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 진시황 vs 사마천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10
신동준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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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세계사를 공부할때 비교적 비중있게 다루었던 부분은 진시황이였다. 만리장성, 불로장생, 천하통일 등 이전까지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업적으로 중국사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사에서도 한획을 그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도 그런것처럼 폭군의 이미지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천하 통일 후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어서 황제의 명에 따라 다스리는 전제군주적 이미지는 강력한 권력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진시황 본기」에서 진시황을 '폭군'의 효시로 규정하게 되고,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진시황은 '폭군 왜곡 확인의 소'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오직 힘을 통해서만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한비자의 현실론을 받아 들여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재판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진시황의 혈통에 대한 논란이나 천하 통일에 관련된 내용, 그리고 어쩌면 진시황의 폭군적 이미지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 될수도 있는 강압정치에 대한 내용이 분서갱유, 토목공사 등과 같은 실제적 근거를 들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마천의 표현과 같은 폭군이 아니라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라는 점을 진시황은 법정에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은 역사적 사실만을 기록했을 뿐이라고 사마천은 진시황의 이야기에 반박한다. 그렇다면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 줄까?

 

담당 판사 정역사는 진시황이 제왕정의 실시함으로써 신분이 세습되는 봉건정을 폐지한 것이나 학문과 덕이 뛰어난 능력있는 자들을 등용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 공로는 인정한다. 하지만 "천하 통일 직후 아직 제국의 기틀이 확고히 다져지지 않은 만큼 패도에 기반한 통치가 불가피 했다는 진시황의 주장에 대해서 그런 자세가 제국의 기반마저 무너뜨릴수 있음을 주장하며 그렇기에 진시황을 폭군으로 규정"한 피고 사마천의 주장을 인정하게 된다.

 

끝으로 '성군' 과 '폭군' 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다를수 있으며, 피고 사마천은 바로 그 당시의 진시황의 모슴에서 '성군' 보다는 '폭군'의 모습을 더 많이 보았던게 아닐까 싶다. 진시황의 신분세습 타파가 서양의 것보다 무려 2천 여년을 앞섰다는 점은 확실히 대단한 일이다. 다만 그 이후에 진시황이 보여준 모습들은 '폭군'으로 불릴만한 것들도 있었기에 진시황의 억울함이 전부 받아들여지기는 힘들것 같다.

 

중국 역사속 최고의 통치자로 불릴만한 진시황과 역사가 사마천의 대결이 흥미로운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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