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지옥 - Poss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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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다면, 맹신지옥은 그 훨씬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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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 Poss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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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과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불신지옥>이 꽤나 무서운 공포영화임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음산한 스코어나 과도한 효과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효과음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공포를 창출하는 것이나, 공간이나 사물을 잘 활용하여- 예를 들어, 아파트 지하실 씬 같은 것 - 말 그대로, '일상의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도 다른 여러 좋은 리뷰들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더이상 언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또 영화의 여러 설명되지 않는 점들을 다시 잘 풀어서 설명하는 것도 나의 몫은 아닌 것 같다. 여러 리뷰들에 보면 재미있고, 기발한 설명들이 많은데, 그보다 더 재미있는 설명을 할 자신도 없다. 다만, 몇 가지를 이 영화는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소진의 엄마(김보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씬이 있다. 교회에서 돌아온 엄마가 아파트 현관 문을 열려고 하는 장면. 주잠금장치와 몇 개의 보조잠금장치가 달려있는 현관. 엄마는 그 몇 개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돌리고, 문을 열려고 하나, 문은 열리지 않고, 도리어 잠긴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자물쇠를 열었다가, 문을 당겼다가,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고, 가지고 온 물건을 떨어뜨리며 잠시 패닉에 빠질 즈음, 스르르 열리는 현관. 어떤 다른 리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장면은 '그들'이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고 급하게 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의 문제.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행한 행동이 사실은 반대로 잠그는 것이었다는 작은 아이러니,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엄마의 작은 패닉은 왠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전주로서 읽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실 그 몇 개의 잠금장치들이 더 흥미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은 어떤 두려움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현관의 팻말 이면의 감추어진 많은 자물쇠들. 종교라는 굳건한 믿음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엄마,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아마도 이는 엄마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을 보면, 그 아파트의 다른 집들도 거의 비슷한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을 달고 있으며, 대부분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범창들을 설치해놓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영화의 시작 부분이 생각이 난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크게 상관은 없는 부분이지만, 영화는 언니 희진(남상미)의 고단한 삶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학교를 다니고, 기침으로 콜록거리면서도 알바를 꾸준히 해야하는,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잘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 그런 희진이 동생 소진이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고, 고속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어느 지방 중소도시로 내려와 거대하고, 허름하면서도, 음산한 아파트 앞에 설 때, 어떤 느껴지는 공포감. 아마도 이 공포감은 그녀의 팍팍한 삶에서 전해지는 지독한 공포감일 것이다. 특별히 어떤 요행이 있지 않고서는 앞으로 그저그런 '88만원 세대'로 살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그녀의 지친 삶과 그녀가 한 때 몸담았던 낡은 서민 아파트와의 조합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어떤 연민 같은 것들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무너지는 중산층의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있을 때만 해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삶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삶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추락하고 있는 것, 이를 영화는 희진의 삶에 대한 몇 개의 컷과 아파트와 집안의 가재도구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빨간 전자렌지가 인상적이었다. 그 빨간 전자렌지는 적어도 15년은 된 저가제품. 왜 아냐면 우리집도 아직 그 전자렌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무너진 중산층들은 두렵다. 무엇이? 삶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해간다. 조금씩 변해가고 망가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삶들 말이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진이 신들렸다고 말하는 무당(문희경)과 자신의 병이 낫기 위해 소진에게 부적을 쓰라고 강요하는 여자(장영남)와 주저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동조하는 젊은 여자(오지은)와 과거 참전용사로, 경비복인지 군복인지 모를 옷을 입고 다니는 경비원(이창직). 좀 도식적이긴 하지만, 왠지 이들은 각각 어떠한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시대, 그 시대의 무섭고도 기이한 자화상들 말이다. 이상한 사이비 세력('무속' 자체가 사이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 속 무당이 그렇다는 말이다)과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30대와 방관적이고 무책임한 20대와 그들을 내리누르는 권위와 권력과 폭력의 망령들의 상징이라고 이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삶의 고통을, 그 고통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믿는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믿음은, 믿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그 무엇(종교이든 무속 신앙이든)도 망쳐 버린다. 일례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사람들이 고통 받았던 시기인 중세시대, 그 중세시대는 한편으로는 강한 믿음만이 존재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지나친 믿음은 종교의 타락을 낳았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명백하게도, 이를 가장 잘 반영하는 캐릭터는 소진의 엄마이다. 그녀의 지나친 맹신은 남편과 아이의 사고,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의 죽음과 아이의 후유증이라는 삶의 고통과 큰 관계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그녀 또한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 중에 한 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영화가 이의 극복을 위해, 즉 무너져가는 중산층이 탐욕이나 방관이나 혹은 맹신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회복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어떤 가족주의, 그 수많은 가족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공동체의 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떨어지는 희진을 필사적으로 껴안았던 엄마의 팔, 아버지를 잃은 소진, 그리고 아버지가 있지만 늘상 바쁘기만한, 병상에 누운 아이의 말들을 통해서 말이다. "아빠..아빠 언제 데릴러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속 학의 존재를 통해서도 그렇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학을 소진의 영혼과 관계가 있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은 옛부터 어떤 전통적인 공동체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의 마무리에서 이러한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지나친 억측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무리는 여전히 모호하며, 이는 한편으로는 영화가 마지막에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가족주의, 공동체의 회복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라고 했을 때,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하는 또다른 물음이 생겨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질문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것이다. 이제는 제2의 소진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사의 딸을 (소진처럼) 잃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주의와 공동체의 회복으로 가능할까.

