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숨은 강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4
마이클 코리타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절판


숨은강(So cold the river)에 빠지다


유령이나 귀신, 초자연적인 영기나 혼, 초능력따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마이클 코리타의 [숨은강]을 읽는다면, 움츠려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이 책 어딘가에 씌여있는 '난 미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어두워진 후에 공동묘지를 지나고 싶지는 않구나'. (p.193)라는 언명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책을 덮었지만, 나는 아직 토네이도가 한바탕 휩쓸고간 웨스트바덴 마을에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악몽같은 후반부는 뼈가 얼얼할 정도의 파워로 독자를 몰아부친 느낌이다. 숨도 쉬기 힘들정도의 압도적인 공세.

잠들어있는 모든 혼을 깨울것 같은 거센 바람의 포효 소리가 귓속의 달팽이관을 뒤흔든다.

여진(餘震).

마음 속에선 희석되지 않는 공포때문에 진동이 여러 차례 계속된다. 동공은 커지고 맥박은 빨라진다.

[숨은강]은 이성적 설명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이 바로 공포라는 점에서 공포소설의 본령에 충실하다.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이 작품은 품격을 잃지않는 공포물이다. 시종 무거움과 어둠으로 착색된 분위기가 고전적인 고딕스타일에 가까운 공포감을 준다. 탐정소설을 썼던 코리타는 단순하고 움직임이 빠른 능률적인 문체를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 문체의 미덕때문인지 (물론 그 문체 때문만은 아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이런저런 다른 생각이 틈입할 새 없이 빠르게 넘어간다.(지나치게 재주를 피우지 않고, 불필요한 말을 생략한, 군더더기 없는 메마른 문체는 작가가 추구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전반적으로는 'Paranormal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스릴러' 의 선례가 될 수 있겠다. 뒷통수를 치는 반전없이 정면승부하는 묵직한 돌직구같은 공포소설이랄까.

대부분의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공포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스티븐 킹이 자주 보여주었던 풍경과 지형, 그리고 분위기를 떠올리게 될것 같다.공포소설을 쓰면서 킹의 자장(磁場)을 벗어나긴 힘들다. 혹자는 이 소설이 호텔을 배경로 하고 있고 환각에 대한 설정때문에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연상시킨다고 했지만, 나는 소설의 속도감,리듬감 그리고 분위기에서 몇년 전에 스티븐 킹이 초심으로 돌아가 썼다는 [듀마키]를 떠올렸다. (코리타 스스로도 스티븐킹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서스펜스 소설을 쓰면서 킹에게 영향받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거나 헛소리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특히 킹이 쓴 글쓰기에 관한 책 [On Writing(유혹하는 글쓰기)]이 그의 교과서였으며, 여름에 읽을 최고의 책으로 킹의 [Bag of Bones(자루 속의 뼈)]라고 밝히기도 했다.)

작가 스스로가 망설였던 전환기적 작품


[숨은 강]은 영미권 스릴러 대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기에 읽고 싶기도 했지만, 코리타가 기존의 출판사(St. Martin's Press)와 결별하고 새 출판사(Little, Brown)로 옮기면서까지 고집했던 책이기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

링컨 페리 시리즈를 쭉 내왔던 St. Martin Press와 헤어진 이유는 출판사측이 코리타가 전통적인 크라임 소설의 영역내에서 글쓰기를 원했지만, 코리타는 자신에게 편안하고 안온한 분야인 탐정소설 외에 다른 쪽 (초자연적 공포물)으로 영역을 넓히고 싶어서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리타는 초자연적 공포물에 대해 관대한 Little, Brown 출판사와 차기 작품 5권을 계약하게 되었는데, [숨은강]이후에 나온 [The Cypress House]와 [The Ridge] 모두 공포물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 [숨은강]은 스타일이 이전 작품과는 달라서 자신의 경력에 타격을 입힐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작가 스스로도 걱정이 앞섰던 작품이었다. 심지어 가명(필명)을 사용하여 출판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마치 아가사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마코트'라는 필명으로 6권의 로맨스 소설을 썼듯이!)

