미즈마루씨가 한 말입니다.

이 그림책을 보면 이 말이 전적으로 이해됩니다. 처음엔, 이렇게 대충 그렸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볼수록 매력이 있는 미즈마루씨만의 그림입니다. ('뭔가를 깊이 생각해서 쓰고, 그리는 걸 성격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미즈마루씨의 철학이 그대로 베어있는 그림들입니다.)

 

 

  

'가르릉거리는 고양이 소리 듣는 걸 좋아한다. 가르릉가르릉 소리는 마치 멀리서 다가오는 악대처럼 점점 커진다. 조금씩 조금씩. 고양이 몸에 귀를 바싹 갖다대면, 소리는 이제 여름 끝자락의 해명처럼 쿠루룽쿠루룽하고 커다래진다. 고양이의 보드라운 배가 호흡에 맞춰 볼록해졌다가 꺼진다. 또 볼록해졌다가 꺼진다. 마치 갓 태어난 지구처럼.'..이라고 [후와후와]에서 하루키는 쓰고 있습니다.

촬영 내내 저도 고양이의 가르릉 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양이와 방에서 촬영하면서 (이 책에 나와있는 하루키의 표현을 빌자면), 세상에 우리밖에 없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하루키가 여섯살인가 일곱 살 무렵에 '단쓰'라는 고양이를 기억하고 이 책을 썼듯이, 저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이 책을 위해 흔쾌히(?) 모델이 되어주었던 '아치'를 기억하겠지요. 가르릉거리는 소리와  따스한 온기를 품은 푹신푹신 솜털같은 고양이 털이 제일 먼저 떠오를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스런 책 [후와 후와]도!

 

후와 후와는 무라카미 하루키, 안자이 미즈마루 콤비의 유일무이한 그림책으로 따스한 하루키의 시적인 에세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팬들이 손꼽아 기다려온 작품

 

2012년 이래로 [스노우맨], [레오파드], [레드브레스트]같은  요 네스뵈(Jo Nesbo)의 걸작들이 국내에 소개되고, 한국 독자들의 책장 한켠을 차지 한지 불과 2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이제 요 네스뵈가 현존하는 스칸디나비아 크라임 소설의 대표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칸디나비아 느와르의 대표'...그동안 공개된 일급 작품들을 고려할 때 그에 걸맞는 합당한 자리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책을 펼쳐든 독자들은 일독 한 후, 자신들도 모르게 깨닫고 만다.

자신들이 읽고 싶던 책은 원래 이런 책이었다고...

(이런 상황은 미국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Knopf 출판사는 (2011년기준) [스노우맨]의 경우 하드커버 1쇄를 6만부, [레오파드]는 6만 5천부, 그 다음 작품인 [팬텀]은 7만 5천부로 꾸준히 늘리면서, 요 네스뵈에 대한 판돈을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다. 번역된 외국어 소설에 대한 거부감으로 잘 알려진 미국에서 조차 그의 작품은 굉장한 호응을 얻고 있다. 이제 요 네스뵈는 '스티그 라르손'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획득했다. 요 네스뵈의 책은 그가 오스트레일라 여행 후 [박쥐]를 쓴 이래로, (2012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4천만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그리고 평균 600페이지 이상을 넘어가는 그의 두툼한 책들이 끔찍하리만치 짧다는 느낌을 받았던 사람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책에 머리를 쳐박고 몇 시간을 몇 분처럼 흘려보내는 마법에 걸린 것만 같았던 시간.

'주의!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갑니다.'

이 말은 요 네스뵈를 읽는 독자라면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는 주의사항일 것이다.

 

안달이 난 독자들은 한 마음으로  요 네스뵈의 다른 책이 국내에 나오기만을 학수고대 했다.

그 기대와 염원에 대한 화답으로 마침내, 2014년 작가의 방한에 맞춰 기념비적인 데뷔작[박쥐]와 스릴러적 재능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걸작 [네메시스]가 공개되었다.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고, 기다렸던 작품이 두 권이나 출간되다니..어쩐지 인생이 한 뼘쯤은 행복해진 기분이었다. 작가와의 만남을 기뻐해야할 지, 그의 새로운 책과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해야 할지, 독자들은 그야 말로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이미 단단했던 독자층이 좀 더 결집되는 것은 물론이고, 소구 계층의 확대와 발굴이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게 되었다.

 

 

 

요 네스뵈의 에이전트인 Niclas Salomonsson은 자신의 중간이름(middle name)을 작품의 주인공인 해리 홀레(Harry Hole)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에릭(Erik)에서 해리(Harry)로 바꿨다는데,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이름에도 미들네임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사람을 나는 여럿 알고 있다. 간명하게 말하면 해리 홀레라는 주인공이 주는 매력에 저항하기란 어렵다는 이야기.

 

 

 

압도적인 도입부와 오슬로 그리고 소르겐프리

 

이 작품은 세 가지 큰 사건의 강줄기가 지나가면서 퇴적시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삼각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세가지는 오슬로에서 연달아 발생하는 은행 강도 사건, 해리 홀레의 전 여자친구 '안나 베트센'와 연관된 사건, 전 편[레드브레스트]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해리 홀레의 동료 '엘렌'과 관련된 사건이다. (이렇게 이 정도로 두루뭉수리하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아직 이 작품과 전작 [레드브레스트]를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스포일러를 극도로 자제하기 위함이다. 스포일러. 이제는 예의없음을 벗어난 하나의 범죄행위. 그런데 이런 스릴러의 속성상, 약간의 스포일러 없이 줄거리를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가위 바위 보를 하지 않고는 묵찌빠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딜레마.  민감한 독자들은 'OO의 죽음'이라는 줄거리조차 읽고 싶은 기분을 망칠 수 있다.시시콜콜한 세부사항을 알려주는 리뷰어들을 보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나는 그런 장면을 목도할 때마다, 공항의 마약 탐지견처럼 상상속의 스포일러 탐지견이  스포일러를 작렬한 그 글 앞에서 미친듯이 흥분하여 컹컹 짓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 

다만 작품의 초반부에 노르데아 은행 안에서 복면 은행강도와 은행원 '스티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은 -극도로 스포일러에 예민한 독자들에겐 미세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꽤나 압도적인 오프닝 장면이었다는 ​점은 밝히고 싶다. 요 네스뵈에 따르면, 이 장면이 [네메시스]라는 작품의 나머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열쇠가 되는 부분이며, 이 초반 10 페이지를 위해서 (작가생활을 통틀어 처음으로) 꽤 오랜시간을 정성들여 계획을 짜고 품을 들였다고 한다.

 

오랜 공을 들여 쓴 덕분일까, 이 부분의 문장들은 마치 숫돌로 막 갈아서 잘드는 칼날 같다. 신선한 쇠냄새가 날 정도. 독자는 노르데아 은행에서 복면강도의 총구 앞에 선 '스티네'가 느꼈을 감정과 맞닥뜨리게 된다. 25초안에 돈을 꺼내 담는 것을 끝내지 않은면, 스티네의 생명이 위험하다. 짹깍, 짹깍..스티네는 어떻게 될 것인가.

