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등 - 잉마르 베리만 자서전, 예술가의 초상 03
잉마르 베리만 지음, 민승남 옮김 / 이론과실천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누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을 물으면 '잉마르 베리만'을 꼽긴 하지만, 늘 함께 꼽곤 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만큼 자신있는 대답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크로넨버그 추종자라는 이미지가 가진 변태성;; 을 잉마르 베리만의 이름으로 중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조금은 숨어 있달까.

이 민망한 고백을 해 놓고 보니,  변명 또한 늘어놓고 싶어진다. 다른 '소위 명감독'들도 많은데, 굳이 베르만을 꼽는 게 오직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을 세트를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크로넨버그처럼 확고부동한 지지를 보내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리만의 영화를 크로넨버그의 영화 만큼이나 즐기면서 보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앙겔로풀로스와 타르코프스키는 수면제이고, 키에슬롭스키 앞에서는 공부하는 기분이 되는 내가, 이상하게도 베리만은 꽤 즐겁게-시간이 가는 걸 가끔씩은 깜빡할 정도로-볼 수 있으니. (좀 자의적인 묶음이긴 하군...) 과격한 표현을 써 보자면, 베리만은 내게 안토니오니보다 많은 걸 느끼게 해 주며, 드뤼포 보다 즐겁고, 고다르 보다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그런 걸 보고, '상성이 맞는다'고들 한다던가.

그래서, 잉마르 베리만의 자서전을 읽는 건 다른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어서라던가, 그의 영화를 더 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왜 이 지리한 영감과 상성이 맞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이었달까. 나 역시도 '크로넨버그'와 '베리만'이라는 이상한 조합이 가능한 이유가 궁금하였던 것이다. 마침 자리끼로 두고 볼 책이 없기도 했지만.

하지만 '괴조합에 대한 의문점 풀이'라던가 '베리만의 영화 세계 탐구'라는, 이렇게 써 놓고 보니 거창하지만 기실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목표들은, 이 책을 반도 보기 전에 날아가 버렸다.
그 사람이 영화 감독이든, 미술가든, 작가이든 간에, 한 예술가의 자서전에서 그의 작품세계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데 베리만의 자서전의 첫 인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겐 호수처럼 깊고 정적이고 경건하다는 표현을 쓸 만큼 고요한 이미지였던 그의 영화들과 달리, 그의 인생은 굉장히 동적이었다. 특히 스캔들을 쫓는 스스로의 저열한 관심사를 저주하면서도 열심히 읽었던 그의 여자들과 아이들, 연애사에 대한 부분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알고보니 꽤 바람둥이였더군, 영감쟁이)

그의 자서전은 그야말로 한 고집불통 인간이자 괴짜 예술가의 투쟁록이었던 것이다. 경직된 사회와, 내면의 열정과,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끝없는 투쟁.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투쟁. 한 마디로 그의 영화의 느낌과 그가 쓴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이 책을 읽은 다른 친구와도 오직 "쇼킹하지 않냐?"라는 말 밖에 못 나누었을 만큼.

하지만,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생각을 정리해보니 꼭 '다르다'라고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영화는 얼핏 정적이고 고요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뤄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끌어안을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저열한 욕망의 움직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그런 욕망을 하찮다며 비웃거나 신처럼 고고히 내려보는 대신, 함께 투쟁하고 고민하고 회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에 스민 종교적 색채도 사실은 인간의 욕망-신을 바라는-의 한 측면을 그린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하지만 동시에 그 본질과는 달리,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그것을 저열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포장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 본연의 하찮은 욕망-그리고 그 욕망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다-과 투쟁하는 고집불통 괴짜들의 영화들이라는 점에서 베리만과 크로넨버그는 닮은 듯 하다. 물론, 베리만의 다른 영화들을 더 보고, 크로넨버그의 자서전이라도 읽게 되면 또 다른 결론, 어쩌면 전혀 다른 결론을 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결론이랍시고 내 놓은 이것도 사실은 리뷰를 벌려놓고 수습을 하지 못하는 한 멍청한 인간의 고군분투의 결과물-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일지도...) 그러나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이 조금이나마 중심에 가까워졌든 아님 남의 다리 긁는 수준이든 간에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베리만'이라는 감독의 정체가 이 책으로 인해 백만분의 일정도 또렷해진건 사실이다.

어쨌든, 무엇보다도 또렷해진 건 바로 이거다 ; 이래서 자서전이라는 걸 읽을 가치가 있는 거였다. (사실 이 독서와 엉망진창 리뷰를 쓰면서 얻은 건 오직 이 것 뿐만이 아닐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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