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 Haeun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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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이렇게 소위 '대박이 나고' 있는 영화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많은 글들과 이야기들과 곁가지 내용들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가. 왠지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보고 난 이후에는 이전에 보았던 리뷰들에 나의 감상이 영향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괜히, 몇몇 부분들에는 반박을 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CG의 어설픔이라든가, 배우들의 연기의 미숙함, 특히 박중훈 연기의 미숙함을 지적하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 그렇다. 글쎄..개인적으로는 CG 부분은 생각보다 의외로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재난영화에서 CG는 큰 부분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의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CG가 얼마나 정교하고 실감나게 제작되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타이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설혹 약간 어설프게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고, 핵심적인 포인트를 살짝 다른 곳에 돌릴 수 있게 함으로써, CG를 영화를 받쳐주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도 그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영화 <해운대>의 CG는 그것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적절히 잘 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박중훈의 연기는...여러 부분에서 약간 어색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몇 가지의 변명을 해줄 수는 있다. 먼저 첫째는, 사투리 연기가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 강한 사투리의 사용은 그것의 적절한 사용만으로도 가끔 연기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에서 이러한 이점을 활용할 수 없는 몇몇 캐릭터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둘째는, 그의 이 영화에서의 역할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는 점. 더구나 그러한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처럼 몇 분간의 장황한 설명을 해야하는 방식이었다면, 좋은 연기를 보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쓰나미의 발생을 설명하는 그 몇 분간의 씬이 과연 필요한 씬이었는가라는 의문이 있다.) 

사실 하려던 이야기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듯 하다. 하려던 이야기는 이 영화를 보고 들었던 몇 가지 의문이었다. 먼저 자잘한 의문부터. 둘로 딱 나눠져 있는 이 영화의 이상한 구조부터 말이다. 이 영화는 관객 누구나가 느끼듯이, 딱 두 개의 영화를 붙여놓은 듯한 구조로 되어있다. 해운대 사람들의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이야기인 전편과 쓰나미가 몰아닥친 후편의 이야기. 물론 많은 영화들이 이야기가 나뉘어진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코미디 영화들도 거개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처음의 웃음 코드와 나중에 감동 코드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은 대개 '코드'만이 그렇다. 이 영화 <해운대>는 갈매기가 차창에 머리를 박던 그 순간부터 갑자기 '페이스 오프'한다. 그리고 몰아닥친 쓰나미 속에 앞의 모든 이야기와 캐릭터의 특징들은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 영화의 이런 어색한 전후반의 연결은, 다른 영화들에서 제기될 틈이 없는 질문을 굳이 하게끔 만든다. 이것이 한 영화로 굳이 묶여져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라는 질문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실 이 영화가 재난 영화인가라는 의문이 살짝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재난이 초반부에 몰아닥친다. 그리고 재난이 일어난 이후에 그 중심 이야기는 그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투쟁,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애, 서로가 살겠다고 벌이는 싸움, 그리고 결국 그것에의 극복이 주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러닝타임 반이 지나가도록 재난을 숨겨놓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여러 갈등을 최대한 끌어올려놓고 쓰나미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재난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나약함, 그것을 넘어선 인간목숨의 중요함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애의 고결함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다른 재난영화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그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나 나약함 같은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고, 쓰나미가 몰아닥치자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위대한 인간애를 발휘하고 모든 갈등은 그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재난 영화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여러 다른 재난 영화의 클리셰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여타의 영화들과 상당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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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을 여는 하나의 실마리가 윤제균 감독이 이 영화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윤제균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연의 중요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적을 만들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죽일 듯이 싫어한 사람도 자기를 구해줄 수 있고, 또 싫어한 사람을 자신이 구할 수도 있으니까. - <씨네 21 714호> 윤제균 인터뷰" 그래서 김밥할머니는 김휘(박중훈)의 아이를 헬기에서 기꺼이 받아주고, 변기를 뚫어줬던 사내는 엘리베이터에서 유진(엄정화)를 구하고, 작은아버지(송재호)는 만식(설경구)를 구하고, 형식(이민기)은 기꺼이 자일을 끊고 떨어지는 것이다. 즉 재난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나약한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라, 고귀한 인간애와 인연을 강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라고 했을 때 여러 갈등은 영화의 전반부에서 쓰나미가 몰아닥치기 전에 이미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몰아닥친 쓰나미 속에서 고귀한 휴머니즘으로 상쇄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휴머니즘의 일방적인 강조는 가끔 지나쳐보이기도 하며, 조금은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텔 옥상에서 헬기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2차 쓰나미가 몰아닥치는 장면. 이 장면에서 노약자들이 올라타 있는 헬기구조대에 사람들이 올라타는 것을 군인들이 통제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실제라면 가능할까. 2차 쓰나미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고, 지금 저 헬기에 올라타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것이 거의 확실할 때, 군인들이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군인들마저도 살기 위해 매달리고 따라서 헬기가 뜨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더 현실에는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이 비현실적인 장면을 고수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합동분향 장면에서 유독 죽은 구조대원들의 사진만 집중적으로 비춰주는 것, 그리고 구조대원들의 고귀한 희생만 강조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다른 것에 있다. 이 휴머니즘의 강조라는 것이 진정 이 영화의 주제인지, 감독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조금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몇몇 시퀀스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영화의 감초 캐릭터인 동춘(김인권)이 떨어지는 컨테이너 박스들을 피하는 장면. 이 장면은 마치 게임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 처리되어 있으며, 뭔가 약간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팬티를 반쯤 내리고 있는 여자가 떨어지는 물에 놀라는 장면들 같은 것. 물론 몰아닥치는 쓰나미의 상황에서 여러 다양한 삶과 죽음들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왜 많고많은 삶과 죽음의 엇갈림 속에서 굳이 그러한 장면을 선택하여 보여줬을까. 한 인간의 생과 사가 오가는 이러한 장면들, 이러한 내용들이 왠지 하나의 유희로서 혹은 오락으로서 제공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이러한 장면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유는 감독의 인터뷰로도 뒷받침된다.


