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 Terminator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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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의 'You Could Be Mine'을 다시 듣는 것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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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09-06-06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즈의 'You Could Be Mine'을 다시 듣는 것은 즐겁다. 새로운 시작으로 모자라지 않은.
이라고 쓸려고 했는데, 뒤의 부분이 무슨 오류인지 계속 잘린다.
이렇게 해놓고 무슨 40자평을 올리라 하는지..-_-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 Terminator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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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절대 있음)





시작부터 어쩔 수 없이 니름질을 상당히 하면서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는 미리 내용을 알고 보았을 때의 느낄 수 있는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허나,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다른 재미'를 별로 원하지 않을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되도록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영화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하 T4로 지칭)'을 비롯한 터미네이터 시리즈에는 묘한 결정론적인 세계관이 있다. 전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살펴보아도 그러하고, 각 편의 이야기를 따로 떼놓고 보아도, 각각의 이야기에는 일종의 결정론적 세계관, 즉 '이미 정해진 미래(혹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식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터미네이터 3'의 경우에도 결국 존 코너는 스카이넷이 일으킨 전쟁을 막지 못한다. 존 코너는 마지막에야 벙커 안에서 깨닫는다. 터미네이터의 임무는 전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보호하는 것 뿐이었다는 점을. 전쟁을 막는 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미 불가능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영화 T4는 어떠한가. T4에서는 존 코너(크리스천 베일)가 아니라 마커스(샘 워싱턴)가 마지막에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것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그가 카일 리스를 만나고, 저항군 본부에 찾아가며, 탈출하고, 존 코너를 스카이넷 본부에 오도록 만드는 이 모든 것이 사실 이미 스카이넷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점, 그는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침투형 로봇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대로 안 된다면, 그건 일종의 프로그래밍 오류인 셈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이의 반대편에 존 코너를 비롯한 저항군 세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존 코너와 저항군 세력은 신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 영화의 존 코너의 마지막 대사가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설명해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다는 것, 이미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영화 중간에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예를 들어 존 코너가 다른 저항군 세력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그렇다. 명령에 불복종하라는 것, 우리가 정해진 명령에만 무조건 따른다면 그것은 기계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것 말이다. 존 코너의 이 말들은 비정결론적인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것, 그것은 기계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으로 보일 때는 예측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일 것이다. 그것이 한편으로 실수가 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는 거야, 거참 얼마나 인간적이니.

그러나 이 존 코너의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점이 있다. 그것이 내가 묘한 결정론적인 세계관이라고 말한 이유다. 시리즈 전체적으로 보면,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존 코너를 살리려고 하는 인간들과 죽이려고 하는 기계들간의 대결이다. 그래서 기계들은 존 코너를 아예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어머니 새라 코너를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그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새라 코너와 만나기 이전에 죽이려고 하며, 어린 존 코너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맞서서 2018년 현재의 존 코너의 가장 큰 임무는 자신을 태어나도록 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 새라 코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내야 한다[각주:1]. 이렇게 보면, 앞의 이야기들은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기계들은 현재의 존 코너가 있는 이 저항군의 세력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뒤바꾸어야 하며, 존 코너는 결정되어 있는 과거를 확고히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카일 리스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새라 코너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는 이 과거, 결정되어 있는 이 과거가 있어야 결정되어 있는 이 미래의 저항군 세력 및 자신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들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존 코너가 존재하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에, 인간들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오도록 하기 위해(존 코너를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기계들이 미래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에 반해 인간들이 정해진 미래를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기계와 인간은 뒤섞이고 역전된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이 시리즈의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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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이와 연관지어 재미있던 것은 기계가 인간을 닮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T4의 현재 시점(2018년 시점)에서 가장 발달된 터미네이터인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맡았던)은 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야 할까. 그것도 근육이 아주 우락부락한,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의 형상으로 말이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T-800의 이전 모델인 T-600은 마치 골격이 전부 드러난(인체해부도에 등장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영화에 더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이전의 모델들은 더욱 인간답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스카이넷과 기계들이 그렇게 인간을 잡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이용해서 더욱 인간에 가까운 터미네이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또, T4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을 공격하는 기계들의 형상을 보면 왠지 이것이 인류의 어떤 진화과정, 혹은 자연세계를 연상시킨다. 마커스 일행을 공격했던 거대한 기계(아마도 '하베스터'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는 과거의 시기에 있었던 거대한 맘모스나 공룡들을 연상시키고, 물에서 인간들을 공격하는 그 기계는 큰 벌레나 피라니아를 연상시킨다. 즉 이것들은 자연의 어떤 세계와 그 형태와 발달 모습이 비슷하게 조응한다. 왜 이것들은 기계이면서도 인간이 존재하는 이 자연세계와 그 형태와 기능을 닮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는 단지 그 형태와 간단한 기능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스카이넷 본부의 그 구조. 밑에는 총을 든 T-600 감시병들이 포로들을 지키고, 위에는 작전실과 실험실(?) 등이 존재하는 그 구조 말이다. T-800이 생산되는 그 밑의 공장의 검고, 뜨겁고, 약간은 더럽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이미지와 그 위의 작전실의 깨끗하고 하얗고 샤프한 이미지의 대립. 이것이 보통의 인간 사회의 이미지와 거의 같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스카이넷의 본부가 꼭 이렇게 생겨먹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음이 생긴다. 왜 이렇게 그 형태나 기능 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마저 인간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는 우문(愚問)일지도 모르겠다. 기계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것, 따라서 그 기계가 인간을 닮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믿는 인간들이, 한편으로는 신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각주:2].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가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기계가 인간들을 아무리 닮으려고 애써도, 하나 결코 닮을 수 없는 게 있다는 점 말이다.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예측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커다란 실패가 될지라도,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가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기계들이 존 코너를 결국 죽이지 못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영화에서 기계들은 존 코너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게 성공했다. 다만, 그들은 한 가지를 결코 고려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마커스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 궁금해졌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그 인간이 결코 고려할 수 없는 점이란 어떤 걸까. 


