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엔 DC에 출장을 가야 한다. 목요일 오후에 떠났다가 일요일 밤에 돌아오는 일정이라서 한 주의 업무시간이 많이 줄어들게 된다. 늘 그러듯이 이런 일정을 짜고 나면 갑자가 한꺼번에 밀린 자료와 일거리가 몰려든다. 덕분에 이번 주말은 오후까지는 몇 가지씩 처리를 해야한다. 남들도 많이 경험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한가한 시간이든, 바쁜 시간이든 뭉텅이로 나눠지는 것 같고, 내가 아무리 컨트롤 하려고 노력을 해도 적절한 분배에는 늘 한계가 따르는 것 같다.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조금 일찍 잤는데, 엘러지 때문에 새벽엔 늘 뒤척이게 되어, 조금 전에 눈이 떠지고 말았다. 이런 저런 생각인지, 엘리지 때문에 코가 막히고 콧물이 나는 탓인지 잠이 오질 않아 조금 노력하다가 포기하고 내심 조용한 시간을 이용해서 간만에 밤의 인간이 되어 보았다. 혹자는 밤의 감성에 기대어 쓴 글은 낮에 보면 유치하기 그지 없어 다 버리게 되고, 낮에 좀더 이성적인 머리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는데, 얼핏 틀린 말은 아니고 글의 종류에 따라서는 낮에 써야만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100% 다 적용되는 이론이 없기에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밥벌이를 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나도 그러고 싶어진다. 낮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조용히 할 일을 하고, 확실히 높아지는 집중력은 내가 하는 일에 큰 플러스가 되기 때문이며, 따뜻한 태양도 좋지만, 밤의 포근함이 더 땡길 때가 있기 때문이다. 전화통화만 아니면 나도 이동진 작가처럼 오전 5시 정도에 잠자리에 들고 정오에 일어나는 스케줄로 살아보고 싶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서 묘사된 화자와 뒤팽처럼 밤의 마력에 취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약간 세상과는 엇나간 듯한 일상이 사뭇 매력적이다. 이러면서도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체육관을 나오면서 맡는 싸한 아침공기를 사랑하고, 이런 날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가서 정열적으로 업무를 처리해 나가는 것에서 느끼는 자부심과 희열도 있기에 아직 밤의 시민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저 가끔 이렇게 glimpse할 뿐이다.
읽는 내내 다소 거친 번역 때문에 조금 고생은 했지만, 역시 잘 샀다는 생각이고, 잘 읽었다는 생각이다. '스페인 내전'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원제가 더 책의 내용에 잘 맞는 것 같다.
2차대전이 시작되기 전, 1930년대 왕정을 엎고 시작된 공화정은 다양한 계파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모여 시작되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아나키즘, 지방분권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실상은 더욱 복잡했던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지방분권을 위해 공화주의 이념과는 먼 세력이 이들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고, 조금씩, 혹은 심하게 서로에게 이념적으로 적대적인 면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헤게모니 다툼은 거의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이에 비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몇 개의 계파로 나눠지긴 했지만, 엄밀히 하나의 단결된 세력을 이뤘던 것 같고, 다른 파시스트 국가들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내전이 시작될 무렵에만 해도 다소 불리하긴 했어도 어느 정도 해볼만한 싸움이었던 것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심화된 내부의 세력투쟁이 그 이상 문제였었던 지도자들의 무능함과 부족한 무기 - 금수조치로 사실상 소련 말고는 무기를 들여올 곳이 없었다 - 때문에 점점 더 쿠데타세력에게 유리해졌는데, 업친데 덮친 격으로 소련의 지시를 받는 공산당과 아나키스트의 대립과정에서 엄청난 인적/물적자원이 소모되었고, 내 생각으로 이 내전 속의 내전은 결국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내부단속을 하려면 최소한 적대세력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소탕한 후에 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대체로 지켜지지 못하는 교훈을 여기서도 본 것이다. 이를 더 크게 확대해보면 결국 공화정을 지원할 모든 이유를 갖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던 당시의 기조, 그리고 스탈린의 공산주의 혁명이 퍼뜨린 확산의 공포 때문에 내전 말기까지 스페인 공화정의 패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들이 깨달았을 즈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던 것이다.
