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요네자와 호노부-[부러진 용골]을 읽다.

 

국내 출간 전부터 장르소설 독자들이 눈독을 들였던 작품이다. 이 책이 금장처럼 두르고 있는 화려한 수상경력이 책의 재미와 수준을 보장하고 가늠하는 잣대는 분명 아니지만, 그것이 아우라처럼 적잖게 시선을 모은 것만은 사실이다.  

 일독 후 느낀 점은, 이제 작가는 이 전과는 다른 레벨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새로운 단계로 진화했다고 할까. 이 전 작품인 [추상오단장]에서 다섯 편의 리들 스토리를 사용하여 보다 다채로운 인상을 독자에게 넘겨주는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이번 작품은 좀더 진일보하여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느낌이다. 기존 작품과는 달리, 낯선 이국의 이야기로 직격하는 모습에서 작가가 본인의 글에 대해서 자기 확신적인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해석을 허락한다. 게다가 현대가 아닌 과거라는 시제의 소급을 통해 더욱 까다로운 글쓰기가 되고 말았지만, 낯선 것들이 으레 가져오는 이물감은 거의 없었다. (작가는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수월한데, 그가 상정한 중세의 잉글랜드는 작가에게 조차 낯설어서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시공간임에 틀림없다. 작가 스스로도 이 당시 사람들이 시간개념을 분 단위를 의식하고 살지 않았기에 수수께끼 조립이 어려웠다고 토로하고 있다. 세밀한 시간 이야기로 알리바이 트릭을 사용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기존에 그가 써왔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풍의 작품이었다. 본 작은 작가가 기존의 틀을 벗어나고, 상투화를 배격하려는 사유와 탐색의 결실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과거 작품을 숙주삼아 비슷비슷한 작품을 내놓는 작가들이 미만해 있는 요즘의 분위기에서 분명 결단 있는 행동이었고, 그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대동소이한 장르문학에서 ‘변별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스타일이라 칭할 수 있는 외피(外皮)의 힘이다. 읽어본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이종 교배하여, 자신만의 색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좀더 다양한 소재에 목말라 있는 대중의 욕망을 읽어낸 작가의 눈썰미와 기존의 안온한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온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가 상정한 배경은 마법이 존재하기에 현실과는 다른 패러렐(parallel)월드의 중세 잉글랜드다. (중세 잉글랜드이긴 하지만, 의미(역사)가 소거된 ‘무국적’ 판타지에 가깝다. 일단 소설의 공간인 ‘솔론’섬 자체가 가공의 섬이다.) 아무래도 이런 배경은 기존의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낯설 질감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낯설고 생경한 것은 역시 신선함을 동반하는 바,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이국(異國)을 모험하는 기분을 선사하여 평범한 일상사에 함몰되어 새로운 것을 희구하는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작가는 미스터리와 판타지를 솜씨 좋게 교직하여 근사한 하이브리드 작품을 가공해냈다. (조직의 배신자를 쫓는다는 설정은 일면, 모험소설의 틀을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비록 이 작품이 마법과 기사, 용병, 유령선, 저주받은 데인인등 판타지적 요소들로 휘감고 있지만, 기본적인 미스터리 장르적 문법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수수께끼를 쫓는다)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이것이 추리 소설임을 부단히 환기시킨다. 그리고 철저하게 ‘비이성(마법)’을 등지고, ‘이성(논리)’적 추론에 의해 사건의 해결에 바투 다가선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공정한 논리적 해명에 전력투구하고 공을 들임으로써, 작품을 주술과 마법을 그린 모험 판타지로 변질시키지 않았다. 작가 스스로 신비한 사건과 마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덜어내어, 작품이 판타지에 잠식되지 않도록 했다고나 할까. 오히려 미스터리라는 기본 바탕 위에 저주받은 데인인과의 전투장면 같은 판타지의 분위기를 덧입혀서 판타지라는 타장르의 독자와 친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열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미스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유희’를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는 분명 다양한 층위의 독자들을 그의 소설로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데뷔 초에 주로 일상 미스터리를 그려왔던 작가는 이제 상당히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고, 이 작품이 그 변화된 소설쓰기 방향의 정점이라 하겠다. 그의 실험이 너무도 세련되고 참신해서 독자는 요네자와 호노부가 타진하고 있는 소설의 모험에 기꺼이 동참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가 썼던 작풍과는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바뀌어 있기에 작가 스스로도 걱정 반 기대 반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추리와 판타지를 횡단하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용맹한 용병들과 데인족간의 전투씬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 오크족과의 전투씬과 견줄 만큼 강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개똥벌레]라는 단편소설을 원형으로, 그의 걸작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탄생시켰듯이, 요네자와 호노부가 11년 전(데뷔 전)에 특수 설정 미스터리에 대한 동경으로 썼던 400자 원고지 250매 분량의 습작소설(검과 마법의 세계에 미스터리를 덧입힌 것)을 전면적으로 개작하여 장편으로 완성한 것이 본 작이다. 그가 십 년 전에 썼던 원형소설의 화자(話者)는 탐정 팔크 피츠존의 종사 ‘니콜라’에 해당하는 인물이였지만, 이번에 다시 쓴 [부러진 용골]에서의 이야기꾼은 마법을 모르는 인간인 영주의 딸 ‘아미나’로 설정했다. 이렇게 작품을 이끌어가는 화자를 머글(마법을 못쓰는 사람)로 설정한 이유는, 책에 등장할 마법을 자연스레 설명하기가 수월한 대상이기 때문일 터이고, 또한 독자들이 감정이입 하기에도 적절한 등장인물인 까닭이다. 여성 화자는 요네자와 호노부가 [덧없는 양들의 축연]에서 능숙하게 그려나간 경험이 있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위화감없이 어색하지 않은 목소리를 들려준다. (작가는 화자를 여자로 상정한 이유에 대해 플롯 때문이라고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자를 남성(가령,영주의 아들)로 설정할 경우, 그가 짊어질 임무가 각별히 커지게 된다. 예컨대, 데인족과의 전투가 가까워질 때 영주의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돌아다니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한편, 소설상에서 다채로운 인종의 캐릭터를 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오고 갈수 있는 교역이 번성한 솔론섬을 무대로 삼은 것도 계산된 작가의 주도 면밀한 마름질인 셈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주제에 효과적으로 상응하는 배경을 선택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마법의 안개가 자욱한 12세기 중세는, 작가 자신이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뒤섞어 혼종(hybrid) 장르의 매력을 펼치기에 적절한 배경임에 틀림없다. 이 시기는 뭐랄까, 이성과 비이성이 혼재하는 무대이기에, 미스터리(이성)과 판타지(비이성)의 대결의 장으로는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작가는 이 둘을 절묘하게 형질변환시켜 새로운 진경을 독자에게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엘리스 피터스의 [수도사 캐드펠]을 통해 일본 독자들이 중세 유럽 시대에 비교적 친숙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중 하나라고 밝힌다 .)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은 데인족의 등장은 이 작품에서 매우 흥미로운 요소이다.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적인 존재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분법적 세계 이해(산자/ 죽은자로 나누는 세계)를 금가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섬뜩한 얼굴이었다. 턱수염을 기른 불굴의 전사들의 낯빛은 결코 안식을 얻을 수 없는 그들의 삶을 말해주듯 핏기 없이 창백했고, 끔직한 살육을 자행하면서도 격앙이나 분노 등 일체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p.369)’

 

그들은 보통 인간의 인식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런 불가해한 것에 대해 인간은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작가의 첫 번째 노림수 일는지 모른다. 이들의 등장으로 작품은 돌연 긴장감과 공포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하는 효과를 얻는다. 개인적으로는 초반부분에 전투의 베테랑인 용병들의 소개를 읽으면서, 그들과 대적할 존재가 강하고 두려운 존재여야만 하겠다고 예상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작가는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완력을 갖고 있는 데인인을 창조해 냈다. 목을 베지 않는 한 그들은 괴멸시킬 수는 없다. 작가가 그들을 작품으로 끌어들인 이유를 좀 더 확대해석 한다면, 저주 받은 데인인은 인간의 비이성에 대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사지를 절단할지라도 잘려 나간 자리에 붙이면 감쪽 같이 붙는 그들의 특성처럼, 인간의 이성의 대척점에 있는 비이성의 특질은 죽지 않고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광기와 비이성일 수도 있고,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보여주었던 집단적 비이성일 수 도 있다. 그런 비이성이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인류역사와 함께 불사(不死)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저주’라 부를 만 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중세라는 배경은,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의 빛과 어둠이 뒤섞인 시기였다. 저주받은 데인족은 인간 이성이 아직 어둠 속에서 무지와 몽매에 포위된 채 야만성에 휘둘렸던 인간들에 대한 알레고리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탐정 역할을 하는 ‘팔크 피츠존’과 조수 ‘니콜라’은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주체적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들이라 말 할 수 있다. 분별력과 논리로 무장하여 사건의 진상에 다가서는 데카르트적 인물들은, 근대 과학의 태동을 눈앞에 둔 중세라는 분위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한편, 20년간 철문에 갇혀 있던 데인족의 일원이었던 토르스텐을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로 보아도 무방하다.. (토르스텐과 비슷한 또 다른 존재를 언급해야 마땅하나,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그 부분은 함구해야겠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덧씌워진 저주의 사슬을 끊으려 하고, 당연히 데인인들의 저항은 거셀 수 밖에 없다. 독자들 중에는 중세라는 배경임에도 종교적인 면이 부각되지 않은 것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는 요네자와 호노부가 스스로 작품에 종교 색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 한다. 영주와 교회의 권한 다툼까지 그리게 되면, 작품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중세 사람들이 신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종교부분에 관한 묘사는 자제 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국내 출간작들. 가장 이색작이라면, 역시 [부러진 용골]이다. 후속작 계획은 없다고 하니, 그 독특한 재미를 오롯이 이 작품을 통해서만 즐길 수 밖에 없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소설을 쓸 때, 미스터리를 세로축,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가로축으로 해서 두 개의 기틀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즐겨 쓰는데,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방식을 늘 고수한다고 한다.

