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난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쓰인 소설이라면, 게다가 그게 연애소설이라면 더더욱. 하나 더 얹자면, 해피 엔딩이 아니고 더우기 밑도 끝도 없다면, 그래서 아주 건조하면서도 로맨틱하다면, 절대 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운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 생활은 내가 여운에 젖어 하루나 이틀 혹은 그 이상을 보낼 수 있도록 나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 권의 잘 쓴 문학작품이 주는 충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이 결국에는 삶을 살찌운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마치 교통사고를 당하듯 가끔 아무런 생각없이 그런 소설을 집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무슨 미친 마음이 들어서 문학전집을 읽자고 생각했고, 그 첫권으로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를 선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를 읽었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를 인상깊게 보아서 읽게 되었던 '네이키드 런치'는 한 마디로 매우 난해했고 혼란스러웠으며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 감정말고는 내게 남긴 것이 없다. 나는 이렇게 휩쓸리지 않고, 아주 먼 거리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이야기 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퀴어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아, 그런데 이건! 밑도 끝도 아닌 결론을 지닌 잘 쓰인 연애소설이 아닌가. 게다가 아주 로맨틱하고, 섬세하고 부드럽고 약하다. 거미줄이나 갓 태어난 아기의 볼에 돋은 솜털이나 새벽 공기를 읽고 있는 듯 하다. 아주 보편적이기 까지 하다. 닳고 닳은 표현을 여럿 동원해서 어쩐지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한 마디로 내가 너무 좋아하는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들의 총합이었다. 나는 책을 한 장 한 장 집어삼키듯 읽어나가면서 마약중독자 백인 게이에게 공명하는 스스로가 두려워졌다. 특히 앨러턴에게 끈질기게 거부당하면서 갈가리 찢기는 리의 내면이,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떤 역사로 작용할 지언정 결과적으로는 마음 한 구석의 빈 공간 말고는 리의 삶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지독한 허무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가끔씩 너무나 보편적이지 않은 것들에서 강한 인간 마음의 보편성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이 그러했다. 주인공 리는 마약중독자이고, 한량이고, 게이이지만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은 그런 '퀴어'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퀴어를 받아들이고 말고는 이 소설의 핵심과는 별 상관이 없다. 다만 퀴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혹은 퀴어만을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표면적인 것들에서 부유하며 충돌만을 반복한다면, 더 없이 멋진 경험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마약중독자인 리가 쏟아내는 의미없고 알맹이 없는 수 많은 말들 사이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버로스의 섬세한 감수성-대표적으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그러하다. 이 문장은 매우 고전적이면서 아름답다-과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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