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우선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그리고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감정에 대해서 이토록 깊이 있게 사유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성이 절대 위치에 있는 철학 전통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감정이 중요한 키워드임을 주지시켰던 ‘혁명적인’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에서 인간의 감정을 크게 48가지로 분류하고, 그와 유사한 감정들을 비교하면서 파고들었는데, 인간의 감정을 이토록 세분해서 소개한 철학자는 없었다'고 말한다.

 

철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 강신주는 재치넘치게도 스피노자가 분류한 48가지 감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각 감정의 실체를 잘 표현해 낸 48개의 문학작품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물론 편집자 양희정의 아이디어 였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신의 한수'가 된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순간순간 내가 잃어버리고 살았던 감정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세계 문학사의 뛰어난 작품들을 소개받으면서 빨리 읽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까지 하는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에 감추어진 내 감정들 하나하나를 찾아가는 여행에 책이 함께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보다 일만배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주변에 있는 가족, 친구, 동료 등 사람들 속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발현시키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사람과 부대낄 때 완전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p.s. 스피노자의 48가지 감정과 강신주가 추천하는 48가지의 문학 작품

(파란색은 읽은 것, 빨간 것은 우선 읽을 것)

1부 땅의 속삭임
1 비루함,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무무』, 이반 투르게네프
2 자긍심,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 /『정체성』, 밀란 쿤데라
3 경탄, 사랑이라는 감정의 바로미터 /『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4 경쟁심, 서글프기만 한 사랑의 변주곡 /『술라』, 토니 모리슨
5 야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 /『벨아미』, 기 드 모파상
6 사랑, 자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동풍서풍』, 펄 벅
7 대담함, 나약한 사람을 용사로 만드는 비밀 /『1984』, 조지 오웰
8 탐욕,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9 반감, 아픈 상처가 만들어낸 세상에 대한 저주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10 박애,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11 연민,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치명적인 함정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12 회한, 무력감을 반추하도록 만드는 때늦은 후회 /『전락』, 알베르 카뮈

2부 물의 노래
13 당황, 멘붕, 즉 멘탈붕괴와 함께 하는 두려움 /『채털리 부인의 연인』, D. H. 로렌스
14 경멸, 자신마저 파괴할 수 있는 서글픔 /『여인의 초상』, 헨리 제임스
15 잔혹함, 사랑의 비극 /『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16 욕망,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17 동경, 한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려는 서글픈 시도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18 멸시, 사랑이라는 감정의 막다른 골목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에드워드 올비
19 절망,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20 음주욕, 화려했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발버둥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21 과대평가, 사랑의 찬란한 아우라 /『허조그』, 솔 벨로
22 호의, 결코 사랑일 수 없는 사랑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23 환희, 원하는 것이 선물처럼 주어질 때의 기적 /『판결』, 프란츠 카프카
24 영광,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3부 불꽃처럼
25 감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26 겸손,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에밀 졸라
27 분노,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이 될 때까지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28 질투,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질투』, 알랭 로브그리예
29 적의,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허망한 전투 /『개인적인 체험』, 오에 겐자부로
30 조롱, 냉소와 연민 사이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31 욕정, ‘프레스토’로 격하게 요동치는 영혼 /『악마』, 톨스토이
32 탐식, 자신의 동물성을 발견하게 될 때 /『먹는 일에 대한 이야기 둘』, 모옌
33 두려움,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유령』, 헨리크 입센
34 동정, 비참함이 비참함에게 바치는 애잔한 헌사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커포티
35 공손, 무서운 타자에게 보내는 친절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36 미움,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괴되거나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4부 바람의 흔적
37 후회,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캐스터브리지의 읍장』, 토머스 하디
38 끌림, 사랑으로 꽃필 수 없어 아련하기만 한 두근거림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39 치욕, 잔인한 복수의 서막 /『토요일』, 이언 매큐언
40 겁, 실패를 예감하는 위축된 자의식 /『여명』,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41 확신, 의심의 먹구름이 걷힐 때의 상쾌함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42 희망,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43 오만,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위험한 관계』,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
44 소심함,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 사강
45 쾌감, 포기할 수 없는 허무한 찬란함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 조르지 아마두
46 슬픔,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미국의 비극』, 시어도어 드라이저
47 수치심,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48 복수심, 마음을 모두 얼려 버리는 지독한 냉기 /『빙점』, 미우라 아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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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기 2015-08-28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다.

