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에게 있어 주의할 점 중 하나가, 비유나 직유를 쓸 때 똑같은 표현을 남발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저의 경우 글 쓸 때 똑같은 표현을 카드 돌려막듯이 여러차례 울궈먹은 적이 상당히 많아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부끄럽습니다만..저는 뭐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라는 변명을 하고 싶네요.ㅎㅎ
좋은 말도 여러번 들으면 감흥이 떨어지는 인간의 심리상,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같은 표현을 남발하면 곤란하겠지요.
무엇보다 자주 사용하다보면 참신성이 휘발되고, 진부한 표현(cliche)이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백옥같은 피부'나 '앵두같은 입술'도 처음에는 엄청나게 세련되고 독특한 표현이었겠지요.ㅋ
다음은 일급 작가들이 실수로 (아니면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쓴 표현들을 제가 매의 눈으로 찝어낸
것들입니다.ㅎㅎ
먼저 미치오 슈스케는 "외국의 동전에라도 새겨질 듯한 옆얼굴"이란 표현을 좋아하는 듯
보입니다.
코끝에 그 사람의 향기가 와 닿았다. 상처 없이
매끈한 감귤류에서 희미하게 퍼져 나올 듯한 향기. 그런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 향기는 어느 외국의 동전에라도 새겨질듯한 그 사람의
옆얼굴에 잘 어울렸다.
-미치오 슈스케, [구체의 뱀] p.71
(북홀릭), 김은모 역
나이는 30대 후반일까. 오똑한
콧대가 외국 동전에 새겨진 여자의 옆얼굴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p.179)
-미치오 슈스케,[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 (북폴리오), 김은모 역
슈스케가 이 표현을 좋아하는 것을 안 이후에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혹시 이번 책에도 그 표현이 나왔을까?..하고 찾게
됩니다.ㅎㅎ
이번 국내 출간 된 [광매화]에는 이 표현은 없었습니다.
대신 미치오 슈스케 스타일의 섬세한 표현으로로 연상의 여자를 기가막히게 묘사해 냈습니다. 아래를 읽어보시죠. 어떻습니까?
슈스케의 전매특허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입니다. 슈스케가 만들어 내는 풍경을 머리 속으로 상상하면서 읽으면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됩니다.
연한 오렌지색 매니큐어를 칠한 발톱이 보였다. 왼쪽 새끼발가락 옆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깎아 만든 듯 단정한 그녀의 모습과
선명한 상처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그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조릿대 잎사귀에 베였어."
투명하리만치 하얀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
그녀는 이따끔 어린아이처럼 한 손으로 너도밤나무 가지를 훑었다. 그녀의 하얀 종아리가 마치 두 마리의 유순한 초식동물 같아
보였다. 언뜻언뜻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 동안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눈이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고 마치 그
부분만 다른 생물처럼 보였다.
-미치오 슈스케, [광매화]
(씨엘북스), 한성례 역
다음은 우타노 쇼고! 이 책을 쓰실 때 낚시에 갔다가 손맛을 제대로 느끼셨는지, "낚여 올라온
물고기처럼"이란 표현을 같은 책에 두 번 쓰셨습니다. 여담인데, 이 책의 표지는 정말 미치도록 러블리합니다. 책의 주인공들이 갤러시 3에서
옵티머스 G로 걸어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저렇게 사진을 찍어 보았네요. 개인적으로 이 책의 후반부에 감탄,또 감탄했었습니다.
남자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낚여 올라온 물고기처럼 푸들 푸들 경련했다.(p.39)
남자는 심하게 구토하며 낚여 올라온 물고기처럼
경련하다 곧 움직임을 멈췄다.(p.68)
-우타노 쇼고, [밀실 살인게임] (한스미디어), 김은모
역
(개인적으로) 2012년 출간된 최고로 재밌는 소설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개의 힘]!
이 책의 작가 돈 윈슬로는 "셜록 홈즈가 아니더라도"라는 표현을 사랑하는군요. (개인적으로는) 한
번만 사용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ㅋㅋ [개의 힘] 2권에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사진은 손으로 개의 모습을 만들어 본
것입니다.^^ 돈 윈슬로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파괴자들(savages)].. 보고 싶네요..
셜록 홈즈가 아니라도 그들이
리틀 피치의 손목을 잘라 출혈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p.305)
굳이 셜록 홈즈가 아니더라도
그곳까지 자동차가 오토바이를 따라왔으리라는 사실은 추측 할 수 있을 터였다. (p.529)
-돈 윈슬로, [개의 힘] (황금가지), 김경숙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