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문 - 달이 숨는 시간,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7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카지노 칩보다는 물에 빠졌을 때의 기포에 초점을 맞춰 찍은 사진이다. 카지노 칩을 반복적으로 던져서 튀어오르는 물방울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택했다. 물거품이 헛됨, 공허함을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 한글 판본 표지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소설의 배경은 카지노의 도시 라스 베이거스다. 사막에 세워진 욕망의 도시. 트럼프와 카지노 칩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

 

코넬리가 만들어낸 소우주

 

스티븐 킹은 [뉴요커]와의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이란 땅 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마이클 코넬리가 발굴한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인 셈이다. 그는 사람이 자고 있는 호텔 방에 들어가 현금이나 보석, 노트북 컴퓨터등을 훔치는 사람의 이야기를 LAPD 경찰로부터 듣고, 이 작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캐시 블랙(Cassie Black)을 구상했다고 한다.

범죄자에 대한 짧은 이야기로 작가는 독자들이 푹 빠지게 만드는 하나의 소우주를 창조해 냈다.

이 전까지 경찰의 관점에서 8권의 책을 쓰던 작가에게 이런 범죄자의 시선에서 쓴 작품은 적잖은 도전이었음을 고백한다.

게다가 이전에는 쓴 적이 없었던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도 이 책이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 속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

작가는 주인공 캐릭터에 사실감을 불어 넣기 위해,"여자 (a woman)라면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보다는 " 이 사람(a person)이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라는 관점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Void Moon -제목이 갖는 상징성

 

 

아직도 점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들의 점괘로 혜성처럼 나타날 불길한 날들.

- 이성복(시인)

 

 

고도로 기술문명이 발달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미신을 계속 믿고 있다. 미신이 여지껏 건재한 까닭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대해 개인을 초월하는 어떤 힘이 있다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믿기 때문일 것이다.

미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은 어디인가, 우선 스포츠 분야를 떠올릴 수 있다. 프로야구선수들이 타석에서 보이는 일련의 행동,의식(가령 정해진 횟수만큼 흙을 발로 차고, 헬멧등을 고쳐쓰고 정해진 횟수만큼 방망이를 투수쪽으로 휘두르는 행위)은 비논리적이고 터무니 없어 보이지만, 그런 행위를 보였을때 얻었던 홈런이나, 안타와 같은 보상행위로 인해 강화된 행동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마음 회로에 그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연결고리를 형성하게된 것이다.

스포츠 분야말고 이런 미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또 다른 곳은 바로 도박판이다.

행운과 불운이 지배하는 곳.

이 책은 수 많은 사람들이 운과 불운을 뼈저리게 느끼는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이 작품에는 많은 미신, 점성술, 카발라, 오컬트적인 요소들이 그득하다. 등장인물 중 레오 렌프로의 존재이유 중 하나는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다. 그는 점성술이 가장 흥했다는 신바빌로니아의 사제가 되었어도 손색이 없었을 정도로 점성술과 미신의 숭배자이다.이름도 '사자자리'를 뜻하는 Leo 아닌가. (그 옛날,작업을 앞두고 레오가 자신과 맥스에게 강요했던 온갖 규칙과 예방책이 생각났다. 작업 전에는 검은색에 베팅하지 마라., 닭고기를 먹지마라. 빨간 모자를 쓰지 마라 등등. 그런 것들이 캐시에게는 금을 밟으면 엄마 등이 부러진다는 식의 미신처럼 느껴졌다. (p.62))

 

하물며 주인공은 미신적 행위를 배제 하기 힘든 도둑이다. (불잡히느냐 마느냐가 너무도 중요한 그들에게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금기와 미신은 태생적으로 그들에게 씻어내기 힘든 무엇이다.) 프롤로그에서 맥스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건 의식의 일부라고 말하는 장면 (맥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건 의식의 일부였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p.6))은 바로 이런 도둑들의 심리와 행동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은 1999년이다. 세기말적 분위기에 휩싸였던 시기아닌가. 작가는 영민하게도,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에게 검은 고양이와 같은-불운의 상징인 보이드 문(Void Moon)이라는 개념을 작품에 끌어들였고, 급기야는 제목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잘 찍은 달 사진은 아니지만, 직접 찍은 사진으로 올리고 싶어서 200mm 렌즈로 찍어본 보름달 사진. 코넬리는 달이 갖는 상징성을 십분 활용하여 작품을 썼다.)

