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썸니아(스펙트럼베스트외화20종행사)
아트서비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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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장에 들어서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 ‘메멘토(The Memento)'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의 신작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메멘토’에서 시간의 역순이라는 기존의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플롯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종국에는 낭패감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때문에 ‘인썸니아(The Insomnia)’를 대하는 첫 느낌은 긴장이었다. 게다가 갱스터 필름과 형사물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알 파치노가 선 굵은 형사로 분하고, 선한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로빈 윌리엄스가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가 평범한 영화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95년 노르웨이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 했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밤이 없이 낮만 계속되는 백야라는 특이한 기간에 접어든 알래스카 외딴 마을의 쓰레기 처리장에서 17세 소녀의 시체가 전라의 몸으로 발견된다. 단서도 목격자도 없는 이 의문의 살인사건에 LA경찰국 소속 베테랑 형사 윌 도머(알 파치노 분)가 투입되고 도머는 그의 오랜 파트너 햅과 알래스카 지방경찰 엘리(힐러리 스웽크 분)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살인 후, 시체의 구석구석을 닦아주는가 하면 머리도 감겨주고 손톱․발톱까지 다듬어 놓는 지능적이고 여유로운 살인자의 흔적을 좀처럼 찾을 수 없던 어느 날, 도머는 쉽게 놓칠 뻔한 단서를 찾아내어 용의자를 추적하게 된다. 그러던 중 안개가 쌓인 어느 해변에서 용의자 대신 파트너 햅을 사살하는 사고를 저지른다. 심한 불면증과 스트레스로 동료를 죽인 그 사고가 자의인지 타의인지 구별조차 못하는 도머는 자신을 향해 조여 오는 LA경찰국 감찰반의 내사와 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심신이 지쳐간다. 결국 도머는 햅의 죽음을 사건 용의자의 짓으로 꾸며댄다. 죄책감과 심리적인 압박감, 백야현상으로 인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도머는 살인자가 자신의 지목하고 있던 소설가 월터 핀치(로빈 윌리암스 분)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도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고 전화기 속에선 여유롭고 차분한 월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2. “이 곳(알래스카)에서 태어났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


  우선 이 영화의 장소적 배경이 되는 알래스카가 주는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군사적․산업적 차원을 떠나서 알래스카는 분명 LA나 뉴욕과는 다르다. 문명에의 오염도 없거니와 가끔씩 그림엽서나 달력에서 보게 되는 그 자연경관은 탄성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래서인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퍼펙트 월드(A Perfect World)'에서는 고단한 삶과 지친 마음의 안식처이자 마지막 목적지인 이상향으로 그려지기도 한 장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알래스카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혹한이 지배해서 접근조차 쉽지 않은 오지인 것이다. 고립된 이미지로서 그곳은 1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으며 잠입도 탈출도 용이하지 않은 곳이다. 윌 도머가 묵고 있는 호텔 여주인의 말처럼 알래스카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곳에서 태어났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이 빌어먹을 지역은 밤이 되어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 다는 점인데  이 백야현상은 알래스카를 지리적 고립을 뛰어넘어 심리적 불안감을 증폭시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  생각해 보라. 낮과 밤, 밝음과 어둠, 진실과 거짓... 세상은 언제부턴가 사물을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 중간 즈음에 완충지역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간과해 오곤 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질서(cosmos)라고 부른다. 그러나 알래스카에서는 낮과 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완충지역의 가능성마저 봉쇄되어 있다. 낮과 밤이 구별되지 않는 이곳에서 이방인은 혼돈(chaos)을 느낀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인 형사와 살인자의 불안한 심리는 그대로 불면의 밤으로 이어진다.

  잠을 들기 위해 노력하는 윌 도머의 몸부림과 그에 아랑곳없는 강렬한 빛, 알래스카는 죄의식에 갈등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3. “좋은 경찰은 수사하느라고 잠을 못자고, 나쁜 경찰은 가책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윌 도머가 느끼는 죄의식의 실체는 무엇인가? 영화속의 갈등관계는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 월터 핀치와 수사관 윌 도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 윌 도머가 수사 중 동료 형사를 죽인 사건 역시 우리의 관심대상에서는 거리가 멀다. 위 사건들은 더 깊숙하게 감추어진 사건으로 가기 위한 표지판에 불과하다.