맹신(盲信)의 반대말은 불신(不信)이 아니다. 영화 속 가장 믿지 않는 캐릭터인, 종교이든 무속이든 코웃음을 쳤던, 엄마에 의해서 사탄이라고 불렸던 형사 역시 이 영화에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소진의 죽음에 이 형사 역시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건 초기에만 해도 형사 역시 단순가출에 불과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영화의 제목이 <맹신지옥>이 아니라, <불신지옥>임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믿거나, 아예 믿지 않거나(종교이든 무속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찌되었던 이 고통의 시기에, 야만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믿으면서(하다못해 '자신'이라도 믿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다우트>에서 찾고 싶다. 올해의 명장면 중에 하나로 꼽고 싶은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의 마지막 그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의심이 들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그 마지막 장면. <씨네 21>의 정한석 기자는 그것을 '회의(懷疑)'라고 불렀다. 아마도 맹신의 반대말은 회의에 가까울 것이다.



p.s. <불신지옥>...재미있는 제목이지만, 이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소 오십만은 더 들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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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2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오히려 내용을 깎았군요.^^
맹신의 반대말은 회의.. 맞는 말입니다.

맥거핀 2009-08-25 02:14   좋아요 0 | URL
네..아무래도 '불신지옥'하면 사람들이 기독교를 바로 연상하니까요.
기독교도도,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도 약간은 불편할 수 있는 제목이지요.
영화를 보니 도리어 감독은 기독교(더 나아가 종교라는 것)에 대한 논쟁을
되도록 피하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퍼블릭 에너미 - Public Enem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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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영화까진 아니더라도, 올해의 캐릭터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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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 에너미 - Public Enem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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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에 대한 미리니름일 수 있습니다.)



몰락해 가고 있는 영웅을 바라 보는 것은 많이 마음 아픈 일이긴 하지만, 늘 흥미롭다. 그가 가고 있는 이 길의 끝에는 파멸만이 존재한다는 점,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임에도, 그것을 향해 조금씩 돌진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움과 함께 비장한 아름다움을 준다. 동료도 모두 잃고, 주위에서도 그를 버리고, 경찰이 마지막까지 그의 숨통을 죄어 올 때,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한 탕 크게 하여 여기를 뜨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일을 벌이기 직전, 몇 안 남은 동료가 그에게 묻는다. "넬슨이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지 않아?" 조급해하는 사람을 쓰지 않는 것, 그가 가진 철칙 중에 하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넬슨'이 기어이 사고를 치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만다. 이 때 존 딜린저(조니 뎁)는 단호하면서도 중간중간 살짝 주저하는 빛을 보인다. 물론 그는 빠른 속도로, 단호한 몸놀림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눈은 중간중간 초점을 잃고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철칙을 무너뜨린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 그는 약간 후회하는 듯도 보이지만, 살아남은 동료들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탈출한다. 여기서의 조니 뎁의 연기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사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건,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 존 딜린저가 파멸의 길로 조금씩 들어서고 있는 순간이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기 보다는, 그 파멸의 길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라고 말해야 할 터이다. 그가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탈출시켜 멋지게 은행을 터는 영화의 첫머리부터 그는 이미 파멸의 길에 들어섰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존 딜린저의 애인 빌리(마리안 코티아르)는 존 딜린저에게 말한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고 말이다. 잡히거나 죽거나. 그러나 그는 코웃음친다. 경찰은 너무 멍청해서 나를 잡을 수 없어. 그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허세였다. 잡히고 나서 웃으며 인터뷰를 하며, 경찰과 어깨동무를 하는 것, 또는 은행을 털며, 은행여직원을 인질로 잡아, 그녀에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주는 것 같은 것들 말이다.

허세는 아마도, 불안의 산물일 것이다. 대부분 불안한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게 마련이다. 주가가 2000선에 곧 도달할거야...2000이 뭐야, 곧 3000까지도 갈 거라고...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내기해도 좋다.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엄청나게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주식에 투자한 그 많은 돈이 날라가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하고 말이다. 존 딜린저도 불안했을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와 같은 갱들의 도시 시카고, 이 시카고에서 멋지게 한 탕 해서 어디론가 뜰 수 있을까, 그 전에 잡히거나 죽거나, 역시 둘 중의 하나로 끝나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 호기를 부린다. 그래서 영화가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그의 허세가 점점 커지는 것은, 역으로 그를 둘러싼 불안이 점점 커지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다. 당신의 옆자리에 혹시 존 딜린저가 앉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른쪽을 보시고, 이번에는 왼쪽을. 이런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광고가, 불켜진 극장에서 흘러나오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옆을 차례로 돌아볼 때 미동도 하지 않고 꼿꼿이 앞을 보고 있는 존 딜린저를 수많은 관객 한 가운데서 잡는 샷이나, 경찰서에 들어가 '존 딜린저 특별수사팀' 사무실로 유유히 걸어들어가, 야구경기에 관심이 몰린 틈을 타서 사무실을 천천히 돌아보며 "지금 몇 대 몇이죠?"라고 묻는 존 딜린저를 뒷 모습으로 잡는 샷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저 순간에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러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