 

근데 보이드 문이 뭐죠?

"점성학적 현상이야. 달이 한 별자리에서 다른 별자리로 옮겨갈 때, 어떤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때가 생기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다음 별자리로 들어갈 때까지 '보이드 오브 코스 (void of course)'상태에 있다고 해. 그게 보이드 문이야. (중략)

그 시간은 운이 따르지 않는 때야, 캐시. 보이드 문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 어떤 나쁜 일이라도 말이지. 그러니까 그 시간에는 꼼짝 말고 있으라는 얘기야." p.83

 

또한 작가는 달이 갖고 있는 미신적인 요소를 십분 활용한다. 미국 사람들은 보름달을 너무 오래 쳐다보는 사람은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믿거나, 보름달이 뜨면 말다툼이 생기고,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미신을 슬쩍 건드린다.

 

그럴 만도 하죠. 오늘 밤엔 사람들이 좀 거치네요. 달 때문인가봐요. 보름달이에요. 못봤어요? 이 도시에 있는 어떤 네온 간판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어요. 언제나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이 도시 사람들이 좀 더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요. 여기 오래 있어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봤어요.

p.150

 

또 하나. 달의 순환과 여성의 생리적 순환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달이 여성성을 상징한다는 것은,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 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달(Moon)'이 들어가는 제목과 여자 주인공을 처음으로 전면에 내세운 점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달은 떠있는 시간때문에 밤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밤에 활동하는 도둑인 캐시 블랙(Cassie Black). 검정(Black)은 밤을 상징하는 색이라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작가가 여러모로 신경 쓴 이름이다.

void라는 단어는, 공허한, 텅빈 (느낌)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 영어로 '그 무엇도 그의 죽음이 만들어낸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라고 쓰면, 'Nothing can fill the void made by his death.' 정도가 될 텐데, 캐시 블랙의 마음이 딱 그러하다.

그녀는 인생의 순간 순간, 추운날 곱은 손을 녹이기기 위해 불을 쬐듯이 죽은 스승이자 남편인 맥스가 만들어내는 추억에 언마음을 녹인다.그리고 그리움은 뾰족한 송곳이 되어 그녀를 찌른다. 그렇다면 Void Moon이란 '공허한 여인'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녀의 기억은 끝없는 풀밭과 같다. 맥스의 망령이 생의 순간 순간마다 달그락 거리며, 그녀의 마음 속에서 풀을 뜯고 있다.

 

 

준비 작업을 하는 동안 캐시는 자신의 스승이자 애인이었던 맥스와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랐다.클레오파트라 호텔에서의 비극적인 결말은 빼고 좋은 시절만 끄집어낼수는 없었다. p.54

 

자꾸만 맥스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했던 시절과 그의 마지막도 생각났다.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지독한 고통과 회한에 사로잡힐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라스베이거스는 항상 풍경이 변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한다. 본질적으로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한 한 장소가 그토록 애특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이 그랬다. 그리움이 사무쳤다. 캐시는 맥스 이후로 다른 남자를 사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고통은 자신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그리고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유일한 재산일지도 모른다. p.89

 

작품 전체에 맥스에 대한 캐시의 사랑과 그리움이 미만해 있기때문일까, 내가 받은 전반적인 느낌은 애틋함과 애잔함이었다. 범죄자인 캐시에 대한 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런 캐시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삶 속에서 맥스의 윤곽을 지우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공허함의 바다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에게 괴로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한 그녀에게 또 다른 공허함을 주는 것은 딸과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공허함과 동시에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 지점에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채우고 있는 캐시 블랙의 모성애와 엄마로서의 책임이다. (앞서 말한) 달이 품고 있는 여성성때문에 점성술에서 달은 어머니, 모성애, 자궁, 가정을 상징한다.

