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탄 (2disc) - 일반판
루이스 리터리어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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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Clash of the Titans, 2010

  감독 - 루이스 리터리어

  출연 - 샘 워싱턴, 리암 니슨, 랄프 파인즈, 알렉사 다발로스




  동양에서는 삼국지가 사골처럼 우려먹고 우려먹는 소재라면, 서양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다. 한국 막장드라마보다 더 막장 중의 막장을 보여주는,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의 막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아무리 미화하고 신들의 가치관은 인간과 다르다고 해도, 불륜은 불륜이고 근친은 근친이고 강간은 강간이다.


  신화에서 페르세우스는 비록 할아버지를 죽인다는 신탁을 받고 아기일 때 쫓겨났지만, 다른 나라 왕에게 구조되어 무럭무럭 잘 자란다. 하지만 그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왕이 이런저런 시험을 하고, 그 모든 시련을 뚫고 나와 왕이 되어 잘 먹고 잘 산다는 내용이다. 얼굴만 보면 돌이 된다는 메두사를 무찌른 것이 바로 그이다. 또한 제우스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 존재라는 것도 중요하다. 그 때문에 그가 괴물들과 맞서 이길 수 있으니 말이다. 반인반신이라니……. 갑자기 모 시장님의 연설이 떠오른다. 아, 그 분은 페르세우스와 동급이셨구나!


  영화에서는 신화의 내용을 좀 바꾸었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을 공경하지 않고, 버리기로 결심한다. 받들어주기만 원하고 자신들에게 축복을 베풀지 않는 신 따위! 그들은 신전을 불태우고 신의 동상을 부숴버린다. 하긴 신이라고 하는 짓이 남의 공주 건드리는 짓이니 존경할 리가…….


  하지만 원래 자신의 허물은 안 보이는 법이다. 인간에게 열 받은 신들은 벌을 주기로 한다. 크라켄이라는 거대 바다 괴물을 보내서 인간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 페르세우스는 길을 떠난다. 메두사를 잡아서 크라켄을 막기로 한 다. 거기에 제우스를 죽이려는 하데스의 음모가 바탕에 깔리면서, 이야기는 점점 복잡해진다.


  페르세우스 얘기를 볼 때마다 제일 불쌍한 것은 메두사이다. 그녀 얘기를 보면 강간당한 피해자이지만, 도리어 죄인이 되는 요즘 사회를 보는 것 같다. 피해자이지만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괴물이 되어야한다니……. 강간당했지만 네가 꼬리치지 않았냐고 욕먹는, 동네 망신시켰다고 강제로 이사가야하는 한국 사회와 비슷하다.


  게다가 제우스는 페르세우스가 자신에게 기도하지 않았다고 아들로 여기지도 않는다. 심지어 아들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공부하라고 보낸 필리핀에서 신나게 붕가붕가만 하고 와서, 그곳 여자가 낳은 자기 자식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일부 정신 나간 남자들 얘기와 다를 바가 없다. 아, 이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국에서 좋아하나보다. 원래 남자란 다 그래. 신도 그랬잖아. 이런 식으로 자기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식이 나름 유명해지자 그제야 내가 네 부모라고 찾아가서 생색내는 것도 비슷하다.


  영화의 CG는 참으로 멋졌다. 극의 진행이 CG를 따라오면 명작이 됐겠지만,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다. 음, 그러니까 감독이 이런저런 CG 장면을 만들어놓고 버리기 아까워서 욕심껏 다 집어넣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뷔페에서 한 번씩만 먹으면 골고루 다 먹을 수 있는데, 욕심내서 토할 정도로 먹어 결국 배탈 나는 나 같은 사람인가보다.


  뭐랄까, 극의 진행이 그리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페르세우스가 왜 신의 아들임을 부정하고 힘을 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양부를 사랑했던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어차피 최종 보스와 싸울 때 써먹을 거면서, 애꿎은 사람들만 죽게 내버려뒀다. 아, 생각해보니 나쁜 놈이네.


  게다가 그가 레어 아템을 득템하는 우연적인 상황에서 웃음을 터트린 사람은 나뿐일까? ‘숲길에서 검을 주우셨습니다. 띠링~공격력이 100 증가하셨습니다.’ 이런 멘트가 들리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그리고 전투 장면을 지루하지 않게 넣는다고 넣었지만, 어쩐지 지루했다. 이제 그만하고 좀 죽이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확실히 만들어놓은 CG장면이 아까웠던 게 틀림없다. 무엇보다 제일 황당한 건, 크라켄과의 마지막 결투 장면이었다. 그 놈은 최종 보스가 아닌 것 같았다. 설마 덩치로 뽑은 건가?