  윌 도머는 자신의 실수에 의한 동료의 죽음을 월터 핀치의 짓으로 만들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다. 하지만 월터는 도머가 햅을 쏘는 광경을 목격함으로써 두 범죄자의 더러운 거래가 시작된다. 형사가 죄지은 자가 되고 죄지은 자가 목격자가 된다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도머는 “좋은 경찰은 수사하느라고 잠을 못자고, 나쁜 경찰은 가책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경찰이지만 감찰과의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악인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믿는 경찰이기 때문에 ‘법망을 피해 가는 악인을 처벌하려면 그 법을 위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간 살인자를 처벌하기 위해 일부러 증거를 조작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에 스치듯 지나가는 알 수 없는 회색화면은 바로 윌 도머가 지질렀던 부정의 잔상이었으며, 이 과거의 잔상이 문제의 본질임을 알아야 한다.

  도머의 이 같은 부정은 햅과 도머에 대한 감찰과의 조사를 불러들이게 되고, 햅과 도머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다시 햅을 죽이게 되는(비록 그것이 실수일지라도) 죄를 촉발시키고, 또 다시 사건을 조작하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눈부시게 밝은 밤으로 인한 불면증은, 법을 지키기 위해 법을 위반하는 모순관계의 상징이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한 형사의 노력, 그 결과로서 밝음은 어둠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실제적 진실과 적법절차가 충돌된 상황에서 후자를 포기하고 얻은 결과는 헛된 명성 이면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던 것이다.


4. “I don't know any more."


  월터 핀치가 제시한 추잡한 거래를 뒤로하고, 핀치를 잡기 위해 총격전을 벌인 끝에 총에 맞고 쓰러진 도머가 엘리의 품에서 죽어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나도 더 이상은 모르겠어(I don't know any more)."이다. 자칫 자신의 비위를 감추기 위해 영혼을 팔 뻔했던 도머는 죄의식과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황금의 다리’를 건넌 것이다. 비로소 그가 설정한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 대한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질서와 혼돈은 동전의 양면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용서는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윌 도머의 유언은 코폴라 감독의 걸작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서 커츠대령(말론 블란도 분)의 유언 “Horror! horror!"와 비교된다. 도머형사나 커츠대령 모두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다가 ‘너무 많이 간’사람들이다. 둘 다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이는 그들의 독단과 잔혹함을 수단으로 얻어진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혼돈을 정리하고 질서를 세우고 있다고 확신하였지만 커츠대령이 그랬던 것처럼 도머형사도 자기가 이룩한 질서에 함몰되어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도머는 6일간이나 불면의 밤을 보낸 끝에 어둠(죄)의 유형은 자신이 분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고 영원한 잠으로 빠져든다. 그렇다면 그는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인가? 햅의 사망사건을 수사하던 엘리의 품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 도머은 사후에 자신의 비위가 세상에 알려져 자신의 명성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에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실 확인을 철저히 하라’고 한다. 엘리는 도머의 죽음 앞에서 그의 부정의 유력한 단서가 되는 증거를 바다에 던짐으로써 용서하는 듯 하지만 과연 영화를 본 관객들도 엘리의 결정에 동의할 지는 의문이다.


2002년 가을, 졸업을 앞두고 평소 영화를 자주  보는 나에게 문예지의 한 꼭지를 떼어 주면서 영화 평론을 부탁하여 쓴 글이다. 나름 고민하며 쓴다고 쓴 것인데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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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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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출신의 망명작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속 주인공 말로우는 시종일관 어둡고 우울한 어조로 한 판 게임이라도 하자는 듯이 심각하고 모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무수한 관념어의 홍수속에 빠져버린 나로서는 만만치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숙명적인 게임에 임한 나는 그에 대한 몇가지 의혹을 풀어보려 한다. 먼저 화자인 말로우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 사람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할 듯 싶다.