전쟁은 늘 끔찍한데, 내전이란 건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이라서 그런지, 더더욱 그러한 것 같다. 적대세력에서 대한 잔인함에서는 양측이, 그리고 내부의 투쟁에서도 비슷했지만, 공화정부의 잔인함은 disproportional하게 부풀려졌고 자주 근거없는 픽션이 뉴스가 된 경우가 더 많았던 것에 비해 군부의 점령을 따라다닌 적대세력과 민간인의 학살, 강간, 약탈 같은 건 당시 군부에 친화적인 미디어의 적극적인 조작으로 제대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글쓰는 이의 역할은 중요한데, 갈수록 개판이 되는 건 왜일까.
이번 한국에서 일어나 촛불혁명을 조금 더 냉정하게 뜯어보면, 현 정국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작은 촛불이 아니라 조중동, 정확히는 박근혜를 버리기로 한, 보수로 각색되는 한국을 움직여온 어떤 세력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원했던 건 포스트 박근혜가 친박에서 나오지 않는 수준에서, 말하자면 MB의 추종세력에서 뽑아내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다양한 경로로 이미 갖고 있었던 뉴스꺼리를 토해냈는데, 정유라건이 터지기 전까지의 전체적인 흐름을 복기해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세월호가 가라앉아도, 그 수많은 무능에도 꿈쩍도 않고, 정권을 대변하던 조중동이 어느 시점엔가부터 다른 뉴스를 토해내기 시작했던 것이 2016년의 정국이었다. 그런데,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진 건 정유라건으로 생각하고 있다. 긴 얘긴 하기 싫지만, 박근혜퇴진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일들은 시작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하고 싶기 때문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되, 그리고 한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좀 거창하게 부풀리면 해방 후 이 나라를 움직여온 흑막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분오열해서 소모적인 논쟁과 적대행위는 좀 멈추고 하나의 세력으로 모여서 발전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나라를 끌어갈 혜안을 가진 통 큰 지도자와 유능한 정치인들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고, 그 이상 깨인 시민들의 단결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대충 알고 있었고, 문학이나 소설로 접한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흥미있게 볼 수 있었던 책이다. 나중에 영문으로도 구입해서 대조해보고 싶다. 몇 가지 번역문제로 의미가 정확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서의 번역, 아니 번역이란 것이 어렵긴 하지만, 댓가가 따르는 일이라면 보다 분발할 필요가 있겠다.
성당에서 배운 단편적인 천주교의 도입, 전파, 그리고 박해의 역사는 전형적인 종교사관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 깊은 지식은 아직도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 부분의 역사를 좀더 복합적인 이야기로 보는 수준은 된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경로를 빌어 어쩌면 진짜 이야기였을 수도 있는, 후기조선 천주교가 사회에 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면 역사소설처럼 정씨 형제들, 황사영, 정순대비, 당파싸움, 남인박해 등 지배층 중심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같지만, 진짜는 그들과 interact하는, 그 존재가 한미하고 불우하기 짝이 없는 밑바닥의 백성들과, 그들만도 못한 천민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역사의 사실을 따지지 않더라도 조선시대 후기 양반이나 중인 이하 계층의 삶은 처절했다. 노비는 사노비, 관노비 할 것 없이 재산처럼, 가축처럼 취급되었고, 짐짝처럼 부려졌으며, 주인의 의지에 따라 새끼를 쳤다. 김훈 특유의 raw한 묘사로 이런 장면이 몇 번 묘사되는데, 이건 사람이 아니라 숫제 집에서 키우는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 같다. 양민이라고 더 나을 것이 없었는데, 무너진 법체계와 집행, 세도정치와 파당정치, 여기서 발생한 뇌물상납과 수수의 피라미드 가장 밑에서 약 100년 후에는 망해버릴 왕조의 마지막을 지탱하고 있었기에 피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하면서 가진 모든 걸 빼앗겨야 했다. 천주교는 이렇게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희망없이 삶을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했는데, 지배층의 구석에 있던 서출, 중인, 세도정치에서 밀려난 남인, 그리고 사회의 최하층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즉 종교적인 면이나 교리적인 면에서의 어필이라기 보다는 반체제적인 사상적인 면에서 큰 매력을 주었을 것 같고, 이 덕분에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전파가 이루어졌을 것이다.