  그냥 영상 보는 재미만 있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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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원정대
배상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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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배상민



  '3포 세대'라는 말이 있다. 경제난으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뜻한다. 그 전에 있었던 '88만원 세대'라는 말보다 더 심각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단어다. 이 책은 그런 3포 세대의 애환을 다소 유머러스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웃기게만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유행어 중에 '웃프다'라는 말이 있다. 웃기면서 슬프다는 뜻이다. 여기 실린 단편들을 나타내는 가장 가까운 단어가 아닐까 싶다. 간혹 책 속에서 보여주는 상황은 웃음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게 재미있어서 웃는 건 아니었다. 어이없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슬퍼졌다. 그들이 겪는 모든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정규직을 얻는데 실패한 남자는 돌아온 연인과의 잠자리에서 예전처럼 자신 있는 섹스를 할 수 없다. 콘돔이 없다는 말에 그의 고개는 수그러질 수밖에 없다. (유글레나)

  남자친구를 기다리던 여자는 결국 낙태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향한다. 남자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기다리지만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걸로 끝이었다. (조공원정대)

  조직 보스의 여자를 건드렸던 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 아이를 껴안기로 했다. 이 세상 어디선가 자신이 뿌린 씨가 자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미운 고릴라 새끼)

  남자는 룸살롱에서 일하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가 사기를 당했을 때, 그녀는 충격으로 유산을 하고 말았다. (헤드기어 맨)

  한국에서는 영어만 잘하면 돈 벌기 쉽다는 말에 혹해서 건너온 외국인 피자배달부의 이야기는 한국의 피자배달부와 겹쳐 보이면서 웃픈 상황을 만들어낸다. (어느 추운 날의 스쿠터)


  종족 번식은 본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본능을 억눌러야했던 젊은이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원인은 무조건 남들이 하는 대로 자식을 교육시키려는 부모의 과시욕 때문일 수도 있고, IMF나 미국에서 벌어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부실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 때문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타의에 의해서였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거세시키고 만다. 남들보다 능력이 없다고 분류되었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청춘은 그냥 그렇게 시들어만 갔다.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슴 아픈 상황이지만, 저자는 더없이 유쾌한 어조로 읊어나간다. 그래서 더 슬프다. 게다가 몇몇 이야기는 안타까운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안녕 할리'와 '헤드기어 맨'이 그러하다. 읽다가 긴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이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원인을 미국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사랑 그녀를 데리고 간 자는 미국인 영어 강사, 공장이 망한 원인도 미국에서 생긴 모기지론 사태, 자기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태어나보니 백인과의 혼혈. 그들에게 한국은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하는, 별 의미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걸까?


  마지막 두 편은 현대 한국 청년들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말하고자하는 바는 비슷했다. '악당의 탄생'은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돈이 되는 일만 맡은 슈퍼맨과 부자가 되는 법에만 열광하는 미디어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담의 배꼽'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비틀어서 보여주고 있다. 결국 가진 자가 되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두 형제가 반목을 한 것이다. 비록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바꾸었지만, 다른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면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돈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또한 돈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신문을 보면 과연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수단 때문에 인간으로 누려야할 행복을 꿈도 꿀 수 없다면, 그건 더 이상 수단이라고 할 수 없다. 아, 그래서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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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이븐 (1disc)
제임스 맥티그 감독, 앨리스 이브 외 출연 / 캔들미디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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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The Raven, 2012

  감독 - 제임스 맥테이그

  출연 - 존 쿠색, 루크 에반스, 앨리스 이브, 브렌든 글리슨




  감독의 전작이 그 유명한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2005’라기에 기대를 했다. 게다가 영화에서 다루는 인물은 하의실종패션으로 유명한 곰돌이 푸도 아니고, 쿵푸를 배우겠다던 팬더 포도 아닌, 포우! 바로 에드거 앨런 포우 (Edgar Allan Poe). 유명한 시인이자 단편소설가 게다가 추리 소설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인정받는 작가! 또한 영화는 그의 작품들을 단편적이나마 영상화시켜 보여주면서, 의문에 쌓인 그의 죽기 며칠 전의 일을 보여주고 있다.


  와아, 영화에 대한 기대가 100% 채워지고 철철 넘칠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중간에 든 생각은, ‘도대체 왜?’ 이런 의문뿐이었다.


  영화는 포우의 소설대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시작한다. ‘모르그 가의 살인 The Murders in the Morgue’을 본뜬 사건이라든지 ‘함정과 진자 Pit and the Pendulum’에 나오는 거대한 균형추의 톱날에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사건 등등. (‘함정과 진자’에 나온 거대 균형추의 톱날은 영화 ‘쏘우 Saw’ 시리즈에서도 다뤘던 살인도구이다.)


