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습관 - 나만의 업業을 만들어가는 인문학 트레이닝북
윤소정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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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문학하고 내 자신을 인문학하자고 외치는 저자의 깊고 푸른 인문정신실천서. 책이라는 갇힌 틀을 벗어나 우리가 왜 인문학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제로 인생에 적용가능한 무궁무진한 방법을 흥미롭게 제시한다. 취향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진정한 인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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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들과 거실에서 영화를 봤다.

 

이미 수년 전에 봤지만 아들을 위해 다시 봤다. 이럴 수가? 그때도 감동적으로 봤건만 심지어 줄거리마저 생각이 나질 않는 게 아닌가? 좋은 책이나 영화를 왜 다시 봐야 하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컨택트(contact). 외계생명탐사프로젝트인 SETI를 이끌었던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이자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과학자인 칼 세이건 박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한 과학자가 주변의 비웃음을 물리치고 외계생명체와 교신하여 그들이 보내준 자료로 우주선을 만들고 방문하여 만난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현재 가장 빠른 속도인 광속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수억년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고려한다면 이 우주상에 설사 우리 외에 생명체가 있다 하더라도 교신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우주에 전파를 보낸 후 그들이 받을 즈음 우리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며 그들 이 보낸 전파가 아무도 없는 지구에 도착할 무렵 그들 역시 멸종된 후일 것이니까.

 

이런 현실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저 광대무변한 우주를 상대로 벌이는 한 인간의 고독한 움직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는 숭고함과 장엄함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한 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주인공 앨리 박사(조디 포스터 분)는 마치 궁극적 원리나 세상의 본질을 찾는 것처럼 몰두한다. 그래서 혹자는 영화 속 외계인을 만나는 과정을 신을 만나는 영적 체험이나 명상의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과학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종교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 우주를 배경으로 신비스러운 기운이 흐름에도 과학자인 앨리는 초지일관 단호하게 신을 부정한다. 우주선을 타고 외계인을 만날 일생일대의 기회를 신을 부정함으로서 놓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과학이 결코 신과 양립할 수 없다는 칼 세이건 박사의 과학적 소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신비함이 아닌 과학적 신비함이랄까?

 

우리 평생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을 외계인과의 조우를 영상으로 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난 외계인은 앨리에게 만남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쥐어 주지 않는다. 그렇게 만나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나 또 만나자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긴 채.

 

지구로 돌아온 앨리가 과연 얻은 것은 무엇일까? 외계생명체가 우리 인간에게 남겨준 메시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뭔가 대단한 것을 얻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쓴 인간의 노력을 한낱 인연의 한가닥으로 마무리하는 그들의 존재는 아무리 봐도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결국, 수십억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우주와 인간과 또 다른 생명체와의 찰라의 만남과 기나긴 기다림의 약속으로 끝나는 인연의 삼각고리는 그대로 아름답고 장엄한 우주의 대서사시오 묵시록이다. 엔딩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내내 황홀하고도 헛헛한 느낌에 가슴이 진동한다.

 

추신 : 아들 왈, 오늘 영화는 왠지 머리가 복잡해.....성공이다. 저 무딘 놈의 가슴에 뭔가가 꽂힌 것이다. 오늘 영화는 일단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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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1-24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님과 정말 좋은 영화 보셨습니다.
저도 예전 칼 세이건 원작이란 것도 모르고 봤는데, 님글 보니 다시 보고 싶습니다. ^^

책을베고자는남자 2015-11-24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건 한참있다 다시 봤을때도 여전히 좋은것을 말하죠 시간은 예전에 보지 못한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는 마법을 부리죠
 
눈먼 시계공 사이언스 클래식 3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용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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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진화생물학의 최고 권위자며 공격적인 무신론 전도사인 ‘리처드 도킨스’의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고전이 된지 30년이 넘었다. 하도 유명한 책이라 10년 전에 구입했건만 몇 페이지 못보고 지금까지 보관만 해왔는데, 정작 더 나중에 나온 이 책 ‘눈먼 시계공’을 먼저 보고 말았다.

