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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평점 :
선택-결국 우리 모두는 근시 아닐까
15살이 된 요 네스뵈는 어느날 몰데(molde)의 한 박물관에서 사진 한장을 본다.
그 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중에 불을 끄던 소방관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소방관은 묘하게 아버지를 닮아 있었고, 집으로 돌아온 요 네스뵈는 아버지에게 그 사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제2차 세계대전.폭격. 화염.
아버지의 머리속에 부우욱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당시의 기억들.
네스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너의 형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단다. 네가 16살이 되면 알려주려 했지만, 말이 나왔으니 지금 이야기 해주마."
그렇게 해서 듣게 된 이야기는 믿겨지지 않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제2차 세계 대전때 아버지는 독일의 히틀러를 위해서 레닌그라드 외곽에서 러시아군과 싸웠던 것이다. 독일의 나치 군모을 쓰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까지 보니,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던 어린 네스뵈는 자신의 세계가 한꺼번에 붕괴되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스탈린이냐, 히틀러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당시 열 아홉살의 어린 아버지는 히틀러를 선택했던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패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게다가 어린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후 유럽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었다.) 당시의 많은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히틀러를 유럽을 먹어치우려는 공산주의의 야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구원자로 보았었다.
정치적 선택의 갈림길에 대한 딜레마는 진홍가슴새의 습성에 대한 엘렌의 다음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실로 '모든 선택은 하나의 포기(Every choice is a renunciation.)'라는 언명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 이 시기가 되면 진홍가슴새의 90퍼센트는 남쪽으로 떠나죠. 말하자면, 극소수만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에 남는 거예요."
" 여기 남는 새들은 올겨울이 따뜻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남은 거에요. 그렇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 기대가 어긋나면 죽는 거죠. 그렇다면 왜 그냥 만약을 대비해서 남쪽으로 날아가지 않는지 궁금하죠? 그냥 게으른 걸까요, 남아 있는 새들은?"
"중요한 사실은 만약 겨울이 따뜻하면, 다른 새들이 돌아오기 전에 최상의 위치에 둥지를 틀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산된 위험인 셈이죠. 잘 되면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거고, 아니면 완전 엿먹는 거고요. 위험을 감수하느냐 마느냐. 괜히 도박을 했다가, 어느 날 밤 꽁꽁 얼어붙어 나뭇가지에 떨어질 수도 있어요. 봄이 올 때까지 얼어 있는 거죠. 반면 겁이 나서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와보면, 둥지 틀 곳이 없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건 우리가 늘 대면하는 영원한 딜레마예요." (p.17-18)
네스뵈의 아버지는, 더 나아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네스뵈의 아버지처럼) 독일 편에 섰던 1만 5천명의 노르웨이 젊은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한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패자의 입장에 선 그들은 승리로만 자신을 치장하고픈 역사라는 위험한 거울을 통해 비춰질 자신들의 처참한 몰골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근시.
먼곳에 있는 물체를 잘 내다볼 수 없는 시력. 전쟁후 독일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3년간 감옥 생활을 할 줄 알았더라면, 그로인해 그의 가족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봉착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네스뵈의 아버지는 분명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것 처럼,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품 곳곳에 근시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정말로 근시가 되어 가는지도 몰랐다.(p.20)
해리는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근시가 됐나? (p.21)
노인은 대답하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환자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안경을 벗으라고 의과대학에서 가르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근시인 의사들이 환자들과 시선을 피하기 위한 방법인 걸까? (p.34)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난 차라리 근시안적인 도덕주의와 결별하는 쪽을 택하겠어. (p.485)
반면에 앞날을 내다본듯 간교하게 살아남은 노인의 (여기에선 스포일링의 위험이 있으니 노인이라고만 쓴다) 시력은 상대적으로 매우 좋다.
노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베티는 깜짝 놀랐다. 물론 그녀의 명찰에 적힌 이름을 그대로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의 시력이 아주 좋다는 뜻이다. 명찰 속 그녀의 이름은 그 위에 적힌 '접수원'이라는 직함보다도 더 작은 글씨였기 때문이다. (p.126)
이 작품이 기존의 요 네스뵈 작품과는 달리 더욱 깊은 맛이 느껴지는 이유는 소설 속에 사실을 바탕으로 둔 역사성을 과감하게 끌어들인데 있다. 그것도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말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신생국가였던 노르웨이는 아무래도 건전한 국가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서 독일에 편들었던 과거보다는 저항했던 노르웨이의 레지스탕스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정립할 수 밖에 없었다. 종전 직후의 노르웨이는 강력한 저항운동으로 독일에게 대항한 것 처럼 비춰지고 싶어했다. (사실은 저항은 미약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노르웨이 정부와 역사가들은 악령을 항아리에 집에 넣고 봉인하는 것처럼 서둘러 독일 쪽 편에서 싸웠던 과거사를 덮어 버렸던 것이다. 이 경우 역사가가 사실의 친구라기 보다는, 사실의 비굴한 노예이거나 포악한 주인으로 전락한 셈이다.