 

 

첫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말로우의 입을 통해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우의 외곽에 프레임 나레이터를 포함한 네 명의 청중들이 있지만 그들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프레임 나레이터조차도 말로우의 외부적인 묘사와 테임즈강 주변의 풍경 묘사에만 관여할 뿐이다. 이 사실은 말로우가 그의 아프리카 경험담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의 말을 검증할 만한 어떠한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의 거짓말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음을 뜻한다. 즉 말로우의 말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은밀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런던과 브뤼셀의 도시 이미지, 이와 병치되는 아프리카 열대 우림속 콩고강의 이미지 모두가 말로우 한사람의 개인적인 시각이며, 그가 만났던 여러 백인들과 원주민들의 묘사 역시 말로우의 주관에 지나지 않음을 염두해야 한다. 말로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또는 어느 부분이 가장된 사실이고 어디가 진실을 내포한 거짓인지 총체적인 의심을 하게 만든다.  전부를 긍정할 수도 전부가 부정될 수도 있다. 어쩌면 테임즈 강물을 보고 제국의 흥망성쇠의 상념에 잡혀 있다가 달빛에 취해, 혹은 한 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즉석에서 지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케빈 스페이시가 분한 버벌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말로우를 신뢰할 수 없는 두번째 이유는 그의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스스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단언하였다.

 

You know I hate, detest, and can't bear a lie.(p.49)

 

그러나 그는 그렇게 혐오하던 거짓말을 커츠의 약혼녀에게 하게된다. 커츠의 임종 시 그의 마지막 말을 묻는 약혼녀의 질문에 그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이름이었다고 말한다. 약혼녀의 신념을 지켜주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고 항변하지만 이 거짓말로 인하여 말로우의 모순이 드러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말로우에 대하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위선이었다. 굉장한 도덕주의자인양 떠벌려 놓고서는(심지어 그는 부처의 형상으로까지 묘사되고 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또 그의 행동에 의심이 가는 부분은 국제만습협회지의 뒷장을 뜯어낸 사건을 들 수 있는데 그 장에는 "Exterminate all the brutes"라는 엄청난 말이 쓰여 있었다. 이는 말로우의 충동이 부른 불필요한 개입이다.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은 커츠에 대한 올바른 이해보다는 소문처럼 "훌륭한 사람(remarkable man)"으로 기억할 것이다. 약혼녀에게 한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결과를 초래할 이 행동으로 인해 말로우의 객관적 신뢰는 여지없이 깨어진다.

 

  소설 전체에서 말로우가 바라보는 문명과 야만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가 그를 믿을 수 없게 하는 세번째 이유가 되겠다. 우선 말로우가 속한 사회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사회이고 그 역시 문명인이다. 그런데 그는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함께 문명인으로서 제국주의와의 묵시적 결탁을 하고 있다. 그는 타락한 문명을 야유하면서 동시에 찬양한다.

그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으며 그 혼란이 독자의 혼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의 이중적 잣대가 러시아 뱃사람, 벽돌공, 의사, 예언자, 그리고 '척하는 자' 등 그의 시각으로 묘사된 인물들에게도 적용되었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말로우는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때문에 커츠의 평가에 대하여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관점이 요구되는데 역시 말로우의 말 속에서 찾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이제 독자는 말로우의 말속에서 추려낼 것은 추려내고 선택할 것은 선택하여 커츠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

 

  커츠는 문명의 전파를 위해 밀림의 오지에 왔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목일 뿐 실상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문화적 침탈을 수행하기 위한 첨병으로써 임무가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 상아를 모으는 일이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은 물론이요 제국 자체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 커츠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잔혹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가 하면 타락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만행에도 불구하고 몇몇 백인과 원주민들은 그를 신격화하는 등 그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와 맞선 사람들 역시 또 다른 악의 화신이다. 커츠는 오지의 밀림속에서 고독과 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문명으로 자신을 데려갈 말로우를 기다린다. 정작 두 사람이 대면했을 때 커츠의 모습은 소문과는 달랐다. 커츠는 그의 죽음 앞에서 "The Horror! The Horror! "라고 신음한다. 말로우는 커츠의 이 마지막 절규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는 이 임종의 순간이 커츠의 도덕적 자각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타당한가? 과연 그 'Horror'라는 한마디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설사 그 외침이 커츠의 뉘우침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말로우처럼 그를 여전히 "remarkable man"이라고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는 모든 '원주민들을 멸망시켰을지도 모르는' 인물이 아닌가?  허울좋은 구실을 내세워 백인들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원주민들을 착취한 독재자이자 폭군이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콘라드는 커츠를 통해 제국주의의 가려진 치부를 드러냄으로서 스스로가 각성의 기회를 삼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또 때때로 말로우같이 사실을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을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유럽인이 빠지기 쉬운 과거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부] 시리즈로 유명한 명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1979년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헐리우드에서 재생산 했다. 말론 브란도, 로버트 듀발, 마틴 쉰, 데니스 호퍼, 해리슨 포드, 로렌스 피쉬번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이 그것이다. 사실 소설보다 영화를 먼저 봤고, 소설을 읽고 다시 영화를 봤으니 영화의 스펙터클한 잔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글을 쓸 때는 소설을 읽고 난 직후 였으니 영화의 개입이 적었으리라 믿는다. 분명한 것은 소설이든 영화든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리스트의 상단에 있는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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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기 2015-09-02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둠의 심연」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 문학평론가 힐리스 밀러”

