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밤에 소복이 내리는 눈을 보노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러나 잠깐이다. 내일 출근 걱정이 금방 낭만적인 생각을 지워 버린다.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치 않고 공평하게 덮어 버린다. 쓰레기더미위로 내린 눈은 우리 눈에 보이는 불쾌함을 덮어버리고 코를 찌르는 악취도 덮어 버린다.

빨간색이든 노란색이든 가리지 않고 흰색으로 덮어버린다. 그래서 눈으로 덮힌 세상은 일순간 깨끗하게 보이는 착시현상이 생긴다.

 

올 겨울 눈이 많이 내리는 걸 보니 이 세상에 덮을 것이 그만큼 많은 게다.

우리가 일년 내내 뿜어댔던 수많은 더러움을 그렇게나마 덮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많이 내린들 잠깐뿐이다. 눈의 마술은 금방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 눈은 녹고 녹은 뒤 세상은 더욱 추한 몰골을 드러낸다.

 

아무리 덮으려 해도 덮을 수 없는 것들. 눈으로 결코 덮을 수 없는 우리들의 더러움을 우리는 결국 눈()으로 덮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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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이 득실거린다.

 

살아있는 싱싱한 육체를 물어뜯고자 텅 빈 머리를 흔들거리며 멍한 눈빛으로 몰려다닌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좀비에게 물릴까 공포에 떨며 도망 다니다 결국 좀비의 공격으로 그들의 행렬에 동참하고 만다. 꿈으로 가득했던 머리는 텅 비어 버렸고 정열을 간직했던 눈의 초점은 사라졌고 따뜻한 숨결을 내품던 코끝은 냉기로 얼어붙었다.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닌 좀비는 움직이는 시체에 불과할 뿐 이미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은 생각을 할 수 있고 생각한다면 말해야 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죽은 것이다.

 

좀비들은 살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말을 하는 것을 죽이려고 한다.

처음엔 좀비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점점 좀비의 공격을 받아 같은 좀비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좀비가 두려워 공격받기 전에 스스로 좀비가 되어 버린 자들도 생기고 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스스로 좀비가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리지 않아도 죽어 있고, 좀비가 아닌데도 좀비인 척 하고,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모두 좀비가 되어 간다. 우리는 좀비다. 나도 좀비다좀비세상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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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억 년에 걸쳐 이룬 지적능력을 초월하고 자각능력까지 가진 슈퍼컴 트랜센던스의 완성을 목전에 둔 천재 과학자 ’(조니 뎁)은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멸망이라 주장하는 반() 과학단체 ‘RIFT’의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는다. 연인 에블린’(레베카 홀)은 윌의 뇌를 컴퓨터에 업로드 시켜 그를 살리는데 성공하지만, 또 다른 힘을 얻은 그는 온라인에 접속해 자신의 영역을 전 세계로 넓혀가기 시작하는데,,

 

영화 트랜센던스줄거리다. 첨단과학기술의 발달을 경이로운 인류의 진화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우려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 역시 많다.

이 영화는 그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인류의 지능을 집약한 컴퓨터가 하나님의 선물이 될지 사탄의 재앙이 될 지는 오롯이 인간의 몫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독립적으로 설 수 있다는 바벨탑의 오만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엄청난 자연의 보복을 불러 일으켰다. 질병의 공포로부터 수명연장의 꿈으로, 기아의 공포로부터 음식물쓰레기의 천국까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간적인 삶의 결과는 초기 과학기술의 발전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데에 반론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오늘날 인간은 인간을 넘어선 인간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끝은 결국 창조, 생명의 창조, 인간의 창조에 이르는 것이다. 파괴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창조하는 것은 아직도 신의 영역이다.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아직도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아주 작은 미생물조차도 창조할 수는 없다전 인류의 모든 지성을 모으려는 인공지능의 탄생은 그래서 더욱 과학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지도 모르겠다.