 





1. 이와 관련하여 영화 속에서는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 문제를 자세히 다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존 코너가 그 자신이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카일 리스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과거로 보내야 하는 것 말이다.

2.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가 흥미롭다. T-800의 다음 모델인 T-1000이 형상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형상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 그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3편의 T-X가 처음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도 재미있다. 신은 아마도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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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더 나아간 봉준호의 작품세계. 세밀하게 전진하지만, 그 칼끝은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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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이 상당히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옛날 어느 도시에서 한 마술사가 우물에 묘한 약을 넣어 버렸다. 마술사는 말하기를, 만약 그 우물물을 마신다면 누구나 미쳐버릴 것이라 하였다. 그 도시에는 우물이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평민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온 도시 사람들이 미쳐갔다. 사람들은 그 우물물을 마시면 미쳐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우물이 그들이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게다가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참을 수 있었겠는가? 얼마 안 가 사람들은 포기했고, 저녁때가 되자 온 도시가 미쳐갔다.
왕은 무척 행복했다. 왕은 궁전 테라스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별개의 우물을 갖고 있지. 신에게 감사한다. 온 도시가 미쳐버렸군 그래." 사람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날뛰고 깔깔거리며 웃고, 울며 난리들이었다. 그것은 지옥이요, 악몽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전에는 결코 해본 적도 없었던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행복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이 왕궁으로 몰려와 외치기 시작했다. 병사들 역시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그 우물물을 마시고 미쳐 있었다. 다만 몇몇의 호위병들과 요리사, 하인들, 대신들 그리고 왕 자신과 여왕만이 미치지 않고 온전해 있었다. 왕은 크게 걱정이 되었다. 왕이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이 그리는 세계는 대체로 상당히 이상한 곳이었다. 그 곳은 열려 있으나 실상은 폐쇄된 공간, 예를 들어 한강을 둘러싼 서울의 일부지역이거나,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 그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이상한 일들은 벌어졌다. 이상한 약품을 먹고 자라난 물고기는 괴물이 되어 고수부지를 덮쳤고, 지방의 한 도시에서는 비오는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강간되어 버려졌다. 그리고 괴물은 한강을 따라 폐쇄된 공간을 활주하며 그 위용을 뽐냈고, 살인마는 작은 도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경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리고 또 여기는 지방의 작은 소읍. 한 여고생이 밤길에 살해되어 옥상에 버려졌고, 한 어리숙한 청년은 살인범으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진실을 찾고자 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미친 세계. 목격자의 불확실한 진술과 작은 골프공 하나를 단서로 범인을 지목한 경찰, 아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만 받아 챙기려는 변호사, 아들과 어머니를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는 이웃들, 도와주기는 하겠으나 돈이 필요하다는 아들의 친구, 그리고 죽은 여고생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은폐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들. 어머니는 묻는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도 그 전작들과 비슷한 것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 <괴물>을 살펴보면, 감독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범이 과연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 혹은 <괴물>에서 괴물이 과연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찾는 것은, 그저 미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맥거핀'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맥거핀으로 두고, 그보다는 이 모든 것의 이면에 숨은 것들, 이러한 틀을 만든 폭력의 구조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감독이 이러한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은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 가는 개인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계속 사라져가는 여자들과 더불어, 경찰들에게 끌려와 폭행당하고 군화발로 짓밟히는 무고한 시민들, <괴물>에서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호와 도움도 받지 못하고, 괴물보다는 오히려 국가로부터 계속 공격당하는 현서네 가족들이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가는 개인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의 구조가 만들어낸 괴물들(변형된 물고기와 살인마)과 그 괴물을 만들어내고, 만드는 데 일조한 자들(한강에 약품을 뿌린 자들 또는 경찰들, 국가기관)이 은폐되고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무엇이 필요했고, 현서네 가족과 경찰서 지하에서 폭행당한 사람들은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마더>도 그러한 면에서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살인의 추억>이 연상되는 지방의 어느 소읍. 