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들어와 가끔 놀라는 때가 있다. 그것은 상당히 일방적이며, 직설적이고, 폭력적인 글들이 높은 추천을 받고 있는 것을 볼 때이다. 정확히 말해서 놀란다기 보다는 그저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일단은 이 알라딘이라는 공간의 특성적인 문제. 내 추측일뿐이지만, 아마도 이곳에는 책을 좋아하고, 그만큼 글쓰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분들이 다수를 이룰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글들도 결국은 어느 정도는 타 곳들과 비슷해진다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뭔가 다를 것이다라는 것은 결국 어떤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어쩌면 그런 것을 폭력적이며, 일방적이라고 받아들이는 나의 성향이 이상한 착각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에 들어서 내가 쓰는 글들이 퇴보를 향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무지 발전이 없고, 계속 한 얘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얼마전 내 블로그 글들을 자주 읽어주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친구의 말로는 내 글이 너무 '모호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후에 내가 지금껏 쓴 글들을 꼼꼼이 다시 반복하여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내 블로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은 '일종의 문제', '~수 있다', '어떤 경향성', '조금은', '~까', '부인할 수 없다' 등등이다. 어떤 것이 좋다고도, 그리고 혹은 나쁘다고도 쉽게 말하지 않는 모호함의 문제, 회색의 덧칠들 그런 것들이 너무 눈에 띈다. (즉 글이라는 것이 결국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함임을 전제로 했을 때, 나 자신도 읽으면서 안개 속을 걷는 형국이라면, 누가 그 글을 읽겠는가.) 

이제 이런 나약한 글쓰기는 그만두고 치열하게 부딪히는 환경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생각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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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10-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듯해요. 어떻게 된 것이 책은 읽을수록 읽어야할 책은 점점 더 많아지는지.. 그리고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가 겁나고 매사에 무언가를 확신한다는 것이 두려워져요.

맥거핀 2011-10-31 20:58   좋아요 0 | URL
한 때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많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분명히 나보다는 무엇인가를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를 보면요. 아는 것과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갖추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일까..도리어 많이 알게 될수록 말하기가 힘들어지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저 '아는 척'만 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생각을 해야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아닌 것 같아요.

꽃도둑 2011-11-0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가을이군요...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사색의 계절..
맥거핀 님의 생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거에요. 무엇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고민해보았을 듯 싶은데요... 누구처럼 써보고 싶다는 열망은 결국 나를 넘어서는 일이어야 할텐데...한계라는 것은요..쉽사리 무너지는 게 아니더라구요.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는 나를 보곤 하죠...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고 그 길밖에는 없는데...
뭐 굳이...저는 그래요. 뭐 굳이.. 그냥 쓰는 순간 몰입하고 그걸로 잊어버리곤 하죠..^^
그리고 어디가서 별로 아는 척 안해요 쩍팔려서...^^


맥거핀 2011-11-02 01:20   좋아요 0 | URL
뭔가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하는 고민인가요..? 그래요. 확실히 뭔가를 넘어서기는 해야하는데, 자주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과연 이게 올바른 방향인가, 이게 더 나은 것인가 의문도 들고..하기는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기준도 예전을 돌이켜보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예전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글들을 지금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별 감흥이 없거나, 도리어 싫어지기도 하니까. 그만큼 자기 기준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 어려운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렵다고 해도 노력은 해야죠.^^

마녀고양이 2011-11-02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맥거핀님께서 저랑 같은 날짜에 유사한 맥락의 글을 올리셨었군요.
따스하게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는게 제 생각인데,
댓글에서 다른 의견이 있었답니다. 그 정도 글은 글쓴이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기 때문에, 비평 자체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죠. 음,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구나 하고 한참 생각했었습니다. 아마 그런 글을 주고 받는게 일상화된 분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자와 여자 또는 직업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면이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추워지는데, 따스한게 저는 좋습니다만. ^^

맥거핀 2011-11-02 20:56   좋아요 0 | URL
방금 전에 몇몇 글을 보고나니, 뭐라고 말을 잘 못하겠네요. 다만, '이것이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다는 말로만 봉합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물론 마녀고양이님께 뭐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 제 블로그 대문에 쓰인대로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무튼, 저도 따스한게 좋습니다.^^
 
약속 - The Promis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가장 몫이 없는 사람들에게 향함으로써 결국은 자기 구원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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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3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것은 항상 숭고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자기구원의 시작은 (타인의 잘못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는 것일 것이다. ...나는 나를 경계하고 있는가?
 
