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숙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또한 환상시도 좋고 추상시도 좋고 환상적 시론도 좋고 기술시론(術詩論)도 좋다. 몇 번이고 말하는 것이지만 기술의 우열이나 경향 여하가 문제가 아니라 시인의 양심이 문제다. 시의 기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인데 작금의 시나 시론에는 양심은 보이지 않고 기술만이 보인다. 아니 그들은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主知的)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기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김수영,  '<난해>의 장막', "김수영 전집2",  민음사,  272~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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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죠. 이분 글은 읽음ㄴ면 읽을수록 좋습니다. 결국 문장의 힘은 행동인 것 같습니다.

수다맨 2014-06-20 19:58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이분만큼 기개가 있었던 사람도 드문 것 같아요!
글이 참 담백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김수영은 허세도 없고, 에두름도 없이 그냥 본질을 향해 돌직구를 던지죠.
 

흔히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얼려 작부들이 있는 술집엘 가보면 그것도 장소와 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취기가 도는 대로 여자를 다루는 사내들의 태도는 각양각색이어서 지분지분 여자를 붙들고 자꾸만 상소리를 퍼부어 웃기고 싶어하는 음담파淫談派도 있고, 혹은 개신개신 쾨쾨스런 말만 툭툭 투기듯 하며 여자의 정신을 혀로 핥듯이 쉴 새 없이 훑어보고 뜯어보는 완상파玩賞派가 있는가 하면, 여자를 어린애모양 옆에 끼거나 무릎 위에 올려앉히고 그 볼기짝을 투덕거리며 술이나 안주를 먹여주기도 하고 커다란 입을 넙죽거리며 받아 먹기도 하는 애무파派, 덮어놓고 여자의 팔이나 가슴이나 다리나, 그래선 안될 때까지 함부로 만져보려고 덤비는 접촉파接觸派, 여자라면 무작정 벗겨 보고 싶어하고, 때로는 자기도 벌거벗기를 좋아하는 노출파出派, 더러는 여자와 얼싸안고 뒹굴며 여자 얼굴에 자기 얼굴을 마구 비벼대거나 입술, 볼, 목 할 것 없이 돌아가며 물고 빠는 발광파狂派, 그런가 하면 여자에겐 대범한 척 앉아서 분주히 술과 안주로 배를 불리고 나서는 주석이 채 파하기도 전에 그 중 밴밴한 여자를 채 가지고 행방불명이 돼 버리는 행동파動派, 이렇듯 그 성격과 취미에 따라 노는 꼴이 죄 다르다.

-손창섭, "부부", 예문관, 152쪽,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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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손창섭의 장편소설로, 책으로 묶인 시기는 197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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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1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다 님은 이 책 어떻게 입수하셨습니까 ?

수다맨 2014-06-10 17:40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나온 책인데다 보관 상태가 영 시원치 않아서 낱장도 많이 떨어지고 속지가 바랬더군요. 만지기만 해도 손에 때탈 정도입니다-_-;;;;
이 소설은 한 마디로 부부의 갈등, 육체적 접촉을 원하는 남자와 플라토닉 러브를 중시하는 여자의 불화를 다룬 소설인데, 무척이나 흥미진진합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로고스(이성)와 파토스(감성)의 치열한 대결이라 해얄까요. 나중에는 인물들이 얽히고 설켜서 총 육각 관계(?!)가 만들어지는데, 무리한 설정 없이 이 관계들을 한 줄기로 엮는 작가적 솜씨가 혀를 내두를 정돕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6-10 18:54   좋아요 0 | URL
음... 귀한 책이로군요. 부부'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걍 ~~~ 책 읽어버렸다고 하고 보관하십시여..ㅎㅎㅎㅎㅎㅎㅎ 위약금 얼마나 내겠습니까...

수다맨 2014-06-10 19:16   좋아요 0 | URL
그러고 싶지만 왠지 양심에 찔려서요 ㅎㅎ
방민호("삼부녀"에 해설 단 평론가)의 연구에 따르면 손창섭이 쓴 장편 소설이 약 13편쯤 된다고 하더군요. 그 중에서 근래에 출간된 소설은 길, 유맹, 인간교실, 삼부녀 이렇게 4작품 뿐입니다. 아쉽게도 유맹과 길은 현재 절판상태구요.
예전에 방민호가 손창섭에 관해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눈에 띄었던 게 그간 문단에서 손창섭 후기 장편 소설들에 대한 연구가 지극히 소홀했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손창섭이 신문에 주로 소설을 연재했기 때문에, 그의 장편소설들이 단순한 통속소설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더군요 (예컨대 최인호 같은 이들의 신문연재소설도 당대에는 통속소설로 치부됐죠).
어쨌거나 지금이라도 발굴하고, 새로이 재평가받아야할 작가라고 봅니다. 단순히 50년대 작가로 그를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과소평가라 생각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6-10 19: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도서관 가서 있으면 저는 훔쳐오도록 하겠습니다.
11권이낟되는데 이걸 복원이 안 된다니 이해가 안 갑니다. 무슨 16세기 소설도 아니고 5,60년대 소설인데 말이죠...