 좋은 칼 하나라든가 예쁜 그릇 같은 것이 살림에 관심많은 여자를 기쁘게 하듯, 이런 잘 만들어진 장면 하나만 있어도 우리 같은 스릴러 독자들은 기쁘다. 작가는 은행강도 씬을 위해 작품을 쓰기 전 은행강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 사실성을 높였다.

 

오슬로. 작품의 주된 배경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익숙한 지리적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야기를 구축해나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친밀한 지역이지만, 작가는 자전거를 타고 건물과 거리 사진을 찍으며, 몇번이고 작품의 배경이 된 주변을 돌며 정확성을 더했다고 한다. '쇠르세달스바이엔 가에 있는 경찰서가 제일 가까워. 통행료 징수소 지나면 바로 나오는데 은행에서 고작 800미터 거리지. 그런데도 경보기가 작동한 순간부터 은행에 도착할 때까지 3분 넘게 걸렸어.(p.41)" 라고 요 네스뵈가 묘사했다면, 실제로도 그런 것이다. 나는 책의 앞에 프린트 되어 있는 오슬로 중심부 지도를 살펴보며, 자전거를 타고 소르겐프리 가와 인두스트리 가를 돌며 꼼꼼하게 메모를 하는 작가를 상상했다.

 

 "소르겐프리는 크리스토프 왕의 소유였던 궁전 이름이라네. 아이티의 왕이었는데 프랑스 군의 포로로 잡혔을 때 자살했지. 소르겐프리 성은 상 수시 성이라고도 블렸는데, 둘 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다는 뜻이야. 그러니 소르겐프리 가는 만사 태평한 거리라는 뜻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크리스토프 왕은 신에게 복수한답시고 하늘에 대포를 쐈잖나. 작가인 올라 바우에르가 이 거리에 대해 했던 말도 들어봤지? '소르겐프리가로 이사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p.129)"

 

[네메시스]의 원제가 [소르겐프리]임을 상기할 때, 이 구절을 읽은 나는 요 네스뵈가 어쩌면 이 대목을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문장 속에 이 소설의 요체라 할 수 있는 핵심 어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곳에 모여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만사 태평'이라는 말은 상당히 반어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는 자신의 전담 영문 번역가인 돈 바틀렛의 번역이 훌륭하지만, 언어란 복잡한 것이기에 노르웨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면서 사라지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이 작품에서 심어놓은 '유머'라며 아쉬워한 적이 있는데, 혹시 이런 제목도 익살적으로 들리도록 의도 된 것은 아닐지.

이것과 관련하여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소르겐프리]로 짓는 바람에 발생한 에피소드는 인상적이다.

우리나라도 사정이 비슷하지만, 영국에서 번역되는 책들은 문화를 고려하여 영미권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대체로 새로운 제목을 갖게 된다. 빈티지(Vintage) UK 출판사의 편집장인 Briony Everroad는 Jo Nesbo의 "네메시스" (원작의 제목은 [Sorgenfri (근심없이, 슬픔없이라는 뜻)])를  가장 힘들었던 제목짓기 작품으로 꼽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소르겐프리 거리(Sorgenfri).."근심 없이(Without a Care)"가 도무지 영어권 책 제목다운 느낌이 살지 않아서 "Easy Street (편안한 거리)"라고 좀 더 부르더운 제목으로 바꿔 보았지만, 스릴러 제목으로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 [네메시스] 출간 당시는 영국의 독자들에게 요 네스뵈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던 시절이라, 독자들에게 '범죄의 냄새가 풍기는 메세지'를 줘야만 했기에 이 책은 몇 개월 동안 [하우스 오브 페인(House of Pain)]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우스 오브 페인'은 이 작품 속에서 강도수사과에 배정된 방으로 감시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연구, 편집, 복사하는 곳이다 )

최종적인 제목으로 채택된 [네메시스]는 작품과 꽤 잘어울렸다고. 요 네스뵈의 전담 번역가인 돈 바틀릿(Don Bartlet)과 편집장이 오랫동안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민한 보람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제목이 주는 이미지가 전혀 무섭지 않고, Walking in the Air란 곡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과 동명 타이틀인 [스노우맨] 역시 선택하는데 애를 먹었다는 후문.

 

 

 

 

 

노르웨이의 오슬로... 말하자면, 서구 독자들이 좋아하는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덴마크, 스웨덴, 아이슬랜드를 일컫는 말)' 본토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지역이 밤이 며칠간 지속될 수 있고,시체를 숨길 수 있는 고독한 장소가 많다는 이유로 살인하기에 완벽한 장소라는 편견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회색빛 우울함이  도시 전체에 착색되어 있고 뼈의 심지까지 파고 드는 추위...이런 요소는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스칸디나비아 스릴러에서 장소 자체가 또 다른 등장 인물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요 네스뵈는 초기 오슬로 3부작 ([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데블즈스타])와 [스노우맨]등이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실, 초기작품 [박쥐]와 [바퀴벌레]의 경우 시드니와 방콕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작가는 오슬로를 작품에 전혀 이용하지 않았었다. 일부러 자신의 도시 오슬로와 거리 두기를 한 느낌까지 있다. 오슬로가 작품의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네메시스]였고, 그 정점은 그 다음 작품인 [데블즈스타]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오슬로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오슬로는 유럽의 외곽같은 느낌의 도시지만, 마약과 관련된 범죄가 많이 일어나며, 그것이 범죄 소설에는 꽤 잘 들어맞는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오슬로라는 도시의 생생한 디테일이 작품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데블즈스타]는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네메시스]에는 노르웨이 뿐 아니라, 브라질도 배경으로 짧게 등장하는데, 이 곳도 작가의 경험에 기인한다. 17살이 되고 나서야, 해외 여행을 하게 된 네스뵈가 떠올린 가장 좋았던 해외 여행은 바로 젊은 시절 갔었던 브라질 여행이었다고. (지금은 흔한) 여행가이드책도 없이, 오로지 지도에 의지하여 다녀왔다고 한다.

 

 

(요 네스뵈는 내부의 적에 대한 영감을 '내안의 살인마'로 부터 얻었다)

 

본격 스릴러에 다가선 작품- 탄탄한 플롯과 뜻밖의 진실

 

잘 알려지다시피, 오슬로 3부작은 경찰 내부의 적(敵)과 '엘렌'사건의 내막을 파헤치는 것이 큰 줄기를 이루는데, 최종적인 해결은 다음 권인 [데블즈 스타]에서 이루어질 듯 싶다. 경찰 내부에 괴물이나 정신병적인 악당이 등장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네스뵈는 '내부의 적은 외부의 분명한 적보다 더 무섭다. 나는 짐 톰슨과 그의 작품 [내 안의 살인마(Killer inside me)]의 팬이다. '내 안의 살인마'는 다소 싸구려 느낌이 나는 제목이지만, 뭔가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내게 자신 뒤에 숨은 내 안의 살인마'라는 개념이 두려웠다. 나는 사회 안에 다른 사회를 갖고 있는 밀폐된 환경에 대해 쓰는 것도 좋아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공교롭게도 [네메시스]에는 '짐톰슨'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짐 톰슨의 책을 읽어보려고 했으나 23페이지에서 38페이지까지 찢겨나가고 없었다." ([네메시스]p.159) 작가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전까진 짐 톰슨(Jim Thompson)과 로렌스 블록(Lawrence Block) 두 명을 제외하곤 범죄 소설가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 3편 격인 [레드브레스트]는 봉인해 버리고 싶었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웨이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춘 작품이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시점과 현재 시점을 오가며 작품이 전개되는 큰 얼개의 작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읽어도 흥미롭고, 스릴러적인 측면으로 읽어도 좋은 작품.