하므로 요 네스뵈의 이 작품은 용기있게 시간을 거슬러 자신들의 어둡고 슬픈 과거를 드러냄으로서 자국민들이 그 당시의 진실과 상황을 폭넓게 볼 수 있도록 한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어두운 과거와 현재 진행중인 신나치주의와 연결시킴으로서 작품은 당대성까지도 획득하게 되었다. 묵은 상처를 끄집어 냄으로서 당대의 정치적 문맥과 결부시킨 작품이 비단 이 작품만은 아니겠으나,요 네스뵈 고유의 색채를 선보이며 납득할 만한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느껴진다. 내가 앞 문장에서 '용기있게'라는 부사를 쓴 이유는,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개인사가 고스란히 스며있기에, 요 네스뵈의 목소리가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파고드는 목소리의 크기에 따라 비례하여 작품도 깊이와 설득력을 더 크게 얻었다.
"우리가 받은 처벌에 대해서라면 억울하지 않소. 난 현실주의자요. 우린 정치적 필요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만 했소. 난 전쟁에 졌고. 그러니 불평따윈 하지 않아."(p.339)
"원통한 건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은 거요.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소. 우리가 목숨걸고 이 나라를 지켰다는 걸. 그 사실이 위안이 된다오." (p.339) 이런 말은 실제로 요 네스뵈의 아버지가 했을 법한 매우 사실적인 말들이다.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여전히 이해받고 싶은 거야.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지, 알다시피.(p.533)"나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누가 결정할 수 있겠나? 심리학자? 법정? 정치가? (p.533)" 이런 대사들은 당시에 독일쪽으로 선택했던 사람들의 입장(아버지)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아서 확실히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네스뵈의 노력 때문일까. 최근의 젊은 역사가들에 의해 당시의 그 치욕적인 과거에 대해 객관적으로 역사를 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출간된 히브리어 판본의 [레드브레스트].
제 2차 세계대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민감한 주제인데,
리뷰를 읽어보니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다.
또 하나의 주인공 -매르클린 라이플
"매르클린 라이플은 독일에서 생산된 반자동 사냥총입니다. 라이플 중에서 가장 구경이 가장 큰 16밀리 총알을 사용하죠. 원래는 물소나 코끼리처럼 덩치 큰 동물들을 사냥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970년에 처음으로 생산되었는데, 겨우 300대가 제작되었던 1973년에 독일 정부가 판매를 금지시켰죠. 이유는 몇 가지의 간단한 조정과 매르클린의 망원조준기만 있으면 최강의 살인 무기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73년 당시 이미 세상에서 수요가 가장 많은 암살 무기가 됐죠. 300대의 매르클린 중에서 최소한 100대는 살인청부업자 그리고 바더 마인호프나 붉은 여단 같은 테러 단체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흠. 100대라고 했나?" 마이리크가 인쇄물을 다시 해리에게 건냈다. "그렇다면 나머지 200대는 원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군. 사냥에 말이야."
"매르클린은 무스 사냥을 비롯해 노르웨이에서 흔한 어떤 사냥에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정말인가? 왜 그렇지?"
(중략)
"첫째로 노르웨이에서 사냥은 백만장자의 스포츠가 아닙니다. 망원 조준기가 달린 매르클린은 15만 마르크 정도 하는데, 다시 말해 벤츠 한 대 값이죠. 게다가 실탄 하나에 90마르크나 합니다. 둘째로 16밀리 총에 맞은 무스는 마치 기차와 충돌한 것처럼 보이죠. 꽤 지저분해집니다."
[레드브레스트], p.201-202
이 책에서 방안으로 들어온 코끼리만큼이나 강렬하고 묵직한 존재감을 보인 것은 '매르클린(Märklin)'이라는 사냥총이었다.
나는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으며, 즉각적으로 '1막에서 총이 벽에 걸려있었다면, 그것은 마지막에 반드시 발사되어야한다. (If there is a gun hanging on the wall in the first act, it must fire in the last. )'라는 안톤 체홉의 말을 떠올렸다. 소위 '체홉의 총'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문구. 보통은 복선(foreshadowing)과 군더더기 없는 글 쓰기에 대한 대표적인 말로 언급되는데, 나는 그런 문학 장치적인 측면을 떠나, 액면 그대로 이 말을 생각했다. 초반부분에 나온 이 어마어마한 살상무기가 작품의 어느 순간에 발포되리라는 예상을 한 것이다. 과연 이 총을 맞을 대상은 누구이며,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목동의 피리소리를 따라가는 수백만마리의 쥐떼중의 한 마리처럼 정신없이 책을 읽어 나갔다.
