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 Still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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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던지는 보통의 시선, 그래서 특별한 (가족이라는) 끝나지 않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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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시크릿 라이프 오브 더 월드 - The Secret Life of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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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복잡한 심정이 된다. 스페인 감독이 만든, 영어를 쓰는 배우들이 출연하고 대화하는, 그러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 감정. 게다가 주인공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이 곳은 어디이며, 그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조셉(팀 로빈스)은 한나(사라 폴리)에게 묻는다. "금발이죠? 발음이 좋군요. 어디 사람인가요, 스웨덴? 러시아?" 그러나 한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혹은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감독도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들려주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이며, 이 사람들은 어디 출신의 사람들이며, 어디서부터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 아니, 그래도 몇몇 얘기는 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청력을 잃은 한나는 공장에서 일한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점심에는 치킨과 쌀밥과 사과를 먹는 되풀이되는 삶.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그녀를 불편해한다며, 그녀에게 사직 대신 휴가를 권한다. 그녀는 한 섬으로 떠나는데, 그 섬에서 멀지않은 석유시추선에 간호를 요하는 환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는 돌연 거기에 자원한다. 석유시추선에서의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각막손상으로 일시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조셉과의 만남. 한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돌보며 그와 점점 가까워진다.

영화를 보기 전, 팜플렛에서 영화의 내용을 잠깐 읽어본 느낌으로는, 흥미롭지만 식상한 설정이라 생각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여자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남자,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 그러나 왠지 보다보니 이것이 중심축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장애는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것. 여자는 보청기를 이용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지만, 보청기를 이용하면 실질적으로 듣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남자는 각막 손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또한 영구적인 것은 아니며, 치료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다. 남자는 볼 수 없고, 여자는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이 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없다. 문제는 물리적, 그 이상에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서로는 알 수가 없으며, 동시에 관객들도 잘 알 수가 없다. 한나는 왜 청력을 잃었을까, 그녀는 왜 갑자기 조셉을 간호하겠다고 나섰을까, 그녀는 정말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을까, 조셉은 왜 여기 바다 한가운데 석유시추선에 오게 되었을까, 조셉에게 녹음을 남긴 여자와 조셉 간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사실 이들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화들에는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진심, 혹은 진심이고자 하는 마음, 혹은 그와 동시에 자신을 어느 정도는 감추려고 하는 마음.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을 내비치다가도, 마음의 문을 살짝 닫아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들이 교감을 하는 방식이며, 많은 사람들이 교감을 하는, 소통을 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secret life of words'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언어로서 전달되는 내용, 그 이상의 어떤 것, 단순히 언어로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언어 그 이상이 담고 있는 진실, 상대방과 무엇인가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것들이 가진 힘. 언어가 가진 숨겨진 힘들. 단 한두 마디일지라도 그것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그 놀라운 파괴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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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러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작은 연대들의 힘의 가장 반대편에 한나가 겪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발칸이 언급될 때 우리는 한나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대략 짐작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어떠한 태도가 이해가 된다. 그 태도라는 것은 요리사 사이먼의 태도 같은 것은 것이다. 세계 여러 곳의 요리를 다양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요리를 하면서 그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태도,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노동자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에 어린 어떤 긍정적인 시선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굳이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말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어떤 무국적성 같은 것들이 그것일 것이다. 당신은 어디 출신의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당신은 그 당신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발칸에서와 같은 거대한 폭력, 혹은 거대한 범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속 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그것의 어떤 개인적 체험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그것에 개개인적인 의무를 덧씌우는 일일 것이다. 어떤 거대한 범죄가 어떤 숫자로만 기억되고, 개개인에게서 떠나 거대한 어떤 것으로만 기록될 때 이는 위험해진다. 개인이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때 그러한 것은 다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경험들을 나누고, 그 경험들을 기억할 때, 그것은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일들이 되며, 진정으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반성이 된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서 말하는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가 아닐까. 그래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프게 하지만, 그것을 단호히 이야기하는 한나의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그것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조셉의 모습을 볼 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석유시추선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그리 길지 않은 대화들을 볼 때,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여러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기록된 테이프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어떤 작은 희망들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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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화장실 - The Pope's Toi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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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기다리는 이들이 안쓰럽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나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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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화장실 - The Pope's Toi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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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제목에 촌스러운 포스터에 '<시티 오브 갓><눈먼 자들의 도시>제작진이 만든 최고의 영화'라는 없어 보이는 문구. 감독의 명성을 내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걸 수도 없고, 없는 박스오피스 기록을 들먹이며 숫자 마케팅을 할 수도 없는 영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 홍보 문구를 보며 썩 끌리지는 않는 영화였다. 단지 그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씨네 21>의 'Must See' 코너에 이 영화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 후였다. must라..must. 글쎄. 그러고보면 난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꼭..반드시 보라'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글쎄, 뭐 봐도 괜찮은 영화에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정도. 무엇보다 영화란 것을 '꼭 봐야할 어떤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꼭 봐야할 어떤 것이란 대로 한복판에서 경찰들이 시민들을 때려잡는 영상, 혹은 어느날 새벽 어느 한 망루에 오른 사람들을 누군가가 공격하는 영상이 될지언정, 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하여튼 간에,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잡지를 줄곧 보면서도 그 must가 꽤나 놀랍고 신기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Must See'라는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니.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만큼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의미일까, 혹은 영화에 대해 어떤 애정이 있다는 의미일까.