그러나 그 후속작 격인 [네메시스]는, -작가 스스로도 밝혔듯이- 오롯이 '진짜 범죄 스릴러'에 초점을 맞춰서 쓴 작품이라는 점이라 전작과는 확실한 변별성이 있다.  ​좀더 좁은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지만, 사건은 복잡하고 앞을 예측하기 어렵다. 작가가 1년간이나 공을 들여 플롯을 짰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후반부 장악 능력이 대단하고, 몇 번의 반전이 있지만, 이야기는 결코 부자연스럽게 뒤틀리지 않는다. 이 두툼한 책이 서스펜스, 속도, 텐션, 흥미를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 하면서 페이지마다 흥분을 선사하는 점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확실히 스릴러라는 단어가 지닌 엄밀한 의미에 가닿은 작품이 아닐까.

 

특히 [네메시스]의 플롯 사이 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레드 헤링들이 독자로 하여금 소설 말미에 충격적 진실의 문이 열어젖혀질 때, 오소소 소름을 돋게 만든다. 레드 헤링 (Red Herring).... 붉은 색을 띠는 훈제 청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독특하고 강한 비린내를 풍기기 때문에 사냥개의 후각을 혼돈시키기 위해 탈출한 죄수들이 자기 몸에 레드헤링을 비볐다고 한다. 지금은 " 진짜 사실로 부터 사람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혼란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추리/스릴러 소설을 다룬 영미권 리뷰를 읽다보면 이 "레드 헤링"이란 단어가 남국 휴양지의 하와이언 셔츠처럼 흔히 등장한다. 이러한 장르 소설에는 작가가 독자를 뒤통수를 치기위해, 거짓 강조나 묘사적인 속임수를 통해 진짜 범인인 것 처럼 보이게 만드는 인물이 반드시 등장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레드 헤링으로 사용해서) 범인이라고 추정했던 인물이, 작품 중간에 갑자기 살해당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를 비롯해서, 이 책을 읽은 후 많은 독자들이 레드 헤링(훈제 청어)를 굽는 냄새에 이끌려 미치듯이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냥개 떼중 한마리가 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여우 사냥에 속절없이 실패한 것은 물론이다. 모든 냄새를 뒤덮어 버리는 연막탄 같은 훈제청어를 기막히게 사용한 요 네스뵈의 필력을 확인하고 싶다면, 바로 이 작품이다. 필요에 의해서 이 책을 재독했을 때, 작가가 곳곳에 배치해 놓은 실마리들에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네메시스-복수의 여신 :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복수심 그리고 보복 전쟁

 

BC 600년, 로마인들은 직접 갚아주는 복수 체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개인적인 차원이었던 복수를 공적인 업무로 바꿔 버렸어. 바로 이 여인이 근대 입헌국의 상징이 된 거야. 맹목적 정의. 차가운 복수. 우리의 문명은 그녀의 손에 달려 있지. 아름다운 여인 아닌가?(p.591)

 

 

네메시스-복수의 여신..이란 제목처럼, [네메시스] 곳곳에 복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편재되어 있다.(일부 옮겼지만, 치명적인 스포일러는 없으니 안심하시라)

복수 이야기는 고대 비극을 포함해서, 많은 문학 작품에서 차고 넘칠 정도로 단골 메뉴였는데, 그만큼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고 열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독자들이 '복수' 라는 테마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복수'가 모든 문화권의 보통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짓말이나 절도 정도는 용서할 수 있지만, 딸을 강간하거나,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당신은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누구든 응징하고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복수 능력'을 부단히 정교하게 다듬어 왔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 인간은 앙심을 품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복수와 응징. 그거야말로 학창 시절에 얻어맞고 다니던 땅꼬마가 훗날 억만장자가 되는 원동력이지.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은행강도의 원동력이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를 봐. 우리 경찰이야말로 차갑고 이성적인 응징으로 위장한 이 사회의 불타오르는 복수 아니겠어? " (p.257)

 

복수. 원시적이라고? 천만에. 복수는 사고하는 인간의 반사작용이야. 행동과 일관성의 복잡한 혼합물로, 지금까지 인간 외의 다른 종은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수의 실행은 그 자체로 너무 효과적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가장 복수심이 넘치는 사람만이 살아남았지. 복수 아니면 죽음. 서부 영화 제목 같지? 하지만 입헌국을 만드는 것은 보복의 논리라는 걸 명심하라고. 눈에는 눈, 죄를 지은 자는 지옥에서 불타거나 최소한 교수대에 매달린다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지. 복수는 기본적으로 문명의 기초야, 해리.

 (p.456)

 

 

요 네스뵈는 "인간만이 복수를 하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아나?( Did you know that humans are the only living creatures to practise revenge? )"(p.131)라는 말을 하며, 복수가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전형적인 특성임을 상기 시켜준다.

인류의 조상이 복수를 적응의 일환으로 선택한 이유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첫째, 인류의 조상에게 공격을 가했던  개체들로 부터 두번째  피해를 당하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고, 둘째, 복수가 잠재적 가해자로 부터 애초에 그 의지를 꺽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복수가 인류 조상의 사회 집단에 '협력하지 않는' 구성원들을 벌하고 협력을 강요하는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처벌없이는 사회가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복수는 우리를 정화시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인간의 영혼은 비극이 주는 연민과 공포로 정화된다고 했어."(p.258)

 

"자네는 이미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텐데. 그냥 정의가 최대한 수월하게 실현되도록 내버려 두지그러나." "복수는 안됩니다. 그게 우리 약속이었죠." (p.336)

 

이렇게 인류가 헤쳐나가야 했던 난관을 '복수심'으로 인해 해결했지만, 복수심은 인간 파괴성의 핵심이자 악행의 근원이기도 하다. 당장 신문만 펼쳐보아도 수 없이 많은 범죄의 동기가 '복수'라는 점을 쉽게 파악 하게 된다. 여기에서 역설과 모순이 존재한다. 어쩌면 요 네스뵈가 [네메시스]라는 작품을 쓰게 된 이유도 복수의 이런 속살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본다.

 

작가는 '전쟁의 동기로서 복수심의 역할' 쪽으로 관점의 확장을 도모한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 아이들이 아프간의 모진 겨울을 견뎌 낼 수 없을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국 병사가 하나가 살해당했다. 유가족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들은 복수를 원했다.(p".196)"

 

바로 이 대목.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그 테러를 자행한 오사마 빈 라덴과 그를 지원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에 보복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이어서 2003년 3월 20일에 알 카에다 테러조직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이들을 돕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공격하여 사담 후세인을 정권에서 축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자국 군인을 투입하기 전에 융단 폭격을 통해 적지를 초토화하는 공격 방식을 보였다. 이런 무차별 공격에 의해서 죽은 민간인의 숫자가 -아이러니 하게도- 테러에 의해 죽음을 당한 희생자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응징을 위한 미국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이 도덕적으로 과연 합당한가하는 의문을 작가는 넌지시 전하고 있는 것이다.