생각해보니, 요 네스뵈의 이 '매르클린 라이플'에 대한 사랑은 꽤 깊은 듯 싶다. 뛰어난 완성도를 보였던 후기작 [레오파드]에도 매르클린 라이플에 대한 언급이 있어 [레드브레스트]를 읽은 독자들을 반갑게 했다.
물건을 둘러보던 해리의 시선이 검은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찍힌 글자에 멈췄다.
"이거, 제가 생각하는 물건이 맞습니까?" 해리가 물었다.
"매르클린이지. 아주 귀한 라이플이야. 실패작이라서 몇 자루밖에 생산되지 않았어. 지나치게 무겁고, 구경도 크지. 코끼리 사냥에 쓰인다네."
"그리고 인간 사냥에도요." 해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총에 대해 아나?"
"세계 최고의 망원 조준기가 달렸죠. 100미터 앞에서 코끼리를 잡을 때 필요한 물건은 아닙니다.암살용으로 딱 좋죠." 해리가 손으로 케이스를 쓰다듬자, 추억이 밀려들었다. "네, 이 총에 대해 좀 압니다."
-요 네스뵈,[레오파드], p.241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이 총의 실재 존재여부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Märklin을 구글링해보면, 다음 사진과 같은 주로 독일산 장난감 기차모형의 이미지들이 찾아진다. 그리고 Marklin rifle을 검색어로 넣으면 미국산 '말린 사냥총(Marlin rifle)'이 검색결과에 잡힌다.
"어떤 총을 원해요?"
"라이플."
"그거야 쉽죠."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매르클리 라이플."
"매르클린? 장난감 기차회사요?" 올센이 물었다.
([레드브레스트], p.141)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면서 찾아본 최종적인 검색 결과를 여기에 밝히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매르클린 사냥총은 작가 요 네스뵈의 순수한 창작물이다. 요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총이란 이야기다. [레오파드]에서 화제가 되었던 가공할만한 고문기구 '레오폴드의 사과'에 이어서 [레드브레스트]에 등장하는 이 진귀한 사냥총도 순전히 요 네스뵈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총의 실존 여부에 대해 궁금해서 추적하던 중, ( BBC에서 제작한 55분짜리 월드북 클럽 인터뷰를 듣다가) 결국 작가의 입으로 '이것은 제 순수한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인터뷰에서 이 총 매르클린에 대해 너무 그럴듯하게 (사실적으로) 요 네스뵈가 이야기해서 진행자인 Harriett Gilbert가 실제로 존재하는 총이냐고 거듭 물었을 정도였다.
작가는 이 총의 이름을 장난감 기차로 유명한 독일의 유서깊은 장난감 회사인 Märklin에서 가져왔으며, 개인적으로 이름이 맘에 든다고 밝힌다. 혹자는 잘 알려진 미국의 '말린 사냥총 (Marlin rifle)'을 연상케하는 스펠링에 독일적인 분위기를 주기 위해 독일 장난감 회사 이름을따온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매르클린의 존재에 대한 논란은 이미 총기 매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거대한 16밀리 총알을 사용하는 것과, 코끼리나 물소사냥용이라는 묘사를 근거로 실존하는 사냥총 중에 영국산 600 Nitro Express (15.75mm의 총알을 사용)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꽤 있었다.이것은 1899년 개발된 두개의 총신을 가진 코끼리 사냥총이다. 아래에 올린 사냥총은 매르클린의 모델이 되었을 법한 600 Nitro Express 사냥총. 매르클린처럼 코끼리나 물소 사냥을 위한 만들어진 총이다.
15.75밀리미터 총알의 위용.(사진에서 오른쪽) 매르클린의 거대한 총알은 대략 이런 느낌이다라는 것을 이 사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매르클린 사냥총을 손에 넣은 범인이 최후로 노리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이 총의 파괴력은 과연 어느정도일까,코끼리를 쏘기 위해 만든 총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저런 궁금증을 당의정 삼아 핥으며 책을 읽으면 어느새 책은 끝나버린다.
이 작품의 번역에 관하여
요 네스뵈의 전담 영문 번역가인 돈 바틀렛(Don Bartlett)에게 어떤 번역가를 존경하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인터넷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시절에 작업했던 번역가들'이었다.