[부러진 용골]에서 세로축은 누가 영주를 죽였는가?(Who done it?)이고, 가로축은 ‘솔론제도에서 벌어지는 용병과 저주받은 데인인의 대결’이라 하겠다. 이 횡축과 종축의 착지점이 겹쳐지는 부분에 예기치 못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숨은 그림 찾기를 할 때처럼 집중력을 갖고, 책을 읽었지만, 작품의 말미에선 예상치 못한 결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의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눈을 잔뜩 부릅뜨고 보았지만, 마술사의 손동작에 속절없이 속았을 때의 기분을 대부분의 독자가 느낄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결론 부분에서 독자의 반응은 허를 찌르는 반전에 감탄으로 획일화된다. 

그리고 하나 더, 후반부에 부각되는 스승의 사랑을 작가가 과장으로 들뜨지 않고 정제된 문장으로 담담하게 묘사한 부분은 내가 이 책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좋아하는 부분이다. (여러 차례 읽어서 머리에 인이 박혀있을 정도다.) 감동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깊이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면, 내가 느낀 것이 바로 그러했다. 반전의 충격과 감동이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빠르게 마음 속에 차오른다. 이런 흔치 않은 경험을 맛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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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셀러 -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반짝이는 사랑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3
아리카와 히로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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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간의 사랑을 살짝 들춰 보여준다.)

 

아리카와 히로 –[스토리셀러]를 읽다.

 

‘성인을 위한 라이트 노벨’이라는 장르에서 확고부동한 인기를 획득하고 있다는 아리카와 히로(有川浩)의 [스토리셀러]를 읽었다. 라이트 노벨은 소년, 소녀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가벼운 문체로 쓰여지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이 책도 빠른 속도로 읽힌다. 그러나 문체가 가볍다고 해서 내용도 가벼운 것은 아니다. 리듬감있는 문체로 진중한 내용을 속도감 있게 그려 나갔다. (네 문장, 읽는 리듬이 상당히 좋거든.그래서 도중에 멈추고 싶지 않아.(p.149)) 알아보니, 이 책은 기존의 아리카와 히로 스타일에서 살짝 작풍을 바꿔서 쓴 작품으로 새로운 맛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본 작 이전에 이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은 [백수 알바 내집 장만기]가 유일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풍의 변화를 감지하기는 힘들었다. 일렁이는 궁금증에 검색해보니, 예상보다 많은 책(18권)이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내심 놀랐다. SF와 밀러터리가 가미된 소설뿐만 아니라, 코믹요소가 가미된 로맨틱 소설도 잘 써서 일본에선 연애소설의 여왕으로 많은 팬 층을 확보하고 있는 ‘여성 작가’라고 한다. ‘여성작가’를 강조해서 쓴 이유는 이 책이 여성 전업 작가를 둘러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그녀의 필명 ‘아리카와 히로(有川浩)’는 꽤나 남성적인 이름으로 들려 혼동을 주는 모양이다. 그녀에 대한 정보 없이 이름만 보고 ‘여성의 섬세한 필치를 지닌 남성작가’로 오해한 일본 독자들이 꽤 있었다. 작가는 서점에서 책이 놓여질 때 ‘아’로 시작하는 이름이라면 선반 앞쪽에 놓여질 것이라 생각하고 작명을 했다고 한다. ‘호(浩)’는 본명에서 한 글자를 가져온 것이다.)  

 

 

이 책은 예전에 즐겨 듣던 LP나 카세트 테이프처럼, Side A와 Side B로 구성되어 있어 독자들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자극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Side A와 Side B로 나누어진 구성은 ‘이누이 구루미’의 [이니시에이션 러브]와 국내작가로는 박민규의 [더블(Double)] 이후 세 번째 만남이다.

Side A에는 글 쓰는 부인의 이야기를 하는 남편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Side B는 글쓰는 부인이 남편에 대해 서술하는 이야기다. 책을 읽기 전에는 둘이 같은 주인공일 것이라는 예상을 했는데,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다른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이 작품은 Side A를 먼저 잡지에 발표한 작가가 단행본을 출판하기 위해 같은 테마로 Side B를 추후에 썼다고 보는 편이 온당하다.(이것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전후 사정을 설명한다. “단편이라기보다 중편 분량이잖아. 그거 한편이 책 반 정도를 잡아먹어버리거든. 그렇게 되면 책 구성에 균형이 깨진다면서 항상 제외됐어. 그리고 담당 편집자가 그 이야기에 정말 애착을 갖고 있어. 소설의 느낌을 잘 살려서 만들고 싶다면서 같은 분량에 내용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써달라고..말하자면 그게 책이 되려면 중편 하나가 더 필요한 거야.(p.151) * 실제로도 Side A는 소설신초 2008년 5월호 별책으로 공개되었던 작품이다.)

 

 

두 이야기 모두 사랑하는 이를 병으로 잃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Side A는 작가 아내를 뇌를 쓰면 쓸수록 노화되는 희귀병으로, Side B는 남편을 췌장암으로 잃는다.) 여성 작가가 등장한다는 점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 

아리카와 히로 자신이 여성 작가이기에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친숙한 사실들을 펼쳐놓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아리카와 히로의 남편은 무차별적인 독서광에다, 그녀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넌 언젠가 프로가 된다’며 끊임없이 격려했다고 한다.(‘세상이 변덕스럽게 어쩌다 그녀를 날지 못하게 할지라도, 원래라면 그녀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신이 그녀의 소설에 흥미를 잃을 리 없다’(p.65)는 말은 다름아닌 실제 남편이 작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아리카와보다도 그녀가 작가가 되는 것을 믿었던 듬직한 남편. 그래서 어찌 보면 이 소설(특히 side A)은 일본 특유의 소설 형식중 하나인 ‘사소설(私小說- 자신의 경험을 허구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써나가는 소설)적인 느낌이 날 만큼 개인적인 삶이 작품에 고여있는 듯하다. 하지만, 소설이란 허구만으로도 사실만으로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어디까지가 진실이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 할 듯 싶다.(작가 스스로도 ‘이 이야기는…어디까지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에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p.228)라고 작품 속의 여성작가의 말을 빌어 일축한다.) 

두 이야기의 접점을 작가는, “전에는 여성 작가가 죽는 이야기였잖아? 이번에는 작가의 남편이 죽는 이야기를 쓰면 어때?(p.123)”라는 말을 집어 넣어 마련해 놓았다. 이 말을 읽으면, 혹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떠올려 두 이야기 모두 비극적인 이야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결국 인생은 유한(有限)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우리는 언제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두 배우자 모두 변질되지 않는 사랑의 확인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목도하기에 나는 두 이야기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Side A와 Side B, 두 이야기 모두 결국은 따지고 보면 두 젊은 부부의 이야기인데 (오히려 이야기의 하중은 연애 시절보다는 결혼 후 생활에 더 실려 있다), 두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고, 부모와 친척과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상정한 것은 아무래도 남편과 부인이 둘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려는 작가의 계산된 의도인 듯 싶다. 일반적인 자녀를 둔 가정과는 다르게, 서로를 위하는 마음과 애정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고스란히 서로를 향한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두 작품 모두 이야기가 만남에서 결혼,(이야기의 중핵은 물론 부인의 저술 활동이다) 배우자중 한 명이 세상을 뜨면서 이야기가 종결된다. 이 작품엔 흔한 연애 소설에서 보여지는 연애의 위기나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배제되어 있다. 작가는 시종 담담하고 간결한 문체로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개인적으로는 감정의 잉여나, 감상적인 과장이 깃들어 있지 않아서 좋았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동화풍의 이야기가 아닌 점은 이 책의 미덕이라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녀의 책을 모두 통람하지 않아서 일본독자의 말을 차용하면, 해피 엔드로 끝나지 않는 그녀의 소설은 이 작품이 이례적이라고 한다.)

[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이 아리카와 히로가 내는 고유한 발성법이라해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말랑말랑한 사랑의 밀어(密語)로 그득한 연애 소설을 기대한 독자들은 이 작품에 대해 볼멘소리를 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 책에는 연애소설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두 연인의 안타까운 엇갈림이나, 매력적이고 낭만적인 훈남이나 미녀도 등장하지 않으니.