트리 오브 라이프 - The Tree Of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서사를 깨버린 초반 30분은 거의 천상의 황홀경으로 이끌지만, 서사가 진행되면서, 그 황홀경은 반복된 메시지로 바뀌며 보는 이를 다시 지상으로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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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 21> 826호 정한석의 리뷰에서: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리가 보는 우주와 지구의 이 생성 이미지는 적어도 상식에 의존한다면 진화론의 이미지일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의 천지창조가 될 수 없다. (중략) 그러므로 이 '트리 오브 라이프'의 이 우주론은 이상한 우주론이며 모순의 우주론이다. 세계의 기원인 것처럼 보여지는 시각적 이미지는 진화론에 입각해 있지만 영화 내내 울려퍼지는 사운드는 창조론을 믿는 자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맬릭이 완수하고자 했던 이 대당의 관계를 누구보다 꿰뚫어본 것은 다름 아니라 브래드 피트였던 것 같다. 그는 "맬릭은 과학 안에서 신을 보고 신 안에서 과학을 본다"고 말했다."

맥거핀 2011-10-28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어쩌면 테렌스 맬릭식의 변형된 지적설계론인가? 신이 '진화의 방식으로' 창조를 행했다고 말하는 것. 영화는 분명히 빅뱅에서부터, 생물의 탄생, 공룡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진화론에 따라 이를 보여주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단절적인 부분들이 있다. 테랜스 맬릭은 도리어 그 단절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생물뿐인 지구에서 갑자기 어떻게 생명이 출현하였는가, 그리고 그 생명들은 어떻게 본능을 획득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생명들은 사랑과 증오, 영성 등등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

맥거핀 2011-10-28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랜스 맬릭은 이 영화에서 한 생명이 태어나고 사멸하는 것과 이 지구의 기원에서 생명이 출현하고 사멸하는 것을 거의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신의 위치에 끌어올려 놓고는 이야기를 끝마쳐 버린다. 이 영화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의 각각 다른 모습의 육화이다. 신은 자신에 대한 무한정의 복종을 요구하고, 그 복종을 거부하거나, 또는 모든 것을 바쳐 복종하려 노력하려 자에게(욥) 고통을 안긴다. 또한 동시에 신은 자신이 인간에게 금지한 것들을 스스로는 행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은 모든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존재이다. 그 모순의 극한 속에서 인간은 생하고, 멸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사건 케이스 하나. 이민 문제를 둘러싸고 중산층 부부 씨민(여)과 나데르(남)는 별거를 시작한다. 별거가 시작되면서 나데르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딸 테르메를 돌보기 위해 가사 도우미 라지에를 집에 들이는데, 얼마 뒤 일이 벌어진다. 라지에가 아버지 손을 침대에 묶어두고 무단으로 외출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부상을 입고, 더군다나 라지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이 없어진 것. 이에 화가난 나데르는 라지에와 언쟁을 벌이고,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라지에를 집밖으로 밀쳐내다가 그만 라지에가 계단에서 구르게 된다. 그리고 라지에는 4개월간 뱃속에 있던 아기를 유산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 더 책임이 있는 것은 누구인가? 아마도 주의깊은 누군가는 이 진술만 가지고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위의 진술만 놓고 보면, 몇 가지 더 확인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라지에는 과연 무슨 일로 외출했는가, 그것이 정말 어떤 시급한 일이었는가, 라지에가 그 돈을 가져간 것이 맞는가, 나데르가 과연 심한 고의성을 가지고 라지에를 밀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데르는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등등 세부적인 확인을 요하는 사실은 많다. 그러나 과연 이 정도 사실들만 확인된다면,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이어지는 몇 가지 질문들. 라지에의 갑작스런 외출이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 때 우리는 그 외출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나데르가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너무 격분하여 그 사실을 망각하고 행동했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느 정도까지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등등