  [네메시스]는 이런 당대성을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이기에, 불가피하게 이런 암울한 시대적 밑그림을 거느리고 있다.

 

"미국 같은 나라, 그러니까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어떤 가치를 상징하는 나라는 자국 내에서 당한 공격에 대해 복수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미국을 공격한다는 것은 곧 그들이 대표하는 가치를 공격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니까요. 보복을 원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만이 민주주의와 같은 연약한 시스템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 한쪽이 주장했다. "만약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가치 그 자체가 희생된다면요?"(p.158)

 

정의는 물과 같아서 언제나 제 갈 길을 찾아 흘러간다고. 그들은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소한 가끔 위안이 되는 거짓말이었다. (p.443)

 

작가는 인간 개개인의 본성에 내재하는 복수라는 개념을 보복 전쟁으로 확대 시킨다. 그리고 '복수'가 국가간 발생하는 전쟁의 '원인'은 아니지만, 전쟁의 당위성(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보복' 개념이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대답이 쉽지 않은 질문을 책 밖의 독자에게 던진다.

정의로운 전쟁이란 가능할까. 전쟁 당사국중 어느 편에 서냐에 따라 윤리적인 판단이 뒤바뀔수 있는데, 정당한 전쟁 명분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서는 '정의'와 '복수'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냐는 질문까지 독자의 마음 속에 심어준다.  정의로서의 복수, 복수의 일종으로서의 정의..복수는 본능적인것이고, 정의는 이성적인것. 복수는 개인적인 것. 정의는 비개인적인 것. 복수는 순환이지만, 정의는 매듭짓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둘은 얼마간 서로 착종되어 있어 쉬 분리하기 어렵다.

 

작가는 '복수'라는 개념을 '자살'이라는 개념으로 횡단시키기도 한다.  '복수'와 '자살'의 유비관계를 드러내는 구절.

 

 

네메시스의 여신이야. 전쟁이 끝난 후에 베르톨 그리머가 가장 좋아했던 모티브였지. 복수의 여신. 그러고 보니 복수도 자살의 흔한 동기라네. 자신의 삶이 이렇게 비참해진 것은 누군가의 탓이고, 그러니 자살을 함으로써 상대에게 죄책감을 주려는 거지. 베르톨 그리머도 자살했다네. 아내를 죽인 후에 말이야. 아내가 바람을 피웠거든. 복수,복수, 복수 인간만이 복수를 하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아나? (p.131)

 

작품의 핵심이 관통하는 이 대목을 읽고, 처음 떠올렸던 것은 알베르 카뮈의 말이었다.

 

자살자는 형이상학적 면에서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에 자살한다.어떤 의미에서 그는 복수 하는 것이다. 그것은 <쉽사리 지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는 요 네스뵈가 쓴 위 대목과 카뮈의 이 말은 손을 맞잡고 있을 정도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와 밀착되어 있는 언명이라고 본다. 이 구절은 이 작품과 관련해서 곰곰이 생각해 봄 직하다. 마침 [네메시스]에도 알베르 카뮈가 인용된다. "알베르 카뮈는 자살이야말로 철학에서 유일하게 진지한 문제라고 했네."(p.126)

 

요 네스뵈에게 있어서 '복수'는 오랜시간 동안 곱씹었던 테마인듯 싶다. 이 주제는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데, 가장 최신작인 [아들 (The Son)(2014)]에서는 그 어떤 책보다 명백하게 다루고 있어 '복수'를 테마로 한 네스뵈 소설의 정점으로 읽힌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네메시스와는 차별화하기 위해, 사도신경(the Creed)의 개념을 포함시켰다고. 복수의 아들이 재림하는 것. (사도신경의  '그리로부터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올 것이다'..라는 부분이 핵심 키워드인 듯.)

"기독교의 윤리는 복수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이 숭배하는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대변해서 복수해주는 위대한 존재야.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 불에 타게 되리라. 그거야말로 일반 범죄와는 비교도 안되는 완전한 복수 행위지.(p.593)라는 말이 [네메시스]의 후반 부에 등장한다. 하므로 이미 사도신경의 개념은 [네메시스]에 그 씨를 잉태하고 있다. "그는 무언가 자신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자신을 숨겨주는 것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리라. 주님의 복수, 네메시스가 된 주님.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저울을. 처벌과 정의. 혹은 처벌도 정의도 없거나. (p.172)"

[아들(The Son)]과 [네메시스(Nemesis)]는 배경과 장치는 달리하지만, -복수의 변주라는-같은 맥락으로 읽힐 듯 싶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작품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복수'라는 무거운 내용에 짓눌리지 않고, 이토록 멋지게 가공하여 풀어낸 작가의 역량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의미 없이 소비되는 장르소설과는 확실히 다른 격을 선사한다. 깊이가 재미 옆에 나란히 자리한다고 할까.

몇년 전까지만 해도 변방에 머물렀던 스칸디나비아 느와르가 어느새 성큼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된 것은 순전히 이런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과 관심 덕택일 것이다.  

 

 

 

 

 

총평

독자들은 일시에 혼란에 빠졌다.

가장 재밌게 읽은 '요 네스뵈의 소설'에 대한 순위 매기기가 [네메시스]가 등장함으로써 재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소설을 1위에 올려야 할까. 실로 즐겁고도 어려운 고민이다. 개인적으로는, [네메시스]를 종독한 후, 이 작가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졌다. 어떤 작가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감을 탕진하는데, 요 네스뵈는 읽는 작품마다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새로움을 선사한다.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의 4권에 해당하는 본작은 본격적인 해리 홀레 시리즈 여정의 시작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이전 작품들과 차이점은 무엇보다 해리홀레가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요 네스뵈는 레드브레스트(The Redbreast)]를 쓰면서 해리홀레가 누구인지를 작가 자신도 비로소 알았다고 말 한 적이 있는데, 그 다음 작품인 [네메시스]에선 더욱 발전한 캐릭터로 살아있는 존재같은 인물의 생동감을 담아냈다고 느껴졌다. 작가의 분신으로서의 투영물이란 느낌도 좀 더 진해졌다. 

작가는 복수라는 자체가 함의하는 파괴적인 에너지에 초점을 맞추어, 복수에 관한 다양한 담론을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평이한 소설 언어로 풀어냈다. 일전에 네스뵈는 '악의 본질'에 대하여 이전에는 쓰여지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실적이고도 독특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있었는데,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에서도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네스뵈의 작품은 그저 납작하고 평평한 구조를 가진, 뻔한 장르 문학의 전형이 아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구역질날 정도의 평균성을 갖고 있는 대동소이한 스릴러들이 있는가. 재미나 지루함을 느끼기에 어정쩡한 작품들..그 책들이 망각으로부터 구제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철면피한 구태의연함 때문일 것이다.