호서기 2015-11-18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15.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

호서기 2015-12-0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실격],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질투],[노인과 바다],[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구매하다.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에 어떤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 영화에서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반복적으로 노출된 적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해당 영화에 대한 모든 이미지가 사라진 후에도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잔상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아마 그 영화는 멜깁슨과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한 1997년작 [컨스피러시] 인 듯 하다. 돌이켜 보건데 그 영화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모튼 하켓의 감미로운 목소리로도 기억되는 나름 괜찮은 영화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잔상으로 말미암아 다른 여러 매체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접할 때마다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사실 이전에도 몇번이나 이 작품에 도전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유시민은 '글쓰기 고민상담소'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은 몇번이나 완독에 실패했다'면서 '남들은 재미있다고들 하는데 자신과는 아마도 궁합이 맞지 않는가 보다'고 한 적이 있다. 내가 도전에 실패한 이유를 생각해 봤다. 이번에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초반부터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삐딱한 시선, 정제되지 않은 표현 따위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모든 것이 불만인 화자는 하나같이 '지겹고' '끔찍하다'고 말한다. 열여섯 고교 퇴학생의 넋두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어야만 하나 사실 지겨웠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콜필드의 시선을 끝까지 따라가기로 했다. 이참에 그 원인모를 강박관념에서도 벗어날 겸 말이다.

 

부러 이 작품에 대한 어떠한 사전지식을 배제한 나는 도대체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읽는 내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반쯤 읽다 보니까 드디어 '호밀밭'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교회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는 가족이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였다. --- 부부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이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 아이가 정말 재미있었다. 인도가 아니라 차도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인도와 차도 사이에 놓인 연석 바로 옆을 겉고 있었다. 아이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그 꼬마도 똑바로만 걸어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걸어가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난 좀더 가까이 다가가 꼬마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를 들어보았다.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 꼬마는 그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들리고 있었다. 꼬마의 부모는 아이에겐 전혀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그 애는 그저 연석 옆에 붙어 차도를 걸어가며,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을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민음사  156p)

 

아직 모르겠다. 우선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이라는 노래가 어떤 내용인지 모르니까 이 단락이 무엇을 내포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한참 지나가니 콜필드가 동생 피비와 대화하는 중에 다시 한번 '호밀밭'이 등장한다. 이번에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싶어?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 줄까? 만약 내가 그놈의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다면 말이야"

"뭔데? 말 좀 곱게 하라니까"

"너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 알지? 내가 되고 싶은 것...."

"그 노래는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야" 피비가 말했다. "그건 시야. 로버트 번스가 쓴 거잖아"

"로버트 번스가 쓴 시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피비가 옳았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 맞다. 사실 난 그 시를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잡는다면'으로 잘못 알고 있었나 봐"나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 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229~230p

 

이제 좀 윤곽이 잡힌다.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이제 막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성적부진으로 퇴학을 당한 16살 짜리 철부지라는 것을. 더군다나 이번 학교가 세번째 학교이니 퇴학도 세번째, 내가 16살의 콜필드였다 하더라도 세상이 바로 보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전에 두번의 퇴학은 무엇때문인지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대충 상상할 수 있겠다. 누가 말거는 행위 자체도 때로는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는 나이, 언제든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수 있는 시기, 혼란의 연속, 스스로도 무엇때문에 불만인지 고백할 수 없는 그 시간의 간격에서 주인공은 방황하고 있다. 주인공은 뉴욕의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콜필드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콜필드의 대책없는 반항적 행동은 기성세대에게 항변한다. 누구나 겪게되는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시한폭탄 같은 사춘기 시절, 이 시기에는 일종의 특권과도 같은 반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그리고 답변을 요구한다. '나는 반항한다. 나는 방황한다. 나는 벼랑 끝에 서있다. 누가 나를 벼랑끝에서 붙잡아 줄 것인가?'라고. 기성세대든 아니면 국가가 만든 어떤 제도는 누군가는 또는 무엇인가는 청춘을 위한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P.S. 로버트 번스의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 원문을 싣는다. 어디에서는 스코틀랜드의 민요라고도 하는데 무엇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Comin Thro' The Rye (Coming Through The Rye)