“콘래드의 펜에서 추하거나 쓸데없는 구절이 흘러나오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 버지니아 울프”
 
털북숭이 원숭이 - 여덟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고대와 근대 인생에 관한 희극
유진 오닐 지음, 손동호 옮김 / 동인(이성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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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의 털복숭이 원숭이는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수법을 동원하여 인간의 본질과 그 내부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산업사회 이후 기계 등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과 자아상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고독과 자아상실은 사회 즉 타인과의 이질감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 또 이를 드러내기 위해 소속감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주인공 양크를 중심으로 기계화된 사회에서 현대인은 어떻게 소외되어 왔는가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양크는 육체적 우월감을 갖고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그가 선박을 움직이는 기관실의 화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양크에겐 선박의 기관실은 일종의 축소된 세상이며 자신이 그 안에 소속되어 있음을 자랑으로 여긴다. 오히려 허약한 체질의 사람들은, 비록 상류층이라 할지라도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료 화부들은 이런 양크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지만, 의식있는 노동자 롱은 양크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노동자들은 단지 자본가들의 착취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인데 양크에겐 갈등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보다 그가 우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양크가 주장하는 소속감의 문제는 앞으로 닥쳐올 그의 고립과 이질감을 암시하는 요소다. 양크는 자신이 소속된 곳은 가족이나 이웃 혹은 친구가 아니라 산업화 이후 물질문명의 상징인 선박의 기관실, 즉 기계문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와 융화하지 못한다.

 

  사람사회로부터의 소외가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밀드레드에 의해서이다. 그녀는 상류사회의 숙녀로 위선으로 포장되어 있다. 밀드레드는 양크를 보자마자 그의 야만성에 놀라 '더러운 짐승'이라고 외치고 기절한다. 밀드레드의 모욕적인 말에 상처를 받은 양크는 분노한다. 그는 복수를 다짐하지만 단지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복수일 뿐이다. 사실 작품속에서 양크는 어떤 종류의 사회적 문제도 인식하지 못하는 단순한 인물이고 이성보다는 순간순간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일반적 사회하고는 현저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가 때때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형상으로 고민하는 장면은 그의 고립감의 실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밀드레드의 모욕으로 양크는 자신의 소속감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처받은 자부심을 빨리 회복하고 자신의 소속처인 기관실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바램이었지만 거리에서의 난동으로 감옥에 같히게 된다. 사회는 그의 불만을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그를 격리하려 한다. 양크는 감옥에서 나와 밀드레드 개인에 대한 복수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녀와 같은 계층사람들에게 복수의 범위를 확대시킨다. 그러나 노동자 단체인 IWW에서 조차도 양크의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는 또다시 고립감을 느낀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해야 할 곳을 잃고 방황하다가 우리에 갇힌 고릴라에게 비로소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의 소속처로 생각했던 기관실의 이미지와 우리의 이미지, 그리고 우람한 체격과 강인한 힘의 이미지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한 양크에게는 반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고릴라로부터 죽음을 당함으로서 동물은 동물일 뿐이며 현대인의 고립은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에 우리에서 죽어있는 양크의 모습은 죽어서까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소속처를 보여줌으로써 양크의 정신적 한계와 사회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대학때 써 놓았던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원작을 읽어보아야 겠다. 그때와는 많은 지점에서 다른 느낌으로 읽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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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클라시커 50 8
크리스티안 에클 지음, 오화영 옮김 / 해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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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든 신약이든 부끄럽게도 아직까지 '책중의 책'이라는 성경을 읽지 못했다. 근래 급작스럽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 심취하면서 헬레니즘 문화권과 함께 서구 문명의 양대 축이라할 수 있는 헤브라이즘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일었다. 올해 초 여성청소년과장으로 부임한 대학 선배의 열정적인 전도 행위로 신우회에 가입하게 된것도 책장속 [성서]책을 집어들게된 계기가 되었다. 해냄 출판사의 클라시커 50시리즈 중 한권으로 구약성서를 종교의 언어가 아닌 일반의 언어로 풀어쓴 책이다. 본격적인 성경 읽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파편으로 머물던 성서 속 인물들과 사건들을 정리해 본다.