아리카와 히로는 보통 사람들의 사랑을 수수하게 그려냄으로써, 범용한 독자들을 어느새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이 작품 속에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이름조차 ‘나’와 ‘그녀’ 혹은 ‘그’로 설정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작가의 의도라 할 수 있다. 특정한 이름 없이 등장하는 ‘나’와 ‘그녀’에게 책 밖의 독자들은 감정이입이 더 수월하다.) 우리는 그 친근한 풍경 속에서 등장인물에게 자연스레 우리를 투사하게 된다. 이러한 전폭적인 동감의 유도는 독자로 하여금 상실되는 대상에 대한 아쉬움을 일깨우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배우자를 잃는 장면이 등장하는 Side A와 Side B의 후반부를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작가가 시선을 두는 곳에 마음이 가닿으면, 독자는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혹은 이미 경험한) 그 상실의 안타까움에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아리카와 히로가 넌지시 이 책을 통해 알려주려고 하는 것을 이성복 시인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사랑은 사라질 것들에 대한 사랑을 부른다’라는 말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내 옆에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이 결국은 시한부라는 것을 자주 잊는 까닭이다. 아니, 잊는다기보다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은 진실일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니 후회하지 않기 위해선 소중한 사람에게 기회가 있을 때, 옆에 있을 때, 마음을 자주 보여주어야 한다는 다짐이 가슴 속에서 움터난다.

 

 

 

공포는 동일자(同一者)가 갑자기 타자(他者)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

(김현, 타자의 철학, 행복한 책읽기-p.165)

 

Side A의 초반 부분에는 타자가 동일자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연애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두 남녀 간에 사랑이 싹트는 장면이라 생각하기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읽었다. 화자인 ‘나’가 같은 디자인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그녀’에게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들을 하나 둘씩 발견하면서 흥미를 느끼고 다가서는 장면은 앞서 말한 ‘타자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작품에 쓰여 있는 아리카와 히로의 표현을 빌어 이야기 하자면, 사무실에선 유일하게 ‘고양이 가면 벗겨진’ 순간을 본 사람이 된 셈이랄까. 언제나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면, 그 둘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은 존재와 매한가지니까. 그리고 이 둘 사이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남자 주인공인 ‘나’는 여자 주인공의 글을 읽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아직 데뷔하기 전이기에 말하자면, 첫 독자인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기형도 시인의 싯구를 [나를/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오래된 서적)] 떠올렸다. 그렇다. 글을 쓴다는 것은 혼(魂)을 내보이는 것이기에 그것을 펼쳐 읽어보려는 마음은 그 사람을 읽어 보려는 노력인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자신을 진심으로 읽어주려 노력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결국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다른 이야기도 보여주고 싶은 정도로 자신을 열게 된다. 그리고 한쪽은 이야기를 제공하고, 다른 한쪽은 그 이야기를 읽고 감상을 보낸다. 마치 그것들이 러브레터인양 오고 가며,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은 들숨과 날숨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읽는 사람”은 동시에 “쓰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내 마음에서 다시 나의 버전으로 쓰여지듯(rewriting), 누군가를 읽을 때 그 사람 역시 ‘나’라는 필터를 통과해 고쳐 쓰여진다. 그 고쳐씀의 다른 이름은 ‘오독(誤讀)’이다. 그러나 ‘오독’은 세상의 모든 책 읽기의 필연적인 운명 아닌가. 다만 그 책(사람)이 지닌 본질에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서려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사랑이란 명시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지만, 이 책이 이야기하는 바를 굳이 이야기하자면, 누군가를 읽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 이해의 노력 속에 우리는 누군가를 위한 단 한 명의 작가가 되고, 단 한 명의 독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계속해서 살아가게 (써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의 빛 속에서 한편이 다른 한편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죽음을 옆에서 지켜주는) 독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모두 ‘쓰는 사람’이자 ‘읽는 사람’이다. 그렇다. 아리카와 히로는 이 책을 통해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응원하고, 응원 받을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다.

 

 (비채에서 나온 아리카와 히로의 장편 소설 [백수알바 내 집 장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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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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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구는 하루키 글쓰기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인데, 이 수필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런 면모를 에세이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내 생애 최초의 하루키는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원제: 중국행 슬로보트)]이란 단편집으로 만났다. 하루키가 초기 삼부작을 끝낸 직후,’ 겨우 건너편 기슭에 헤엄쳐 도달했다라고 느낀 후 썼던 최초의 단편집이었다. 첫만남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달까. 나는 그만이 가공해내는 독특한 느낌의 단편들이 단박에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본 작에는 이 단편집에 실린 [중국행 슬로보트]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가 제목을 먼저 붙인 후 소설을 써나갔다는 후일담이 소개 되어있어서 흥미로웠다. 보통과는 순서가 반대로 물구나무를 선 셈이다. p.38)

그리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댄스 댄스 댄스]의 순서로 의 이야기를 차례로 읽어나갔다. (나는 청춘 삼부작+[댄스 댄스 댄스]를 이 순서로 읽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빨래하는 순서가 분류, 세탁, 행굼, 탈수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1949년생인 하루키가 이 책을 발표한 연도는 1979년으로 서른살이었다. 하루키는 서른살에 스무살 무렵의 1970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썼는데, 아마도 그 기분은, 가을에 여름철의 추억들을 떠올리는 것 같은 것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가 쓴 어떤 수필집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정말이 이 책에는 여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뭍어나는 구절이 너무나 많다. 그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스무 살 전후의 여름이 생각나 가슴이 뻐근해온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 중, 나는 다른 작품은 몰라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만큼은 여름에 읽어야 제격이라고 느낀다.

 

심지어 이 작품을 한 줄의 글로 요약하라면, 망설이지 않고, 기형도가 쓴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를 인용할 정도다. 여름은 다름 아닌 질풍노도같은 청춘기의 은유이고,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누구에게나 힘겨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데뷔작이기에 완벽한 작품은 아닐지라도 나는 이 작품이 품고 있는 무우청처럼 새파란 시선함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아찔할 정도의 푸릇함.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도처에 작가의 삐딱한 시선과 야유들이 편재해있는데, 그런 이유로 모범생처럼 반듯하게 써나간 [태엽감는 새]보다는 조금 불량스러워 보이는 이 작품을 더 좋아한다. 나의 행운이라면 이 책을 스무 살 여름에 읽었다는 점일 것이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자면, 막 만들어진 진흙탕처럼 나의 감수성이 살아 있을 때였다. 태양은 뜨겁고, 한낮의 거리는 옥양목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있는 그 시절에, 하루키의 젊음이 고스란히 응축된 문장들로 넘쳐나는 이 작품을 나는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피 돌기를 하듯 재빠르게 흘렀다. 하루키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었다.

 

여름의 향기를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바다 내음, 먼 기적소리, 여자의 피부 감촉, 헤어 린스의 레몬 향, 저녁 무렵의 바람, 엷은 희망, 그리고 여름날의 꿈그러나 그것은 마치 어긋나 버린 트레이싱 페이퍼처럼 모든 게 조금씩,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옛날과는 달라져 있었다.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한 대목처럼,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 뿐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옛날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올 여름, 그의 청춘 소설에 열광하던 나에게서 (심리적으로) 몇 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내 앞에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제목의 하루키 수필집 한 권이 놓여 있다.

이제 나는 스무 살 여름에 느꼈던 가슴 속에 찾아 드는 저녁나절의 가벼운 불안따위는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메마른 심장을 갖게 되었다. 내 청춘 시절과 함께 하던 하드코어한 쓸쓸함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하루키 역시 변했다. [무라카미 아사히도의 역습(1986)] 편에 수록된 <자동차에 대하여>에서 자동차라는 물체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라고 썼던 하루키가 본 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2011)]에 이르러서는 수동기어 모는 여성을 찬미하고(p.22), 오픈카에 대한 매력을 소개할 정도로 변해 있다.(p.172. 하루키는 십오 년째 오픈카를 타고 있다고 한다)

 뭐 놀라울 것은 없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지구는 자전하며, 여러 가지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니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애착은 예전보다는 많이 엷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전처럼 수 차례 반복해서 읽지는 않는다) 일단 그의 작품이 출간되어 나오면 욱신거리는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십여 년간 부동자세다.

팬으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정말 대단한 작가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다른 작가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을 잃어가고 있는 즈음에 그는 [1Q84]같은 대작을 발표하여 평단과 독자들의 후한 채점을 받아,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전성기는 앞으로 도대체 몇 번이나 더 있을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하다.)

 

 각설하고, 본 작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수필집엔 예의 하루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적인 산문이 담겨있다. 거역할 수 없는 하루키만의 고유성이랄까, 아니면 지문이랄까. 특유의 결이 있다.

나처럼 그가 국내에 내놓은 대부분의 에세이집을 읽은 독자들은 동의하겠지만, 이 작품이 완전히 새롭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무라카미 라디오(2001)]의 후속 편에 해당하기에 길이나 무게감, 상정하고 쓴 대상 모두 그것을 확실히 닮아있다. 십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썼지만, 마치 연년생처럼 키와 몸무게, 생김새가 비슷비슷하다. 비틀즈 이야기,(<이제 그만둬버릴까>p.100,<주문송>p.212) 중고 레코드 이야기(<스키타이 조곡>을 아십니까?,p.196), 조깅 이야기(<궁극의 조깅 코스>p.64), 고양이 이야기 (<장어집 고양이>p.156,<까마귀에게 도전하는 새끼 고양이>,p.204), 과일 이야기(<아보카도는 어렵다>,p184, <결투와 버찌>,p200)등은 전편인 [무라카미 라디오]에도 대동 소이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하루키의 핵심 키워드라 할만한 소재들이다.

 

비슷한 소재의 글들은 비단 [무라카미 라디오]뿐만 아니라, 이것보다 분량이 조금 더 긴 수필집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비슷한 소재를 여러 에세이집에서 이야기하면, 조금은 참신함의 빛을 잃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를 보이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수필집 대부분을 읽어본 애독자로서 맹세컨대, 그러한 사실이 이 책의 흥미를 전혀 반감시키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번 수필집에서 그가 포착해내는 세계의 단편들은 일본 최고의 작가라는 명성에 값 하는 높은 수준이다.

