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 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오해하자 말자'도 같은 맥락으로 쓸 수 있을까?  검찰청내에서  법질서를 지키라며 국민이 쥐어 준 권력을 '조자룡 헌 칼 쓰듯' 제멋대로 휘두르는 검사들의 허여멀건한 얼굴과 말쑥한 옷차림을 보노라면 그 리얼함에 현실인지 드라마인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래, 저건 드라마야. 아무리 그들이 부패했다 해도 차마 저정도로 사리사욕을 위해 이전투구를 하진 않을거야 "  손자병법 따위는 초등학생이나 구사하는 전법으로 치부해버릴 것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장면을 볼때 마다 내 입에서 되뇌어진 말이다.

 

보통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보이기에 드라마다.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왜곡도 하고 과장도 한다. 길고 긴 인생사를 몇회에 압축해서 흥미롭게 보여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청자 또한 그러리라는 것을 알고 본다. 그럼에도 가끔 드라마가 현실보다 더 리얼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드라마가 딱 그 짝이다. 

 

젊은 두 부부검사의 정의를 향한 싸움은 정작 사필귀정으로 마무리되어야 하는 드라마의 통속적인 양념일 뿐. 검찰총장과 특별검사의 물고 물리는 암투야말로 이 드라마의 진정한 백미며 '진짜'같은 진짜가 아닐까?  물론, 현실은 보다 온건하고 안전하며 은밀하게 진행되겠지만 말이다.  

 

아! 짜증난다. 내가 저들 보다 정직하고 법을 잘 지키고 어떤 부분에선 더 똑똑할 수도 있는데 단지 권력 -내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법이 저들 편이라는 이유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또 실제로 하찮게 처리 해버릴 수도 있다는 이 더럽게 차가운 현실이....드라마에서만 그들을 맘 놓고 욕할 수 있는 이 이상한 나라가.....

 

그런면에서 이 드라마는 정말 나쁜 드라마다. 나쁜 검사를 같은 검사마저도 쉽게 어찌해보기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정말 나쁜 드라마다. 그들의 한마디에 진실과 상관없이 서슬퍼렇게 법이 집행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결국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가를 다시 한 번 학습한다.  명목상의 법이 실질적인 권력에 의해 얼마나 쉽게 타락하고 남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복습까지 한번 더 하며 권력에 대한 굴종이야말로 그들의 무서운 손아귀에서 안전하게 내 삶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임을 가르치려 드는 정말 기분 나쁜 드라마다. 더럽게 재미있는..... 

 

이완구 총리지명자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승부 끝에 가까스로 턱걸이했다는 뉴스보도를 들으면서 다시 한번 드라마같은 현실이 떠오른다. "그래, 우리나라에서 저만한 위치에 오를 정도의 이력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유리처럼 투명한 과거를 가질 수 있겠는가? "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돈 없이 빽없이 오직 실력으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다는 것이 얼마나 드라마같은지 말이다. 드라마가 현실같은지 현실이 드라마같은지 헷갈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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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가족끼리 왜이래>의 차순봉은 죽음을 맞는 인간의 한 면을 보여주었다. 불치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는 고통은 아무하고도 그 무게를 나눌 수 없는 것이리라. 그걸 이해하면서도 어차피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죽게 되는데 다만 그 시점을 좀 더 당겨서 명확하게 되었다는 현실이 그렇게 힘들까?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내일 사고로 먼저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내가 죽는 시점을 모른채 죽는 것과 알고 죽는 것의 차이가 한 사람의 행과 불행을 이토록 좌우하도록 놔두는 것이 옳을까?