 

컴퓨터에 업로드된 윌(정확하게 윌의 정신이겠다. 육체는 사라졌으니)이 전 세계 네트워크을 장악하고 하려는 것이 인류가 저질러 놓은 수많은 오류의 원상회복이었던가? 그러나 그의 계획이 실현될수록 인간들은 불안해한다. 논리회로와 알고리즘만 존재하는 그의 생각(?)이 인간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악개념, 비논리성, 모순덩어리의 사고방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사라진 자기 육체까지 창조해낸 윌은 사랑하는 에블린이 원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오프(OFF)하고 만다. 사랑이라는 지극히 비논리적인 이유로.

기계가 되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려다 그 길을 포기하고 다시 인간으로 복귀하고 만 윌.

자신이 추구한 자연으로의 복귀 역시 인간들이 했던 방식과 흡사했다는 것을, 스스로는 지극히 이성적이라 하지만 과정을 생략한 결과만의 독단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윌은 포기한 것이다.

인간은 거꾸로 기계로 인해 인간성을 되찾는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을 원래대로 복구하고자 노력한 기계가 인간적인가?

아니면 그런 기계의 노력을 막고자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기계를 파괴하고자 한 인간들이 더 인간적인가?

모두 알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결코 기계가 될 수 없고, 기계적으로 살 수도 없다는 것을.

그러면서 왜 기계적인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의 길이지만 기계가 결코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

 

지금 전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수많은 엘리트 과학자들이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과연 인간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을까? 기술에 대한, 자연에 대한, 인간에 대한 철학이 들어있기는 할까? 아니 고려 대상이라도 되고 있는 것일까? 장담할 수 없다면 이 영화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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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땅콩항공 조현아 사태로 인한 갑을관계가 전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번 조현아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을을 대표하는 사람인양 그동안 당했던 갑질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으로 던질 수 있는 돌이란 돌은 모두 그녀에게 던졌다. 조현아는 한순간 갑중의 갑에서 을중의 을로 내동댕이쳐졌고 모든 을에게 본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가련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으며, 그녀와 같은 무리 갑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다. 갑과 일대일로 설때는 한없이 초라한 을들이 은폐되고 안전한 공간에서 서로 엄호하며 쏘아댄 화살들은 멀리가지 못하고 결코 적의 갑옷을 뚫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 사태가 마무리 되면 조현아는 잠깐의 굴욕적인 을에서 다시 슈퍼갑으로 돌아갈 것이다. 갑이 시혜로 베푼 한정된 시간이 지나면 마법은 풀어지고 차가운 현실로 돌아가는 ‘야자타임’처럼 말이다.

 

갑이라고 항상 갑은 아니다. 나보다 상위 갑을 만나면 나는 을이 된다.

또한 을이라고 늘 을은 아니다. 나보다 하위 을을 만나면 나도 갑이 될 수 있다.

결국 갑을관계는 상관관계며 상황에 따라 상호간 얼마든지 위치가 바뀔 수 있다.

살다보면 나같이 평번한 사람도 별 볼일 없긴 하지만 가끔씩 갑의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있다. 구매자와 판매원, 입주민과 경비원, 부모와 자식들, 집주인과 세입자, 원청업체 직원과 하청업체 직원 등등...


어쩌면 이세상의 모든 관계가 수평을 이루는 동등한 관계는 없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갑과 을의 수직적 관계만 존재하며 우리 모두는 사는 매 순간 갑 아니면 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나도 모르게 갑질을 해댄 건 아닌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삿대질하며 불쌍한 을을 겁박하지 않았나

의무는 잊어버리고 권리만 주장하지 않았나

눈꼽만한 지위를 가지고 쥐꼬리만한 권력을 슈퍼갑인양 행사하지 않았나

갑같잖은 을 주제에 다른 을에게 행사한 내 유사 갑질에 대한 대가는 을끼리의 이전투구로 이어지고 결국 자멸로 이어질 뿐이다. 구경하는 갑들의 박수를 받으며.


을로써 나의 행동은 어떠하였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나만 눈감으면 된다고, 이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자고, 도움이 필요한 같은 을에게 얼마나 냉정했는지, 무너진 자존심을 합리화할 핑계 찾는데만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든지 갑이 되 보고자 얼마나 많은 을들을 짓밟았는지....