(개인적으로는 [무라카미 라디오]가 너무 재미 있는 수필집이었지만, 수록 작품이 너무 적어 아쉬웠는데, 본 작이 그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었다. 아마 다른 독자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기가 막히게 맛 좋은 음식을 한 입 더 얻어 먹은 듯한 느낌이랄까.)    

 

 

 

 

(‘알레그로(Allegro-빠르게)’의 속도로 읽다가, ‘비바체( Vivace-활발하게)’..그러다 결국 프레스토(Presto-아주 빠르게)’의 속도로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혹한기에 굶주린 들짐승이 모처럼 발견한 먹이를 단숨에 먹어 치우듯.)

 

 

 

 

(하루키 정류장 광고.. 순수한 팬심으로 만들어 보았다. [잡문집]을 읽었다면, 이번에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그렇다면 타 수필집과 변별성을 보일,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작품이 그의 최신 에세이라는 점이다. 그가 최초로 썼던 [무라카미 아사히도 (1984)(국내에는 코끼리공장의 해피엔드로 제목을 바꿔 출간)]에서 27년이 흐른 후, 현재에 가장 가까운 하루키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독자의 성장과 함께 역시 달라진 하루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에세이는 아무래도 다른 장르에 비해서 작가의 원체험에 밀착해 있으며 자기 고백적 성격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기에, 현재 작가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를 독자는 알게 된다. 게다가 이 작품은 삼 년에 걸쳐 장편소설 [1Q84]를 탈고한 이후의 하루키 일상과 담백한 사유를 엿볼 수 있기에 가치가 있다. 문학적 절정에 있는 동시대의 거장이 포착해낸 세계의 광경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근자에 그가 의미 부여하고 있는 세계의 풍광이 그의 글을 통해 삼투되어 독자에게 전달 되어 지는 것이다. 문학의 절정기에 있는 대가..비유하자면 단풍이 산의 아랫부분까지 다 먹어 내려온 상태랄까. 단풍구경을 하려면 절정인 바로 지금인 것이다.

하지만 [1Q84] [태엽 감는 새] 같은 장편 소설이 줄 수 있는 진중함과 무거운 주제에 대한 성찰을 본 작에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자머리 나사에 십자드라이버를 갖다 대는 것 만큼이나, 애초에 이 책으로의 접근법이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작가가 서문에도 밝혔 듯이 이십 대 여성들이 보는 가벼운 잡지에 수록된 작품이기에, 글은 밝고, 유쾌한 톤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이러한 풍선같은 가벼움 속에서도 하루키만이 발견하고, 깨달은 번뜩이는 에피파니(epiphany)가 존재한다. 독자들이 이러한 에세이를 읽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세상을 작가의 독특한 시각을 따라 함께 보는 재미도 그 한가지일 터이다. 

 

하나 더 이 책의 매력을 꼽자면, 오하시 아유미씨의 매력적인 동판화가 각 수필마다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라디오]부터 함께 해 온 삽화가라고 하는데, ‘까치글방에서 출판되었던 [무라카미 라디오]에는 원본과는 달리 삽화 없이 출간 되었었다. 하므로 국내독자는 오하시 아유미의 독특한 삽화와는 첫 대면을 갖게 된 셈이다. 삽화가 없어도 하루키의 에세이들은 충분히 가슴 설레일 정도로 훌륭하지만, 이미지가 추가되니 시너지 효과가 상당하다.    

 

(하루키는 어떤 글에서 [노르웨의 숲 (상실의 시대)]를 읽은 한 여성 독자가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어져서 늦은 시각이었지만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본 작에 수록된 [생각 없는 난쟁이]를 읽고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초콜릿이 너무 먹고 싶어진 것이다. 결국 우적우적 먹고 말았다.)

 

 

 

 (압도적으로 유쾌한 수필. 하루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머의 백미가 담겨있다. 서점이건, 도서관이건 이 수필을 펼쳐져 읽어보라. 이 책의 소장 욕구가 잭과 콩나무의 콩처럼 쑥쑥 커질 것이다. 여담인데 나는 이 글 읽고, 오메가 3를 구입해 버렸다. )

 

(엘피같은 느낌의 하루키의 글들. 많은 것들이 변해도 중요한 본질을 변치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게된다.)  

 

본 작에 수록된 어느 수필이나 허투루 쓰인 것이 없을 만큼 정제되고 유쾌하게 읽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반짝이는 장면으로 다가오는 것은 오래된 LP를 수집하는 비닐 정키에 대한 ‘<스키타이 조곡>을 아십니까?(p.196)’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국내 출판사 측이 선택한 표지 그림이 바로 이 수필을 위해 그려진 동판화다.)

나 자신도 한때 이 세계에 기웃거린 적이 있기에 지극히 공감 가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 무렵, 나는 6,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옛날 유럽 영화에서 주인공이 LP를 고르는 모습이 나오기만 해도 살짝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내 주변에도 이런 LP 수집광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아주 미세한 풍향의 변화를 감지하고 먹이의 냄새를 맡는 맹수처럼, 곰팡내가 살짝 나는 오래된 LP판의 냄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하루키도 바로 이런 류의 사람이라 여러 차례 이런 자신의 취미에 대해 다른 에세이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래된 LP 레코드는 하루키가 사랑하는 모티프중 하나였다. [슬픈 외국어] <누가 재즈를 죽였는가>편에서 중고 엘피 가게에서 레코드를 고르다 보면 세시간 정도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고 술회하던 하루키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쓸모 없는 물건도 버릴 수 없는 집착>편에서 쌓이는 레코드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 것에 대해 난처해한다. [무라카미 라디오] <세상은 중고 레코드 가게>편에서 전세계 어디를 가도 틈만 나면 중고 레코드 가게를 찾는다는 하루키 역시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렇듯 중고 LP광인 하루키는 그의 책을 읽어온 독자라면, 낯설지 않다. 그의 이러한 취미는 그의 단편소설, [토니 다키타니]에도 스며들어가 있기도 하고 (토니 다키타니의 아버지는 방대한 옛 재즈 레코드를 유산으로 남긴다), 그의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작중인물이 듣는 음악에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이 수필에 주목한 이유는, 단순히 그와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이유로 교감했기 때문인 것 만은 아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는 LP를 잘 듣지 않게 되었기에 이 이야기가 반갑게 다가왔다. LP를 듣는 일을 큰 선심이라도 쓰는 양, 생색을 내고 해야 하는 특별한 일이 될 줄 당시에는 누가 알았겠는가. 하루키의 표현을 빌어 이야기 하자면, 세월이 흘러 기린과 곰이 모자를 바꿔 쓰고, 곰과 얼룩말이 목도리를 바꿔 두른 것이다. (p.115, 양을 둘러싼 모험) 시대가 변하면 여러 가지가 바뀌고, 그것 때문에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LP를 턴테이블에 거는 것이 그리운 일이 된 사람들에게 그의 수필은 그 시절의 추억을 되작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변화 속에서도, 비록 나는 예전의 나로부터 많이 변해버렸지만, 하루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달라짐 없이 큰 울림이 있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근본 적인 것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진언을 일깨워 준다고 할까. 그것은 [양을 둘러싼 모험]에서 주인공이 제이에게 이야기한 노래는 끝났어. 하지만 멜로디는 아직 울려 퍼지고 있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파악 할 수 있겠다.

 

늘 그렇듯 하루키가 가공해서 제시하는 이야기에 독자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딸려 가게 된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책은 끝나 있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바뀌고 교체되었지만, 일급 에세이스트로서 그가 써낸 작품을 읽는 것은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여전히 가슴 벅찬 일이다. 세상이 바뀔수록 그대로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 하루키의 글이 그러하다. 오랜만에 턴테이블에 오래된 LP레코드를 올려놓고, 그의 수필을 다시 한번 음미하며 읽어야겠다. 치지지직. 그의 에세이에서 그립고 정겨운 잡음이 날것 같다.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발화를 만나게되는 수필집. 하루키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장난스런 모습의 하루키부터 심지어 던적스러운 모습의 하루키까지.) 

 

 

 (이번 신간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와 다른 하루키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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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13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집집마다 다 저렇게 책장을 차지하고 있나 봐요. 저도 그런데..그치만 원서는 없..없습니다, 에세르님ㅎㅎ

요즘은 LP판 틀어놓은 카페 주인이 되고 싶다고 계속계속 생각을 해서.. 이 글이 무척 맘에 들어요^^

에세르 2012-07-29 10:30   좋아요 0 | URL
아앗, 제가 포스팅하자 댓글 달아주셨네요..이제야 보게되었어요!(죄송)
하루키 좋아해서, 사모았더니..(절판된 것 헌책방에서 구하고..) 원서는..일본어로 된 것은..일본어 공부해서 읽어보려했지만..능력이 안되서 포기했구요..ㅠ 영어로 된것은, 같은 곡을 다른 버전으로 (가령 라이브) 듣는 것 같아서 종종 읽어봅니다.^^
LP판 틀어놓은 카페 주인이 되시면, 꼭 알려주세요. 아주 좋은 곡들을 선곡해서 들려주실 것 같아요!