이곳은 상당히 폐쇄된 사회다.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러한 작은 사회에서, 공동체의 무참한 폭력이 한 소녀에게 가해진다. 이는 폐쇄된 사회, 폐쇄된 공동체에서 가해지는 알려진, 그러나 모두들 쉬쉬하는 그런 폭력. 그러나 이 폭력은 실제로 이러한 폭력을 가한 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든 별로 공들여 수사할 마음이 없는 경찰과, 변호사와 검사와 병원장이 젋은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중첩된 이곳에서 이 구조가 온전히 이들만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봉준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결코 처벌받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 도준(원빈)이나 기도원 종팔이와 같은 어리숙한, 사회적인 약자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낸 틈을 가장 약한 곳을 부러뜨려 메우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난다. 그러고 보면, 감독은 영화가 현재의 이야기임을 여러번 상기시킨다. 언뜻 배경이나 상황만으로 볼 때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80년대를 다루고 있는 듯 하나, CSI를 언급하거나, 2006년 월드컵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임을, 이 폭력의 구조가 여전히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음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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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꽤나 친절하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 장면까지 세세한 설명과 주석을 덧붙인다. 흥행감독으로써 가끔은 비교 대상이 되지만, 그런 면에서 박찬욱 감독과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 약간 고약한 이미지의 추상화를 그려놓고 "이 추한 것에도 아름다움이 있지 않니..이 이면의 것들을 보렴..."이라고 말하는 식이라면, 봉준호 감독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 보이는 잘 짜여진 풍경화를 그려내놓고, "자 여기에서 네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거야...그게 뭐냐면 말이지.."라고 말하는 식이랄까. 작은 복선들과 작은 디테일들이 중첩되어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봉 감독의 영화는 전달한다. 그러나 굳이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예로 든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그림들에서 풍기는, 이상한 미스테리와 괴기(怪氣)들. 그것 또한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몇 가지 미스테리한 질문이 가능하다. 도준은 과연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엄마의 생각대로, 혹은 우리 모두의 생각대로, 정말 '바보'인가. 이 엄마(김혜자)는 도준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를 전적으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죄책감(도준을 그렇게 만들었다는)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러고보면 이 엄마야말로 수상쩍은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도준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돈이 별로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에서 숨겨진 돈들이 나오고, 군에서 최고 잘나가는 변호사를 찾아갈 줄도 알며, 이상한 침술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또 형사 제문(윤제문)이나 아들의 친구 진태(진구)와의 관계도 어딘지모르게 약간 이상한 점이 있어...아니야..그건 단지 김혜자에게서 풍겨나오는 어떤 아우라에 내가 너무 깊숙히 빠져든 탓일꺼야...그래도 그 춤은 좀 이상하잖아...그래...그 춤. 맞아, 그 춤. 이 영화는 시작과 끝이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 부분에 엄마의 우스꽝스럽고도 어딘지모르게 슬퍼보이는 그 춤에서, 엄마가 약재를 썰다가 밖을 내다보고 거기에 아들 도준이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시작한다면 마지막에서는, 엄마가 산자락에 서 있는(처음의 그 춤 장면은 아마도 시간상으로는 여기에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장면에서, 다시 약재를 썰고 그 밖을 내다보면 형사가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엄마가 버스에 올라타 침을 찌르고 버스 안의 아주머니들과 한바탕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난다. 이 마지막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엄마는 약한 존재였다. 시작 부분에 어두운 방안에서 약재를 썰며 좁은 문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그 아들이 차에 치여도, 갑자기 나타난 형사에게 잡혀가도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작은 프레임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나중에 도준과 구치소에서 대면하는 장면과 겹친다. 역시 사각의 틀 안에서 작은 틈으로만 아들과 대화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 그러나 이 엄마의 모습은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누구와도 만나고 어디든 나타나면서 말할 수 없이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아들 도준 대신 그곳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를 보면서 "엄마가 없어?"라고 묻는 그 순간, 엄마는 다시 작은 사각의 틀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더 작은 틀들로 끊임없이 분열된다. (이를 감독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엄마는 고통스런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부위를 침으로 찌르고, 아주머니들과 섞여서 춤을 춘다. 이로써 엄마는 일종의 공범이 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인 어느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과 아프게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다른 수많은 모성(母性)들 틈에 섞여서. 내 아들 대신 다른 아들을 밀어넣고, 작은 엄마로 돌아가며.

