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사 Dr. 스쿠르 애장판 전12권 세트
사사키 노리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일본인들이 뽑은 만화 50선"이라는 목록을 본 적이 있다. <내일의 조/허리케인 조>라든지 <도라에몽> <유리가면>같은 익숙한 작품들이 상위에 링크되어 있고, 이름을 모르겠는 만화가 한 반쯤 되는 목록이었다. 그런데 그 목록 13위에 정말 생각치도 않았던 만화가 한 권 올라 있었다. 노리코 사사키의 <닥터 스쿠르>였다.

노리코 사사키의 <닥터 스쿠르> 이야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노리코 사사키라는 만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녀만큼 일관성있는 스타일을 가진 만화가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작품마다 그녀가 변화를 주는 것은 배경 뿐 인 것 같다. <닥터 스쿠르>는 수의대와 동물병원, <못말리는 간호사>는 병원, 그리고 최근작 <헤븐>은 레스토랑, 이런 식으로. 배경설명이 끝나면 이렇게 간단하게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 십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성격의 캐릭터들은 자질구레한 소동들을 벌이면서 평범하지만은 않은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그래서 그녀의 만화들의 첫인상은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큰 줄거리도 없고, 사건도 없고,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과연 있을까. 그림체도 상당히 평범하고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편이다. 슬랩스틱개그풍도 적다. 그러나 그녀 만화가 매력이 없다는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다. 그녀의 작품은 정말로 정말로 매력적이니까. 그것도 두세번, 네번, 그 이상을 반복해서 읽어야만 직성이 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과연 어디에 그런 매력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노리코 사사키 만화만의 특징을 찾아야 한다. 그녀의 만화만의 무엇을 찾는 일은 쉬워 보인다. 그녀 스스로는 일관성있는 스타일의 소유이지만 만화계 전체로 보면 그녀의 스타일은 오직 그녀만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하면 지나친 평가일까?) 수의대, 병원, 레스토랑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평범한 사건들과 조금은 벗어난 평범한 일상의 비범한 사건들. 아까도 말했듯이 개성 강하고 나름대로 다들 성격파(?)인 등장인물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녀가 이야기를 펼쳐놓는 무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 세밀한 묘사들.

그 중 그녀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세번째 요소이다.  <닥터 스쿠르>를 보고나면 왠지 수의대를 반쯤은 다닌 기분이 되고 (그래서 쥐에게 주사를 맞출 수도 있을 것 같고 개에게 약을 먹일 수도 있을 것 같으며, 소의 아이를 받는 일이나 동료의 꼬리를 물어뜯는 범인 돼지를 잡는 일도 가능할 것만 같다) <못말리는 간호사>를 보면 종합병원 간호사들의 행동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게다가 각종 병의 신기한 특징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까지) <헤븐>을 보고나면 이런 저런 일들을 해 주지 않는 레스토랑이 삼류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만화의 "로인 디시 loin d'ici"라는 레스토랑이 과연 일류인지는 다른 문제지만. 상당히 격식은 갖추었지만...품위가... --;;;) 흥미롭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같은 해박한 묘사, 그것이 상당히 재미있으며 매혹적이다. 그래서 결코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점점 만화에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캐릭터들이다. 한 번 보면 잊혀질 수 없는 상당한 성격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닥터스쿠르>의 주인공 찬우나 <헤븐>의 주인공 이가 칸은 주인공치고는 상당히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지만 주인공이 평범한 대신 정말 빛나는 조역들이 많이 등장한다. <닥터 스쿠르>에서는 (만화를 보신 분이라면 아하!하고 가장 먼저 생각해내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유교수가 있고, 만화 여주요조역 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특징과 괴상한 체질을 소유자인 이태영양, 쥐를 무서워해서 교재의 쥐 그림에 "나는 다람쥐"라 써놓야만하는 강민군, 엄격하면서도 엄격하지 않은 할머니, 무신경한 놈인 것 같은 태수, 등이 이 만화의 빛나는 인간 조역들이다. 사실 이 만화에서는 동물 조역들이 진짜이다. 동네의 여대장 나비, 무섭게 생겼으나 담담하고 얌전한 시베리안 허스키 꼬마, 아무생각 없는 모래쥐들, 그리고 닭에 대한 인식을 상당히 바꾸어놓는 마당의 무법자 병순이. 생각해보면 주인공들이 얌전한 사사키의 만화에는 그 빈자리(?) 메꾸고도 몇번은 넘칠 조역들이 그득그득 하다. (<못말리는 간호사>에서는 주인공부터 상당했는데 그 대신 조역들이 상당히 정상적인 인물었다는 재미있는 점이 생각난다.)

그리고 마지막, 배경에 대한 상당한 묘사를 바탕으로 독특한 성격의 인물들이 평범하지는 않지만 일어날법한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이 이 만화에 묘하게 매력적인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친근하면서도 신기한 느낌을 전해 주는 것이다. <닥터 스쿠르>를 보면 "이 정도 일은 일어날 것 같아"하면서도 수의대라는 곳이 상당히 신기한 곳이 된다. 실제 수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기도 하지만 만화만큼 재미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 역시도 신기하다.

바로 노리코 사사키의 만화는 이렇게 일상과 비일상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우리가 쳇바퀴돌듯한 일상에서 한 번 꿈꾸는 소심한 탈출감이랄까. 나와 내 주위 사람들과 나의 일은 여기 그대로 존재하면서도 한바탕 웃을 수 있고 잠깐 휴식이 될 수 있는 해프닝들을 구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사사키의 만화는 그렇게 일상적인 해프닝들의 연속이다.

상당히 쉬워 보이면서도 꽤 어려운 일이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일상에서 특징적인 해프닝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사실 <닥터 스쿠르>말고도 그런 해프닝적 일상들을 다룬 만화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사키만큼 "평범해보이는" 작가는 만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것 저런 것 잊고 아직 <닥터 스쿠르>를 읽지 않으신 분은 한 번 쯤은 읽어둘만은 하다.  모두의 마음에 들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꼬마같은 시베리안 허스키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들테니.

ps ; 새로 나온 판형과 종이, 마음에 든다. 근데 제본이 약간 약한 듯... (내것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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