- 쓰나미가 진행된 뒤에 벌어지는 2차적인 재난에 대한 아이디어가 관건이었겠다.
= 맞다. 변압기 시퀀스는 장마 때 감전사로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는 사실에 기인한 거다. 호텔방에서 물이 빠지면서 아이가 밖으로 떨어지는 장면도 재난영화에서 못 본 것 같아서 넣었다. 컨테이너 장면은 사실 더 재밌게 갔다. 컨테이너가 박히는 건물이 호텔이다. 그때 안에서 반라의 남녀가 피하다가 박스와 바짝 붙게 되는 장면이 있다. 여자가 뭔가 해서 고개를 내밀 때, 두 번째 콘테이너 박스가 날아와 변을 당하는 거지. 다 찍었는데, 너무 장난스럽다고 해서 뺐다.

- 사실 아쿠아리움 장면을 보면서 또 다른 시퀀스가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수족관에서 빠져나온 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지….
= 그 장면도 있었다. 실제 찍었다. 화장실에 가는 희미의 친구가 물을 헤치고 나오는데, 상어한테 물리는 장면이다. 역시 너무 웃기다고 해서 뺐다. 그런가 하면 건물 앞에 빽빽이 모여 있던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지는 장면도 있었는데, 같은 이유로 삭제했다. 전체적으로 10분 정도를 자른 것 같다. 다 코믹스러운 장면이다. 재난의 긴장이 몰아쳐야 하는데,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많아서…. (웃음) 나중에 DVD에는 다 넣을 거다.