씨민과 나데르의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는 별거에서부터 출발하게 된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수많은 문제들과 얽혀 있다. 여기에는 씨민과 나데르라는 성별의 문제가 있고, 중산층 부부인 씨민과 나데르 부부와 그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인 라지에와 히잣부부라는 경제계층적인 문제가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란 사회를 둘러싼 종교적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거짓과 양심의 공방을 둘러싼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있다. 또 동시에 테르메와 소마예라는 양가의 딸들을 등장시켜 가족의 문제를 묻고 있기도 하며, 각 개인에게는 사건에 있어서의 판단 방식과 대응의 문제를 묻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영화는 계속적으로 등장인물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복잡한 가치들 속에서 어느 하나를 판단하도록 요구한다. 물론 영화의 큰 축은 위에 진술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의 곁가지에서 등장인물들은 지속적으로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것은 꽤 커다란 사건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볼 때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들에게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인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당신이 여성 가사도우미인데 치매 남성이 실수로 옷에 변을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면 된다. 그러나 당신이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남편 외 다른 이성의 벗은 몸을 보아서는 안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이 영화는 거의 매순간 등장인물들을 어떤 딜레마 속에 빠뜨리며, 그들에게 어떤 선택을 요구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들이 단지 등장인물들에만 던져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영화의 첫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 우리는 이혼법정에 나와있는 씨민과 나데르를 마주하게 된다. 이 장면이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심사관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심사관의 시선과 동일하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장면에는 각자의 입장을 항변하는 씨민과 나데르만 있을 뿐, 심사관은 카메라 자체가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카메라를 통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은 심사관이 된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심사관이 되어 씨민과 나데르의 진술을 듣고 판단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 입장이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결국 제한된 각자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명확한 판단을 내리게끔 하는 진실은, 혹은 사실은, 이 두 사람의 각자의 입장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표명하는 사실은 사실 이 두 사람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은 분명 있지만,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두 사람의 진술을 들으며, 나름 둘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본인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그러한 제한된 진술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꽤나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자세를 영화의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의도적인 추리극이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흔히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를 보다보면은 결국 우리는 어떤 제한된 진술과 부정확한 사실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된다(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추리극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하다). 이 사건을 밝혀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번인가 영화를 다시 되돌려보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초반의 어떤 사소해 보이는 사건과 동작들이 이 영화 속 사건의 판단을 내리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봐도 그 장면의 진실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반의 어떤 장면들에서 중요한 몇가지는 감독에 의해서 숨겨졌음을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감독의 편집장난에 놀아난 것일까. 그렇게 단정짓기는 이르다. 왜냐하면 그순간 영화는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것을 미리 정확하게 알았다고 해서, 당신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으로 질문을 바꾸어도 좋다. 당신이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당신은 그만큼 다른 어떤 것을 잃을 준비가 되었는가.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어떤 것들을 당신은 감수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과도 연결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딸 테르메를 앞에 두고 심사관은 묻는다. 이혼을 앞둔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 너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자면, 너는 누구를 잃을 준비가 되었는가.