 

차순봉은 보통 우리가 갖는 죽음에 대한 상식적인 생각을 깨뜨리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그는 죽음을 무조건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삶이 조금 줄어든 것, 죽음의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죽음에 대해 보통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태도를 그는 보여 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슬픔으로 허비하지 않고, 죽는 그 시간까지 늘 그러하듯이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가족과의 일상을 보내다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고자 했다. 언뜻 비범해 보이면서도 잘만하면 나같이 평범한 사람도 따라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삶에 맞춰져 있다. 내일 뭐할까? 내일 무엇을 먹을까? 모레는 또 어떠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릴까? 내년에는 무엇을 하고 10년 뒤에는 또 무엇 무엇을 하고....그 어디에도 내 삶의 끝은 없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끝없는 삶만 생각하지 결코 죽음의 그림자는 밟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엄연한 운명이다.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또 다른 동반자다. 내 삶이 굴러가는 그 어느 순간에도 죽음은 항상 같이 다닌다. 죽음은 무섭다고 회피할 대상도, 저주스런 운명도, 비극적인 종착역도 아닌 삶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죽음을 준비하자. 행복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행복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결코 불행한 일이 아니다. 죽음은 삶을 보다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죽음은 인간의 욕심을 자제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천국에 가고자 애를 쓰는 것은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의 행복을 죽은 이후까지 연장시키고자 하는 욕심일 뿐이다.

 

죽음 이후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나는 족하다. 살겠다고 몸부림치며 주위사람들을 지옥에 끌어 들이지 않고, 그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삶의 미련을 한 가닥 먼지인양 훌훌 털며 깃털처럼 가볍게 일어나 이 세상과 작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순봉 아저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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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장점은 많다. 지적교양, 정신건강, 자기계발 등등. 독서의 장점에 관한 이야기들은 굳이 다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독서의 단점을 말하는 이는 별로 없다. 사실 독서의 단점은 그 장점에 비해 작다면 작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생각보다 크고 많을 수도 있다.

 

내게 있어 독서의 단점은 대부분 육체적인 것에 편중되어 있다. 거실을 책장으로 채운 덕분에 책상에서 책을 읽는 경우가 별로 없다. 주로 소파에서 뒹굴뒹굴 하며 읽는 편이다. 그래서 자라목이 됐다. 목을 수그리고 읽다 보면 목이 뻐근하고 심지어 가슴근육까지 당긴다. 스트레칭을 하면 좀 풀리기는 하지만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과 가슴이 굽었다. 누워서 읽다 보니 허리에 문제가 생겼다. 잠깐만 있어도 허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다. 그뿐 아니다. 눈도 갈수록 침침해졌다. 근시인데다 노안까지 와 가까운 것도 안보이고 멀리 있는 것도 안 보인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책을 계속 읽는 내 자신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고생을 하나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생은 새발의 피다. 진짜 고생은 따로 있다. 독서를 좋아하면서 육체적인 운동까지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다는 아니겠지만 그동안 주위를 둘러보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기질 자체가 운동을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나 역시 땀 흘리는 운동보다는 시원한 곳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사색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걸린 것이 치질이다.

 

맨날 쪼그리고 앉아 책만 보는데다 직업까지 사무직이다 보니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다 집에 오면 또 앉아 있고....가장 치명적인 것은 화장실까지 책을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결국 오랜 시간의 독서편력이 남긴 후유증을 오롯이 불쌍한 내 항문이 뒤집어 쓰고 만 셈이다가끔 불편할 때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결과는 참혹했다. 갑자기 악화된 것이다. 지금은 상당히 책을 보기가 힘들다. 이 글도 겨우 쓰고 있다. 엉덩이를 실룩 실룩 하면서.

 

그래서 수술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상태로 계속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차라리 시원하게 수술하고 다시 책을 보는 것이 백번 낫겠다는 생각이다. 책을 보다 생긴 병이지만 거꾸로 책을 읽기 위해서도 치료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자세로 독서하는 습관을 가져야겠다. 나이를 먹어 가니 독서에도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곧은 목과 척추, 밝은 눈, 허리를 받쳐주는 튼실한 엉덩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밑받침이다. 머리는 그 다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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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이 강하다는 것은 세상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내 주관과 소신대로 꿋꿋하게 살아가기에 주위 환경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정신건강을 지키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정도에 따라 인생의 행복지수도 결정된다는 것이리다. 부모의 교육, 자라난 환경, 타고난 기질에 따라 제각각이겠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과거는 흘려보내고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 성인이 된 이상, 앞으로의 내 인생은 내가 나를 결정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 보자.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멘탈강화비법 6가지’를 올려 본다.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지만 핵심인 것도 사실이다. 진리는 항상 너무 단순한 것이니까. 딱 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자기 연민에 시간을 낭비한다=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나 슬픔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빚이나 건강 문제 등과 씨름할 때 자기 연민에 빠지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기 연민 대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뇌를 훈련해야 한다. 멘탈이 강한 사람은 문제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는 데 집중한다.