(<씨네 21 714호> '윤제균 인터뷰' 중 부분 발췌)



과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인간애, 인연..그런걸까. 잘 모르겠다. 위의 몇 가지 장면들을 보면서, 그리고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자꾸 아리송하게 된다. 인간의 죽음을 장난스럽게 묘사하는 것과 과도한 휴머니즘의 강조. 휴머니즘의 강조는 무엇을 덮기 위한 것일까. 혹은 무엇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일까. 자꾸만 아리송해지는 그것의 상관관계들. 우리는 그것을 단지 상업영화의 최대치이자, 그것의 한계에 불과하다고만 말해야하는 걸까.


p.s.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동춘(김인권)이 어머니의 사진을 붙잡고 오열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의 옆에 놓인 '용감한 시민상'이 과연 무엇을 위한 용감한 시민이었냐고 묻고 있는 그 장면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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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1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동춘의 어머니와 물에 둥둥 떠다니는 신발, 그리고 용감한 시민상,
그걸로 울면서도 우쭐해하는 동춘, 감독이 김인권을 가장 신뢰하는 게
아닌가싶은 정도로 역할이 크더군요.

맥거핀 2009-08-13 01:3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의 리뷰 당선도 축하드립니다.^^
(하하..상금이 줄어서 상당히 불만..;)

확실히 이번 영화에서는 많은 분들이 김인권의 호연을 말하는 것을 볼 때,
이번 영화의 숨은 승리자(?)는 김인권이 아닌가도 모르겠어요.
나쁜 면을 가지고 있지만, 나쁘게 느껴져서는 안되는 캐릭터였는데,
그런 면을 잘 표현한 것 같아요.
 
플라스틱 시티 - Plastic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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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와이의 불교 수행을 따라가는 것은 강렬하나, 꽤나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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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시티 - Plastic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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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습니다만...)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영화구나. 아니, 꼭 리뷰를 쓰기가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이 영화에 대해 물어도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라는 의미다. 영화를 보고 와서 찾아본 몇 개의 리뷰는 대체로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 특유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이국적이면서 무거운, 그러면서도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어떤 것. 강렬한 색의 대비와 독특한 화면구성. 매우 불친절하고 난해한 내러티브. 오다기리 죠와 황추생의 인상적인 연기, 그 뭐 그런 것들. 그러니까, 다시 정확히 말하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러티브가 생략된, 이미지와 상징으로 점철된 영화를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겠는가. 이러한 영화는 아무리 줄거리를 적어내려간다고 한들, 아무 것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부터 줄거리는 별로 기억나지 않고, 파편화된 몇몇의 이미지만 머리 속에서 맴돈다.
 



...................................

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장 머리에 남은 것은 영화 마지막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짧은 문구이다. 바로 이 문구이다.


一物一數 作一恒河 一恒河沙 一沙一界 一界之內 一塵一劫 一劫之內
일물일수 작일항하 일항하사 일사일계 일계지내 일진일겁 일겁지내

所積塵數 盡充爲劫 
소적진수 진충위겁 


(세상 모든 것들의 수를 세어 그 수만큼의 항하(갠지스강)가 있다고 하고,
이 항하의 모든 모래 수 만큼의 세계가 있으며
그 숱한 세계 안의 한 먼지를 한 겁으로 치고
그 모든 겁 동안에 쌓인 먼지 수를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