라로 2012-08-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에서부터 님의 리뷰를 읽어 내려오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댓글을 답니다!!
제가 글은 못 써도 좀 까다로운 독자인 편인데(다른 사람의 리뷰에)
멋진 사진을 올려주셔서가 아니라 리뷰가 이렇게 재미있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에요!!^^;;
사실 알라딘에서 리뷰 거의 안 읽고 페이퍼만 읽고 있거든요.
것도 긴 글은 리뷰든 페이퍼든 거의 안 읽는 편인데!!!!
에세르님!
좀 많이 멋지시군요!!^^
팬심이 막 발동합니다.^^

에세르 2012-10-28 17:55   좋아요 0 | URL
아..댓글을 이제야 보았네요..바쁜 일이 있어서 리뷰도 못쓰고 해서, 한동안 알라딘 서재에 못들어왔었네요..
(이제 좀 열심히 활동하려고합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함이 많은데, 재밌다고 칭찬해주시고..좋은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긴 리뷰를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동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할런 코벤 (Harlan Coben) - 용서할 수 없는 (Caught 2010), 비채 (2012, 6)

 

[용서할 수 없는]을 읽다.

 

이 책의 원제는 Caught지만, 출판사측에서 [용서할 수 없는]이란 제목으로 변경하여 국내 출간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원제보다 오히려 한결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고 느꼈다. 작가 스스로도 이 작품을 누가 용서를 받아야 하고, 누가 용서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용서에 관한 소설이다(a novel of forgiveness)라고 말하고 있다.

용서라는 묵직한 단어가 들어간 제목 때문일까,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이란 기형도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복수는 용서하는 것이다(The noblest revenge is to forgive)’라는 금언도 떠올랐다. 어느 쪽이나 용서가 육체와 정신을 마모시킬 만큼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머금고 있는 말들이다.

타인을 용서하는 과정은 고통을 참고 흡수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기에 용서를 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을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로 여긴다. 그 정도로 어떤 종류의 용서는 쉽지 않다.  

 

자신의 남편을 차로 죽인 알코올 중독자 아리아나 나스브로에 대해 웬디는 이렇게 일갈 한다.

 

당신이 더는, 다른 아이의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을 실행하란 말이에요. 버스를 기다렸다가 그 앞에 뛰어들라고요. 이도 저도 싫다면 나와 내 아들한테 다시는 찝쩍거리지 말란 말이에요. 우린 당신을 용서할 생각이 없어요. 추호도.”(p.86)

 

작가는 이 대목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드리워진 불편한 관계의 한 예를 드러낸다. 독자는 이를 통해 피해자가 직면한 분노의 깊은 골과 치유되지 않고 곪은 상처가 존재하는 한 용서란 요원(遙遠)한 것이라는 비관적 인식을 아프게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엔 이 둘의 관계뿐 아니라, 웬디와 댄 머서를 포함하여 여러 인물 간의 가해자/ 피해자(용서자)의 구도가 등장한다. 그 구분되지 않고 뒤엉켜있는 구도 속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전개되고 물론 어느 순간 접점이 등장한다. (그 구도의 자세한 관계는 이야기의 핵심이라,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 미리니름이 될 수 있기에 적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인간은 항상 가해자이고 다른 인간은 피해자(용서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가해자/ 피해자로 가름하는 분명한 선긋기란 불가능하다. 후반부를 읽어보면, 작가는 피해자가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가해자도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는 듯 보인다.

 책을 덮고 나면, 작가의 목소리에 동조하면서도 용서하면 과연 잊을 수 있을까?’ ‘가해행위를 간과하고 덮어주는 것과 진정한 용서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도 작가가 말하는 참된 용서를 체현할 수 있을까?’와 같은 피할 수 없는 질문들로부터 도주하기 힘들게 된다. 

 

 

 

 

(코벤은 그림에 비유하여, 스탠드 얼론(stand-alone)을 완전한 공백의 캔버스라고 말한다. 마이런 볼리타나 미키 볼리타 같은 시리즈물은 몇가지 것들이 이미 채워져 있는 상태라, 시작은 살짝 수월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에 의해 제한되어지기에 더 어렵다고 한다. 그둘은  사용처가 두개의 다른 근육이며, 따라서 다소 다른 목소리가 나는 셈이다. 하지만 그 매일 매일 고통스럽고,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을 증오하며 쓰는 과정은 거의 항상 똑같다며 털어놓는다. 이 작품은 스탠드 얼론으로 한정했을 때, 국내에 일곱번째 출간된 작품이다.) 

 

 

이 책의 한 축이 용서에 관한 것이라면, 또 다른 축은 방송과 인터넷을 포함한 미디어의 위험한 힘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선 자극적 소재로 시청률을 높이는 현장체포프로그램 리포터인 웬디의 함정에 빠져 빈민가의 어린 농구선수들의 덕망 있는 감독인 댄 머서의 인생은 파멸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가 정말로 파렴치한 소아성애자인가,하는 궁금증도 이 책을 이끌어가는 힘 중 하나이니,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 바란다.)

 

그 빨간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책의 서두에서 등장하는 그 빨간 문으로의 접근이란, 미디어의 무자비한 횡포를 경험하게 되어 무너져 내리는 개인의 삶을 우의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이 문()은 칼날과 같다. 댄 머서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의 세계는 두 쪽으로 잘려 두 동강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과 이후의 세계는 다시는 봉합될 수 없는 별개의 세계다.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기에 누군가의 사회적 일탈이 방송되거나 기사화되면, 인터넷과 연동되면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수많은 군중들의 분노의 발화를 피할 수 없다. 복제된 기사가 셀 수 없이 많은 블로그에 도배되고 성난 댓글들이 폭주하고 질주한다. 혹자는 마녀사냥이라 부르고 혹자는 현대판 인민재판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이제 전 세계에 편재해 있는 현상이다.  디지털 전과기록은 썩지 않는 미이라처럼 온라인 상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인터넷은 나다니엘 호손이 쓴 [주홍 글씨]에 등장하는 ‘A(간통(Adultery)’을 뜻하는 단어의 첫 글자)’라는 글자가 붉게 수놓아진 옷처럼 개인의 잘못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일생이 아니라, 죽고 난 후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족쇄와 같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위험천만한 온라인상의 시민저널리즘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미디어의 먹이사슬 안에서 포식자의 위치였던 웬디가 먹이로 전락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그녀가 표범에서 톰슨 가젤로의 존재변이 되는 대목은 그 높이의 낙차가 너무 커서 아찔할 정도였다. 

 

 (코벤의 또다른 스탠드 얼론인 숲(Woods 2007 )이 올해 비채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코벤이 페이스북-리얼리티 티비 세대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세계에 사는 작가로서 이런 소재로 글을 쓰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작가란 존재는 자신의 작품에 그 시대의 성격을 투영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벤은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던 소아성애자를 체포하는 TV 뉴스 쇼를 보다가 만약 나와 친한 사람이 이런 쇼에 지금 등장하여 체포 된다면 어떨까?’ ‘만약 그가 내가 알고, 신뢰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존재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이 작품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모든 상상력의 발원지는 바로 선정주의로 물든 TV뉴스 쇼였던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지내던 친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범용한 인물들이 대응하는 방식을 결코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풀어가는 그의 장기가 이번 작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는 느낌이다.

   코벤은 이렇듯 일상성을 강조하는 작가다. 세상엔 잔인한 살육과 선정성에 의지하여 독자의 주목을 끄는 타입의 작가들이 있지만, 그는 그런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코벤은 마치 저희 음식점은 그렇게 자극적인 조미료로 맛을 내지 않아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일급 요리사와 같다. 그는 일상 안에서 긴장감을 창조하는 것이 더 쉽다라고 밝히면서 백악관의 음모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이야기나,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난도질하며 죽이는 사람에 대해서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스타일은 평범한 방식으로 살아가던 보통 사람이 어떤 사건에 휘말렸을 때 어떻게 그 상황을 헤쳐 나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작품에 편만해 있는 이러한 일상성을 응시하다 보면, 나와 가까운 평범한 이웃에게 일어나는 사건처럼 보이기에 독자는 감정이입을 수월해져, 몰입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이 밖에도 현대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능숙한 솜씨로 작품 가득 부려 놓았다. 앞서 말한 미디어의 횡포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한 인터넷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진위를 따지지 않고 자극적인 사건만을 쫓는 언론의 황색 저널리즘과 사건을 오도하는 기사와 오보, 그리고 신문사나 방송국 기자들과 경찰들의 함정수사에 대한 윤리적 문제, 소아성애자들에 대한 대중적 공포, 해고로 인한 자존심을 구긴 가장들의 문제,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차별까지 사회의 어두운 환부에 대한  작가의 근심 어린 시선을 책 안에 담아냈다.

 

미국 내에 아동폭력에 대한 공포는 지난 20년 동안 어린이들에게 적절한 교육, 영양, 주택공급, 양육, 의료 등을 베풀지 못한 탓에, 그러한 죄의식을 소아성애자나, 아동 학살자등에 투사한 것이며, 낯선 이들에게 점점 아이를 맡기는 일이 많아지는 데 따른 부모들의 불안과 죄책감을 부추기기 위해, 미디어의 보도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의견 (베리 글래스너(Barry Glassner)-공포의 문화(The culture of fear))이 있어 이곳에 부기한다. 이러한 공포의 조장에는 자극적인 소재를 선호하는 언론이 배후 세력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 더. 실제로 FBI순수 이미지라는 작전으로 온라인상에서 거짓 아이디로 어린 10대나 아동인척 하면서 소아성애자들을 단속했다고 한다. 게다가 방송국 기자들도 (이 소설에서처럼) 상대가 나타나면, 카메라를 들고 경찰과 함께 약속장소로 나타나는 함정수사를 하곤 했는데, 이러한 행동은 유혹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확언하긴 힘들지만, 코벤은 이러한 정황들을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 소설 공간 속으로 형상화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다.   