 

독서도 인연과 운명이 있는 것인지 이기적 유전자보다 더 두껍건만 요새 과학에 필이 꽂혀서 그런지 별 부담 없이 읽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 몇 가지를 빼고 예나 논증의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눈으로 넘겨 버렸으니 부담과 이해도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철학책을 보며 경험했던 한글의 외국어 화를 또 경험하고 있다. 철학은 어려워서 이해를 못하고, 과학은 몰라서 이해를 못하는 차이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분야에 정통한 학자가 쓴 책엔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른다. 비록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다고는 하나 과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하다면 안타깝지만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흐름으로 중요한 몇 가지를 집어 낼 뿐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외국어를 읽는 듯 고된 시간의 결과는 그럭저럭 달다.

 

진화론의 양대 산맥이자 학문적 라이벌이었던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미 2002년에 사망했기에 창조론이라는 철갑을 두른 신과의 전쟁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그의 아우라는 눈이 부시다. 책 제목인 ‘눈 먼 시계공’ 의 시계공은 원래 ‘윌리엄 페일리’ 라는 신부가 쓴 ‘자연신학’에서 유래한 말이다. 만약 땅에 시계가 떨어져 있다면 절대 우연히 아니라는 것이다. 바위는 우연히 떨어져 있을 수 있지만 복잡한 시계는 분명 만든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시계공은 창조주를 말한다. 진화론에 반대하고자 든 예인 시계공을 역으로 도킨스는 자연선택에 빗대어 눈먼 시계공이라 말한다. 일정한 의도가 배제된 자연의 선택을 ‘눈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2가지다. 창조론의 신화적 공격에 대한 진화론의 과학적 반박과 ‘굴드’가 주장했던 단속평형설에 대한 점진적 ‘자연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재미있는 예로 자연선택 과정을 설명한다. 가령, 원숭이에게 모니터와 자판을 주고 글을 치게 한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다.」

원숭이가 무작위로 자판을 두들겨 이와 똑 같은 문장을 우연히 칠 확률은 우주가 몇 번 다시 만들어질 만큼 어려운 일이다. 확률적으로 거의 0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우연히 덩기 길던사. 그야 저 놀가. 기르러 살치게. 」이런 문장을 치는 날이 올 수 있다. 그러면 위 문장을 기본으로 놓고 다시 자판을 두들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덩기 길던사. 그야 저 놀가. 르러 살치게. 」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문장을 다시 시작으로 또 수천번 치다 보면 우연히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있다.

길던사. 그야 저 놀가. 르러 살치게. 」 또 치고

원숭이 길던사. 그야 저 놀가. 르러 살치게. 」 계속 치고

길던사. 그야 저 놀가. 사고러 살치게. 」 또 치고

원숭이 사. 그야 저 놀가. 사과치게. 」 다시 치면

원숭이 엉덩이는 사. 그야 저 놀가. 사과러 살치게. 」

 

이렇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히 나온 것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언젠가는 원하는 문장이 나올 수 있다.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돌연변이로 진화한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기초로 아버지는 다시 변이를 보태고 내게 전해준다. 이 과정의 끝없는 반복이 진화의 내용인 것이다.

 

보통 인간의 수명은 100년이 안 된다. 우리는 길어야 100년의 시간을 살기에 당연히 이 시간만을 기준으로 진화해왔다. 당연히 사고의 폭도 100년 미만이다. 그러나 진화의 시간은 짧게는 수백만년, 길게는 35억년이다. 이 긴 시간의 폭을 우리는 가볍게 무시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침팬지를 아무리 관찰한다 한들 100년의 시간으로는 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물론, 아무리 긴 시간 본다 한 들 침팬지가 인간으로 진화하진 않을 것이다. 침팬지와 인간은 먼 옛날 같은 조상으로부터 이미 분화되어 각자 다른 종으로 진화의 길을 걸었으니까)

 

왜 우리는 진화론을 당연한 과학으로 인정하는 듯 말하면서 끊임없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신은 가깝고 과학은 멀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것은 간단하다. 믿는 자의 말로 ‘하나님을 영접’ 하면 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이다. 어차피 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에 더 가까운 동물이니까.

과학은 다르다. 이성이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납득이 돼야 믿는다.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보통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그 어려운 이론들을 이해하고 검증하겠는가?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과학들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데 왜 유독 진화론만 공격의 대상이 되는가?