어쩌면 모두가 미쳐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최대한 지키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더 미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이 엄마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세상을 지키려했던 어머니를 기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대신이 말했다. "꼭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폐하께서도 그 우물물을 마시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그래서 그 왕은 그 우물물을 마셨고, 잠시 후에는 그도 미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군중들이 기뻐하며 소리쳐 외쳤다. "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우리 왕의 마음이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 오쇼 라즈니쉬, <배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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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6-0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미리니름이 이 정도면 거의 없는 걸요.
그게 있어도 영화감상엔 아무런 지장이 없지요, 제 경우엔^^

맥거핀 2009-06-02 14:59   좋아요 0 | URL
음..제 생각에도 이 영화는 미리니름이 알고봐도
크게 무리가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목적은 범인찾기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또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파산의 기술記述 - The Description of Bankrupt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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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지만, 알고 보셔도 괜찮습니다.)





인디스페이스의 월례비행에 다녀왔다. 이달의 영화는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記述)>. 일종의 사회성 짙은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제목은 <파산의 '기술'>이나 '기술'보다는 '이미지' 또는 '파편들'에 가깝다. 화면에는 여러 이미지들이 떠돈다. 지하철에서 투신하는 사람을 흐릿하게 잡은 CCTV 화면, 대한뉴스, 타이거우즈가 빙그레 웃음짓는 카드회사의 광고, 어느 담벼락에 붙어있는 광고전단들, 어느 시위 현장, 386들의 축제, 세계 경제 포럼....많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들. 그리고 그 중간에 비정규직 노동자 몇몇의 인터뷰와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와 파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감독의 나레이션과 조세희의 <난쏘공>, <시간여행>의 몇몇 구절이 끼어든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계속 우리의 분노와 공포를 가라앉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는 몇몇 강렬한 장면들을 일부러 피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채권추심자가 파산한 사람의 집의 물건들을 압류하러 찾아가는 장면들, 혹은 카드회사에서 돈을 빨리 갚으라고 반협박조로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아주 흐릿한 화면으로 제시되거나, 아예 암전된다. 그리고 그나마 음성도 조금 나오다가 말아버린다. 인터뷰 장면들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뷰 중 극적인 장면들, 예를 들어, 한 파산한 아주머니가 카드빚을 갚기위해 한 노래방 도우미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조금 이야기하는 듯 하더니 금새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터뷰도 그렇다. 한 사람의 인터뷰를 차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짜깁기한다. 여기에 중간중간 갑자기 끼어드는 여러 이미지들과 자막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갑자기 제시되는 조세희 소설들의 구절들, 그리고 감독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표현했던 상당히 문학적인 수식을 가진 나레이션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영화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든다.

