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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징조들 ㅣ 그리폰 북스 2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의 종말, 흔히 말하는 아마게돈을 다룬 이야기들은 다들 음울하고 분위기 칙칙한 공포스러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오멘]. 그 암울하고 호러스러우며 세상의 종말이 닥칠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주었던 책은 이후 등장한 종말 이야기의 대명사였다. 666이라든지 악마의 자식이라든지...하여간 엄청난 인기를 얻어 영화로도 만들어져 수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해서 교회나 성당으로 이끌거나, 즐거움에 만세를 외치며 파티를 열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달랐다. 책 뒤의 소개글을 보고 매료되버리긴 처음이었다.
''이제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볼 수 없다. 모차르트도 없다. 초밥도 없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영원히 저 위에 계시라 하고 우리는 그냥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하노라, 아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지만 - 멋진 징조들이라니... 세상에 종말이 왔을때 일어난다는 징조들이 멋지면 어떡하자는건가! - 너무도 유쾌하고 풍자와 패러디 그리고 사회 비판이 적절히 섞인 멋진 글이었다. 무조건 섞어 찌개가 아닌, 재료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훌륭한 일품 요리라고나 할까?
이 글의 첫 부분은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한 직후, 그들을 꼬신 뱀 - 그 이름도 유명한 크롤리 - 와 천사 아지라파엘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 나무에다 화살표를 그어놓고 커다란 글씨로 건드리지 말 것이라고 해놓다니, 그다지 치밀하다고 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왜 그 나무를 높은 산꼭대기에 올려놓든가 멀찍이 떨어뜨리지 않았느냔 말야. 정말이지. 그 분이 뭘 계획하고 계신 건지 궁금해지잖아."
어쨌던 세상으로 떨어진 크롤리와 역시 같이 온 천사 아지라파엘은 오랜 세월동안 끈끈한 정을 가지고 땅따먹기 시합을 벌인다. 11년 전, 드디어 세상을 멸할 운명을 타고난 ''마왕, 왕을 몰락시킬 자, 용이라 불리는 거대한 짐승 (너무 길어서 이하 생략)''이 태어난다. 크롤리와 지옥의 마왕들의 치밀한 계획하에 그 아이는 오멘에서처럼 유복한 집안의 아이로 바꿔치기될 ''뻔'' 한다.
왜 ''뻔''하냐고?
실행을 맡은 행동 대장인 수녀의 실수로 아이가 다시 바꿔치기 당하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A와 B만 바꾸는 것인데 A와 B와 C가 서로 바뀌는 엄청난 결과를 낳은 것이다.물론 그것도 모르고 아지라파엘과 크롤리는 협정을 맺어 운명의 아이로 착각한 다른 아이 - 이름도 무시무시한 워락 - 을 열심히 교육시킨다.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이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운명의 날이 되어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네 명의 천사와 지옥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제가 있다면 ''마왕, 왕을 몰락시킬 자, 용이라 불리는 거대한 짐승...(생략)''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그들이 모른다는 것! 덕분에 아지라파엘과 크롤리는 각자의 상관들에게 협박을 받으며 그 아이를 찾아 나선다. 물론 그 아이는 아주 평범한 동네에서 조금은 특별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에 기록된 인류 최후의 날...
유쾌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통쾌한 기분을 느끼면서 읽은 책이다. 두 명의 작가 중에 누가 무신론자이고 누가 유신론자인지 모르겠지만, 그 둘의 조화가 적절히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너무 가볍다거나 심각한 신성 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부분도 있었지만, 그 단점조차 충분히 무마할 장점이 너무도 많은 글이다.
한없이 키득대다 보면 어느새 인간의 존재 이유같은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 무리가 전혀 없는 전개라던지. 서구 현대 문명사회를 빗댄 풍자라든지 서바이벌 게임하는 곳을 지나다가 크롤리가 비비탄을 모조리 실탄으로 바꿔버리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줬어. "라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 그리고 네 명의 종말을 예고하는 천사들이 미사일 기지 앞에서 "난 이런 걸 상상하지 않았어. 철사줄이나 가지고 장난치려고 몇 천년이나 기다린 게 아니라고. 이런 건 도저히 극적이라 할 수가 없잖아."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
오토바이 폭주족인 천사라던지, 다이어트 식품을 만들어 기아를 일으키는 천사, 무기 밀매를 하는 천사 그리고 신의 뜻을 배달하는 공처가 우편 배달부 - 그가 못가는 곳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수다장이 수녀회의 막아버리고 싶은 입을 가진 수녀님들 같이 독특한 개성을 지닌 등장 인물.
뛰어난 네이밍 센스. 이건 원작으로 봤으면 더 감동을 느낄 것 같다. 주석으로 해석된 것을 봐야 이해가 갔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제일 압권인 것은 역시 인물들의 대사일것이다. 재치와 위트가 철철 흘러 넘치다 못해 강이 되어 흐르는 대사 처리는 엄지 손가락을 위로 쳐들게 만든다.
예를 들면
"그래 댁들이 지옥의 천사들이란 말이지?"
"어느 지부에서 왔는데?"
그가 말했다.
계시록 6장.
흰옷의 젊은이가 덧붙였다.
"2절에서 8절까지"
(네 명의 천사가 고속도로 폭주족과 나누는 대화)
물론 더 많았지만, 그렇다고 책을 몽땅 베낄 수는 없어서 여기까지...
마음껏 웃고 골똘히 생각하게 만들었던, 정말로 간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읽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오늘은 크롤리처럼 퀸의 노래를 들으며 조금 생각해봐야겠다. 신의 섭리가 무엇인지, 과연 아지라파엘이나 크롤리의 말처럼 그런 것인지...그리고 어린 아담 - 원래 예정된 운명의 아이 - 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종말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저 책에서 종말의 징조라고 일컬어지는 것들 모두가 지금 현재 우리의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하긴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말세야, 말세"를 입에 붙이기 시작했으니, 지금이 말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조금 오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