마이클 만 감독의 몇몇 영화들, <히트>나 <콜래트럴>, 그리고 이번 영화 <퍼블릭 에너미> 같은 작품들을 보면 멋드러진 총격전 장면들과 더불어 위의 존 딜린저와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온다. 내 생각에는, 그 캐릭터들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해듯이, 불안해 보이면서도, 불안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에 있다. 꼭 불안이 아니더라도, 어떤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과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미묘하게 교차하며 드러나는 것이 캐릭터의 매력을 가중시킨다는 말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마이클 만 감독의 역량이 출중해서라기 보다는 그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가 대체로 그런 것과 맞닿아 있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만드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일종의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약한 것에는 약하게, 강한 것에는 강하게 대할 줄 아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은 대체로 커다란 위험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주변에서는 점차 고립되고, 파멸은 거의 예정되어 있다. 이 거대한 자기 확신이 예정된 파멸로 달려가 그것에 부딪힐 때, 그 파장 속에서 어떤 것들이 드러나는가. 그것을 마이클 만은 조용히 잡아낼 줄 안다. 인물의 그림자에 난사된 총알들이 박히는 것으로, 혹은 경찰에게 잡혀가는 여자를 구하러 갈까말까 망설이는 아주 짧은 멈칫거림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왠지 마이클 만은 이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해 기꺼이 다른 캐릭터를 희생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존 딜린저의 곁에는 여러 동료들이 따르지만, 이 중에 특별히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캐릭터는 없다. 그저 동료들은 존 딜린저의 곁에서 폼나게 있다가, 한 명씩 조용히 사라져갈 뿐이다. 존 딜린저의 애인인 빌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다. 남자를 위해, 혹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으로서만 말이다. 아마도, 이와 관련해서 가장 큰 희생자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다른 한 축인 퍼비스 형사(크리스천 베일)일 것이다.퍼비스 형사는 전체적으로 존 딜린저의 가장 큰 적수이면서, 영화의 나머지 한 축으로 보이지만(혹은 한 축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별로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부분이 없다. 존 딜린저와의 몇 번의 맞대결에서는 약간은 머뭇거린다, 혹은 우왕좌왕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래서 그랬을까. 존 딜린저의 마지막 말을 여자에게 전하는 폼나는 역할도 그의 몫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크리스천 베일의 어떤 부분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의 스포트라이트는 그가 아닌 히스 레저의 몫이었으며,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에서도 그는 주인공이면서도 그다지 주목받은 캐릭터가 아니었다. 무려 '존 코너'였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다른 하나의 장점은 그 캐릭터들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 자체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거리나 의상, 자동차, 극장과 같은 물질적인 재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서 존 딜린저와 같은 사악하지 않은 반 사회적 영웅에 열광하는 것, 혹은 경찰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즉 '퍼블릭 에너미'로 정하고, 그를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시작부에 경찰이 과학적인 수사방법을 통해서 그를 잡을 것이라고 공표하지만, 경찰이 결국 활용하는 방식은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약을 투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자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하는 등의 결국 '그 방식'이었다.)이 어떤 사회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하게 한다. 존 딜린저가 잔인한 폭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혹은 은행은 털어도 은행 고객의 돈은 털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민중들은 응원했다? 글쎄. 은행 돈이라는 것도 결국 고객들의 돈이고, 그는 어쨌든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는 대공황 시기 사람들의 심리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를 살펴보는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 만은 그런 시대 속으로 우리를 성큼 들어서게 만든다. 꼭 실감나는 총격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마이클 만은 총격전에 특화된 감독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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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1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조니뎁을 좋아하는 딸이랑 보고 왔어요.
역시 멋진 캐릭터에 멋진 영상이었어요. 좀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존의 불안과 허세, 어린시절의 상처로 약한 면이 있는 사람이더군요.
어떤 큰일을 두고 꼭 세살때 죽은 어머니의 흑백사진을 열어보더군요.
그 얼굴이 사랑하는 연인 빌리랑 꼭 닮았구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09-08-17 20:56   좋아요 0 | URL
네..중간에도 아버지 얘기도 나오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의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던 사람인듯 싶어요.
물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요.
중간 이전에는 영화가 좀 지루한 감이 있는데,
막판에 터뜨리기 위해서 중간에는 좀 쉬어가는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한 30분간은 아주 좋았습니다.

따님이랑 영화를 많이 보시는군요.
개인적으로는 따님이 부럽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문화적인 체험을 많이 하는 것, 좋죠.^^
 
해운대 - Haeun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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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영화를 가장한 다른 이야기. 강조된 휴머니즘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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