읽어본 독자들은 느끼겠지만, 네스뵈의 작품은​ 기존의 스릴러들과는 다른 질감이 무엇이 있다. 이 작품은 '장르 소설'에 대해 삐딱한 편견을 갖고, 문전박대하는 독자들에 대한 도전이자 자극이다. 이쯤되면 네스뵈의 작품은 순수문학/ 장르문학이라는 편협한 이분법 구도를 교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일독 후 새삼 느낀 것은 십 여년전에 쓴 작품이나 비교적 최근에 쓴 작품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어서 균질성을 보장한다.​우연히 인터넷에서 2008년 노르웨이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 20선이란 짧막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이 20선중 요 네스뵈의 책이 다섯 권이나 포함되어 있어서 놀랐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꾸준히 읽힌다는 것이 방증인 셈이다.

(참고 삼아  이곳에 그 책이름을 부기하면, 2위 [스노우맨], 10위 [헤드헌터], 12위 [리디머], 14위 [레드브레스트], 18위 [네메시스]이다)

​예술의 세계는 '질투라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성운'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방광을 누르고, 동공은 크게 벌어진 채로, 상체를 책쪽으로 기울인 채로 몇시간이고 읽게 만드는 작품을 몇 년간 꾸준히 발표하는 요 네스뵈의 재능을 같은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작가들은 필경 시기하고 샘 낼 것이다.

 

 

'재밌다'라는 어휘는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는 이 작품을 설명하기엔 너무 초라하고, 턱없이 힘이 없다. 이 작품의 재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더 강력한 다른 형용사가 필요할 것이다.

독자들은 이제 [네메시스]의 다음 권 [데블즈 스타]를 읽을 희망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그와 더불어 출판사 편집부는 안달이 난 독자들이 다음 권 출간을 서둘러 달라는 조바심 가득한 재촉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즐거운 불가항력이다.

 

 

 

 

 

독자들은 이제 [네메시스]의 다음 권 [데블즈 스타]를 읽을 희망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이번에 [네메시스]와 함께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 1편인 [박쥐].

 

네스뵈가 창조해낸 형사 '해리 홀레'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기에, 열성적인 네스뵈 팬이라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펼쳐질 해리홀레 시리즈를 즐기기 위해선 무조건 구매해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신선하다. 독자에게 알랑대는 느낌이 없어서 좋다. 그리고 이미 이 때부터 네스뵈는 음악에 민감한 자신의 귀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첫 작품을 이렇게 잘 쓸 수 있다면, 역시 밴드의 리더보다, 주식중개인보다 작가가 되어야 마땅하다.

 

 

 

 

 

 

사족 1. [네메시스]에서 좋았던 점 (1)

짐 빔의 등장

 

예의 이 책에도 해리 홀레 형사의 트레이드 마크인 짐 빔 위스키가 등장해서 반가웠다.

알콜은 해리 홀레에게 크립토나이트(슈퍼맨의 약점) 같은 존재.

 데뷔작 [박쥐]에서 해리 홀레는 "자기만의 독을 발견하면 그것만 찾지 않나?(p.285)"라고 말한 후, 짐 빔을 선호하는데, [네메시스]의 여러 장면에서 짐 빔이 금빛 액체를 찰랑거린다.

이 작품에선 짐 빔을 도피처가 아닌, 벌 주기 위한 최종 수단이라고 의미부여 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앞에 있던 콜라에 짐 빔을 보었고, 여자의 이름이 뭔지 신경쓰지 않았다. (p.37)

 

짐 빔을 마실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복통이 없는 대신 안개가 그를 감싸며 모든 감각을 둔화 시켰다.(p.103)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벌을 줘야만 죄책감이 해소되지. 자네가 절망에 빠졌을 때처럼 말일세, 해리. 자네의 경우, 술은 도피처가 아니라 스스로를 벌주기 위한 궁극적인 수단이야." (p.86)

 
 "진 드릴까요, 형사님?" "짐 빔 있습니까?" (p.466)

 

 

 

 

 

 

 

 

 

사족 2. [네메시스]에서 좋았던 점 (2)

열쇠라는 소재

열쇠...신비나 수수께끼의 세계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그런 세계를 해명하는 수단을 상징한다.

 

"오는 길에 비브스 가의 도어록 가게에 들러서 내가 주문한 열쇠 좀 찾아다 줄래? (p.49)"

 

그러니까 열쇠는 총 세개인 셈이지. 하나는 어제 이 아파트에서 나왔고, 하나는 전기공이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세 번째 열쇠는 어디 있지?  (p.130)

 

열쇠란 열고 닫는 힘을 지닌 상징적인 물체다. 고대로부터 열쇠는 지식과 미스터리,시작과 호기심을 표상하는 물건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번 작품의 해결이 열쇠와 긴밀한 관계가 있어서 좋았다.   특히 국내 번역판의 표지에 열쇠가 등장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폴란드 판본의 [네메시스]는 피묻은 열쇠 그림을 표지로 [세번째 열쇠(Trzeci Klucz-The Third key)]라는 제목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사족 3. [네메시스]에서 좋았던 점 (3)

밴드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는 해리 홀레

 

사람들은 록 밴드 도어즈(Doors)가 프린트 된 티셔츠를 입으면서, 세상을 향해 나는 "도어즈(Doors)를 듣는 타입의 인간"이다라고 밝힌다. 이 때 음악이란 그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요 네스뵈는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네메시스]에서 해리 홀레 형사가 '요케 앤드 발렌티네르네'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거나 ( 그러고는 신기하다는 듯이 해리의 티셔츠를 바라보았다. 가슴팍에 그려진 '요케 앤드 발렌티네르네' 로고에서 시작된 땀자국이 이제는 셔츠 전체로 퍼져 있었다.p.76  ),'바이올런트 팜므'의 셔츠를 입고 있는 장면 (해리가 스웨터를 벗으며 말했다. 스웨터 안에 입은 진회색 티셔츠는 원래 검정색이었는데, 빛바랜 글씨로 'Violent Femmes'라고 적혀있었다. p.25)에서 나는 요 네스뵈의 말이 떠올라 빙긋이 미소 짓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비채 측에서 두 권의 요 네스뵈 신작을 발간하면서 사은품으로 '요 네스뵈'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마련한 것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티셔츠를 입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나는 요네스뵈의 작품을 읽는 타입의 인간'임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항에 작가를 마중 나갔던 일부 독자들은 이 티셔츠를 입고 기다렸다고 하는데, 이 광경을 지켜본 요 네스뵈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족 4. [네메시스]에서 좋았던 점 (4)

[손자병법]의 해석

 

개인적으론 요 네스뵈가 '라스콜 바제트'의 목소리를 빌어 이야기하는 [손자병법]에 관한 작가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네메시스]가 마음에 들었던 수십가지 이유중 하나. 아래에 일부만 옮겼지만, 책을 읽으면서 전문을 살펴보면, 작가의 독특한 시각에 무릎을 탁 치게 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깊이있는 혜안이 한 순간에 완성된 것은 아닐 것이다.