그렇다. 필경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번역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인터넷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현재에도 번역이란, 특히 좋은 번역이란 좀처럼 이루어 내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돈 바틀렛에 따르면 좋은 번역을 위한 최고의 시나리오는 작가,번역자,편집자 셋이 완전히 참여해서 서로를 믿으며 일하는 것이라 한다. 번역자가 원문 텍스트에서 읽을만한 버전의 번역본을 편집자에게 넘기면, 편집자는 언어의 사용과 작품과 시리즈 내에서 일관성을 점검하는 일을 한다. 요 네스뵈의 작품의 경우, 번역자와 편집자가 이런것들을 확실히하기 위해 매우 밀접하게 작업한다고 밝힌다.
국내 번역본의 제작 과정을 상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출판사의 웹사이트를 들낙거리며 알게 된 것은, 편집자와 번역자 모두 충실함과 완벽을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특히 빼어난 번역가라고 칭찬받는 돈 바틀렛이 번역한 영어 판본 번역본을 능가하는 면은, 노진선님의 번역은 독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책에 대한 배경을 모두 숙지한 후, 꼼꼼하게 쓰신 역주는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되었다.(영어판본에는 역주없음.)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이 책에는 독일어와 러시아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영어판본에는 독일어와 러시아가 그대로 나오고 영어번역이 되어있지 않기에 그 언어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기에 매우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Redbreast를 울새나 개똥지빠귀가 아닌, 진홍가슴새로 번역한 부분은 특히 탁월한 선택이어서 감탄했다. 맨 첫장에 작가가 인용한 셀마 라게를뢰프의 ' 진홍가슴새의 비밀(Christ Legends)'의 이미지와도 맞고, 개똥지빠귀라는 이름에서는 얻을 수 없는 시적(詩的)인 분위기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에 따르면 돈 바틀렛의 번역이 훌륭하지만, 언어란 복잡한 것이기에 노르웨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면서 사라지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이 작품에서 심어놓은 '유머(humor)'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노르웨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 참여하거나 조절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작가가 할일은 그저 믿고 맡기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개인적으로 국내판 [레드브레스트]의 경우, 번역이 참 좋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p.332쪽의 (집으로 가는 길에 해리는 자신에게 어떤 벌을 줄까 고민했다. 뭔가 가혹하면서도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벌이어야 한다. 에어로빅 수업을 들어야겠다.)
이런 부분에서 해리의 유머감각이 드러나 빙긋이 웃게 되었고, part 5 [일곱날]에 해리홀레가 엘렌의 자동응답기에 남기는 장면에선 차오르는 슬픔외에는 선택할 감정이 없었다. 이렇게 독자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것의 일차적인 공로는 물론 작가겠지만, 좋은 번역없이는 그러한 전달이 불가능하다고 단언 할 수 있다. 영문판본으로 읽었을 때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었을 때 훨씬 좋았고 감동적인 이유는 내 짧은 영어실력 탓이 있었지만, 위화감없는 매끄러운 번역의 덕이 무척 크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싹 걷힌 듯한 느낌이랄까.
총평
게오르그 루카치는 위대한 작가의 특징으로 '진실의 대한 갈증, 현실성의 열광적인 추구,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요 네스뵈는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시킨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특히 기존의 두 작품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도 좋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은 루카치가 말한 예술가는 외부세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비출수 있는 청명한 거울 역할을 한다라는 말을 상기 시킨다. 봉인해 버리고 싶었던 과거사를 왜곡없이 비추는 용기 있는 작품이다. 암초로 치부되던 노르웨의 과거사를 가감없이 보여주어 오히려 제대로 된 방향을 인도해주는 등대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거대한 체스판의 졸(卒) 신세였던 젊은이들이 내린 선택이 결국 어떤 지점까지 그들을 인도했는지를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했는데, 이를 통해 사회의 부당한 오해를 씻고 과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했다. 주안점을 역사쪽에 맞추어도 상당히 흥미있고, 미스터리 스릴러 쪽으로 맞춰도 꽤 만족스럽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 네스뵈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런 큰 얼개의 작품을 만들기위해서는 아무래도 작가적 역량이 담보되어야하는데, 역시 요 네스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큰 주제의 무게에 스토리가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기대치를 훌쩍 넘어선다.
히브리어로 된 성경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유명한 성경 테마인 다윗과 밧세바, 우리아의 일화가 작품속의 인물들과 포개져서 강한 상징성을 드러낸다. 이런 기술적인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빛나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요 네스뵈만이 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가 있어서일까. 읽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진다. 몇몇 장면과 문장은 몇번이고 읽고 싶을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답다.
이런 기분을 나 혼자만 느끼기엔 미안할 정도로 작품이 근사하다. 주저없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