영화에 너무 짧게 스치고 지나갔고, 영화 안에 이 말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나오지 않는터라, 그 의미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불교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줄여서 <지장경>) 제1품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에게 물은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에서 나온 말로서, 문수사리보살이 지장보살이 어떻게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불가사의한 일을 성취하였는지(혹은 할 수 있는지)를 묻자, 하나의 비유로서 이야기한 것이다. 즉, 위의 시간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온 겁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 말은 여러가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왠지 이 자막의 말은 영화 속 유다(황추생)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필요하다는 것, 즉 어떤 고리를, 어떤 업을 끊어내는 것은 매우 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장경>에서 담고 있는 가장 큰 주제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법(因果法), 선업(善業), 윤회 등을 이야기하며, 하나의 실천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라 한다. 즉, 지금까지 어떠한 생을 살아왔는가에 의해서 다음의 생이 결정되며, 본인이 쌓은 업은 본인이 선업을 행하는 것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가 시작과 끝이 거의 같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유다는 브라질 국경근처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 때 한 일본인 가족이 나타났고, 그 가족의 아버지가 총에 맞는 틈을 타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소년 키린(오다기리 죠)을 만났다. 그리고 백호(白虎)가 나타났고, 무겁고도,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이 흐르며, 영화가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다시 브라질 국경지역으로 이야기는 돌아왔고, 유다와 키린은 다시 백호를 보고, 유다는 키린의 손에 들린 칼을 통해서 자살하고, 다시 그 무겁고도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과 함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유다는 이 질긴 고리를, 질긴 업을 끊으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곳에서 키린의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키린의 아버지가 되어 여러 악행(업)을 저지르고, 키린마저도 그 악행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지만, 결국 키린의 손에 죽는 이 아이러니를 말이다. 이 윤회를 영화는 하나의 형식으로, 그리고 몇 개의 상징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물론 아직까지 머리는 복잡하고, 많은 의문은 섞여 있다. 그것으로 이들의 업은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왜 다시 이곳(브라질 국경지역)으로 돌아와야 했는가.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곳은 어디이기에 말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곳은, 영화의 제목이 말하는 대로 '플라스틱 시티'이다. 그러고보면, 이 제목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플라스틱 시티라는 곳. 플라스틱이 상징하는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가소성(可塑性)의 공간.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마법의 공간. 그러나 이 가소성의 공간이라는 것은, 다를 말로 하면, 거짓의 공간, 가짜의 공간이다. 플라스틱이 가지고 있는 가짜라는 본연의 속성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 플라스틱 시티 안에서 유다와 키린이 벌이는 사업으로도 명백해진다. 유다와 키린이 벌이는 사업이란, 가짜의 물건을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와 아주 비슷한 가짜를 말이다. 더구나 키린은 영화 속에서 다시 그것을 반복하여 확인해 주기도 한다. 자신은 진짜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가짜가 진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그러나 말이다. 과연 그 돈은 진짜일까. 어쩌면 그 돈 마저도 가짜인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여기는 플라스틱 시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짜로 이루어진 곳. 진짜는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곳. 어쩌면 그곳은 지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공간으로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그 마법의 정글에서 결국 얽히고, 맺힌 업의 끈을 풀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진짜 백호를 보았고, 업을 풀어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유다는 키린에게 말한다. 너의 삶은 이제 시작이야, 너에게 시간은 많아..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시간, 겁의 시간, 항하사의 시간, 무량대수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업은, 그 운명은 사라질 수 있을까. 키린의 뒷모습에서,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서, 부서지는 강렬한 파도에서 우리는 다시 엄청난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 강물의 흐름을 하나하나 따라간다해도, 파도의 파고를 모두 하나하나 세어 나간다 해도...이 마지막은 꽤나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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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 Let It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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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누구에게나 내려요. 맞잡을 손이 있다면, 때로는 우산은 놓아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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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 Let It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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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제목이 <레인>인걸까. 영화 내내, 비는 커녕, 따스한 햇살만 쏟아지는구만. 남(南)프로방스(영화의 배경이 꼭 여기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음. 남..프로방스. 그냥 어감이 좋으니까. 적어도 북 프로방스보단.)의 따스한 햇살이 말이다. 그러다가 영화가 한참을 지나고 어느 순간 비가 온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 아,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두 번째 비가 온다. 그리고 미무나의 품에 안겨 있는 플로랑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서야, 제목이 '레인'인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영화 내내 비는 딱 두 번 온다. 첫 번째 오는 비는, 사람들의 감정을, 혹은 대립을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비다. 높은 산에 올라가 인터뷰를 촬영하려던 미쉘(장-피에르 바크리)과 카림(자멜 드부즈)과 아가테(아네스 자우이)는 양떼의 적절한 도움으로 인터뷰 촬영을 실패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차는 길바닥에 뒤집어져 있고,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세 사람은 모두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고, 상대방에게 마음 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들을 하고, 상대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른다. 두 번째 비는, 치유의 비다. 모든 것이 마무리 되고, 아네스는 이제 떠나려고 할 때 쏟아지는 그 비. 그 비가 치유의 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첫 번째 비와 두 번째 비가 쏟아지는 사이에 지나갔던 몇몇 마법과 같은 장면들에 의해서이다. 아가테가 자신의 어린시절 앨범들을 살펴보다가, 대부분의 사진이 자신을 찍은 것임을, 동생 플로랑스를 찍은 사진은 거의 몇 장 없음을 발견하고, 뒤늦게야 동생을, 그리고 동생을 대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 혹은 카림이 유아세례식에 갔다가, 촬영 알바를 하고 있는 미쉘을 만나는 장면, 그리고 미쉘도 카림도 잘 알고 있으나, 미쉘이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카림도 이해해주는 척 하는 장면들 같은 것. 