 

'손자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의 장수이자 지략가죠. 손자병법(The Art of War)을 썼고요." "..... 표면적으로는 손자병법이 전쟁터에서 전략을 세우는 법을 다루는 것 같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실은 갈등에서 이기는 법을 말하고 있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최소한의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을 알려주지. 전쟁에서 이긴 사람이 꼭 승자는 아니라네. 많은 자들이 왕관을 썼지만 정작 자기 병사를 너무 많이 잃어서 오히려 표면상으로는 폐배한 적군의 명령에 따라 통치해야만 했지...(p.304)

 

"우 왕이 궁녀들에게 병법을 가르치기 위해 손자들 초대한 이야기를 해줬던가, 스피우니?...손자는 똑똑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우선 궁녀들에게 행진하는 법을 설명했지. 정확하면서도 교육적으로. 하지만 북소리가 울리자, 궁녀들은 행진하지 않았어. 그저 킥킥 거리며 웃었지. '병사들이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장군의 책임이다.'손자는 그렇게 말하고 한 번 더 설명했어. 하지만 두 번째로 행진하라고 명령했는데도 같은 일이 벌어졌어. 그러자 손자는 '명령을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이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사의 책임이다'라고 말하더니, 자기 부하 두명에게 궁녀들 중에서 우두머리 둘을 끌어내라고 했지. 그러고는 겁에 질린 다른 궁녀들 앞에 두 여자를 일렬로 세우고 목을 베었어. 왕은 자신이 아끼던 궁녀 둘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칠간 병상에 눕게 되었지. 마침내 건강이 회복되자 왕은 손자에게 자신의 군대를 맡겼다네.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인 거 같나, 스피우니?" (p.402)

 

 

 

 

 

 

사족 5. [네메시스]를 읽고 감정이 휘발되기 전에 바로 써두었던 메모

 

국내에 [스노우맨],[레오파드],[레드브레스트]로 쌓은 명성과 평판은 이 작품을 통해서 더욱 공고해 질 것이다.

책을 덮고나서 잠시 눈을 감고 요 네스뵈의 끝 간데 없이 펼쳐지는 상상력에 감탄하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현기증 나는 작품.

도무지 다음 장면이 어떻게 전개될 지 예측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명품 스릴러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 아닐까.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가 떨릴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같은 만족감을 준다.

단순하고 판에 박힌 스릴러가 아닌 품격이 다른 질감의 스릴러를 추구하고 지향한다면, 기분좋게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을 쫓으면

될 듯 싶다. 새로운 자극에 목말라 있다면, 이 작품이 합당한 해답이 될 것이다.

작가가 구축한 소우주는 이미 이 작품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다.

문학은 침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명제를 환기시킨다.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 물음표가 되어 머리에 박힌다.

독자의 세계관과 사유의 폭과 깊이를 넓혀주는 데 도움을 주는 소설이다.

인간 본성인 복수와 맹목적인 정의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빼곡히 채워 넣었다.

진짜, 스릴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기억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도대체 언제 나올까?"를 외치며 학수 고대하던 마커스 세이키(Marcus Sakey)의 [대니얼 헤이스 두번 죽다 (The Two Deaths of Daniel Hayes)]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기뿐 마음에 월스트리트 저널에 신문 기사처럼 만들어 넣어 보았습니다.)

 

 

 

 

 

[다니엘 헤이스 두번 죽다]를 읽다.

 

 

Q: 당신이 말하는 거짓말은 소설과 동의어인가?

A: 우리는 잘 씌어진 소설을 보고 '사실'같네라고 말하며, 현실에서의 기막힌 일을 보고 '소설'같네라고 말한다. 실제로 진실과 등가를 이루는 위대한 거짓말을 나는 훌륭한 소설 속에서 자주 보아왔고, 문학은 그 힘으로 우리를 사로 잡는다.

-장정일, 너에게 나를 보낸다. p.287

 

 

 

한 인터뷰에서 당신의 글쓰기 배경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커스 세이키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듣고 위에 부기해 놓은 글을 떠올렸다. 장정일은 작가가 되면 마음껏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세이키 역시 '거짓말'이 그의 글쓰기에 자양분이 되었다.

세이키에게 있어서 특히 대학 졸업후 기업 홍보및 마케팅 분야에서 10년간 일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광고 분야" 만큼 범죄물 쓰기를 준비하는데 좋은 분야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개인적으로 표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상징적인 느낌을 굉장히 잘 살렸습니다. 이 사진 속에 쏟아지는 가을 햇살때문에 백양목처럼 하얗게 탈색된 거리에 있는 여성의 그림자에 주목해주시길. 이쪽에 서있도록 부탁한 의도적인 샷입니다.)

 

 

 

 

기억상실증과 결부된 스릴러로 대표되는 로버트 러들럼의 [본 아이덴티티(Bourne Identity-1988)](작품속에 러들럼의 책을 읽는 사람이 나온다)와 그렉 허위츠의 [크라임 라이터(The Crime Writer-2007)]를 작품 안에 새겨넣음으로서 그 작품들에 대해 작가가 고민했음을 대놓고 표현한다. 작품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메멘토 포스터도 같은 시선으로 보아도 안전하다.

 

대니얼을 서랍을 잡아 뺐다. 립밤, 콘돔, 동전이 가득쌓인 접시, 그렉 허위츠의 소설 한 권이 들어 있었다.p.111

베넷은 혹시 숨겨놓은 금고가 있는지, 액자에 넣은 영화 [메멘토]의 포스터 뒤쪽도 확인했다. p.144

 

특히 그렉 허위츠 작품은 드루 대너(Drew Danner)라는 범죄소설가가 병원에서 기억을 잃은 채로 깨어나는데, 경찰들이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자로 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초반부와 유사성을 보인다. 기억상실, 작가라는 주인공의 직업, 여자친구 살해 혐의등이 매우 흡사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보이는 반응이란 아무래도 대동소이해서, 소재의 중첩때문에 초래되는 선배작가들의 자장을 벗어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마커스 세이키는 기억상실증이 걸린 주인공을 내세워 전혀 다른 차원에서 독보적이고 매력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여자 얼굴의 앞면은 흰 바탕에 빨간 글씨로 제목을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얼굴의 뒷면을 이용해서 작가 소개 글을 넣은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표지만으로도 소장욕구가 생긴다고 할까요.)

 

 

소위 소재의 진부함(클리쉐)에 대한 문학적 싸움의 흔적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다루었던 소재에 어떻게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차별성을 두느냐가 이 작품의 승패를 가늠하는 열쇠였을 듯 싶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심층을 향해 직진하기는 커녕,소재의 표면에서 그저 공회전만하기 쉽기에 더욱 그러하다. '널리 알려진 소재'와 '상투성을 극복하고 변별성을 두려는 작가의 의지'의 길항이 좋은 효과를 냈다.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는 익히 알려진 '기억 상실증'이란 소재를 작가가 치열성의 강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매끄럽게 얼개를 잘 짜내어 만들어낸 수작이라 할만하다. 게다가 이 작품은 흥미본위의 단순한 스릴러물이라고 보기에는, 작가가 작품 내에서 세상의 비밀을 반복적으로 누설하면서, 독자를 깊은 성찰의 공간으로 인도하려는 열의있는 목소리가 꽤 크게 들린다. 기억을 잃고, 다시 되찾아가는 주인공의 마음 속에서 부유하고, 소용돌이 치는 복잡한 불협화음을 통해, 단순히 마음 조리며,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것 외에도, 우리는 진실에 가닿으려는 사유의 모험 또한 함께 하게 된다.