링컨 페리(Lincoln Perry) 시리즈로 승승장구하고 있는데다가, 기존 팬들이 그의 새로운 스타일에 마뜩치 않아 할수 있기에 적잖게 망설여야 했음에 틀림없다. (먼저 썼던 최초의 스탠드얼론인 [Envy the Night]은 그래도 크라임 소설이었지만, [숨은강]은 초자연적 호러물로 180도 다른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스타일의 변화는 마이클 조던이 농구가 아닌 야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만큼이나 주변 사람들을 놀래키고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이 작품은 코리타의 경력을 더욱 빛나게 해준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Philip Kerr라는 작가는 "시리즈 작가들은 언제 멈춰야할지 모른다,며" 같은 주인공이 나오는 시리즈를 너무 많이 쓴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코리타는 과감하게 링컨 페리 시리즈를 잠정 중단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는데도 다른 방식을 찾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면에서 그의 행보는 데니스 루헤인이 자신의 스타일과 다른 [살인자들의 섬]을 출판했을 때와 비교되기도 한다.( 한 인터뷰에서 코리타는 데니스 루헤인이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한가지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루헤인의 용기를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코리타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된 작품이 데니스 루헤인의 [가라, 아이야 가라(1998)]였으며, 심지어 데니스 루헤인의 워크샵 강좌에 학생으로 강의를 들은 경험도 있다고 하니,루헤인이야말로 그에게 많은 자양분을 제공한 듯 싶다. )



영감



Joshua Bell과 Edgar Meyer(작곡)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곡 "Short Trip Home".

이 곡은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에게 욕조에서 흘러넘치는 물처럼, 코리타에게 엄청난 영감을 가져다 주었다.

("Short trip Home"..제목도 의미심장하다. 15장에서 조시아가 꾸는 꿈속에서 노인이 "고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여러차례 강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음악을 들으며 (특히 같은 트랙을 반복해서) 글 쓰는 것이 버릇이라는 코리타는 이 바이올린 곡으로부터 [숨은 강]의 스토리텔링 감을 자극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 음악이 어떤 이야기를 필요한다고 느꼈기에 이 작품을 썼으며, 이 작품을 쓰면서 수천번을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음악을 찾아보았고, 처연하고 구슬픈 바이올린 멜로디를 들으면서, 바이올린 연주이야기가 나오는 9장과 27장, 30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멜로디가 그를 품에 안아들고 터널을 지나 의식세계로 안내했다. 아름답고 편안한 노래였다. 음악이 잦아들면서는 너무도 슬퍼졌다. 음악을 보내기가 싫었다.(27장/p.214)" 이 글 그대로다. 과거를 초대하는 선율.

코리타는 특히 '9장-시간이 흐른 뒤에'와 30장 -만가(輓歌)'에서 눈을 감고 죽은 사람을 위한 바이올린 곡을 연주하는 소년의 음산한 이미지를 이 음악을 듣고 떠올렸다.(이 음악을 듣고 떠오른 이미지를 고스란히 쓴 부분이 30장(만가)이니, 음악을 들으며 글을 음미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캠밸 브래드포드의 뒷이야기들 전부가 이 노래로 부터 나온 이미지에 빚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을정도로 이 음악에서 영감을 얻었다. (여담인데, Joshua Bell과 Edgar Meyer 모두 코리타의 인디애나 대학 동문이다.)



주인공



주인공 에릭 쇼는 한물간 헐리우드의 카메라 감독이라 이제는 장례식 비디오를 촬영하는 인물이지만, 초감각적 인식능력을 가진사람이다. 과학과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직관과 무의식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사람. 이른바 '밤의 눈'으로 '낮의 해'를 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사진을 보고 사진의 장소가 사진속 인물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일거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내거나, 자동차를 구매하기 전에 끔찍한 자동차 사고가 일어날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는 것처럼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 현상을 겪는 인물이다. 작가가 이 책의 주인공으로 이성적 생각의 눈을 해제하고, 초감각 경험의 눈으로 접속하여 사물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상정한 것은, 이 책에 '초자연적 스릴러(supernatural thriller)'라는 타이틀을 붙일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연구를 무시하는 가장 큰 이유를 마음이 물리적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을 못하기 때문이라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불가해성이 공포의 불을 지피는 질료가 된다고 본다.



이 소설 내에서 적극적인 내러티브의 주체중 한명인 앤 맥키니는 날씨와 기후에 집착하는 노파로, '살아있는 과거' 같은 존재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자신을 찾아온 에릭 쇼에게 생수를 제공하고, 그것을 통해 과거의 재현을 느끼는 그녀는 독자에게 "너희들이 찾으려 한 건 그들의 야망이 빚어 낸 유물이다"라는 소설 도입부의 말을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코리타가 공포 소설에서 드러내고자하는 것은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방식으로 현재와 시시각각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앤 맥키니는 과거에 정보를 알려주는 저장소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기상학을 연구하여 미래(날씨)를 예측하는데 이는 그녀가 과거와 미래를 잇는 매개체로서의 은유가 덧씌워진 존재임을 암시한다.

배경



코리타는 초자연적 요소가 들어가는 소설을 쓸 때 실제 장소를 기반으로 하는 것을 중시한다.

