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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폴란드 출신의 망명작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속 주인공 말로우는 시종일관 어둡고 우울한 어조로 한 판 게임이라도
하자는 듯이 심각하고 모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무수한 관념어의 홍수속에 빠져버린 나로서는 만만치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숙명적인 게임에 임한 나는 그에 대한 몇가지 의혹을 풀어보려 한다. 먼저 화자인 말로우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 사람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할
듯 싶다.
첫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말로우의 입을 통해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우의
외곽에 프레임 나레이터를 포함한 네 명의 청중들이 있지만 그들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프레임 나레이터조차도 말로우의 외부적인 묘사와
테임즈강 주변의 풍경 묘사에만 관여할 뿐이다. 이 사실은 말로우가 그의 아프리카 경험담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의 말을 검증할 만한 어떠한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의 거짓말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음을 뜻한다. 즉 말로우의 말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은밀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런던과 브뤼셀의 도시 이미지, 이와 병치되는 아프리카 열대 우림속 콩고강의 이미지 모두가 말로우 한사람의
개인적인 시각이며, 그가 만났던 여러 백인들과 원주민들의 묘사 역시 말로우의 주관에 지나지 않음을 염두해야 한다. 말로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또는 어느 부분이 가장된 사실이고 어디가 진실을 내포한 거짓인지 총체적인 의심을 하게 만든다. 전부를 긍정할 수도
전부가 부정될 수도 있다. 어쩌면 테임즈 강물을 보고 제국의 흥망성쇠의 상념에 잡혀 있다가 달빛에 취해, 혹은 한 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즉석에서 지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케빈 스페이시가 분한 버벌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말로우를 신뢰할 수 없는 두번째 이유는 그의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스스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단언하였다.
You know I hate, detest, and can't bear a lie.(p.49)
그러나 그는 그렇게 혐오하던 거짓말을 커츠의 약혼녀에게 하게된다. 커츠의 임종 시 그의 마지막 말을 묻는 약혼녀의
질문에 그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이름이었다고 말한다. 약혼녀의 신념을 지켜주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고 항변하지만 이 거짓말로 인하여 말로우의
모순이 드러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말로우에 대하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위선이었다. 굉장한 도덕주의자인양 떠벌려
놓고서는(심지어 그는 부처의 형상으로까지 묘사되고 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또 그의 행동에 의심이 가는 부분은
국제만습협회지의 뒷장을 뜯어낸 사건을 들 수 있는데 그 장에는 "Exterminate all the brutes"라는 엄청난 말이 쓰여 있었다.
이는 말로우의 충동이 부른 불필요한 개입이다.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은 커츠에 대한 올바른 이해보다는 소문처럼 "훌륭한
사람(remarkable man)"으로 기억할 것이다. 약혼녀에게 한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결과를 초래할 이 행동으로 인해 말로우의 객관적
신뢰는 여지없이 깨어진다.
소설 전체에서 말로우가 바라보는 문명과 야만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가 그를 믿을 수 없게 하는 세번째 이유가
되겠다. 우선 말로우가 속한 사회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사회이고 그 역시 문명인이다. 그런데 그는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함께 문명인으로서
제국주의와의 묵시적 결탁을 하고 있다. 그는 타락한 문명을 야유하면서 동시에 찬양한다.
그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으며 그 혼란이 독자의 혼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의 이중적 잣대가 러시아
뱃사람, 벽돌공, 의사, 예언자, 그리고 '척하는 자' 등 그의 시각으로 묘사된 인물들에게도 적용되었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말로우는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때문에 커츠의 평가에 대하여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관점이 요구되는데 역시 말로우의 말 속에서 찾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이제 독자는 말로우의
말속에서 추려낼 것은 추려내고 선택할 것은 선택하여 커츠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
커츠는 문명의 전파를 위해 밀림의 오지에 왔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목일 뿐 실상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문화적 침탈을 수행하기 위한 첨병으로써 임무가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 상아를 모으는 일이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은 물론이요
제국 자체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 커츠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잔혹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가
하면 타락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만행에도 불구하고 몇몇 백인과 원주민들은 그를 신격화하는 등 그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와 맞선 사람들 역시 또 다른 악의 화신이다. 커츠는 오지의 밀림속에서 고독과 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문명으로
자신을 데려갈 말로우를 기다린다. 정작 두 사람이 대면했을 때 커츠의 모습은 소문과는 달랐다. 커츠는 그의 죽음 앞에서 "The Horror!
The Horror! "라고 신음한다. 말로우는 커츠의 이 마지막 절규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는 이 임종의 순간이 커츠의
도덕적 자각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타당한가? 과연 그 'Horror'라는 한마디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설사 그 외침이 커츠의 뉘우침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말로우처럼 그를 여전히 "remarkable man"이라고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는 모든 '원주민들을 멸망시켰을지도 모르는' 인물이 아닌가? 허울좋은 구실을 내세워 백인들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원주민들을 착취한
독재자이자 폭군이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콘라드는 커츠를 통해 제국주의의 가려진 치부를 드러냄으로서 스스로가 각성의 기회를 삼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또 때때로 말로우같이 사실을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을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유럽인이 빠지기 쉬운 과거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부] 시리즈로 유명한 명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1979년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헐리우드에서 재생산 했다. 말론 브란도, 로버트 듀발, 마틴 쉰, 데니스 호퍼, 해리슨 포드, 로렌스 피쉬번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이 그것이다. 사실 소설보다 영화를 먼저 봤고, 소설을 읽고 다시 영화를 봤으니 영화의 스펙터클한 잔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글을 쓸 때는 소설을 읽고 난 직후 였으니 영화의 개입이 적었으리라 믿는다. 분명한 것은 소설이든 영화든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리스트의 상단에 있는 작품들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