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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여행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들의 이야기
최순욱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저자 - 최순옥
예전에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큰조카와 그리스 로마 신화 전시회를 간 적이 있었다. 작품 밑에 적힌 설명을 읽던 조카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고모, 외국 사람들은 바람피운 게 뭐가 자랑이라고 그림까지 그렸대?” 그리고 다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고모 저게 신이야?”
하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의 일상은 참으로 난잡하고 부도덕하긴 하다. 오죽했으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너무 좋아하는 나도 이건 아동 유해 매체가 아닐까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북유럽 신화의 신들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멋진 목걸이를 얻기 위해 난쟁이들과 동침하는 여신이 있는가 하면,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암말로 변신하여 수말과 관계를 맺는 신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새끼 말을 출산한다! 술 먹고 주사를 부리는 신은 기본이요, 납치 강간은 옵션이다.
하지만 신들의 사고방식을 우매한 인간이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신들의 그러한 행적을 기록한 게 바로 인간이니, 입맛에 맞게 자극적이기도 하고 흥미 유발도 하고 풍자를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가감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계속 보는 인간의 심리를 그 오래전에 신화를 기록한 사람들은 파악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조금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신화가 그 나라의 문화나 자연 환경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저자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다.
저자는 거인 족과 신들의 싸움이 북유럽의 춥고 혹독한 겨울과 지리적인 여건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또한 신화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풍습이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알려준다. 예를 들면 결혼할 때 신부에게 망치를 주는 것이 토르가 여장을 하고 거인 족과 가짜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북유럽의 약탈혼에 대한 근거를 프레이르와 게르드의 결혼과 연관 짓기도 한다.
처음에는 너무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조카의 어릴 적 얘기가 떠오르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신화를 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고 하지만, 그것을 적힌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런 설명이 곁들여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이 옳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말이다.
셰익스피어 이후 새로운 것은 없다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신화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후 새로운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건 북유럽 신화건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 이 이름은! 이 설정은! 이 구도는!’하면서 얼마나 많은 게임과 영화와 소설과 만화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저자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을 잘 해주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한국의 신화와 비슷한 내용이 있으면 비교를 해주거나, 게임이나 영화에 어떻게 북유럽 신화가 적용되고 변형되었는지 예를 들어주고 있다.
예를 들면, 북유럽의 신들이 자신의 조상에 해당하는 거인족을 죽인 것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가 아버지를 죽인 것을 비슷한 연장선상에 놓고 얘기한다. 그리고 프리그와 헤라의 비슷한 상황에 대한 다른 대처법을 보여준다. 또한 반지에 얽힌 이야기를 톨킨과 바그너가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도 얘기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인간은 과연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과학 기술은 확실히 발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예술 쪽은 아닌 것 같다. 기존에 있던 것을 변형하고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뿐이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이나 욕망 같은 것들은 신화시대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신이라는 지위에 있기에,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게 아닐까?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까, 내키는 대로 하는 건 아닐까? 기록하는 인간들의 그런 욕구가 그대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화를 좋아하는 것이라 추측한다. 감추고 싶은 욕망의 대리 만족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런데 북유럽 신화는 신들의 종말이 나온다고, 세상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신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살아남을 놈은 살아남는다. 그게 꼭 나란 법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