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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작가 - 이재찬
2013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띠지에 적힌 ‘니가 살인자라 부모를 죽인 걸까? 아니면, 부모가 널 살인자로 만든 걸까?’라는 문장이 보였다.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이 소설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지? 호기심이 생겼다.
250쪽 정도 되는,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두께. 책을 펼치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중간에 한눈 한번 팔지 않았다. 오탈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책에 푹 빠져들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이것은 마치 둘째 조카에게서 얘기해준 게임 ‘문명’을 했을 때의 경험과 비슷했다.
(문명은 전원을 켤 때는 분명히 오후 5시였는데 정신을 차리니 새벽 4시가 되었다는, 게임자를 시간이동 시키는 컴퓨터 게임이라고 둘째 조카가 증언했다.)
방인영은 고3 여학생이다. 대형 로펌에서 근무하는 아버지와 쇼핑과 교회에 다니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어머니가 가족의 전부이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빠는 그렇게 똑똑한데…….” 내지는 “엄마는 예쁜데…….” 그녀는 자신을 5등급이라 칭한다. 외모도 성적도 다.
억지로 가야하는 교회 예배도 귀찮고, 자신을 보면 잔소리만 하는 아빠도 싫다. 그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방 변호사’라고 부른다. 홍길동도 아니면서. 그리고 부모의 재력 때문에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학교 선생도 싫고, 불쌍하게 보는 과외도 별로고, 이 나라 교육 제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다. 친구도 많은 것도 아니다. 거기다 친척들도 별로다. 다들 그녀의 집에 재정적 도움을 바라면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런 그녀에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고 있지만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심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계약직 공무원이라는 남자. 인영은 그에게 자신의 부모를 죽여 달라는 살인 청부를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인영은 외모나 공부는 5등급일지 몰라도, 눈치라든지 상황 파악, 상황 정리, 결단력, 행동력 등등은 거의 1등급에 해당하는 소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살해 계획을 세우는 장면이나, 뒤처리장면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아주 꼼꼼하고 세심하게 함정을 파는 것이, 방 변호사의 핏줄이 맞는 거 같다.
만약 부모가 인영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허락했으면, 그녀는 엄청난 능력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가 없으니까 할 의욕이 안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5등급이 나올 수밖에.
특히 인영은 비뚤어진 세상의 비리를 알아차리는 능력은 뛰어났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내뱉는 대사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딱하지만, 날카롭고 통찰력이 엿보이며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가끔은 자학적이며 뒤틀린 유머감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론이 있고 순환할 뿐이라는 이론도 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오전 수업 때 논술이 나한테 물었다.
“순환이죠.”
-중략-
“조선 시대 때도 무전유죄 유전무죄,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가? 근거는 뭐가 있을까?”
“부자는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법무법인에서 감옥에 가지 않게 해 주거든요.” -p.141
나는 “사실 내가 별로 이 세상에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있는 데에는 어느 밤에 엄마 아빠가 뜨겁게 안아 버렸기 때문”에 불과하다. - p.171
그 때문에 상당히 우중충하고 암울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읽고 난 느낌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어딘지 모르게 주인공에게 힘내라고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폐륜범죄를 저지르려는 소녀를 응원하다니! 갑자기 죄책감과 더불어 범죄스릴러물을 그만 봐야하는 갈등이 생긴다. 게임과 더불어 범죄 수사물도 중독증세가 있는 건가?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그녀가 처한 세계가 너무도 비정상적이고 비뚤어져있기에, 그곳에서 탈출하려는 그녀의 시도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러다가 깨닫는다. 그녀가 사는 세계가 내가 사는 세계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책에서 스치듯이 지나간 막장 세상을 보여주는 사건사고들이 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자기네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김밥집 주인을 사탄으로 몰아붙였던 사건도 진짜로 있었고, 교사들이 부모의 재력에 따라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다르다는 건 오래전부터 다 알고 있는 일이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무슨 죄를 저질러도 비싼 변호사를 고용해서 무죄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친구끼리 왕따를 만드는 것 역시 현재 진행형이며, 가족 간에 돈 때문에 의가 상하는 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혹자는 어쩌면 인영을 돌연변이나 괴물, 또는 사이코패스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낳은, 이 비뚤어지고 뒤틀린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의 결과물이다. 그녀가 괴물이라면, 이 세상 역시 괴물일 것이다. 개는 강아지를 낳고, 소는 송아지를 낳는 법. 괴물 같은 세상이 괴물 같은 아이를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아, 그렇다. 이 책은 단순히 패륜범죄를 저지르는 발칙하고 사이코패스같은 소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어른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세상을 제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이 비뚤어진 세계에 어떻게 손을 쓰지 않으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욕심을 취할 생각하지 말고, 양심을 되찾고 가족과 마음으로 교류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는 경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