딜레마란 결국, 무엇인가를 잃을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물론 모든 선택이란 게 대부분 그렇기도 하지만, 딜레마는 그로인해 선택한 것 외에 나머지 하나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좀 다른 얘기겠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미드 중에 <24>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의 매력을 스케일이 큰 액션, 배신과 역배신이 넘쳐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스피디한 사건 전개 등 여러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넘쳐나는 딜레마들이 그것들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의 잭 형님은 거의 매 에피소드에서 딜레마에 처하며, 그 딜레마의 강도는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국가반역자로 몰려 평생 도망다니면서 살아야 하는 삶을 감수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목숨을 다른 어떤 것과 맞바꾸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 선택들은 때로 매우 불합리해 보이기도 하고, 해서는 안될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보는 우리가 이 딜레마적인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결국 지지하게 되는 것은 그 선택이 두렵고 어렵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가장 최악의 결과 - 아마도 잭의 죽음을 포함한 - 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딜레마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무서운 점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의 마지막과도 조금은 통한다. 딸 테르메는 사실 이 영화에서 의외로 가장 정확한 관찰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중간에 세탁기를 놓고 하는 말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가서도 그 관찰력은 그 위력을 어느정도 발휘한다. 그 테르메가 나중에 가지는 선택의 태도. 심사관은 반복하여 확인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분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너는 답을 가지고 있느냐고. 테르메는 망설이지 않고 명확하게 대답한다. 답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답을 가지려 하는 태도 말이다. 아마도 딜레마로 가득한 하나의 영화를 놓고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선택은, 나는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입장에 다 공감하며,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결국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어쩌면 그 윤리와 도덕의 질문들을 나는 피해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누가 했던 말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 영화가 그냥 당신을 쑥 뚫고 지나간 것이 되므로. 아마도 좋은 영화란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얹혀있는 영화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냥 뻥뚫고 지나가는 까스활명수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더 많을 것이다. 100자평에 "영화로 치르는 윤리론 시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어쩌면 상당한 악평일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영화관 같은 곳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을 바란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실 어쩌면 다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거짓에 가까운 말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영화를 보는 우리는 결국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된다. 만약 우리 자신이 딜레마에 빠졌을 때 겨우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어떤 선택 뿐이며, 그 선택이란 그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우리 각자가 가진 세계관이라는 밧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24>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우리가 잭 형님에 열광하는 것은 물론 잭 형님이 각 딜레마에서 빠르고 화끈한 선택을 하시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잭 형님이 가진 대원칙, 즉 그의 세계관에 공감하기 때문은 아닐까. 예를 들어 <24>의 세계라면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아야한다는 세계관이다.  배나온 중년남 잭 형님이 그래도 조금은 섹시해 보이는 것은 그 원칙을 가지고 딜레마를 하나하나 격파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애정남'이 아니지만, <24>를 보는 잭 형님의 열렬한 팬으로서, 이 애매한 것이 가득한 사건에 어떤 판결을 내려보려 한다(이 판결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것은, 물론 나의 윤리관이 그 정도 깜냥밖에 안되는 까닭이다). "할아버지의 치매 악화 및 부상과 원고 라지에의 유산의 경중을 놓고 봤을 때 원고 라지에의 유산이 훨씬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사건의 전후 정황을 놓고 봤을 때 피고 나데르와 그의 가족들에게 아기 유산에 대한 일정 정도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원고 라지에가 본인의 일부분의 과실을 인정하고 있고, 대가 없는 보상금을 원치 않으므로, 라지에에게 가사 도우미 일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맡기되, 기존 일당의 10배를 보수로 지급할 것을 명한다. 땅땅땅."



덧.
접근성도 좋고, 영사시설도 좋고, 친절한 'KU시네마테크(건국대)'에서 왜 이렇게 관객이 없는지 의아함을 가지고, 나를 포함한 달랑 3명의 관객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그 3명의 관객 중의 한 명은 무려 홍상수 감독(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건대에 재직중이다). 영화가 끝난 후 텅빈 영화관 로비에서 마주보는 행운(?)을 누렸으나, 타고난 소심증으로 싸인도 못 받았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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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이 영화의 번역 제목에 대해서..separation을 단지 '별거'로만 한정짓는 것은 조금은 아쉽다.

네오 2012-01-3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감독님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각자의 진술과 선택의 딜레마 ㅋㅋㅋㅋ 이 영화보면서 내내 도대체 끝을 어떻게 만들까라는 생각때문에 앞장면을 상기하면서 봤네요~ 좋은 영화예요^^

맥거핀 2012-01-31 21:56   좋아요 0 | URL
음..그러고보니 홍상수 감독이 좋아했을 법도 하네요. 잘알지도 못하면서..ㅋㅋ 영화가 끝난 후 홍감독님과 로비에서 딱 마주쳤을 때 아..그럼 이 영화를 보고 느낌이 어떠셨어요?하고 물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아쉬워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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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정의란 무엇인가'. 혹은, 영화로 치르는 윤리론 시험. 당신이 누구의 입장에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가가 당신의 내면에 숨겨진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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