변화를 무서워해 피한다=사람은 안락한 곳에 머물 때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새로운 도전을 피하는 것은 활기차고 풍성한 삶에 가장 커다란 방해물이 된다. 변화와 관련된 불편함을 참는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더 충만해지고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한다="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안 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야말로 남들로부터 거절을 당했을 때 느끼게 될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수비적인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상대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할 것 같은 일을 하거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선택이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한다=실수로부터 충분히 배워 두 번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보통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실수로부터 배움을 얻으려면 겸손해야 하며 좀 더 나은 새로운 전략을 기꺼이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멘탈 갑들은 자신의 실수를 숨기거가 변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실수를 자아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 분개한다=동료 직원이 진급을 하거나 친구가 이룩한 업적들을 들으면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성공에 분개하는 행위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 방해가 될 뿐이다. 자신만의 성공에 대한 정의가 분명할 때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자신의 목표와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한다=현대인들은 모든 일이 빠르고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자기 성장은 달팽이 걸음처럼 천천히 이뤄지는 것이다. 몸무게를 줄이거나 좀 더 자비로운 태도를 갖게 되는 것도 천천히 꾸준한 페이스로 해야 이뤄지지 금방 결과를 기대해서는 실망만 남게 된다. 멘탈이 강한 사람들은 진정한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결과를 보기 위해 기꺼이 열심히 일할 각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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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18C까지 가족과 성(性)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부부는 생식의 관계에 머물렀고, 성적인 욕망은 가정이 아닌 사회에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한 풍속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살롱문화’는 가난한 젊은이가 출세하기 위해 권력자의 후원을 얻기 위한 발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류층 부인과의 사랑의 장소를 제공했으며 각종 담론의 토론장이 되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공창(公娼)의 존재는 상류층의 전유물인 살롱 같은 고상한 배출구를 확보하지 못한 보통사람들에게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불가피한 성욕의 탈출구였을 것이며 당시 우리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왜 매독 같은 성병에 시달렸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한 해답도 겸할 것이다.


자식은 따로 유모가 키웠으며 부모의 양육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성을 가정이라는 테두리 밖에서 향유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젊은 기사가 모시던 상관의 부인에 대한 연모를 테마로 하는 ‘궁정문학’의 유행 또한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이다.


(조선시대 우리사회에서도 내용은 같거나 유사하다. 사극을 보면 진실은 아닐지라도 대감나리가 정실부인과 돈독한 애정을 과시하는 장면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서로 대감, 부인하면서 예의를 깍듯이 갖추다가 친구들과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속된 말로 ‘기생파티’를 하거나 투기를 ‘칠거지악’으로 규정하며 첩을 들이는 것이 허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가족과 성의 불일치는 전근대화의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러던 성이 19C에 들어서면서 가족과 결합되어 생각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를 신성하게 생각하였으며 공개된 욕망으로서의 성욕은 부부간의 ‘은밀한 침실’로 스며들었다. 부인은 정숙함을 미덕으로 삼게 되었으며 외간남자와의 사랑은 불륜으로 법적,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된다.


이처럼 근대 산업사회에서 가족의 의미는 과거와 많이 달라진다. 공장노동자가 필요해진 신흥 부르조아 계급과 결탁한 국가는 안정적인 인력수급을 위해 봉건사회의 장원제 몰락으로 경작지를 잃어버린 농민들을 도시로 유혹했다.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열악한 작업환경에도 버틸 수 있는 정신적 기제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온몸이 바스러지도록 희생할 수 있는 가장의 투철한 가족애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족’의 기원이 의외로 최근임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되는데 오늘날 마치 인간의 본성처럼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적 산물이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하나임을 알게 되는 건 허무한 일이다. 엄격하지만 따뜻함을 가슴에 숨긴 부정과 자식을 위해 일생을 희생하는 모정, 형제간의 경쟁어린 사랑을 구성으로 하는 ‘스위트홈’의 환상은 실재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아닌 인위적 결과물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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