 

마이클 코넬리는 이 작품을 완성한(2000년) 무렵, 처음으로 아버지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신의 글쓰기에 아버지/어머니적인 본능이 스며들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버지다움으로 충만했던 코넬리가 자신의 부성애을 캐시 블랙에게 투영시키며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void에는 트럼프 카드에서 짝패가 없는 것 나타내는 뜻도 있다.( a lack of any cards in one suit)

작품의 배경은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 하면, 카지노, 카지노하면 트럼프 카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이 void라는 단어의 다층적인 의미를 이용하여 제목으로 사용하고, 또 그런 장면을 작품 속에 집어 넣은 코넬리에게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재빨리 카드를 꺼내 한장씩 넘겼다. 확인하고 넘어가는 카드가 많아질 수록 두려움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카드도 하트 에이스가 아닌 것을 확인 했을 때, 캐시는 큰 소리로 욕을 내뱉으면서 카드 뭉치를 집어던졌다.

(중략)

"뭐야? 52픽업 게임하고 있었어?"

"51픽업이라고 해야 맞겠는데요." p.316

 

작가는 이것에 멈추지 않고, 두 주인공을 상징하는 카드를 독자에게 내어 보인다.

 

 

두 명의 주인공 - Ace of Hearts VS Jack of Hearts

 

에이스 오브 하트(Ace of Hearts)의 특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하트 에이스'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을 끌어당기며, 하트가 감정을 뜻하기에 누군가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의미한다. 가령 엄마와 딸이나 남편과 아내, 연인같은 친밀한 관계 말이다. 비록 이 카드가 사랑에 대한 열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돈에 대한 욕구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 카드의 숙명적 존재에 해당하는 카드가 바로 다이아몬드 에이스이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니, 마이클 코넬리가 다른 카드가 아닌 '에이스 오브 하트'를 '캐시 블랙'을 상징하는 카드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 듯 보인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선인이 아니라, 악인들인데, 주인공 캐시 블랙이 다른 주인공들과 차별화 되는 것은 바로 마음(heart)를 갖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마이클 코넬리는 독자들이 캐시 블랙이 감옥에 들어가게되었던 이유가 '사랑'때문이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캐시 블랙.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

맥스에 대한 사랑의 추억 속에서 매일 그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맥스와 자신의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넘치며, 자신과 딸의 행복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

카드 점에서 이 카드는 사랑과 행복을 나타내는데, 과연 캐시는 그녀가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와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한편 잭 오브 스페이드 (Jack of Spades)는 이 책의 남자 주인공에 해당하는 잭 카치(Jack Karch)의 별명이다.

 

잭 오브 스페이드 카드는 오랫동안 거짓말쟁이,사기꾼, 악당, 죄수,반역자, 도둑, 질투..등 좋은 않은 것의 대명사로 불리워 왔던 카드다. 간단히 한마디로 정의하면 나쁜 녀석(The bad boy)라 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닌 카드라할까. 작가가 이름이나 별명을 허투루 짓지 않으며 상당히 고심해서 만드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 결국 잭 카치의 별명으로 이것 만한 것은 없다.

특히 spade는 영어로 '삽'이란 뜻이 있기에 시체를 사막에서 처리하기위해 자동차 트렁크에 삽을 넣고 다니는 잭 카치에게 어울린다.

"자넬 잭 오브 스페이드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먼. 트렁크에 삽을 넣고 다니니 말이야."(p.251)

사실 스페이드는 영어로 '삽'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원래는 '스파다'라는 이탈리아어(스페인어로는 '에스파다')에서 기인한다.

'스파다'의 의미는 '검(칼)'을 의미하며, 스페이드의 모양도 칼모양에서 연유한다. 하므로 이 작품 속에서 폭력과 광기의 상징과 같은 잭 카치가 잭 오브 스페이드 카드로 설정한 것에 대해 설명된다. Jack of Spades가 상징하는 인물은 '올거 더 데인 (Ogier The Dane)'이라는 샤를 마뉴의 12 성기사중 한 명인데, 전설에 따르면 Courtain이라는 명검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이래저래 검과 관련된다.

 

잭 카치(Jack Karch)의 성(姓)인 Karch는 'karc'에서 왔는데, karc의 의미가 중세 독일어의 '교활한 (cunning), 남모르게 살짝하는 (Sly)'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처럼 많은 성들이 처음에는 별명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교활한 잭' 정도가 되겠다.

 

작가가 '캐시 블랙'이란 이름과 '잭 카치'란 주인공의 이름에 매우 신경을 썼다는 것은 작품의 여러 대목에서 드러난다.

다음은 캐시 블랙과 잭 카치에 대한 이름 관한 작가의 설명으로 사용된 것.