독자에게 친숙하고 알고 있는 장소를 배경으로 플롯을 끌어나가는데, 이번 작품 <숨은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렌치리크 (French Lick)와 웨스트바덴 (West Baden) 마을을 실존하는 장소였고, 생수 사업에 대한 역사도 사실이었다. 지금은 아름다운 5성급 호텔들이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곳이다. (코리타가 느끼기에 숨이 멎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호텔과 촌구석에 가까운 이 지역과의 이질적인 부조화는 그에게 위화감을 가져다 주었다.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있는 그 기묘한 동거. 그 이유가 신비한 치료제로서의 생수가 가져다준 명성때문인 점에 그는 주목했다. 알카포네에서 루즈벨트같은 유명인사들이 이 생수의 효능을 보고자 이 지역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배경과 역사가 작가의 상상적 도정에 초자연적인 스릴러적 요소를 부단히 심어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실을 기반으로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허황된 느낌을 상쇄해준다. 실제로 마을과 호텔을 방문했던 많은 미국독자들은 이 마을의 숨은 뒷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며 읽었다고 한다.

가령,p.144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마을에 대한 구절은 적어도 미국 독자들에겐 이 책의 읽는 재미를 배가 시켜준다.



[...플루토가 악마가 아니라, 대지와 지하에서 비롯된 부의 신이라셨어. 그래서 회사 이름을 그렇게 붙이지 않았겠어? 아버지가 흥미롭게 생각하신 신화는, 플루토가 맡은 임무가 바로 죽은 자들이 강을 건너 심판을 받기 전에 스틱스 강둑에 묶어 두는 역할이라는 부분이었지. 본질적으로 플루토는 여관주인이야. 이 마을에서 물 다음에 나타난게 뭐겠어? 여관들. 아름답고 놀라운 여관들이야."...]







총평



콜론(:)과 세미 콜론 (;) 만큼이나 비슷하게 생겨먹은 세상의 많은 공포물들 중에서 이 작품은 흰 바둑알 속의 검은 바둑알처럼 소재의 차별성이 느껴진다. 세상에, 생수가 주는 공포라니!! 초,중반부에 생수가 만들어내는 기이한 두려움을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한 재미를 주는데 후반부는 보편적인 시간의 흐름을 엉클어 놓을 만큼 폭풍같은 재미가 기다리고 있다. 장르 소설(장편)의 경우 후반부 진행에 비해 초반부의 긴장감이 헐거워서 서사균형이 무너지는 경우가 흔한데, [숨은강]의 경우는 초,중반에도 이완되지 않고 기복없는 긴장감을 유지한다. 완급조절의 솜씨가 어지간하다고 할까.



8살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보았던 -한때는 8대 불가사의라고 불릴 정도로 웅장했지만-폐허가 되어버린 웨스트 바덴 스프링 호텔을 작가는 잊을 수 없었고, 18년후에 이 호텔과 마을 배경으로 묵직하고 순도 높은 공포물을 창조해냈다. 모티프가 된 씨앗을 그는 세밀한 조사와 상상력으로 무럭 무럭 자라나게 했던 것이다. 단순한 일차원적 공포를 넘어서서 작가가 등장인물에 대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을 작품에 심어넣은 점 또한 인상적이었는데, 가령 구원을 상징하는 듯한 앤 맥키니의 마지막 장면은 작품의 품격을 높여준 듯 느껴졌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은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이나 좀비, 괴물류의 으스스함에 기대어 공포감을 주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살과 피를 사방으로 튀게 만드는 발동기를 단 톱 대신에 코리타가 선택한 것은 하늘과 땅을 이어 놓은 노끈 모양의 거대한 토네이도이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이 만드는 파괴적인 공포는 그가 선택한 장르에 적합한 설정이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Lilapsophobia (토네이도에 대한 공포증) 환자가 꽤 많이 있을 정도로, 미국에선 토네이도에 대한 공포심이 대중들 마음의 밑자리에서 유통되어왔다. 그 밑바닥에 소용돌이치는 공포심을 예리한 칼날처럼 파고든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공포소설의 선호도에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평가의 부침(浮沈)이 있을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서늘한 작품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작가의 다른 작품인 링컨 페리 시리즈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 다행히도 코리타가 21세의 나이에 썼던 기념비적인 데뷔작, [오늘 밤 안녕을(Tonight I Said Goodbye)]이 국내출간 되어있다. 공포물과 탐정물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자신의 필력을 뽐내는 마이클 코리타. 공포물에서 빼어난 솜씨를 보았으니, 이제 코리타 소설의 모태가 된 탐정물에서 그의 진짜 색채를 확인할 차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