  그런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포우가 사랑하는 여인 에밀리가 납치되면서 사태는 악화된다. 모두가 보는 파티장에서 일을 벌인 살인자는 대담하게도 그에게 도전장을 보낸다. 그녀를 구할 방법을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의 소설 속 내용을 본뜬 시체가 발견된다. 필즈 형사와 함께 포우는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포우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애너벨 리 Annabel Lee’라는 더없이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시를 쓴 시인의 얼굴, 그리고 ‘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라든지 ‘아몬틸라도 술통 The Cask of Amontillado’같은 기괴하고 소름끼치는 단편을 쓴 소설가의 얼굴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 두 가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열병과 같은 사랑에 들뜬 얼굴과 광기에 물든 얼굴만 보여줬다. 그나마 사랑에 들뜬 얼굴은 여인이 사라지자마자 싹 사라지고, 오직 광기와 분노 가득한 얼굴만 나올 뿐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지면 당연히 그러리라 이해는 하지만…….


  왜 범인이 그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포우의 재능에 질투를 느껴서인지 아니면 그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서인지 알 수가 없다. 이건 뭐 영화 ‘미저리 Misery, 1990’에 나오는 캐시 베이츠처럼 소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그런 결말이라니! 각본가가 누군지 옆에 있다면 욕을 퍼부을 뻔 했다.


  포우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에게는 간간이 튀어나오는 대사나 상황에서 ‘아, 이거야!’라고 맞추는 재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즐거움은 주지 못했다. 범인을 추측하는 재미도, 그 정체가 드러났을 때의 놀라움도 아무 것도 없었다. 차라리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영상이 더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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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 - 제22회 스바루 소설 신인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1
아사이 료 지음, 이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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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桐島, 部活やめるってよ, 2010

  작가 - 아사이 료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연결되어 있기도 한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예상을 했건 안했건, 바라건 바라지 않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범위가 확장된 경우가 있다. 오죽하면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까지 나왔을까. 사람 사이의 일은 진짜 모르는 것이다. 왜 갑자기 저런 얘기를 했냐면, 책을 읽으면서 저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기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 둔 직후와 맞물렸다. 그 중에는 기리시마와 친한 아이도 있고, 이름만 아는 경우도 있고, 또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배구부를 그만두면서, 연쇄작용처럼 아이들의 생활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예를 들면 매일같이 기리시마를 기다리던 여자 친구와 그녀의 친구가 있다. 하지만 기리시마가 배구를 그만두자, 여자 친구는 더 이상 방과 후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같이 있던 여학생은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아지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진다.


  이런 식으로 기존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자연스레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면 그 옆에 있던 사람 역시 자기 주위의 누군가에게 또 변화의 바람을 불어 일으킨다.


  이렇게 처음에는 그냥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변화는 점점 회오리바람처럼 학교 전체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큰 흔적을 남긴다. 이 책은 그 흔적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기리시마의 속사정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대충 짐작만 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언급만 될 뿐이다.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 속에는 아이들의 고민과 사랑, 우정,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 가족과의 서툰 관계 등등이 들어있다. 어떤 아이에게는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싶은 눈물과 체념 그리고 다짐이었고, 또 다른 아이에게는 고뇌와 불안 그리고 확인이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앞만 바라보고 가는 시선이기도 하고,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짓눌린 아이의 아주 약간 벌어진 숨통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제 겨우 열일곱,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진학이냐 취업이냐 고민을 해야 하는,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책에서는 그러했다. 새하얀 도화지라고 학생들을 지칭하지만, 정작 무슨 색이 어울릴 지 말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어떤 그림이나 어떤 색이 아이들에게 맞을지 같이 고민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나름 선을 그어가면서 생활을 했다. 눈에 띄는 아이, 그렇지 않은 아이. 위 또는 아래. 서로를 곁눈질하고 관심 없는 척하지만, 상대방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면서 각자 길을 걸었다.


  하지만 기리시마의 배구부 탈퇴는 그런 조용한 학교에 불어 닥친 한줄기 바람이었다. 그것은 광풍이 되어 아이들의 가슴에 남았다. 누구의 마음에 얼마 정도 깊이의 흔적을 남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누구에게는 봄날의 미풍일 수도 있고, 또 누구에게는 카트리나 급의 대형 태풍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지 아닌지는 아이들의 마음에 달려있다. 그런데 부정적인 영향은 주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은 각자 아픈 진실을 마주하면서 깊은 생각을 해서 결론을 내렸으니까.


  어른들은 그냥 지켜봐주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말처럼.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넣자면, 아이들이 여자 친구와 관계를 가질 때 콘돔을 떠올리는 부분은 대견스러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동급생'에 나오는 아이들은 콘돔을 쓰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었다. 짜식들, 앞으로도 콘돔은 꼭 써야한다.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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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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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이재찬




  2013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띠지에 적힌 ‘니가 살인자라 부모를 죽인 걸까? 아니면, 부모가 널 살인자로 만든 걸까?’라는 문장이 보였다.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이 소설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지? 호기심이 생겼다.


