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A Pocket Full of Rye,
1953
작가 -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미스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녀가 젊다는 뜻이 아니다. 예전에 미스 마플의 단편을 만화로
만든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젊은 여성으로 그렸었다. 하지만 책에서의 그녀는 60은 넘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곱게 나이든 노부인이다.
뜨개질을 좋아하고 다정다감하지만 무시무시한 눈빛과 가끔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흉내 낼 줄 안다.
아, 나도 나중에 늙으면 그녀처럼 곱고 통찰력과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난 다혈질에 마음에 안 드는 건 못 봐주는데다가
욱하는 성질을 갖고 있잖아? 안 될 거야, 아마…….
소설의 첫 부분에 '암시장에서 파는 비싼 나일론 스타킹'이라는 말이 나온다. 재빨리 이 글의 출판 연도를 확인했다. 1953년. 지난 번 '예고
살인'때는 배급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그 때보다 3년이 더 지나서 그런지, 이 책에서는 배급에 대한 이야기나 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포트스큐라는 발음하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부호가 갑작스레 사망한다. 사인은 독살. 죽기 전에 큰아들과 대판 싸우고, 쫓아내다시피
한 둘째 아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거기에 두 번째 부인은 불륜 중이었고 말이다. 경찰은 의심이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 와중에 그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부인 역시 독살당하고, 어린 하녀마저
시체로 발견된다.
죽은 하녀가 자신이 몇 년 전에 데리고 있던 소녀였기에, 미스 마플은 분노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사건 현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냉철한 눈빛과
다정한 말솜씨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범인을 찾기 시작하는데…….
이번 이야기는 안타까웠다.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한 소녀가 어떻게 사기꾼에게 넘어가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는지, 생각하면 화도
나고 불쌍했다. 이번 이야기의 범인은 완전 나쁜 놈이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대했는지 뻔히 알면서! 하긴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그녀에게
접근했다. 예쁘지 않은 외모로 인해 주눅이 들었던 소녀를 감언이설로 꼬여 범행에 이용해먹다니,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읽으면서 욕을 퍼부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 나오는 미스 마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플 양의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연민의 정에 잇달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정한 살인자에 대한 분노였다.
그런 다음, 이 두 가지 엇갈리는
감정은 다 물러가고 승리의 기쁨이 파동쳤다. 어떤 전문가가 턱 뼈 한 조각과 두 개의 이빨로부터 어떤 멸종한 동물을 성공적으로 재구성해 놓았을
때에도 이러한 승리의 기쁨을 느꼈으리라. -p.283~284
심증은 가지만, 정확한 물증이 없어서 체포되는 것을 보지 못한 범인. 그 놈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증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와야 했던 범인. 하지만 뜻밖에도 편지 한 장이 모든 것을 밝혀주었다. 그것을 읽는 미스 마플이 분노와 눈물과 기쁨을 느끼는 장면에서,
나도 희열을 느꼈다.
그래, 이제야 물증이 생겼구나. 번지르르한 말솜씨와 훤칠한 얼굴로 여자들을 울리고 다닌 이 빌어먹을 놈아, 넌 이제 죽었다. 미스 마플이 승리의
기쁨이었다면, 난 통쾌함이었다.
그런데 문득 승리라는 단어에서 뭔가 걸리는 기분이었다. 범인을 못 잡으면 그가 이기는 것이고, 잡으면 탐정이 이기는 것으로 보는 걸까? 그러면
피해자는? 그 사람은 전리품이라는 말인가? 정의는 이긴다는 말도 있지만, 음. 그냥 승리라는 말이 피해자는 제쳐두고 범인과 탐정의 대결에만
집중한 것 같아서 조금 걸렸다. 하긴 탐정 소설은 탐정 때문에 읽는 것이지, 피해자는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 예전에는 탐정이 범인을
잡느냐 마느냐에 집중했는데, 요즘은 피해자에게 관심이 간다. 어쩌면 난 죽었다 깨나도 탐정보다는 피해자가 될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