 

갑은 절대 자발적으로 을을 갑대우 하지 않을 것이다. 을들이 합심하여 을이 아닌 갑에게 (진정한)을질을 해대야 한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천박한 갑질에 대항하는 우리의 을질은 수많은 을들의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투쟁과 희생의 노력이 수반된다.  언제까지?  갑들이 마지못해 노블리스 어쩌구를 줏어 담을 때까지.

 

을들이여! 진정한 을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  갑질이 없어질때까지. 을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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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급한 일이 없어도 일단 도로에 차를 몰고 나오기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이드, 헐크로 변한다.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사람들도 마음이 급해진다. 신호가 바뀌었는데 조금이라도 지체할라치면 여지없이 뒤에서 경적음이 울리고, 노란불에 일찌감치 서기라도 하면 짜증난 뒤차의 원망이 뒤통수를 찌른다.

마치 카레이서마냥 무리한 차선변경이나 추월경쟁에 뛰어들 땐, 온 몸을 휘감고 도는 아드레날린에 심장은 벌렁거리고 혈압은 오르며 두 손엔 땀이 홍건하다. 적의 목을 단 칼에 베어 버릴 듯 차를 적토마 삼아 운전대를 칼 인양 휘두른 이 무모한 장수는 자기 차 뒤로 멀찌감치 밀려 나간 적들의 수급을 돌아보며 득의에 찬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신묘한 운전솜씨를 뽐낸 뒤 느끼는 잠깐의 쾌감이 사라지기도 전 목적도 이유도 없이 내달렸던 달인의 등 뒤엔 죽음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지나간다.


연비운전을 하면 좋은 점이 많다.


첫째, 돈 됩니다.

연료의 대부분은 급출발, 과속, 급제동 시 소모된다. 항상 계기판의 rpm을 보면서 바늘의 등락이 심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출발은 부드럽게 하고 과속을 삼가며 최고연비수준으로 정속 주행하며 ‘’브레이크는 돈이다“ 라는 생각으로 어지간하면 밟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운전하면 리터당 7Km에서 8km로 올라간다. 40ℓ 주유 시 40Km를 더 달릴 수 있으므로 5ℓ정도를 덤으로 달리는 셈이며 금전적으로 8,250원의 이익이 발생한다. 한 달에 세 번만 주유해도 15ℓ×1,650원=74,250원을 절약할 수 있다.

(연비 안좋은 중대형 2,399CC 휘발유차 시내운전 기준, 아마 다른 차들은 이보다 더 나을 것이다)


둘째, 안전운전 좋아요

연비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차간거리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고 신호체계를 파악하는 것은 필수다. 저만치 신호가 노랑이나 빨간 등으로 바뀔라치면 기어를 중립으로 놓고 탄력운전으로 가다가 마지막에 가볍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항상 정속주행을 신조로 여기기에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속에 의한 사고 날 확률이 줄어들며 미리미리 차선 변경을 여유 있게 하기에 무리한 끼어들기로 인한 사고나 다툼의 소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셋째, 차량수명연장에 도전

정속주행 및 안전운전으로 차에 무리한 힘을 가할 필요가 없기에 당연히 차수명도 길어질 것이고 급제동으로 인한 타이어마모, 각종 턱 등에 의한 바닥파손방지 등 차에 좋았으면 좋았지 나쁠 것은 없다. 사고나서 차 망가지면 수명을 논할 필요도 없겠다.


마지막, 생활의 도인(道人)이 저절로....^^;

처음엔 습관이 들지 않아 다소 힘들다. 여유 있는 차간거리로 옆 차가 잘 끼어들 수 있기에 욱할 수 있지만 숨 한번 마시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너 돈 많다. 그렇게 빨리 가고 싶으면 빨리 가라. 잘 못하면 영원히 갈 수 있으니 조심해라. 쯧쯧...” 그렇게 서둘러봐야 실제 도착시간은 별 차이가 없다는 통계도 있다. 목숨을 걸고 달리기엔 우리 삶은 너무 소중하고, 돈을 걸고 달리기엔 우리 지갑은 너무 얇다.

도(道)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수행은 산에서만 닦는 것이 아니다.

우리네 도로가 바로 수행터다. 도(路)에서 도(道)를 닦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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