  250쪽 정도 되는,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두께. 책을 펼치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중간에 한눈 한번 팔지 않았다. 오탈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책에 푹 빠져들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이것은 마치 둘째 조카에게서 얘기해준 게임 ‘문명’을 했을 때의 경험과 비슷했다.

  (문명은 전원을 켤 때는 분명히 오후 5시였는데 정신을 차리니 새벽 4시가 되었다는, 게임자를 시간이동 시키는 컴퓨터 게임이라고 둘째 조카가 증언했다.)


  방인영은 고3 여학생이다. 대형 로펌에서 근무하는 아버지와 쇼핑과 교회에 다니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어머니가 가족의 전부이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빠는 그렇게 똑똑한데…….” 내지는 “엄마는 예쁜데…….” 그녀는 자신을 5등급이라 칭한다. 외모도 성적도 다.


  억지로 가야하는 교회 예배도 귀찮고, 자신을 보면 잔소리만 하는 아빠도 싫다. 그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방 변호사’라고 부른다. 홍길동도 아니면서. 그리고 부모의 재력 때문에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학교 선생도 싫고, 불쌍하게 보는 과외도 별로고, 이 나라 교육 제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다. 친구도 많은 것도 아니다. 거기다 친척들도 별로다. 다들 그녀의 집에 재정적 도움을 바라면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런 그녀에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고 있지만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심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계약직 공무원이라는 남자. 인영은 그에게 자신의 부모를 죽여 달라는 살인 청부를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인영은 외모나 공부는 5등급일지 몰라도, 눈치라든지 상황 파악, 상황 정리, 결단력, 행동력 등등은 거의 1등급에 해당하는 소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살해 계획을 세우는 장면이나, 뒤처리장면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아주 꼼꼼하고 세심하게 함정을 파는 것이, 방 변호사의 핏줄이 맞는 거 같다.


  만약 부모가 인영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허락했으면, 그녀는 엄청난 능력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가 없으니까 할 의욕이 안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5등급이 나올 수밖에.


  특히 인영은 비뚤어진 세상의 비리를 알아차리는 능력은 뛰어났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내뱉는 대사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딱하지만, 날카롭고 통찰력이 엿보이며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가끔은 자학적이며 뒤틀린 유머감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론이 있고 순환할 뿐이라는 이론도 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오전 수업 때 논술이 나한테 물었다.

  “순환이죠.”

  -중략-

  “조선 시대 때도 무전유죄 유전무죄,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가? 근거는 뭐가 있을까?”

  “부자는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법무법인에서 감옥에 가지 않게 해 주거든요.” -p.141


  나는 “사실 내가 별로 이 세상에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있는 데에는 어느 밤에 엄마 아빠가 뜨겁게 안아 버렸기 때문”에 불과하다. - p.171



  그 때문에 상당히 우중충하고 암울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읽고 난 느낌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어딘지 모르게 주인공에게 힘내라고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폐륜범죄를 저지르려는 소녀를 응원하다니! 갑자기 죄책감과 더불어 범죄스릴러물을 그만 봐야하는 갈등이 생긴다. 게임과 더불어 범죄 수사물도 중독증세가 있는 건가?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그녀가 처한 세계가 너무도 비정상적이고 비뚤어져있기에, 그곳에서 탈출하려는 그녀의 시도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러다가 깨닫는다. 그녀가 사는 세계가 내가 사는 세계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책에서 스치듯이 지나간 막장 세상을 보여주는 사건사고들이 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자기네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김밥집 주인을 사탄으로 몰아붙였던 사건도 진짜로 있었고, 교사들이 부모의 재력에 따라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다르다는 건 오래전부터 다 알고 있는 일이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무슨 죄를 저질러도 비싼 변호사를 고용해서 무죄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친구끼리 왕따를 만드는 것 역시 현재 진행형이며, 가족 간에 돈 때문에 의가 상하는 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혹자는 어쩌면 인영을 돌연변이나 괴물, 또는 사이코패스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낳은, 이 비뚤어지고 뒤틀린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의 결과물이다. 그녀가 괴물이라면, 이 세상 역시 괴물일 것이다. 개는 강아지를 낳고, 소는 송아지를 낳는 법. 괴물 같은 세상이 괴물 같은 아이를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아, 그렇다. 이 책은 단순히 패륜범죄를 저지르는 발칙하고 사이코패스같은 소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어른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세상을 제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이 비뚤어진 세계에 어떻게 손을 쓰지 않으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욕심을 취할 생각하지 말고, 양심을 되찾고 가족과 마음으로 교류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는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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