내가 알기로는 선교활동이 없이 신앙이 전파되어 자리잡힌 경우는 한국 땅의 천주교가 거의 처음이나 마지막이다. 그 내면엔 진리에 대한 목마름 이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중의 간절함이 큰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 힘이 지금도 한국의 천주교를 비교적 옳은 정치/사회운동의 한 축으로 만들고 유지시켜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의 가르침은 다르지 않고, 수천억을 들여 회당을 짓고 정치세력화 하며 타자의 아픔을 무시하는 건 직업적인 타이틀이나 신앙의 계통을 떠나 모두 개만도 못한 새끼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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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궁전이란 것이 있다면 아마 이 책도 지난 번에 읽었다는 증거를, 잘 찾아보면 어디선가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워낙 김훈의 책이나 에세이가 비슷한 말투와 희뿌연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책에서는 어떤 특정 이벤트가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여러 번 등장했는데, 이 부분은 조금 낯선만큼,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서, 군부대 부근에 자리한 미술학원, 그 학원을 맡아 일하던 원장, 모 위관인가 영관급 장교의 애인이라던, 임신한 채 죽은, 자살로 판명된, 조금은 의심스러운 정황의 그 사건을 여러 번 똑같은 말투로 묘사했던 걸까?
그의 에세이를 읽은 경험 상 조금은 자전적인 요소로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특별히 여기서 김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포인트는 찾지 못했기에 그냥 어떤 이의 삶을 잠시 구경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1985년에 나온 만화버전, 첫 번째 이야기를 다룬 이 애니메를 접하고, 나중에 영문으로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한 이 시리즈를 읽은 것도 어느새 25권이다. 10년 이상 조금씩 나왔는데,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작품을 쓴 시기와 영문출판시기가 거의 20년 가까이 차이가 나서, 전자기기나 미래기술의 묘사가 상당히 옛스러웠는데, 이젠 많이 따라잡은 것 같다. 어느 시점에선가 대략 2000년대에 들어와서 쓰여진 것이 한 7-8년 후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젠 이 시리즈도 거의 끝나 가는 것 같다. 그새 시즌을 거듭하면서 딱딱한 로보트에서 거의 안드로이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된 Big Bang Theory의 셸든을 보는 것처럼 주인공 D도 처음보다는 훨씬 더 감정을 보인다. Western, SF, Horror를 아주 적절한 비율로 섞어 놓았기 때문에, 그리고 시리즈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책마다 따로 읽을 수 있을만큼 독립적인 이야기라서 3-4개월에 한번씩 신간이 나올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시리즈를 처음부터 하나씩 모아가면 읽는 책은 드물고, 보통은 나온지 오래되면 한꺼번에 구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 삶의 어떤 시점부터 한 권씩 모아들이기 시작한 이 책은 거기에 쌓인 추억만큼이나 소중하게 갖고 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주말에 일을 조금 덜어두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일단 바뀐 계획은 내일 새벽 일찍 출근해서 큰 건을 몇 가지 내일 중으로 해결하는 거다. 대충 6-12시까지 열근하고, 12-2시는 운동으로 피로를 풀고, 2-7시까지는 머리를 덜 쓰는 정리와 리뷰를 진행하고, 다음 날 조금 완화된 이 패턴을 반복하면 그럭저럭 DC출장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 같다. 떠나는 당일엔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writing업무를 챙겨 일찍 공항에 가서 라운지를 이용하면 오가면서 어느 정도의 업무처리도 가능하고, 밥과 음료수, 원하면 맥주나 칵테일 정도는 공짜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연간 두 개씩 주는 라운지 이용권을 이럴 때라도 써야한다.
출장은 여러 모로 부담이 되지만, DC는 늘 즐거운 곳이고, 업무를 빙자해서 거기 사는 친구를 만나 신세를 질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다. 소주든 와인이든 실컷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면 한다. 나와는 달리 대형로펌에 처음부터 들어가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대단한 놈이라서 늘 몇 가지 배울 수 있어서 그와의 대화를 즐긴다. 월/화만 잘 보내면 주말까지 즐거운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