 

 

(코벤의 다른 책들,단 한번의 시선(Just one look2004), 결백 (The innocent 2005)) 

 

 

코벤은 여성의 관점으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여성 페르소나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남성 페르소나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해 그리 어렵지 않게 느낀다고 한다.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쉽다고 밝히며, 아마도 약간의 거리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하고 작가는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용서할 수 없는]의 여성 주인공 웬디의 존재는 남성작가 썼음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이 없었다. 몇몇 남성 작가의 경우, 여성 주인공을 너무 사실성이 떨어지게 그려내, 공감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뭐랄까, 마치 남자가 양산을 쓰고 다니는 것 마냥 어색하다. 어떤 작가는 여성 캐릭터를 너무 매력적으로만 보여지게 해서 단조로운 캐릭터 안에 가둬버리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코벤이 [용서할 수 없는]에서 그려낸 웬디는 전형적인 호감 가는 주인공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독자가 밉상이라고 여길만한 요소가 다분히 포함하고 있는 인물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이 비현실적 인물로 착색되는 것을 경계한다. 코벤은 호감가는 캐릭터보다 현실감이 있는 캐릭터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밝히며, 자신은 구태의연한 위험에 빠진 가련한 여자 주인공 캐릭터를 싫어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상투적인 정형화를 거부하며 실제에 가까운 인물로 자신의 텍스트를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상처로 그늘진, 착하고 매력적인 여주인공은 휴가지 해변가의 하와이언 꽃무늬 셔츠만큼이나 흔하디 흔하지 않은가. 코벤은 19권의 책을 쓰는 동안 (이 책의 출간 기준) 여자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단 두권에 불과할 정도로 남성 주인공 위주의 글을 썼는데, 그래서인지 웬디(Wendy)라는 캐릭터를 그의 시리즈물 주인공인 마이론 볼리타(Myron Bolitar)를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주인공으로 선정할 만큼 애착을 보인다. 코벤의 작품에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누가 선()한 인물이고, 누가 악()한 인물인지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도 웬디와 에드 그레이슨을 비롯해서 등장인물의 다수가 착한 사람/ 나쁜 사람과 같은 이분법적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코벤은 흑과 백처럼 색깔이 분명한 인물들 보다,소위 회색 인물들(gray characters)에 대해 쓰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러한 모호한 인물들이 그의 작품을 견인하는 힘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여담인데, 이 작품 [용서할 수 없는]에는 코벤의 충성스런 독자를 위해 시리즈 물에 나오는 마이론 볼리타의 친구 윈(윈저)를 등장시켜 읽는 재미를 배가 시킨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반색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코벤은 마이론의 페르소나와 어떤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으면 굳이 그를 주인공으로 쓰지 않고, 독립작품(스탠드얼론)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코벤의 이런 태도가 한 캐릭터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색깔의 작품을 보여주게 된 배경이다. 어떤 경우라도, 반복은 곧 진부해지고, 철면피하기 때문에 이는 작가로서 바람직한 모습이라 하겠다.(이 작품은 코벤의 통산 10번째 스탠드얼론이다. )   

 

이 작품 [용서할 수 없는]용서라는 큰 주제를 전경화하면서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불편하고 달갑지 않는 주제들을 배경에 오롯이 담아낸 수작이라 말 할 수 있다. 타인의 잘못을 껴안고, 상처를 보듬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도 반추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책을 덮은 후에도 한동안 강한 정서적 울림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매양 작품을 쓸 때마다 이 문장이 마음을 끄는가? 독자의 흥미를 끄는가? 이것이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작가의 작법은 이 책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독자는 그가 자신의 작품을 세심하게 다듬고 연마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코벤은 부조리한 현실을 겨냥하고, 동시대의 치부를 까발리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장르 소설에 독자들이 중시하고, 기대하는 경탄할만한 반전과 짜릿한 재미또한 잊지 않는다. 애초에 작가가 지향하는 글쓰기의 세계가 작품에 좀 더 서스펜스(suspense)를 담아 독자들을 다음 단어, 다음 문장, 다음 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고, 그러한 것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스릴러라고 믿고 있기때문이다. 어느 정도 이 계통의 작품들을 읽어 반전에 익숙하고 단련된 독자라도, [용서할 수 없는]이 선사하는 후반부에는 만족할 것 같다. 독자는 직구를 기다리다 갑자기 떨어지는 커브에 속수무책으로 헛스윙을 하는 타자의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익히 알려졌듯이, 코벤은 반전의 달인이고, 그의 책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작가와의 머리싸움에 도전하려는 독자들의 일급 대련상대다. 독서의 주안점을 재미와 흥미에 두어도 만족감을 줄 것이고, ‘깊이와 작품성에 두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특급 스릴러의 견본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주변에 망설임 없이 소개해 줄 양질의 스릴러를 찾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이 바로 명쾌한 답변이 될 것이다   

 

   ( 코벤은 이번 작품에서 국내독자들에게 자신의 색깔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빨간 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매우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작품.

늘 첫문장을 신경써서 만들었던 코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 중 첫문장들을 이곳에 부기해 놓는다.

 

"스콧 덩컨은 킬러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단 한번의 시선)

" 당신은 그를 죽일 의도가 없었다." (결백)

"매리앤은 비참한 삶 속에 그나마 남아있던 미덕을 깡그리 파괴해버리는 자신의 저주스런 능력을 한탄하며 쿠엘보(멕시코산 데킬라)를 석잔째 천천히 마셨다. (아들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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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0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르님,
조심스레 물어보건대, 설마 사진작가 아니어요?
굳이 알라딘에 리뷰를 쓰기 위해 이 많은 장소를 다니면서 이토록 양질의 사진을 찍는 것 같지 않아보여요. 다른데 쓰는데 있죠! 뭐랄까, 작품전에 낸달까. ㅋㅋㅋ
글도 대박이지만 사진에 눈이 더 가는데, 전부터 그랬네요, 에세르님의 글은요.
사진이 정말 예뻐요... ㅎㅎ

에세르 2012-07-09 09:16   좋아요 0 | URL
하하하 소이진님, 사진 작가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요..(언감생심입니다)
좋은 말씀 너무 감사하네요~^^ㅋㅋ
다른 사진 찍을 때 책 사진도 덤으로 찍는데,
요즘 나오는 책들이 멋져서 찍으면 그럴싸하게 나오는 듯 싶어요~^^
 
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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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보내려다 만 편지를 찾아낸 것은, 지난 일요일 세 번째 책상서랍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바쁘게 지내다보니, 책상 서랍을 열어보는 것조차 어떤 종류의 동물들이 1년에 한 번 정도만 발정기를 갖는 것처럼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터였다.

 

전달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책상서랍 속에 숨죽이고 있는 편지가 불러일으키는 쓸쓸함은 각별하다. 거기에는 망설임이랄까, 때를 놓침이랄까, 용기없음이랄까, 후회랄까 뭐 그런 것들이 잔뜩 묻혀져 있다. 그것은 어쩐지 불발탄이나 뚜껑을 잃어버린 사인펜처럼 서글프다.
세상에는 또 얼마나 보내지 못한 편지가 바닷가의 모래 알갱이처럼 산재해 있을 것인가.그 모든 편지에 대해서 언뜻 떠올려 보기만해도 마음이 무척 무거워진다. 어쩌면...그 무렵 나는 너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 뭉치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내가 보내려다 만 편지를 꺼내 읽어보니 지금 와선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없는 감정들과 이야기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세월이란 그런 것이다. 많은 것들이 시간의 비를 타고 유실(流失)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읽으니,신기하게도 서서히 그 시절의 내가 복원된다.

 

지금은 편지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의 쓰지 않지만, 편지를 많이 썼던 시절이 분명있었다. 짜디짠 외로움의 방증이랄까. 아마도 내 인생에서 보낸 편지의 8할을 그 시절에 보냈던 것 같다. 요리 프로그램을 본다고 해서 배가 부르지 않는 것처럼, 편지가 내 외로움을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편지에 매달렸다. 편리한 이메일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손으로 직접 쓰는 편지를 내가 쓰려고 했던 것을 보면, 편지에는 다른 매체가 주지 못하는 독특한 힘과 매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한자 한자 밤을 새워 편지지를 메꿔나가는 모습이나, 보내지 못한 편지가 일깨워주는 상념, 옛 편지를 서랍에서 꺼내 읽고 추억에 잠기는 일, 기대감으로 우체통을 들여다보는 마음, 편지를 받은 상대방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반송된 편지 뭉텅이들의 안타까움... 이런 것들은 편지만이 줄 수 있는 정서이고, 편지만이 가진 힘인 것이다.

 

여기, 편지만이 줄 수 있는 이런 정서와 힘을 이용한 작품이 있다.

 

 

[왕복서간]을 읽다.

 

 

 

 

 

 

 

서간체 소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진 3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편집이다.