 

캐시. 어떤 이름의 약잔가? 카산드라?"

"캐시디요."

'부치 캐시디 할때 그 캐시디? 부모님이 범법자를 좋아하셨나보군.'

'아뇨. 닐 캐시디 할 때 캐시디요. 아버지도 항상 여행을 다니셨죠. 어쟀든 그렇다고 들었어요."

p.323

 

잭 카치는 어릴 때 종종 마술사인 아버지와 합동 마술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스트립의 여러 카지노와 호텔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유명 마술사 '놀라운 카치!'이다.

아들 카치는 '잭 오브 스페이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는 아버지 카치가 아들 카치를 우편낭에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그 우편낭을 다시 커다란 상자에 넣은 후 자물쇠로 잠갔다 다시 열자 아들은 사라지고 대신 스페이드 잭 카드 한 장만 남아있던 마술쇼에서 유래한 것이다.

p.243

 

 

캐시 블랙과 잭 카치는 둘다 범죄자라는 점에서만 같을 뿐, 둘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캐시 블랙은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마음 속에 그리며 살아 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가 타히티 섬을 자신의 도피처이자 영혼의 고향으로 삼은 것처럼, 캐시와 맥스는 그 곳을 생각하며 현실을 견뎌 낸다.

 

그 후 캐시와 맥스는 섬으로 갔고, 복제를 하거나 타락시킬 수 없는 곳이 적어도 한 군데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88

 

마지막을 위하여,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위하여.(To the end. To the place where the desert is ocean.) (p.151)

 

 

 

잭 카치가 캐시 블랙의 집에서 발견한 액자 뒤쪽 판지에 적혀 있는 써머싯 몸의 글을 통해 작가는 슬쩍 [달과 6펜스]와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 고개를 들어 타히티의 윤곽을 보는 순간, 나는 이곳이 내가 평생동안 찾고 있던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I looked up and saw the outline of Tahiti and I realized this was the place I had been looking fo all my life.)"

 

여담인데, [달과 6펜스]라는 작품 제목에도 달(Moon)이 등장한다. 익히 알려진대로 달은 '꿈'을, 6펜스는 '현실'을 의미한다. 캐시 블랙이 억눌린 과거라는 울타리 속에서도 '달'을 꿈꾸며 사는 인물이라면, 잭 카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잭 카치가 끊임없이 25센트짜리 동전을 만지작 거리며 동전 마술을 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세계의 전모는 다음과 같은 양식으로 이해된다.

 

카치는 팔츠 너머에 있는 관목 지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조슈아나무를 바라보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막은 황량한 모습일 때 진정으로 아름답다.

p.230

 

사막이 사막일 때 진정 아름답다고 느끼는 냉혈한. 욕망의 도시를 대변하는 것 같은 인물. 그의 광기는 모두 이런 세계관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반면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은 쫓으며 삶을 살아가며 그것이 다름 아닌 마음(heart)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캐시 블랙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극명한 대조가 주는 긴장감이 끝까지 무기력해지지 않으며 독자의 주의를 끈다.

 

그런데, 잭 카치를 작품내에서 지독하게 잔인한 살인마로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악당인 캐시 블랙에 몇 백배 악한 인물을 만들어낸 이유는 독자가 상대적으로 선한 캐시 블랙을 응원하고, 감정이입을 통해 작품 속에 빠져들게 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잭 카치는 소위 도덕적 사고능력, 충동적 행동 욕구에 제동을 걸고 억압하는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싸이코페스로 같은 존재다.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과 (살인)욕구를 서슴없이 따르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악몽 속에서나 해봄직한 행동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라 하겠다. 함부르크의 사회학자 얀 필립 림츠마는 감정이입이 결여되며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고 하는데, 잭 카치가 바로 그런 타입의 악인인 셈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런 악인은 소설 속에서 판지처럼 일차원적인, 전형적인 인물이되기 쉬운데, 스릴러의 대가인 코넬리는 잭 카치의 아버지와 연관된 과거를 슬쩍 슬쩍 이야기 속에 끼워놓는 기술을 써서 잭 카치란 악인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실로 질투심이 들 정도로 대단한 솜씨다.

