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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썸니아(스펙트럼베스트외화20종행사)
아트서비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1.
극장에 들어서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 ‘메멘토(The
Memento)'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의 신작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메멘토’에서 시간의 역순이라는 기존의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플롯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종국에는 낭패감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때문에 ‘인썸니아(The
Insomnia)’를
대하는 첫 느낌은 긴장이었다. 게다가 갱스터 필름과 형사물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알 파치노가 선 굵은 형사로 분하고, 선한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로빈 윌리엄스가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가 평범한 영화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95년 노르웨이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 했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밤이
없이 낮만 계속되는 백야라는 특이한 기간에 접어든 알래스카 외딴 마을의 쓰레기 처리장에서 17세 소녀의 시체가 전라의 몸으로 발견된다. 단서도
목격자도 없는 이 의문의 살인사건에 LA경찰국 소속 베테랑 형사 윌 도머(알 파치노 분)가 투입되고 도머는 그의 오랜 파트너 햅과 알래스카
지방경찰 엘리(힐러리 스웽크 분)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살인 후, 시체의 구석구석을 닦아주는가 하면 머리도 감겨주고 손톱․발톱까지
다듬어 놓는 지능적이고 여유로운 살인자의 흔적을 좀처럼 찾을 수 없던 어느 날, 도머는 쉽게 놓칠 뻔한 단서를 찾아내어 용의자를 추적하게 된다.
그러던 중 안개가 쌓인 어느 해변에서 용의자 대신 파트너 햅을 사살하는 사고를 저지른다. 심한 불면증과 스트레스로 동료를 죽인 그 사고가
자의인지 타의인지 구별조차 못하는 도머는 자신을 향해 조여 오는 LA경찰국 감찰반의 내사와 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심신이 지쳐간다. 결국
도머는 햅의 죽음을 사건 용의자의 짓으로 꾸며댄다. 죄책감과 심리적인 압박감, 백야현상으로 인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도머는 살인자가 자신의
지목하고 있던 소설가 월터 핀치(로빈 윌리암스 분)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도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고
전화기 속에선 여유롭고 차분한 월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2.
“이 곳(알래스카)에서 태어났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
우선
이 영화의 장소적 배경이 되는 알래스카가 주는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군사적․산업적 차원을 떠나서 알래스카는 분명 LA나 뉴욕과는
다르다. 문명에의 오염도 없거니와 가끔씩 그림엽서나 달력에서 보게 되는 그 자연경관은 탄성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래서인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퍼펙트 월드(A
Perfect World)'에서는
고단한 삶과 지친 마음의 안식처이자 마지막 목적지인 이상향으로 그려지기도 한 장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알래스카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혹한이 지배해서 접근조차 쉽지 않은 오지인 것이다. 고립된 이미지로서
그곳은 1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으며 잠입도 탈출도 용이하지 않은 곳이다. 윌 도머가 묵고 있는 호텔 여주인의 말처럼 알래스카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곳에서 태어났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이 빌어먹을 지역은 밤이 되어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 다는 점인데 이 백야현상은 알래스카를 지리적 고립을 뛰어넘어 심리적 불안감을
증폭시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 생각해 보라. 낮과 밤, 밝음과 어둠, 진실과 거짓... 세상은 언제부턴가 사물을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 중간 즈음에 완충지역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간과해 오곤 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질서(cosmos)라고 부른다.
그러나 알래스카에서는 낮과 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완충지역의 가능성마저 봉쇄되어 있다. 낮과 밤이 구별되지 않는
이곳에서 이방인은 혼돈(chaos)을 느낀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인 형사와 살인자의 불안한 심리는 그대로 불면의 밤으로
이어진다.
잠을
들기 위해 노력하는 윌 도머의 몸부림과 그에 아랑곳없는 강렬한 빛, 알래스카는 죄의식에 갈등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3.