아네스 자우이의 이 영화는, 왠지 여러 캐릭터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유달리 부각하고, 서로간의 대립항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애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고압적인 플로랑스의 남편, 마음 속에는 어떤 열정을 품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언니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플로랑스, 겉으로는 유능하고 차가워보이나, 사실 주위 사람들의 관계를 약간은 버거워하는 페미니스트 아가테, 능력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알고 보면 허점이 많은 미쉘, 이민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나,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카림. 그리고 이들 간의 성(性)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격적인 대립항들, 플로랑스와 남편간, 혹은 플로랑스와 아가테 간에, 카림과 미쉘 간에, 그리고 카림과 (플로랑스+아가테)와의 대립, 아가테와 그녀의 남자친구와의 대립 등등.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모자란지 감독은 여기에 복잡한 사랑 관계를 첨부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여러 특징적인 캐릭터들을 여러가지 복잡한 관계망으로 연결시키고, 거기에서 어떤 관계의 새로운 내포와 외연들을 발견하고, 유머 속에서 은근히 정곡을 찌르려는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감독의 전작 <타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곧 아까 말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왠지 그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비가 금방 그치고,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서로의 약한 모습들이다. 이민자 출신으로 뿌리깊은 차별 속에서, 카림의 날선 말들이, 사실은 약한 부분을 감추려는 일종의 방패에 불과했다는 것. 혹은 농부의 약간은 집요한 시선 속에서 얇은 스카프 속으로 애써 밀어넣는 아가테의 약한 하얀 팔꿈치. 프로듀서와 제대로 계약도 안된 상태에서 알바로 연명하는, 그나마도 제대로 못해 아이의 이마를 맞힌 미쉘의 카메라 마이크. 이런 것들을 서로가 조용히 바라보면서 모두들 깨닫는 것이다. 저 사람도, 별로 다를 것이 없구나. 그저 우리는 그 형태만 다를 뿐이지, 비슷비슷한 효과를 가진 콤플렉스로 둘러쌓인 약한 인간들일 뿐이구나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오는 비는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한테나 내려요.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이민자 출신이 아니라고, 남자라고, 내가 피해가지는 않는답니다. 그저 누구한테나, 골고루, 쏟아질 뿐이랍니다, 라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안도를 준다. 모두가 다를 바는 그다지 없다는 것, 때로는 많은 일들이 꼬이고, 또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겠지만, 모두들 비슷하게 누군가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거나, 비슷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비슷하게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비슷하게 서로를 몰래 좋아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당신만이 그렇게 유별나게 망가지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치유의 코미디.
 



....................................

'고품격 프랑스 코미디'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키에르케고르' 운운하는 농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의 웃음이 빵빵 터지는 곳은 그보다는 훨씬 '낮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네스가 인터뷰에서 양치기 운운하자 뒤의 양떼들이 '메에~~~'하며 화답을 해주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고품격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사실 빛나는 지점은 그런 '고품격' 프랑스 유머들보다는, 아름다운 프랑스의 풍광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마법같은 장면들에 있다. 그런 장면들의 일부는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중언부언 늘어놓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되겠지만, 다음의 한 장면만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므로 언급해두고자 한다. 영화의 마지막, 쏟아지는 비 속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 그들은 손을 맞잡고, 곧 여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머리 위로 날려버린다. 비는, 누구에게나 가릴 것 없이 쏟아지지만, 가끔은 우산이 필요없을 때도 있어요. 어딘가에 맞잡을 누군가의 손이 있다면, 우산 따위는 놓아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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