 

                                         Robert Burns

 

Coming Through The Rye.  호밀밭을 거닐어요

O Jenny is all wet, poor body, 이런, 제니는 다 젖었군요, 가엾기도하지.

Jenny is seldom dry;  그치만 잘 마르질 않네요

She draggled all ger petticoats, 제니는 페티코트를 질질끌며 터벅터벅 걸어가지요

Coming through the rye! 호밀밭을 거닐면서 말이죠^^

Coming through the rye, poor body, 가엾어라, 호밀밭을 걸어오네.

Coming through the rye, 호밀밭을 걸어오네

She draggled all ger petticoats,  페티코트를 질질끌며 터벅터벅 걸어오는구나

Coming through the rye!   호밀밭을 거닐면서 말이죠

Should a body meet a body   따뜻한 몸으로 안아주어야 할텐데

Coming through the rye,  호밀밭을 걸어오네요

Should a body kiss a body  키스해 주어야 할텐데

Need a body cry?  울고싶나요?

Should a body meet a body  따뜻한 몸으로 안아주어야 할텐데

Coming through the glen,  계곡을 걸어오네요

Should a body kiss a body  키스해 주어야 할텐데

Need the world know  사람들이 알까요?

Should a body meet a body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하는데

Coming through the grain  밭을 거닐어 오고 있어요

Should a body kiss a body  키스해 줘요

The thing is a body's own  제니가 원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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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낮이 가고 밤이 오고, 다시 밤이 가고 낮이 오기가
몇 번을 거듭하도록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내리는 비에 몸속까지 흠뻑 젖어도 보고, 지쳐 길거리에 쓰러지기도 했다.
어느 날, 커다란 소용돌이가 쳤고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은 어둠뿐이었다.
마치 안대를 한 술래처럼 먼지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한발 내디디면 천길 낭떠러지일 것만 같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못생겼다고 놀이에 끼워주지도 않던 동네 아이들, 돌을 던지며
놀려대던 사람들이 악몽처럼 눈앞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추웠지만 이마와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여행은, 특히 혼자서 하는 여행은 참 외롭다.
바람만 뒹구는 거리에서 뚜벅 뚜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라치면
내가 걷는 것인지 길이 나를 삼키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작렬하는 햇빛아래 개구리 한 마리 도로를 횡단하다가 차바퀴에 깔려 압사당하는 비극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먼지는 이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바탕 땀을 흠뻑 흘리고 나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도 같았다.

잠시 허리를 굽혀 신발 끈을 고쳐 맸다. 구멍 난 운동화 틈사이로
때 절은 새끼발가락이 생뚱맞게 나와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은은한 백합 내음이 콧속을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향기가 시작되는 곳이 어딘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인기척 없이 냄새만 유혹처럼 먼지의 발걸음을 잡았다.
분명 사람의 냄새였기에 기다리기로 하고 길가 풀 섶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집을 언제 떠났는지 어림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고되고 외로운 여정이었다.

 

“자니?”

 

먼지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따뜻한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향기의 주인인 듯 달콤한 내음이 공기 중에 있었다.

 

“피곤한가 보구나. 곧 일어나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한참 동안이나 곤하게 자더구나.”

 

먼지는 깜빡 잠이 들었음을 알고 코를 골지는 않았는지,
침을 흘리지는 않았는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니?”
“그래...”

 

정말 수수하게도 생겼다고 먼지는 생각했다.