“좋은 경찰은 수사하느라고 잠을 못자고, 나쁜 경찰은 가책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윌 도머가 느끼는 죄의식의 실체는 무엇인가? 영화속의 갈등관계는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 월터 핀치와 수사관 윌 도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 윌 도머가 수사 중 동료 형사를 죽인 사건 역시 우리의
관심대상에서는 거리가 멀다. 위 사건들은 더 깊숙하게 감추어진 사건으로 가기 위한 표지판에 불과하다.
윌
도머는 자신의 실수에 의한 동료의 죽음을 월터 핀치의 짓으로 만들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다. 하지만 월터는 도머가 햅을 쏘는 광경을 목격함으로써
두 범죄자의 더러운 거래가 시작된다. 형사가 죄지은 자가 되고 죄지은 자가 목격자가 된다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도머는
“좋은 경찰은 수사하느라고 잠을 못자고, 나쁜 경찰은 가책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경찰이지만 감찰과의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악인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믿는 경찰이기 때문에 ‘법망을 피해 가는 악인을 처벌하려면 그 법을 위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간 살인자를 처벌하기 위해 일부러 증거를 조작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에 스치듯 지나가는 알 수 없는 회색화면은 바로 윌 도머가 지질렀던 부정의 잔상이었으며, 이 과거의 잔상이 문제의 본질임을 알아야 한다.
도머의
이 같은 부정은 햅과 도머에 대한 감찰과의 조사를 불러들이게 되고, 햅과 도머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다시 햅을 죽이게 되는(비록 그것이
실수일지라도) 죄를 촉발시키고, 또 다시 사건을 조작하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눈부시게 밝은 밤으로 인한 불면증은, 법을 지키기 위해
법을 위반하는 모순관계의 상징이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한 형사의 노력, 그 결과로서 밝음은 어둠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실제적 진실과
적법절차가 충돌된 상황에서 후자를 포기하고 얻은 결과는 헛된 명성 이면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던 것이다.
4.
“I don't know any more."
월터
핀치가 제시한 추잡한 거래를 뒤로하고, 핀치를 잡기 위해 총격전을 벌인 끝에 총에 맞고 쓰러진 도머가 엘리의 품에서 죽어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나도 더 이상은 모르겠어(I don't know any more)."이다. 자칫 자신의 비위를 감추기 위해 영혼을 팔 뻔했던 도머는
죄의식과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황금의 다리’를 건넌 것이다. 비로소 그가 설정한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 대한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질서와
혼돈은 동전의 양면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용서는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윌 도머의 유언은 코폴라 감독의 걸작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서
커츠대령(말론 블란도 분)의 유언 “Horror! horror!"와 비교된다. 도머형사나 커츠대령 모두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다가 ‘너무
많이 간’사람들이다. 둘 다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이는 그들의 독단과 잔혹함을 수단으로 얻어진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혼돈을
정리하고 질서를 세우고 있다고 확신하였지만 커츠대령이 그랬던 것처럼 도머형사도 자기가 이룩한 질서에 함몰되어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도머는
6일간이나 불면의 밤을 보낸 끝에 어둠(죄)의 유형은 자신이 분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고 영원한 잠으로 빠져든다. 그렇다면 그는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인가? 햅의 사망사건을 수사하던 엘리의 품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 도머은 사후에 자신의 비위가 세상에 알려져 자신의
명성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에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실 확인을 철저히 하라’고 한다. 엘리는 도머의 죽음 앞에서
그의 부정의 유력한 단서가 되는 증거를 바다에 던짐으로써 용서하는 듯 하지만 과연 영화를 본 관객들도 엘리의 결정에 동의할 지는 의문이다.
2002년 가을, 졸업을 앞두고 평소 영화를 자주 보는 나에게 문예지의 한 꼭지를 떼어 주면서 영화 평론을 부탁하여 쓴 글이다. 나름 고민하며 쓴다고 쓴 것인데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