 

미나토 가나에가 이번에 선택한 틀은 다름아닌, 18세기에 인기 있었다는 서간체 소설 스타일이다. 서간체 소설 방식을 차용해서일까, 독자는 편지글 특유의 친밀성을 통해 감정의 솔직한 흐름을 따라가며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게다가 작가는 기존의 작품들이 비슷한 스타일을 반복적으로 보여왔고, 그로인한 상투화의 우려가 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나에는 이번 작품에서 프레임으로 서간체 형식을 사용하여 변화를 모색했고, 그 결과 타작품들과는 구별되는 뚜렷한 변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간체 소설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는데, 하나는 한사람이 쓴 편지들로 이루어진 소설이고, 또 하나는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의 사람이 쓴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은 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장르쪽 소설에서는 스티븐 킹의 예루살렘 롯(Jerusalem's lot)도 대부분 주인공인 찰스가 쓴 편지로만 이루어져 있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스티븐 킹의 데뷔작인 '캐리(Carie)'역시 서간체 구조로 되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편지,신문 잡지기사, 책에서의 발췌가 작품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자에는 서간체 소설을 편지에만 국한 시키는 것이 아니라,일기, 잡지, 블로그, 이메일, 녹음, 책으로부터의 발췌, 인터뷰까지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로 이루어져 화제가 되었던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도 서간체 소설로 분류된다. ) 그밖에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아모스 오즈의 [블랙박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이 경우는 이메일)등 역시 서간체 스타일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소설들로 유명하다.

 

 

 

 

 

 

 

( 가나에의 작품은 직소 퍼즐처럼 조각 조각이 모여 전체의 그림을 보여준다)

 

 

 

미나토 가나에와 직소 퍼즐(jigsaw puzzle)

 

 

미나토 가나에가 채택한 방식은, 두 사람 이상이 편지를 주고 받는 타입인 후자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다수의 화자(話者)를 둘수 있고, 여러 시점에서 이야기가 해석되고 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다시점(多視點) 방식'인데, 이것은 데뷔 때부터 감추기 어려울 만큼 한결 같이 유지해 온 미나토 가나에의 특징이자, 장기라 할 수 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이야기들이 조금씩 합쳐져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스타일이다. 비교하자면, 직소 퍼즐(jigsaw puzzle)과 비슷하다고 할까. 전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각 조각이 어떻게 생겼고, 색깔과 모양을 기억해야 하는 직소퍼즐 맞추기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뇌를 자극한다. 직소퍼즐은 문제풀이로 자극받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좌뇌와 큰 그림을 바라봐야하는 창조적인 우뇌, 양쪽을 모두 발달시킨다. 한 조각, 한 조각 모아 전체의 형태를 만들어 가다 보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좌뇌와 직관적이고 주관적인 우뇌가 둘다 자극을 받게되는 셈이다. 이것은 어쩐지 미나토 가나에의 작풍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가나에는 이미 데뷔작 [고백]이나 [속죄]에서도 같은 상황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하면서 종국에는 큰 그림이 완성되는 방식을 보여준 바 있다. 작가는 이미 잘라낸 조각들이 갖고 있는 단면의 모양을 생각하고, 그것과 잘 들어맞는 조각을 만들어 서사를 전개해 나간 느낌이다. 실제 직소 퍼즐은 퍼즐 상자 위에 완성된 그림이 인쇄되어 있어 그것을 보고 맞춰 나가면 되지만, 글을 읽거나, 쓸 때는 그런 완성그림이 없기에 전적으로 상상력으로 전체 그림을 그려나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종적으로 그림이 짜맞춰졌을때 돌아오는 보상과 성취감은 독자나 작가 모두에게 대단히 짜릿할 수밖에 없다. 이 계통의 전문가에 따르면, 이러한 성취감을 느낄때에 신경전달물질의 일종인 도파민(dopamine)이 생산되는데,이 물질은 사람들의 집중력과 동기에 영향을 주며, 쾌락과 중독과 스릴에 관여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에, 더 나아가 추리소설에 중독되고 빠져드는 이유가 설명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반신욕하면서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놀라운 가독성을 보여준다)

 

 

 

서간체라는 틀

 

첫 번째 이야기부터 세 번째 이야기까지 공통점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주인공들이 과거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실에 바투 다가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건에는 상처가 옹이처럼 패어있다. 각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패인 생채기의 내역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이 현재의 삶에 많건 적건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십 년 뒤의 졸업문집], [이십 년 뒤의 숙제],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각 제목은 보다시피 현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제목인데, 등장인물 간의 편지는 결국 과거를 되새김질 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오고가는 편지 속에 주인공들의 희미하고, 불완전했던 과거는 빠르게 복원된다. 편지가 얼어붙어 있던 기억의 영토을 쇄빙선처럼 부숴버리는 것이다. 물론 오가는 편지에 쓰인 말들이 불편한 사건에 접근하면 할수록 감정의 진폭이 큰 어휘가 사용되기도 하고, 거짓의 가면을 쓰기도 하고,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풀 먹은 창호지가 마를 때처럼, 서로 팽팽하게 당기는 긴장감을 독자가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미나토 가나에는 고조되는 긴장감뿐만 아니라, 편지의 특징을 십분 발휘해서 속도감을 높였다. 편지는 아무래도 글자수를 늘이기엔 적합하지 않은 매체이기에 최소한의 글자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속도는 역시 글자 수에서 나온다. 작가가 세부를 잘라내고 행위에 집중한 결과 놀라운 가독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편지글이라 해서 미문 취향이나, 서정적 나르시시즘에 매몰되지 않고, 필요한 말만 명료하게 사용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읽은 책중 가장 빠르게 읽은 책이었다. 주인공들이 주고 받는 편지를 탁구 랠리 구경하듯 고개를 움직여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읽다 보면, 어느새 끝나 버린다. [왕복서간]은 속도감과 몰입감 높은 책의 좋은 증좌가 될 것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다. 읽으면서 가나에게 감탄했던 것중 또 하나는, 서간체 문장의 단조로움을 극복한 방식이다. 두 번째 이야기 [이십 년 뒤의 숙제]에서 방송부를 맡고 있는 오바 아쓰시가 녹음이라는 방식을 통해 편지를 좀더 생생하게 전달하게 하는 설정을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저 사실 전달이아닌, 대화체의 등장이 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듯한 묘사를 할 수 있게 된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다. 서간체 소설이라는 그릇이 갖고 있는 한계때문에 작가는 빈약한 묘사에 대한 고민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탁월한 묘사는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것이 없는 소설은 놀랄 만큼 밋밋하기 때문이다.

 

 

 

 

'그때 상황을 가급적 정확하게 써보겠습니다.(p.97)'나 '선생님께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마호 씨가 잘못 기억하는 부분이 있으면 곤란하니 마호씨의 말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p.98)' 혹은 '앞으로 만약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신경쓰지 말고 그대로 알려주렴(p.106)'..같은 말을 작가가 집어넣긴 했지만, 편지에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는 '따옴표'와 묘사의 '세세함'을 설명하기엔 다소 위화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의 대화체나, 오바 아쓰시가 쓴 글의 자세한 묘사등이 모두 설명된다.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처음에 마호 씨를 만났을 때부터 저는 쭉 대화를 녹음하고 있었습니다. 방송부에서 취재하던 버릇이지요. 양해를 구할까 했지만 그러면 속내를 감출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무단으로 녹음했습니다.(p.160)'

 

비슷하게 첫 번째 이야기 [십 년뒤의 졸업 문집]에도 촬영 비디오와 CD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옛기억을 상세하게 되살린다.( '지아키의 사고가 신경쓰여서 옛날 비디오랑 CD를 자꾸 보고 들었더니 취재 때 있었던 소소한 일들이 떠오르는 거야.(p.60)')

 

 

 

십 년 뒤의 졸업 문집

 

방송부 동아리 친구끼리의 결혼식때문에 십 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생 사이에서 행방불명된 친구 지아키를 둘러싼 사건을 주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작품은 작가의 전작들인 [속죄]나, [소녀]등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빼어난 여성심리 묘사가 이제는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음을 느끼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을 반추하며 여자친구들끼리 주고 받는 편지 속에서 우리는 예의 심리 저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질투와 선망, 오해와 위선, 비밀과 거짓말등을 목도하게 된다. 그들이 펼쳐보이는 옛 시절의 풍경과 에피소드에 소소한 재미를 느끼다가도, 그들이 격앙된 감정을 드러내며 진상에 다가가면, 돌연 긴장감에 포박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와 다음 이야기인 [이십 년 뒤의 숙제] 사이에는 흥미로운 점접이 있는데, [십 년 뒤의 졸업 문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지도하던 방송부 동아리 선생님이 바로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 '오바 아쓰시'라는 점이다. ("밤중에 너희끼리 돌아다니다가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니?" 오바 선생님께 그런 꾸지람을 들었잖아? ([십 년 뒤의 졸업문집],p.63)) (저는 지금 방송부를 맡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과 연인을 데리고 강에 물놀이를 갔는데 학생과 연인이 동시에 물에 빠진다면, 과연 주저 않고 학생을 먼저 구할 수 있을 지 고민해 봅니다.([이십 년 뒤의 숙제]p.105) 여기에 등장하는 '그 아이들'이 [십 년 뒤의 졸업 문집]에서 편지 릴레이를 벌이는 '그 아이들'인 셈이다.) 작가는 전면적으로 드러내지않고, 슬쩍 두 이야기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사견이지만, 세번째 이야기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에 등장하는 '야스타카'와 두번째 이야기 [이십 년 뒤의 숙제]에 등장하는 '요시타카(물에 빠진 학생이다)'는 묘하게 포개지는 이미지의 인물이다. 둘다 왕따를 당했다라는 공통점도 있고, 무엇보다도 음성학적으로 서로를 연상케하는 비슷한 발음이다.