 

“난 먼지야, 내게 할 말이라도 있니?”
“너 친구를 찾고 있지?”
“...”
“어떻게 알았냐구? 네가 자면서 말하더라. ‘친구야 어딨냐’구.”

 

먼지는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지 몰라도 기분이 좋아졌다.

 

“난 달이야.”

 

달이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하자,

먼지도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달은 먼지 옆자리에 앉아서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있었고 눈은 바라보는 거리만큼 깊고 고요했다.
먼지는 그런 달의 옆모습을 침을 삼키며 바라보았다.
'꿀꺽' 먼지가 침을 삼기는 소리다.

 

“외롭니?”

달은 시선을 옮기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외로워.”

먼지는 어렵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누굴 사랑하고 있니?”
“난 사랑이 뭔지도 몰라.”
“먼지라고 했지? 
 내가 얘기 하나 해줄 테니 괜찮다면 들어볼래?”

 

먼지는 달이 참 진지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토록 진지하게 말을 건넨 기억이 없었다.

 

달이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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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먼지가 처음 만난 사람은 한눈에도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반갑게 다가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그 예쁜 숙녀는 먼지를 본체만체 유유히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먼지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숙녀가 먼지 앞을 스쳐갈 때 재빨리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쳇, 넌 누구니?”
“나랑 친구 할래?”

 

그녀는 먼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더니, 갑자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꼬마야, 난 너랑 친구할 마음이 없단다.  
 너처럼 볼품없고 못생긴 아이와 친구를 한다면
 모두들 나를 비웃을 거야!”

 

그녀는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그러고는 아랑곳없이 품에서 거울을 꺼내더니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작은 손가방에서 빨강 립스틱을 꺼내더니 분홍색이었던 입술을

빨갛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먼지는 그저 그녀가 하는 대로 바라만 보다가 말했다.

 

 

“그럼 그냥 이름이라도 일러주지 않으련?
 다음에 만나면 이름을 불러 줄게.”

 

숙녀는 한참동안 먼지를 바라보다가,

 

“흔히들 나를 '수성'이라고 부르지만, 내 진짜 이름은...

아니, 내가 뭐하는 거지? 꼬마야, 나중에 나를 우연히 만나더라도 아는 척 하지 말았음 해.”


“---. 귀찮게 해서 미안해.”

 

먼지는 고개를 떨군 채 진짜 이름을 말해주지 않은 '수성'에게 사과했다.
수성과 친구로 지내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예쁘고
자신은 정말이지 형편없이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난 비록 못생겼지만 창피하지 않아. 
 그래도 저 넓은 세상 어디쯤에는 나를 맞아줄 친구가 있을 거야.'

 

빠른 걸음으로 멀리 사라지는 '수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먼지는 아직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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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 멀고 먼 우주 한 귀퉁이 은하계, 이름도 없는 조그만 행성에 참 지지리도 못생긴
아이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먼지’라고 부르며 놀려댔다.
결국 ‘먼지’는 그 아이를 이르는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다.
울퉁불퉁 외모에 다닥다닥 주근깨, 눈은 보일 듯 말 듯 했으며
키는 또 왜 이리도 작은지 모든 게 불만투성이였다.
동네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먼지와 친구를 하려 하지 않았다.
먼지는 퍽 외로웠다. 언제나 혼자였다.
'삶'이라는 것이 너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먼지는 계속 야위어 갔다.
그런 먼지를 바라보던 엄마가 어느 화창한 날 먼지를 앉혀놓고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무엇이 너를 붙잡는 줄 모르겠다.

 저 은하계 너머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는데 어째서 나서지 않는 거니?

 이 곳에서 힘들어하지 말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오렴.”

 

바깥세상? 그곳에는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그렇게 편견으로만 가득한 곳은 아닐 거야. 
언제까지나 이렇게 외롭게 살아갈 순 없어. 

어딘가에 나를 받아줄 친구가 있을 거야.’

 

먼지는 집을 나서면서 앞으로 닥칠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먼지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길은 눈앞에 반듯이 펼쳐져 있었지만 한 참을 갔는데도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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