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연락이 안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직 1:1 상황에서 떨어져 있기만 하면 연락할 방도가 없다. 이 문제(?)는 남편의 입장에서 특히 심하다. 나는 아주 가끔 혼자서 바깥을 나갈 때가 있는데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깊은 외로움에 어울릴만한 얄팍한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내 눈에는 공중전화도 안보여서 날개는 조금 힘차 보일 수도 있다. 외로움이 무섭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안온한 생각의 지평이 나에게도 열렸으면 좋겠다. 내가 밖에 나가 있어도, 내가 혼자 집에 있어도 아무도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 나는 언제든 놓여있을 수 있다. 맘만 먹으면 가능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점심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남편이 집을 찾아 귀가를 했다. 분평동과 수곡동 어디쯤에 과연 어떤 찜질방이 있는가 구글지도를 펼칠 줄도 모르고 펼칠 마음도 없는 것에 난 안도한다. 뭐든 귀찮아 하는 마음에 안도한다. 맛있는 짬뽕집이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고 차로 3분 거리에 있는데 거기서 후룩후룩 뜨거운 국물과 면발로 얼큰하게 해장 한사발 하고 싶었노라, 왜 미리미리 말을 안해놓고서는 왜 지금 이 집엔 토끼 같은 아이들과 여우 같은 마누라가 없느냐고 하시면? 아, 당황. 토끼와 여우를 사랑하도록 마치 짜여져 있기라도 한 것인양 그대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가 왜 함께 슬퍼해야 합니까. 여기서만 이렇게 말하지 절대 실제의 나는 이렇게 못한다. 아무튼 남편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지, 나는 오늘처럼 이런 일이 있으면 기죽은 마음이 잘도 된다. 내가 남편에게 박수를 보내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가 일찌감치 욕심부리지 않기로 한 정신의 토대에 괸한 것이다. 매번 동의하고 긍정한다. 토끼같은 아이들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고 마누라가 여우짓을 못하면 못하는대로 봐주겠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세계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훌륭한 내면의 소유자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안일함이란 것을. 내 속 편하자고 만든 가짜 프레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어찌됐건, 난 요정도에서 생각을 맺는다. 다만 그에게도 가끔 불쑥불쑥 올라오는 게 있음을 이해한다. 내 마누라도 남들처럼 여우같이 세상을 헤쳐나갔다면, 다분히 세속적일망정 그 욕망을 잘 꾸려가는 마누라였다면 우리가 이렇게 사회적으로 몰락(?)하진 않았을 것을... 하는 회한 같은 것을 비출 때가 있다. 그걸 앞으로도 떠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난 알고 있다. 어찌됐건 오늘 난 맛있는 짬뽕을 먹을 기회를 놓쳤고 토끼같은 아이들이 모두 집을 나가버린 이 상황을 설명하다보니 남편의 속상함이 내게로 전이되어 하던 걸레질마저도 마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짬뽕 못먹게 된 사연을 이리도 완곡하게(완곡은 개뿔이나. 왜 뭣땀시 못먹게 되었는데? 짜증나게 하지 말고 제대로 말을 해보쇼)
하고 앉아있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 알겠다. 이 페이퍼를 통해 오늘 저녁(은 힘들겠구나, 암튼) 토끼와 곰과 늑대가 짬뽕 한그릇을 앞에 두고 회동하는 그림같은 동화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여우 대신 곰이라서 슬퍼할 이유도 없다.
죄송합니다. 내용과 전혀 무관한 사진입니다. 윗글도 모두 제 변덕의 일환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팩트에 기반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믿지는 마세요. 글이란 게 참 요물이라서 쓰다보면 몇번을 헤가닥헤까닥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