 

 

 

 

 

 

(문자 메세지나 카카오 톡 같은 가볍고 편리한 소통수단이 편재해 있는 세상에서 온기를 담고 있는 편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십 년 뒤의 숙제

 

두 번째 이야기 [이십 년 뒤의 숙제]는 이십 년전에 강에 빠져 떠내려가는 학생을 구하려고 뛰어든 남편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했던 여교사와 그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의 후일담을 다룬 작품이다. 유년시절에 겪은 커다란 트라우마가 등장인물들이 성장한 후 어떤 결과를 미치는지 보여주었던 [속죄]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아이들이 여섯 명 있더구나.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그걸 확인하고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지.(p.93)) 그리고 여교사가 등장하는 부분에선 일견 [고백]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미나토 가나에는 작가 이전에 고등학교 가사 선생님이었던 이력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학교나 선생님과 관련된 그녀의 목소리에는 유달리 힘이 실리는 듯 하다. 졸업한 제자가 옛스승에게 편지를 쓴 편지글이라서, 온다 리쿠의 단편 [당신의 선량한 제자로부터]라는 작품이 즉각적으로 떠올랐으나, 읽어보니 악의 현현을 통해 오싹한 기분을 준 온다리쿠의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에서 쓴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에서 여교사의 남편이 만든 머위 된장 주먹밥의 맛과 새우와 흰 살 생선을 다져넣은 계란말이를 아이들이 이십 년이 지난후에도 기억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남편의 따뜻한 마음씨를 부각시키는 효과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음식 맛도 기억할 정도인데 하물며 그날의 사건은 어떻게 잊을 수 있게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직선운동을 해왔지만, 그 기억만큼은 언제나 제자리 걸음으로 고여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맹점은 결국 다케자와 마치코 선생님이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남편과 열 살짜리 제자중 누구를 구해야 했나,라는 잔인한 질문에 놓여있다. 그 일로인해 사망한 남편을 제외한 그 사건에 연루된 어느 누구도 이 질문의 자장(磁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이 질문은 그 사건에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 아이들과 당사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었고, 그 감정에 평생을 휘둘리게 된다.

 

이 선택의 장면과 그것이 낳은 결과는 윌리엄 스타이런이 썼던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 어머니인 소피는 아들과 딸 중에서 한 아이만 살리고, 다른 한 아이는 가스실로 보내 죽게 해야했던, (나치에게 강요받은) 가혹한 선택을 하게된다.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후회하게 되는 결정이다. 이 소설에서 소피는 결국 두 아이를 모두 죽일 수 없어, 아들 쟝을 선택하게 되고, 평생토록 딸인 에바에 대한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차라리 나치가 결정했더라면, 이토록 괴로운 죄책감에 내던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잔인했던 것은 그녀에게 선택권이 쥐어졌다는 사실이다. 선택이 불러올 결과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의 극단적인 예이다. 소피의 선택을 썼던 윌리엄 스타이런이나 본작 [이십 년 뒤의 숙제]를 쓴 미나토 가나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란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가며, 그러한 선택의 결과들이 차곡차곡 쌓여 현재 우리의 인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선택에는 '커피'를 마실지, '녹차'를 마실 것인가 처럼 깊게 생각해볼것도 없이, 사소하고 간단하게 처리될 문제도 있지만, 삶의 기반을 뒤흔들정도로 아주 중요한 일도 있다. 이 소설에는 등장하는 선택의 딜레마역시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간단히 끝낼 수 없는 곤혹스러움을 내재한 문제였고, 그것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등장 인물의 편지를 통해 작가는 개진한다. 그 과정을 밟으며 그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응어리졌던 감정이 조금씩 풀려 갔음이 밝혀진다.

 

 

다케자와 마치코 선생님이 마음에 걸리는 여섯명아이들을 만나볼 사람으로 오바 아쓰시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잊지않고 그녀에게 매년 연락을 해왔던 학생이기도 하고, 또 그녀처럼 선생님의 길을 걷고 있는 제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작품 후반부에 밝혀지는데 이 부분이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선 공명되어 울리는 가슴아픈 사연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편지글 특유의 온기때문일까, (내 독서이력에서 드문 일인데)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음을 고백한다. 이것이 미나토 가나에가 의도했던 것이라면,- 까뮈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이 작품에서 작가와의 진정한 만남을 이룬' 셈이다.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

 

 

편지를 쓰는 행위는 새삼 당신과 나 사이의 올바른 시간과 거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p.181)

 

이 편지가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일주일? 아니 열흘? 그보다 더 걸릴까? 당신 담장이 도착할 때까지 걸릴 시간도 계산해야겠지.

 

이게 지금 우리 사이의 시간과 거리야.(p.182)

 

 

 

 

개인적으로 편지만의 강점은, 자신의 감정을 시간차를 두고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자나 전화가 줄 수 없는 장점이다.

 

가령 2012년의 5월 29일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 밀봉한 것을, 2012년 5월 31일에 상대방이 개봉하는 장면. 멋지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편지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다. 이것이 해외 우편인 경우 시간차가 더욱 벌어지게 된다. 시간차를 두고 상대방의 편지에 담긴 마음을 궁금증과 기대감을 갖고 꺼내본다. 인류 역사와 함께했을 정도로 케케묵은 소통 수단인 편지가 공룡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드라마틱한 밀봉과 개봉에 있다.

 

세 번째 이야기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은 P국으로 자원봉사를 떠난 연인 준이치와 마리코가 주고 받은 해외 우편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당연히 편지를 주고 받는 시간차와 거리가 있다. 따라서 답장을 기다리며 느끼는 두 주인공의 불안과 기대감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둘은 중학교때부터 알아오던 사이였는데, 그 시절, 화재 사고와 결부된 끔찍 한 사고로 인해 가까워지게 된 관계이다.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 중고등학교시절 특유의 적의(敵意),집단 따돌림,서로에게 상처 입히기, 나약함, 거짓등이 틈입해있다.이야기는 그 은폐하고 싶은 진실에 조금씩 접근하면서 전개되어간다. 그 사건의 내막은 박남철 시인의 말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진실의 칼날이 너무나 날카로운 것이어서 되도록 칼집 속에 진실을 깊이깊이 있게 하는 것이 좋은' 종류의 것이고, 작가의 말을 사용하자면, '0을 곱해서 모든 것을 무화 시키고 싶은 진실'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선 반드시 응시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거짓 기억과 뒤섞이며 그녀를 괴롭혔던 사건의 진상에 마침내 접근하면서 뜻밖에 드러나는 진실의 얼굴을 작가는 정성스럽게 새겨넣었다. 진실이 밝혀진 후 둘은 새로운 1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가나에의 작품을 변함없이 견인해왔던 '사건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은 아직도 건재하지만, 이 작품에는 다른 작품들과 뚜렷하게 유리되는 요소가 있다.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이다.

 

소위 일본 독자들이 이야기하는 '독(毒)이 있는 미나토 가나에'와 '독이 없는 미나토 가나에' 사이에서 작가는 이작품을 통해 후자에 발을 담그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의 결말 부분을 읽어보면, 이러한 작가의 변모를 쉬이 수긍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발표했던 초기 작품들은 그녀가 '악의(惡意)'의 까발림에 전력을 기울였기에 읽은 후에 부대낄 정도의 어두운 뒷맛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사랑과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미나토 가나에 자신도 "'업보의 연쇄'나 '악의(惡意)'같은 것은 자각하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힘껏 자유롭게 쓰자. 이른바 그 결의(決意) 표명이 제3화인 [십오 년 뒤의 보충 수업]에 있는 마지막 1행"이라고 밝히며 자신의 작풍에 관한 '제2막'을 선언하고 있다.

 

 

 

이 책 [왕복서간]에 수록된 세 작품 모두 짧지만, 높은 완성도와 짜임새가 있는 작품이었다. 편지글 형식을 취하고 있기때문에 친밀하고 고백톤의 느낌을 줘서 일까, 상당한 가독성이 생겨, 한번 펼치면 읽다가 중단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밝혀야겠다. 게다가 각 작품마다 작은 반전이 잠복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내뱉게 된다.

 

5현제 이후의 로마제국 황제들의 재임기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극심한 자리다툼이 있는 (잠시 방심하면 순식간에 도태된다!) 장르문학계에서 미나토 가나에가 꾸준히 자신의 이름을 독자들에 각인시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분명 기존 스타일을 답습하려는 모습에서 벗어나,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꾸준한 노력 때문일 것이다.

 

 

 

 

 

 

 

 

(가나에의 작품들이 '데뷔작 [고백]의 벽을 넘을 수 없다'라는 말을 지금껏 셀 수 없을 정도로 들어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미나토 가나에'에게 편지를 썼다면, 지금쯤 우리는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왕복서간]은 [고백]을 잠시 잊어도 좋을 정도로 괜찮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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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22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에세르님.
미천한 저 소이진은 댓글 달기도 민망하여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저도 <소년을 위로해줘>를 이런 방식으로 쓰려고 했는데 안 되겠습니다.
편지 형식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손 너무 예쁘시지 말입니다. ㅎㅎㅎ

에세르 2012-07-02 10:00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너무 자신을 낮추시며 칭찬을 해주셔서 부끄럽네요~^^
은희경의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소이진님 덕분에 관심이 생겼네요.ㅋ 17살의 주인공이라 아무래도 감정이입이 나보다는 훨씬 잘 될듯 싶네요. 그시절로 돌아가서 읽어야한다는 암시를 넣고 읽어보고픈 소설입니다.

손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고.. 그 주인공의 이진님의 칭찬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매우 기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