 

이른 바 모세 5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신명기) 중 창세기는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천지창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노아의 후손들, 바벨탑의 건축, 소돔과 고모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그의 손자 야곱, 이스라엘 12부족 유래 등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 천지창조 : 하나님은 첫째날-빛, 둘째날-하늘, 셋째날-바다, 넷째날-해 달 별들, 다섯째날-새들과 바다의 생물, 여섯째날-땅위의 동물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고 7일째 되는 날을 안식날로 했다.

 

2. 인간의 창조 : 하나님은 처음 아담을 흙으로 빚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생기를 주었다. 아담이 외롭게 보이자 그의 갈비뼈를 취해 하와를 만들어 함께 낙원에 살게 했다. 낙원의 중앙에는 생명의 나무와 인식의 나무가 있었는데 하나님은 인식의 나무에서 열리는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금기는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사악한 뱀의 유혹으로 하와는 선악과를 베어물고 아담에게도 먹게 했다. 그때부터 둘은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럽게 여기고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하나님은 뱀에게는 물론 금기를 깬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내렸다. 그때부터 뱀은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아담은 땀을 흘리지 않고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없게 하였고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죽음의 운명도 주어 에덴동산 밖으로의 추방을 명했다.

 

3. 카인과 아벨 :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는 카인, 아벨, 셋 이렇게 3형제를 낳았다. 카인(농부, 정착민)은 농작물을 경작하였고 아벨(양치기, 유목민)은 양을 치며 살게 되었다. 형제는 하나님이 두려워 제단에 제물을 바쳤다. 하나님은 카인의 농작물 대신 아벨의 양고기 제물만 취했다. 카인은 이를 시기해 아벨을 쳐 죽이고 숨었다. 하나님의 분노로 공포에 떨던 카인은 결국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자 하나님은 카인의 표식(보호의 표식)으로서 용서한다. 이후 놋(고향이 없다는 뜻)으로 이주한 카인은 유목 생활을 시작한다.

 

4. 노아의 방주(150mX25mX15m) : 아담의 10대 후손인 노아는 모든 인간들이 타락한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의로운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물로써 인간을 벌하기로 하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고 노아의 가족과 모든 살아있는 동물들 한쌍씩을 방주에 태우게 했다. 그리고 40일간의 대홍수를 통해 살아있는 모든 것을 멸했다. 한참 후 비가 그치자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 육지가 있는지 확인하였다. 나중에 보낸 비둘기가 7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터기 동부 아라랏 산(5,198m)에 정박하고 밖으로 나온다. 노아와 그 아내 그리고 3명의 아들들(셈, 함, 야벳)과 그 아내들만 구원받았으니 이때 노아의 나이 600세에 달했고 그는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5. 노아의 후손들 : 어느날 손수 만든 포도주에 취해 나신으로 잠이든 노아를 둘째 아들 함이 보게 되었다. 함은 아버지를 천으로 덮어주는 대신 형과 동생에게 이야기 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부끄러워 얼굴을 돌린 후 이불로 덮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격노해 가나안에 대한 저주를 내렸다. 이후 노아의 세 아들인 셈(셈족, 이스라엘의 조상), 함(함족, 가나안의 조상), 야벳(야벳족)은 각각 세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