다시 한 번 뭐 어쨌든 간에. 영화는 귀엽고도 둥글둥글하며, 동시에 슬프면서, 꽤나 웃기는 영화였다. 1988년 브라질과 맞닿은 우루과이의 국경마을 멜로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기로 결정되면서 작은 마을은 들끓는다. 교황님을 돈벌이로 이용해도 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집을 팔고, 가진 것을 팔아, 장사를 해 떼돈을 벌 궁리를 한다. 그날 엄청난 사람이 이 작은 마을에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들은 먹고, 마시고, 무언가를 살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의 밀수로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는 이 남자 비토(세자르 트론코소)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난 머리가 참 좋아...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는 생각한다. 몰려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그러고는...싸기도 하겠지. 그래, 유료 화장실을 차리는 거야. 그래서 아내와 딸에게는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고, 집도 고치고, 나는 오토바이를 사는 거지..오토바이!

기발한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물론 실제로 비토처럼 유료 화장실을 차리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당시 그 작은 마을은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꿈으로 부풀었고, 언론에서는 이 사람들의 꿈을 부추기고, 부풀리고,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을 일확천금- 이라고 해봤자, 얼마 안되는 돈일 테지만 -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 끝은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하기 어렵다면 다음의 영화의 홍보문구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빠의 화장실>은 가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적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 영화가 빛나는 것은 이 모든 소동이 지나간 후일 것이다. 이 아버지 비토는 신성한 교황의 말씀과 그 교황의 말씀을 들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고작 황금색의 똥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 일종의 불경을 저질렀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양심과 화해하고, 하나의 작은 악을 뿌리침으로써 선의 세계에 한 발짝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딸 실비아는 자신이 꿈꾸던 저널리스트라는 것이 어떤 허위를 가지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봄으로써, 그것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성자와 성부와 성령이 삼위일체임을 이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교황과 대통령과 그들을 괴롭히던 기동순찰대나 국경수비대가 삼위일체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뭐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평화롭고 우습고, 궁상맞게 살아갈 것이다. 뭐 어쨌든, 살아가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에 또다른 교황이나 혹은 록스타나 혹은 미국 대통령이 온다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관객들은...우리들은 그저 키득거리고, 낄낄거리다가, 마지막 자막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고 안쓰럽게 웃어제끼면 될 것이다. 아..저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우리랑 크게 다를 것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더 안쓰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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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를 보고 영화의 줄거리나 내용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저기 나오는 나쁜 넘들이 요즘 우리 주위에 얼쩡대는 나쁜 넘들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여기 나오는 나쁜 넘들. 나쁘지만, 참 인간적이다. 이들이 인간적인 이유는 대놓고 나쁘기 때문이다. 고작 밀무역하는 것 좀 잡아냈다고(사실 말이 밀무역이지, 조금은 한심하고 소박한 수준이다), 딸을 바치라고 하지 않나...자기 일을 돕지 않겠다고 했다고 해서, 가족을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하지 않나 말이다. 어쩌면 이는 이 영화 속 세상이 법보다는 폭력이 가까운 사회임을,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이 좀 덜된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일종의 구멍들이 많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동시에, 그 구멍 속에서 힘없는 서민들도 그 구멍을 역이용하여 살아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달러의 뇌물, 혹은 위스키 한 병으로서도 뇌물의 기능을 할 수 있으며, 그 뇌물을 이용하여 힘없는 보통 사람들도 조금은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지배체제가 그 지배체제의 기능들을 폭력이나 힘보다는 그들 입맛에 맞춘 법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더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몇 달러의 뇌물은 이제 당연히 통하지 않게 된 사회, 그러나 거대한 재벌의 거대한 돈이나 이상하게 구조화된 법을 내세운 권력에는 너무나도 순응하고, 누구도 그들을 어떠한 이름으로도 제지할 수 없게 되어가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점점 법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지배될 때, 그 지배는 얼마나 무섭고 거대하며, 페쇄되어 있으며, 차가운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뒷맛이 영 씁쓸하고 개운치 않다. 모든 소동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교황과 정부와, 그들이 지배하는,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이 믿어 주기를 원하는 모습만을 앵무새처럼 떠드는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며 비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TV에 병을 던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이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이 욕하는 정치인들, 이들은 1988년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 이후에 어떤 정부와 정치인과 언론을 보았을까. 우리에게도 거대한 힘과 투명한 폭력은 가까이 있는 것일까. 극장에 깔린 '대한 늬우스'들이 그런 전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자신들의 정책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하며, 뉴타운 공약을 내세우고, 그 뉴타운 공약들이 서민들에게 먹혀들어 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았을 때에 그것들은 더욱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후에 무엇을 보게 될까.

사실 결국에는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작은 힘들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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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7-0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여기선 상영하지 않아 보기 힘들어요.ㅠㅠ

맥거핀 2009-07-06 17:29   좋아요 0 | URL
아..썩 괜찮은 영화이니,
아마 서울지역 개봉이 끝나면 그쪽에도 개봉하지 않을런지요..?
기회가 된다면 보셔도 괜찮을 영화입니다.
트랜스포머 몇 개관씩 틀 때 이런 영화는 반 타임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반두비 - Bandho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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곪아가는 것들, 망가져 가는 사회에 던지는 가볍고도, 유쾌한 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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