수다맨 2014-06-11 12:46   좋아요 0 | URL
한 작가의 잊혀진 장편소설들을 출간한다는 게 출판사 입장에서도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ㅠㅠ 그래도 이 작가의 글들은 반드시 재발굴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잉여인간' 정도의 작가로 기억되기에는 너무나 아깝죠

노이에자이트 2014-06-2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부부>와 <유맹>이 새로 출간되었습니다.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저는 하드 커버로 된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손창섭 작품집이 있는데 장편으로 <길>도 실려있습니다.나머지는 단편들입니다.

수다맨 2014-06-26 16:05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맹(실천문학)"이 새로 출간된 것은 맞는데, "부부"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예옥이란 출판사에서 손창섭의 "삼부녀"와 "인간교실"을 출간했고, "부부"도 조만간 출간한다 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6-27 14:52   좋아요 0 | URL
안타깝군요.

수다맨 2014-06-29 23:00   좋아요 0 | URL
네 ㅠㅠ 그래도 부부 만큼은 나중에라도 꼭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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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이 대표 저서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 책도 그러한 물증 중 하나다. 비평고원과 알라딘을 오가며 활약하던 로쟈의 적공과 감각과 예기가 오롯이 살아 있는 책이다. 특히 김규항, 김훈, 고종석을 비교하는 글은 로쟈 서평의 정점이다. 하지만 이 이후에 나온 로쟈의 책들은 힘이 빠져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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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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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의 불안정, 서술과 묘사의 불균형, 서사의 작위성,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구성, 개연성 없고 매력 약한 캐릭터 등 갖가지 단점들이 노출된다. 결국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덮었다. 하성란의 재능은 가장 고전적이고 표준적인 단편을 쓸 때 드러나는 것 같다. 장편을 쓸 재주가 없다고 해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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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08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어쩌면 저랑 생각이 이렇게 150% 같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이 소설 읽고 역시 하성란은 단편에는 강하지만 장편은 글재주가 없구나 했습니다.
하성란은 장편을 쓰면 180도 달라지는 분입니다. 단편에는 강한데 장편은 약합니다.

수다맨 2014-06-08 18:49   좋아요 0 | URL
저는 이거 읽고 별 다섯 개 주는 사람들 이해가 안 가더군요. 어쩌면 오늘날 독자들은 하성란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하성란이라는 브랜드 자체를 소비하는 데 쾌락과 우월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닐까 의문이 듭니다. 박근혜 정부의 정책들은 잘 몰라도 박근혜라는 인간 자체를 -어떤 이유에서건- 흠모하는 부류들과 비슷하다고 해얄까요.
결국에 50쪽 남기고 덮었습니다... 최근에 오래전 절판된 -세로쓰기 판본인-손창섭의 장편 "부부"를 읽었는데, 저는 차라리 이 소설이 하성란 소설보다 낫다는 데 돈 만 원쯤 걸고 싶더군요 ㅎㅎㅎ

창고지기 2015-01-1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은 뭐랄까 기교의 장이랄까. 하지만 장편소설은 작가의 세계관이 드러나기 때문에 철학이 빈곤하면 좋은 장편을 못쓰는 거 같습니다.

수다맨 2015-01-12 14:52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단편이야 감각과 기교만 충실하면 어느 경지까지는 이를 수 있지만 장편은 작가의 세계관이 그만큼 공고해야 나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단편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욕 먹을 소리입니다만, 저는 진짜 소설은 장편이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3살의 젊었던 오에는 세상과 인류에 대해 크나큰 경멸을 품었던 것 같다. 그의 문장을 읽노라면 마치 소태를 핥는 기분이 드는데,  이 맛에는 역겨움과 중독성이 함께 있다. 인간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거기에 있는 절망과 치욕을, 똥내와 땀내를 언어로 환산한 결과물이 바로 이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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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06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술 한 잔 하십시다.

수다맨 2014-06-06 21:33   좋아요 0 | URL
넵 조만간 한잔 하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