왜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일까. 아마도, 몰입은 공감과 분노, 또는 공포를 낳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이 파산에 대해 어떤 공포심을 갖거나, 혹은 이 사회가 파산한 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구조를 보고 분노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파산의 구조, 이 구조 자체를 조금 더 주목해서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파산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두 눈 크게 뜨고 보라고, 그렇게 보아야만 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파산 그 이후(TV의 사회고발물들이 대체로 다루는 부분인)보다는 '파산 그 자체'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꽤나 친절하지 않다. 파산의 '기술'이라고 해서 그 파산의 구조 자체를 줄줄이 설명하기를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이 파산의 구조는 매우 흐릿하고 상당히 희미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파산의 구조라는 것이 그토록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이다. 희미하고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을 조금씩 끌어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그것이 파산의 늪이다. 다만 몇 가지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이 파산의 구조라는 것은 드러나 있는 층과 그 이면의 층이 있다는 것이다. 은행의 대출들과 카드회사의 친절한 광고들, 그리고 그 이후에 조금은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불친절한, 아니 폭력적인 전화목소리와 압류딱지를 붙이는 손길과 파산자들의 눈물과 의료보험 해지와 목소리들에 대한 노이로제가 드러나 있는 층이라면, 그 이면에 드러나 있지 않으나 사실은 훨씬 더 폭력적인 층이 있다.

이 드러나 있지 않은 층은 이 영화에서 '집행자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스치고 지나갔던 모습이다. IMF 이후 시작된 외국자본의 침공과 무너진 국내경제, 서민들의 손에 친절히 쥐어진 '카드'라는 함정 속에 숨은 카드회사를 살찌우던 정책들, 불안정한 고용 속에서 언제라도 이런 파산의 늪에 들어설 수 있는 비정규직들과 이 비정규직을 탄생시킨 사람들과 법률과 정책들. 이는 아마도 이 영화에 나온 3가지의 상징적인 장면들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세계 경제 포럼(혹은 그 비슷한 것)이 열리는 장면. 이 장면의 사운드는, 그들이 하는 소리는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연상될 정도로, 웅얼웅얼 소음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래도 그들 손에 들린 와인잔은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 '회사들보다는 가계에서 훨씬 상환이 잘 되니까요. 그쪽으로 자금이 몰리는 거죠.'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커다란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가끔 구제금융이니 뭐니 하는 얘기도 나오지만, 개인이 무너질 때는 아무도 그들을 '구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파산해가는 사람들과 교차되어 편집된 386들의 모습들, 그들이 축제에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손을 흔드는 장면들. IMF 이후 소위 '진보정권' 10년의 시대에 양산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카드회사들과 제2금융권과 파산자들, 그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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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이송희일 감독의 사회로 이강현 감독과 변성찬 영화평론가, 그리고 파산 관련한 시민단체에서 나오신 분(단체명 및 성함이 기억이 안난다...-_-)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영화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은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그것은 아마도, 故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월례비행 상영은 몇 달 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지금 이 시기에 이 영화의 얘기를 한다는 것이 감독은 조금 부담스러운 듯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파산의 구조 그 이면의 것들, 그리고 그 구조를 만든 것에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소위 '진보정권'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은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이 영화는 2006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故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386세대에 대해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감독은 여러번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감독 그 자신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지금 이 시기에 와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박노자 선생이 쓴 글과 같이,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혹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확실히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이 자꾸 섞여들어가고 있음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대담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변성찬 영화평론가가 질문한 다음의 부분이다. 영화 중간 파산한 분들의 인터뷰에서 한 아주머니가 돈을 어떻게해서든 꼭 다 갚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아주머니는 돈 몇 푼 때문에 의료보험이 없어 고통에 신음해야했던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의료보험비를 못내도 카드빚은 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야만 할까. 이에 시민단체에서 계신 분이 날카로운 대답을 해줬다. 이들에게 파산한 것은 하나의 '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 즉, 돈을 못갚고 파산한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죄인처럼 이 사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파산한 사람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과 폭언은 어느정도 정당화되며, 그들이 마치 신앙간증을 하는 것처럼, TV 앞에 나와 눈물로 돈을 다 갚을 것을 호소하는 사회, 그리고 하루에 2-3시간만 자면서 결국 돈을 다 갚은 것이 미담처럼 다루어지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이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빚을 갚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빚을 갚는 것'이 이들에게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레임'이 다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이같은 다른 '프레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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