 

6. 바벨탑의 건축 : 다시 번성하게 된 인간들은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기에 이것은 오만불손으로 여겨졌다. 바벨탑을 건설하여 하늘까지 닿겠다는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은 탑을 건설하는 인간들의 언어를 제각각 다르게 하여 서로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를 두고 '바빌로니아의 언어 혼란'이라고 하는 바 결국 서로 통하지 않는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바벨의 의미를 두고 '혼란'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신의 문'으로 이해하는 편이 맞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7. 소돔과 고모라 :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모두 큰 부자로 많은 양의 가축을 기르고 있었다. 서로 경쟁하다보니 목초지가 부족하게 되자 각자 헤어져 독립하기로 했다. 롯이 옮겨간 곳은 '소돔'이라는 지역이었는데 이 곳 사람들은 동성애, 수간 등 난교를 할 뿐만 아니라 믿음도 없었다. 지금도 '소도미'라는 표현은 동성애나 수간을 의미한다. 죄악의 구렁텅이와 다름 아닌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두를 멸하기로 결심했다. 아브라함은 이 가운데 의로운 사람이 있을 진데 함께 멸하겠느냐고 묻는다. 하나님은 50명의 의인이 있다면 멸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였지만 아브라함의 계속되는 협상으로 의인 10명이 있으면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였다. 형사소송법의 대원칙 '무죄추정의 원칙'과 법언 '한사람의 무고한 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열사람의 죄있는 사람을 벌하지 않는 것이 낫다'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의인이 없었던가. 결국 하나님은  불과 유황으로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롯과 그의 아내와 두딸만 살려두고자 했으나 롯의 아내는 멸망하는 소돔시를 돌아보지 말라는 뜻을 어기고 뒤돌아 보는 바람에 살아남지 못했다. 롯의 딸들은 자신들과 아버지 롯만 살아남은 것을 깨닫고 아버지를 취하게 만든 후 서로 번갈아 동침하여 각각 아들을 나으니 언니의 아들은 모압족의 조상이 되었고 동생의 아들은 암몬족의 조상이 되었다.

 

8. 아브라함, 이삭, 야곱 :* 십일조, 할례, * 하나님과의 언약, 이스마엘, 이삭을 바침, 이삭과 리브가, 쌍둥이 에서와 야곱(발꿈치를 붙잡은 사람), 야곱의 거짓말,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다.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는 자라는 의미)

 

9. 이스라엘의 12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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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클라시커 50 10
게롤트 돔머무트 구드리히 지음, 안성찬 옮김 / 해냄 / 2001년 9월
평점 :
품절


그리스 로마의 대표 신화 50선을 마치 백과사전처럼 가나다 순으로 편집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작게 다루어졌던 또 다른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회화, 조각, 판화, 영화 스틸 등 다양한 시각자료를 활용한 편제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비슷하고, 각 이야기의 기원, 문학 회화 음악 조형예술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점, 종합적으로 에피소드마다 교양성 흥미성 시의성 영향력을 별점으로 평가한 점 등은 다르다.

 

신화에서 유래하여 우리의 언어생활에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을 통해 고대의 이국에서 구전되어 온 타 문화가 얼마만큼 우리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새삼 경악하게 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의 의미만 해도 그렇다. 무언가를 억지로 끼워 맞춰놓은 것을 지칭하는 이 표현은 예컨데 정해진 원고량과 레이아웃에 맞춘 신문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들이 투덜가리며 할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아르고스의 눈'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헤라가 이오를 감시하기 위해 고용한 파수꾼인 아르고스는 눈이 100개나 있어 24시간 365일을 철통같은 감시를 할 수 있다. 비록 헤르메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는 하지만 탐정사무소나 보안업체의 상호명으로 '아르고스'만큼 적합할 수는 없다.  

 

권력과 부가 많이 쌓여 있는 곳에서 나는 악취는 '아우게우스의 외양간'이라는 표현으로 멋을 낼 수 있다. 그것을 청소하는 일은 그야말로 거의 불가능한, '헤라클레스적인' 과제이다. 그래서 권력이 강할수록 부가 많을 수록 부패는 심하고 청소는 힘들어 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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