 

제인 데이비스 (Jane Davis)

 

그런데, 한편으로는 작가의 작명에 대해 너무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일은 금물일 듯 싶다. 꿈보다 해몽이 되기 십상이다. 가령, 캐시 블랙이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여권에 새겨 넣은 새 이름이 '제인 데이비스(Jane Davis)'인데, 어떤 대단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뜻 없이 지은 작가 주변인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 근원을 둔 이름들의 십중 팔구가 야훼(하나님)와 관련이 있기에, 그것을 그럴싸한 의미망으로 잡아내어 작품을 해석해 나갈 수 있겠지만, '제인 데이비스'는 단지 마이클 코넬리의 작가 웹사이트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는 여동생 이름일 뿐이다. 데이비스란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여동생 제인 코넬리. 다시말하면, 캐시 블랙이나 잭 카치처럼,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맞춰 특별히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이쯤에서 사이트 만들고, 관리하느라 애쓰고 있는 여동생 이름을 한 작품 정도에는 써줘야 겠네."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넣어줬다는 느낌이랄까.

코넬리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작명 습관은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탄환의 심판]에 등장하는 미키의 조사원 탐정인,'데니스 워치에초브스키'란 발음이 쉽지 않은 이색적인 이름의 소유자가 있다. 이 인물은 코넬리가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이라 감사의 의미로 작명하여 작품 속 인물의 이름으로 활용한 것이다.([탄환의 심판] 맨 뒤에 있는 코넬리가 쓴 '책이 나오는데 수고해줘서 감사하고 싶은 인물'에 어김 없이 '제인 데이비스'가 있다.이 책 [보이드 문]의 '감사의 말'에도 '내 웹사이트의 디자이너이자 관리자인 제인 데이비스에게도 항상 웹사이트를 최신으로 흥미롭게 꾸며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라고 밝히고 있다. 제인 데이비스가 코넬리의 웹페이지 마스터이자, 여자 형제라는 것은 코넬리 팬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

이런 뒷이야기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마치 인류가 달을 정복하기 전에, 달에 대한 이런 저런 환상과 이야기를 가졌지만, 달 착륙 이후 달의 실체를 알고, 낭만적 환상이 깨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하지만 작가는 작품을 쓰고, 그것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들 몫이니(오독(誤讀)은 세상 모든 독자의 특권이며, 이해는 오해이 일부일 뿐 아닌가.), 작가의 작명 의도가 원래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총평

 

마이클 코넬리는 본인이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는 조건 하에 이 작품의 영화화 권리를 팔았고, 그것이 예정대로(2003년) 딤임팩트와 피스 메이커등을 만들었던 미미 래더 감독에 의해 영상으로 옮겨졌었더라면, (캐시 블랙 역에 다이안 레인, 잭 카치역에 알파치노가 거론되었다고 한다) 영화 개봉과 함께 출간되어 우리는 이 근사한 작품을 좀 더 일찍 접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산되면서 우리는 이 걸작을 자그마치 13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뒤늦게 공개된 이 작품이 전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다. (캐시 블랙이 자신의 작업에 디지털 카메라를 쓰지 않고, 폴라로이드를 쓰는 장면에서만 그런 느낌을 좀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걸작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지만 이 작품 [Void Moon]은 코넬리 최초의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도 부각되지만, 무엇보다 코넬리가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작품이었기에 더욱 의의가 있다. 범죄자가 주인공이기에 독자들은 쉽게 동화되거나 연민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 게다가 독자가 이런 범법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해야하기에 더욱 힘들다.

마이클 코넬리는 독자의 동화를 위해서 세가지 전략을 썼다. 첫째 여성 주인공을 망각만이 구원이 될 것 같은, 과거의 그림자에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 속에 놓았다. (그것에 더하여, 모성애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공유하는 레오와 정서적 공감대도 작품 전체에 애잔함과 서글픔의 색조를 띄는데 큰 역할을 했다.)

