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맛. The Taste of Autumn..)
그렇습니다. 순전히 제목 때문입니다.
'아스라이 스러지다 (long gone)'이라는 책 제목으로 부터 저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스러져가는 낙엽들을 떠올렸습니다.
이곳에 포스팅한 사진들은 낙엽이 거리를 수북히 쌓이던 늦가을 무렵에 찍은 것들입니다.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맞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머리 속으로 뛰어든 생각을 고수하기 위해 이 포스팅을 해봅니다.
우선 RHK에서 나온 책 커버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을 이곳에 적어 보겠습니다.
'아스라하다'- (기억따위가) 희미하고 어렴풋하다..라는 국어 사전상의 의미에 어울리는 표지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스러지다'-(모양이나 자취가 없어지다)라는 뜻을 음미하면서 표지를 보면 꽤 잘 만들어진 표지라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수분기를 날아가 버린 장미의 잎사귀가 언젠가는 바스라져서, 먼지처럼 스러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 표지의 이 바스러지는 잎사귀에서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의 이미지를 떠올렸답니다.)
게다가 '스러지다'와 '쓰러지다'가 의미는 다르지만, 음성학적으로 비슷하게 발음되어 서로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네요.
" Long Gone" 이란 원제목에서 '아스라이 스러지다 '라는 한국어 번역제목을 끄집어 내 것은... 여러번 생각해도 훌륭합니다.
2012년 베스트 번역 제목을 뽑는다면, 망설임없이 이 작품에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아스라이'란 말도, '스러지다'란 말도 둘다 너무 시적(詩的)인 세련된 제목입니다. 시적인 제목과 스릴러라니, 매력적입니다.
엘라페어 버크... 이 작품 [아스라이 스러지다]가 국내 첫 출간작이기에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닙니다.
그녀의 첫번째 스탠드얼론인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의미깊습니다.
일단 평범한 여성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으로는 첫 작품이기 때문이죠. 그녀의 작품의 여주인공들은 검사이거나('사만사 킨케이드' 시리즈), 경찰('엘리 해쳐' 시리즈)이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주인공이기에 이 전 작품과는 다른 시선과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의 삶이 어느날 송두리째 뒤집혀 버리는 타입의 소설을 쓰고 싶었던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룬 셈이지요.
국내외에 알려진 엘라페어 버크의 프로필을 보면, 역시 유명한 범죄 소설 작가인 '제임스 리 버크'의 딸이라는 점이 부각됩니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을 읽지 않았지만 미스터리 소설에 매료되었다고 하네요. 도서관 사서인 어머니와 작가인 아버지. 그야말로 스토리텔러로서 자랄 최적의 환경인 셈이지요. 그러나 그녀를 결정적으로 범죄 소설 작가의 길로 이끈 것은 포트랜드 지방검사를 했던 경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법적 절차에 대한 글을 쓸 때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별다른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다른 작가들보다, 법률 시스템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핍진하게 그려낼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사만사 킨케이드' 시리즈도 국내에 빨리 번역되어 그 실감나는 글을 읽고 싶네요.
이 작품은,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이 그러하듯- 후반부의 반전이 꽤 좋았습니다. 매우 놀랄만한 결론을 보여줍니다. 책을 덮은 후 몇개월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 만한 강렬한 장면 (가령, 영화에 비유하면,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에 등장하는 3분간의 샤워장면-알몸의 자냇리가 괴한에게 공격받아 살해당하는 장면 같은!)이 없다는 것은 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만,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마무리 될 지 예상하기 힘들다는 점이 이 책의 최대 미덕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아스라이 스러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