 

 

 

확언하건대, 비록 이 작품은 '스릴러'로 분류되어 서점가의 책꽂이에 꽂힌다하더라도 그 이상의 다양성을 열어 젖히는 의미있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전형적인 장르론적 테두리로 가두기에는 덩치가 크고, 다층적 의미망으로 걸러 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즉각적인 재미만을 하염없이 쫓아가는 타입의 작품이 아니고 (하지만 아주 재밌다), 독자의 세계관을 변화시켜주거나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켜 줄만한 화두가 내장되어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말한다.

기억이라는 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를 자신에게 설명하는 이야기일 뿐이야. 따라서 기억에는 절대적인 게 없고 모두 주관적이지." (Memories are just stories we tell ourselves to explain how we got where we are. There's no absolute to them. It's all subjective. p.363) 지난 한 주일 내내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거였어. 모든 순간에 선택을 한다는 거지. 과거는 이미 지나갔어. 기억은 꿈과 다름 없이 허망하다는 거야. 실질적이고 유일한 건 현재야. 바로 그걸 배웠단 말이야. (Over the last week, if there's anything I've learned, it's that you're only who you choose to be. Every moment. The past is gone. Memories are no more solid than dreams. The only real thing, the only true thing is the present. That's it. p.364)

 

 

 

기억이란 한번 만들면 변형 불가능한 조각상이 아니라, 만질 때마다 손의 힘에 의해 모양이 바뀌는 점토에 가깝다고 한다. 그것도 절대로 굳지 않는 점토라는데, 이는 기억의 가변성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게다가 기억이란 시간의 공격에 속절없이 유실되기도한다. 이런 믿지 못할 기억이, 결국은 사람을 구성하는 것일까? 마커스 세이키는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를 자신에게 설명하는 이야기 일뿐이며,과거에 누구였는지나 자신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의 문제보다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고 설파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이런 생각에 견인되는 작품이다. 따라서 책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잠시나마 마커스 세이키가 펼쳐보이는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이란 무엇이고 기억은 자아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기억이란 무엇이며, 현재의 나와는 어떻게 연결되어있는가?" 하는 철학적 물음 속에 발을 들여놓도록 허락 받는다. 이를 테면, 이것이 마커스 세이키의 복음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작품이 선사하는 매혹은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온다.

 

 

 

 

 

 

 

나는 누구일까? 기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인생을 선택하여 살것인가?

 

 

 

그녀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 벽에 걸린 사진들도 생각났다. 소피의 과거 모습 중 어느 하나도 그녀에게 닥쳐올 미래를 보여주진 못했다.(p.388)

 

 

 

이건 네가 과거에 누구였는지, 혹은 네가 뭘 기억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야. 네가 지금 누구인지에 관한 거지. 네가 선택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문제인 거라고. (p.391)

 

 

 

우리가 어떤 식으로 원하든 간에 살아갈 수 있다는 거지. 매 순간순간을 말이야.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야. (p.364)

 

 

 

쭉 이어온 과거가 없는 사랑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알츠하이머병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평생을 살아오며 사랑하고, 집을 사고, 아이들을 키워왔어요. 그랬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덜컥 병이 나고 다른 한쪽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봐요. 그들이 여전히 결혼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할까요? 그들이 함께한 시간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요? 아니면 모든 게 그저....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일까요? (p.255)

 

 

 

 

 

 

 

 

 

 

 

어찌보면, 이 작품은 소설과 시나리오의 하이브리드가 아닐까,할 정도로, 마커스 세이키는 꿈과 과거 회상 장면에서 고집스럽게 시나리오 스타일로 글을 쓴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소설적 구조와 시나리오적 구조를 결합시키므로써, 연극적인 효과를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주인공이 각본가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쉽게 이해된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이전의 작품을 썼던 작가가, 본인에게 낯선 LA로 작품의 무대를 옮긴 것도, 헐리우드라는 소재와 이런 구조적인 장치를 염두해 두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LA를 중심으로 책을 쓰게 된 작가는 본의 아니게, 레이먼드 챈들러나 제임스 엘로이, 마이클 코넬리 같은 LA를 배경으로 글을 썼던 기라성 같은 선배 작가들과 경쟁하게 된 셈이다.

소설의 주요 무대를 헐리우드로, 주인공의 부인을 배우로 설정한 이유는 헐리우드하면, 배우, 배우하면 연기가 자연스레 연상되기 때문이다. 배우는 다른 사람 역할을 하기에 용의한 직업이다. 이 소설에서, 자신을 지우고 타인으로의 존재변이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부분이 꽤 눈에 띤다. 이부분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작가의 목소리를 일깨운다.

 

 

 

대니얼은 미국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오랫동안 차를 모는 동안 다양한 인물들을 머릿속에 그리는 게임을 했다. 도박에 중독된 소방관이 되기도 했고, 미식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동성애자 보험 영업사원이 되기도 했으며, 히트곡 [마카레나]에서 나오는 인세로 살아가는 작곡가되기도 했다. 흡사 옷 가게에서 이것저것 옷을 걸쳐보는 일과 흡사했다. 재단이나 박음질이 잘못되어 몸에 맞지 않으면 한쪽으로 던져버리고 다음 것을 선택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범위에 한계가 있는 각박한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예전의 대니얼은 분명히 어떤 특징이 있는 인물이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좋은 쪽 나쁜 쪽으로 끊임없이 선택을 했기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이제는 원하든, 아니든 어느 한 인물의 역할을 군소리 없이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인격을 선택하는 자유가 없어지고, 강요된 결정에 따라 할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이 주어진 셈이었다. (p.188)

 

 

 

다른 뭔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자신들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려고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회를 받아들일까? 습관적으로 유지되는 결혼생활은 또 얼마나 될 것이며, 속만 끓인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p.236)

 

 

 

아주 죽을 맛이었다. 과거에는 왜 완벽할 수 없을까? 완벽할 수 없었는데 완벽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단 말인가? (p.260)

 

 

 

하지만,어찌 보면 핵심적인 사건부분을 전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부분에선 고개를 갸웃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이 부분은 전통적인 세밀한 묘사와 문장의 맛을 음미하는 것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독으로 작용할 수 있어,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독자를 만족시키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며, 각본스타일의 나오는 부분은 책 전체로 보아서는 일부분이다.