둘째,여자 주인공을 뒤쫓는 '악의 화신'이라 불러도 좋을만큼의 악인의 존재다. 캐시의 피에 흐르는 범법자의 주스가 애교로 느껴질 만큼의 강력한 싸이코패스라 그녀의 죄는 쉽게 희석된다. (이 작품은 잭 카치의 등장으로 굉장한 스피드를 얻는다. 거장의 솜씨로 악인이지만 무척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전형성으로 채색된 '죽은' 인물이 아닌 탄력있는 악인이다. 악(惡)이 오롯이 자신의 이익에 의해서만 조정되는 행동이라 예나지금이나 우리의 마음을 끌기 때문에 그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셋째,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 최고의 전문가인 점을 부각 시켰다. 중반부에 펼쳐지는 그녀의 솜씨는 비록 범죄이긴 하지만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내가 스릴러에 대해 문맹이나 다름없었던 시절, '스릴러'라는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바로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이 작품을 읽은 후 -나는 다른 수 많은 독자들처럼- 굶주린 듯 그의 책을 구해서 읽었고, 이 책 이후로 장르 소설에 대한 내 마음 가짐이 영원히 달라지고 말았을 정도로 마이클 코넬리는 내게 의미 깊은 작가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여러 작품들을 두루 읽으면서, 스릴러 읽는 재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막막한 슬픔의 분위기를 작품 전반에 스며들게 하면서, 한편으로 불꽃을 튀기며 타들어가는 도화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향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본원적인 서정을 표출하면서, 긴장과 공포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솜씨를 보고 있자면,어째서 코넬리를 스릴러의 제왕이라 부르는지, 그리고 왜 그가 빚어낸 재미에 불잡혀 우리가 꼼짝할 수 없게 되는지 새삼 납득이 간다.

책을 읽을 때,책의 내용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록 우리 두뇌는 관련된 내용을 의미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화학물질을 방출한다고 한다.그렇다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대부분의 독자는 그로인해 격렬한 감정적 반응을 나타낼 듯 싶다.

캐시 블랙이 내리는 선택은 뜻밖의 선택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기에 차오르는 감동에 닫혔던 우리의 마음이 활짝 젖혀지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는 그녀 뒤를 잭 카치의 망령도, 자신의 범죄에 대한 갈망도, 맥스에 대한 죄책감도 따라붙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 보다 앞서 달려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우리도 그녀와 함께 마냥 달리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동력이 끊어지고, 절망의 그림자를 밟을 때마다, 이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게 될 듯 싶다.

 

끝내 스릴러와는 친해질 수 없다는 독자들 조차, 이 책을 한 번 잡으면, 쉽게 책을 놓지 못한 채 밤이 이슥하도록 페이지를 넘기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강력 추천이다.

 

 

 

 

 

(스팅이 몸담았던 그룹 폴리스 (The Police)의 앨범의 타이틀이 마침 [Synchronicity]라 이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여러차례 올려놓고 [보이드 문]을 읽었다. 스팅은 아서 쾨슬러의 열렬한 독자였는데, 그의 작품 [우연일치의 뿌리]라는 작품에 영감을 얻어 이 앨범 제목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책에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이 언급되어 있다.))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를 융은 '동시성(Synchronicity)'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좀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우연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현재의 세계가 전부는 아니고, 이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존재하며, 이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손을 맞잡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위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의 연결. 세상의 일은 우연히 벌어지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우주의 질서 안에서 관련지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마이클 코넬리는 '운명'이라는 개념을 강화하기 위해 이 동시성(Synchronicity)을 작품 안으로 끌어 들였다.

 

동시성. 캐시는 그 단어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지난 5년동안 꼼꼼하게 풀어봤던 [라스베이거스 선]의 크로스워드 퍼즐에 적어도 열두 번은 나온 단어였다. 겉으로는 별개로 보이지만 서로 관련된 일이 시간차를 두고 일어나는 것. 동시성. p.404

 

 

우주의 질서 속에서 어느 하나를 어그러뜨리면, 모든 것이 변한다.

 

 

파급 효과를 기억해. 방 안에 있는 뭔가를 바꾸면 그 일과 관련해 온 우주를 바꾸게 돼. 파급 효과를 미치는 거야.

p.132

 

하트 에이스를 떨어뜨림으로서 모든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의미있는 우연이 많은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문득 맥스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 캐시는 언제나 그 만남을 서로 잘 어울리는 영혼들의 우연한 마주침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 캐시 자신에게는 결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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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5-0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이안 레인과 알 파치노의 조화가 제법 어울리지만...이제 그들은 늙었기에...전 오히려 요즘 떠오르는 (이미 스타지만) 제니퍼 로렌스가 떠올르네요. 전 그녀의 대표작들보단 초기작인 "원터스 본"에서 정말 대단한 모습을 봤거든요.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과도 제법 어울려보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