오히려 처음에 다니엘 헤이스가 물밖으로 나왔을 때는 주인공이 느낀 공포와 불안감을 흉내내서 짧게 쳐낸듯한 문장으로 시작했지만, 다른 부분에선 시적인 산문을 쏟아내서 독자로 하여금 담긴 내용만큼이나 언어가 갖고 있는 풍미를 맛보고자 천천히 읽고 싶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요컨대, 이 작품엔 작가의 여러 스타일이 서로 경쟁하듯 빼곡히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스티븐 킹은 "문학적 우수성에 이끌려 소설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비행기에 가지고 탈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끝까지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그런 소설말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 독후감이 전체적으로

작가가 내보이는 철학적 성찰에 주목하고 있어 문학적 우수성만을 지닌 작품처럼 비춰질 수 있겠지만, 재미면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빼어나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공기가 다르고 냄새가 다른 곳으로 던져진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반전이 몇차례 작품 속에 등장한다. 세상이 갑자기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 아득한 순간과 기분을 느끼기 위해 독자들은 이런 책을 구입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스티븐 킹이 말하는 비행기에 가지고 탈만한 책의 전형을 보여준다. 판에 박힌 듯한 소재로 범람하는 스릴러들 가운데에서 단연 독특한 자리를 차지 할만한 작품이다. 작가는 소재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휘둘리지 않고, 확실히 소재를 지배했다는 느낌이다. 캐릭터들의 내면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쉽게 감정이입 될 정도로 살아있다. 잘 짜여진 플롯 속에서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작품의 수준을 높여준다. 육류의 두툼한 부분에 더 잘 익으라고 넣어주는 칼집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까.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작품의 명도는 다소 어둡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어둡지 않아서 좋았다. 절벽처럼 위태로운 다니엘 헤이스의 상황을 따라가며, 그에게 간섭하고 동일시하고 침잠하며, 나는 과연 현재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되묻게 되었다. 혹시 책읽기에 대한 열망이나 욕구가 예전만큼 강렬하지 않다면, 이 책을 주저없이 권해주고 싶다. 사그라들던 책에 대한 열정이, 필경 잉걸불처럼 활짝 피어오르며 타오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라디오 그 세번째 이야기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위한 포스팅






무라카미 하루키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제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알려드리면,

"졸리지 않은 밤은 내게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만큼이나 드물다 (p.12)"..라는 통통 튀는 하루키 식 문장에서 나왔습니다.





책이 도착하자 마자, 다른 책을 다 제쳐두고 읽었습니다. 저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제가 하루키를 많이 좋아합니다.



찾아보시면 정성스레 쓴 관련 포스팅이 몇개 있습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을 위한 포스팅 : http://blog.naver.com/meushar/140163250005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위한 포스팅: http://blog.naver.com/meushar/140152546246





이 책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어느 정도 예상과 기대는 했지만, 역시나 너무 재밌습니다.

가령, '기본 정책이 없는 정부는 화장실 없는 맥주집 같습니다.'같은 기가막힌 비유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읽는 재미를 배가 시켜줍니다.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잡지 -[앙앙]에 쓴 연재 에세이를 모은 것이라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토실토실 살찐 상상력이 가득한 에세이집입니다. 읽는 내내 유쾌하고, 몇 년은 젊어진 느낌입니다.

힘을 빼고도 이런 글을 써내다니, 대단합니다.

하루키씨 말대로 재미있고 즐겁게 글을 쓴 분위기를 작품집 내내 맛볼 수 있습니다.


뭉크에게는 그 밖에 [멜랑콜리]라는 제목의 그림도 있는데, 그 주인공 얼굴이 나와 아주 닮았다는 말을 몇 명의 노르웨이인에게 들었다. 오슬로 미술관에 가서 실물을 보고 싶기도 한데, 으음, 그렇게 닮았을까? (뭉크가 들은 것-p.151)



이 문장을 읽고 욱씬거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찾아본 뭉크의 [멜랑콜리]라는 그림. 우와, 과연 하루키씨랑 닮았네요.ㅋ


전 조개나 소라, 고동 껍데기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요. 이 처럼 예쁜 조개 껍데기를 보면 꼭 구입해야 합니다.

사진 상에 보이는 조개는 하트 모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세히 보면 접혀 있는 '천사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어서 냉큼 구했습니다.

모든 수집이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어떤 것을 모으다 보면, 시간이 지날 수록 까탈스러워져서 무턱대고 모으기보다는 나름 가치를 따져서 냉정하게 구하기 마련입니다.

하루키의 책들도 제가 수집하는 것 중 하나인데, 이번에 새로 출간된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역시 하루키 책 수집을 하는 사람으로서 소장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단 하루키가 가장 최근에 쓴 에세이라 점과 오하시 아유미 씨의 귀여운 동판화가 누락되지 않고 그대로 함께 수록된 원본에 아주 가까운 책이란 점에서 높은 점수를 매기고 싶습니다.


어느새 날씨가 꽤 더워졌는데요, 이렇게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조개와 함께 책을 찍어보니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최근에 구한 하루키의 책 두 권입니다. [해변의 카프카] 영어 판본과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영어판본의 책입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는 하루키의 에세이 집으로는 예외적으로 영어번역이 되었군요.


하루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견지로서, 비채에서 나온 이 세 권의 책은 무척 수집가치가 높다고 생각됩니다. 책의 만듦새도 아주 좋고, 하루키의 개인적인 삶을 엿보기엔 이 책들 만한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루키 좋아하는데, 으아, 이렇게 3권 선물 받으면, 정말 기쁠 듯 싶군요.



하루키가 젊은이들로 부터 '문장 공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됐든 살아가는 일 밖에 없다.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살 것 인가 하는 문제와 대충 같다.'라고 말한 적인 있는데, 이 에세이집은 그런 하루키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는 듯 보입니다.

일상의 하루키를 통해 방향 감각이 분명한 그의 문장들이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라는 제목에 맞춰서 샐러드와 함께 한 컷 찍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샐러드 (야채)를 좋아하는 하루키의 에피소드를 담은 글도 들어 있습니다.



'슈퍼 샐러드'라 할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전에 호놀룰루의 할레쿨라니 호텔 수영장 근처의 레스토랑 'HWAK(House Without a Key)'에서 아주 훌륭한 샐러드를 만났다. 마노아 레터스와 쿠라 토마토와 마우이 어니언을 넣었을 뿐인 단순한 샐러드였지만 맛있어서 늘 점심으로 먹었다. 따뜻한 롤빵과 이 샐러드-그리고 차가운 맥주-가 있으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p.46-슈퍼 샐러드를 먹고 싶다)




샐러드를 하루키가 맛있게 먹듯, 저도 그의 글을 맛있게 냠냠 먹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쇤브룬 동물원의 사자'라는 제목이 달려있는 에세이인데, 저도 동물원을 좋아하는지라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동물원 이야기'는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인 [저녁무렵에 면도하기]에도 실려있죠(이상한 동물원).)

적절한 말을 고르는 데, 시간과 품을 들이며 글을 정성스럽게 쓰는 하루키의 문장들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극히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친절심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되도록이면 상대가 읽기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시도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알기 쉬운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말을 골라야한다. 시간도 들고 품도 든다. 얼마간의 재능도 필요하다. 적당한 곳에서 "그만 됐어."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다.p. 23-사랑은 가도)




무라카미 라디오 세번째 이야기!

작년에 나왔던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와 함께 찍은 샷. 무라카미 라디오의 시리즈에 맞춰서 비슷한 풍으로 만들어져 통일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통일감 있게 나와주면, 역시 수집욕구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ㅎ)

무라카미 라디오 첫 번째 편인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도 곧 나왔습니다. 역시 기대되는 책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