우선, 우주의 기원 같은 물리학은 감히(?)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음에 비해 생물학인 진화론은 왠지 만만해 보인다. 수학으로 시작해 수학으로 끝나는 물리학에 비해 미생물에서 점점 발전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쉽게 들린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음에도 모두 알고 있는 듯 착각을 하는 것이 진화론이다. 빅뱅설 또한 창조론에 반대하기는 마찬가지만 그것을 반박하기란 과학자가 아닌 이상 힘들다. 하지만 생물학은 이론의 접근 가능성의 용이함 때문에 다윈 시대부터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로부터도 공격이 대상이 되곤 했다. 물리학이 지동설로 거시적인 탄압을 받았던 반면에 과학적 사고가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나온 진화론은 어중이떠중이까지 건드리는 만만한 이론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학적 이론보다 진화론이 일반인에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종교와 가장 극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동설도 충격적이긴 하나 추상적임에 비해 인간이 원숭이와 같은 종류라는 말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관심을 가질 만한 구체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천인공노할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이 6일 만에 천지창조를 하신 후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며 만족해하셨는데, 설마 하나님이 아메바나 침팬지를 보시고 “좀 있으면 이것들이 인간이 될 것이야” 하시면서 만족해하시진 않았을 것이다.

 

억지를 부린다면 이 모든 진화의 과정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성서에 나와 있는 말씀을 과학으로 일일이 검증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짓임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의심하지 말라 하셨잖은가?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법칙으로 삼고 산다. 모든 일은 원인이 있기에 그에 따른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뭔가가 생겼다는 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처럼 납득하기가 어렵다. 진화의 과정도 과정이지만 이 우주가 태어난 이유도 따로 없고 그 우주에 생명까지 나타난 별다른 이유 또한 없다는 것은 참 허무한 일이다.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늘 발생과 기원에서부터 찾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없는 이유를 기어이 만들면서까지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에 더더욱 이유 없음의 생명기원과 시간의 흐름에 맡긴 진화의 과정에 표를 던지려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장장 2주에 걸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완독한 대가치고는 참 보잘 것 없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냥 진화론은 과학적이고 진짜이니 어설픈 창조론에 혹하지 말라는 의미로 만족할 밖에. 그렇지만 광대무변한 우주의 경이로움과 생명의 신비로움을 접할 때마다 문득 문득 드는 이 영적인 느낌을 어찌할 것인가?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 꿇고 기도할 신을 버리고 전기로 움직이는 컴퓨터나 로봇을 택하는 것 같은 껄끄러운 이 느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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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존재의 역사 양자형이상학
이성휘 지음 / 고즈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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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거창한 과학적 존재론이다. 그것도 본인 자량을 곁들인. 굳이 돈을 주고 구입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읇는 분야는 이제 과학이 차지한 것 같다. 철학의 형이상학을 과학이 한다. 그럼 철학은 이제 존재라는 거창한 주제보단 소소한 생활로 직업을 바꿔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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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1-21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철학이 소소한 마음의 위안에 힘쓰고 있는거 같습니다.
 
두려움 없는 죽음, 죽음 이후의 삶
줄리아 아산테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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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 덮었지만 내용보다‘죽음’이란 단어 때문에 간단히 몇 자 적어 본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는 삶 다음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인간만이 언젠가는 자신의 생이 마감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대가는 자기 존재의 소멸에 대한 불안과 공포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은 인류의 숙명이 되었고 문화가 되었으며 결국 종교가 되었다.

 

미신이나 잡술로 취급하며 애써 무시하면서도 의식의 한 꺼풀만 벗기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무의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만날라치면 믿지 않으면서 믿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인류 문명의 위대한 결과물인 차가운 이성은 맨 정신일 때만 유효할 뿐, 누구나 만나는 순간 허무하게 무너질 만큼 막강한 죽음의 위력은 전설, 민담, 신화, 영화, 소설 등, 보다 덜 치명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생명 소멸에 대한 공포는 제아무리 아름답게 치장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우리의 공포데 대해 종교를 통한 영적인 극복 대신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는‘사자와의 대화’가 그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자주 접했던 죽은 자와의 접촉 방법은 다양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이야기는 소위 나쁜 혼령 즉 원혼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이승에 대한 집착이 강한 혼령일수록 좋은 일이 아닌 불길한 일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다. 엑소시스트 류의 영화에서 나타나듯이 대부분의 혼령은 인간에 대한 원한으로 산자의 몸에 들어가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해결하려 든다.

 

행복하게 죽은 사람은 어지간하면 이승에 고개를 내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승에 남긴 애증의 강도는 출현 빈도수와 비례한다. 물론, 문화적 측면의 관점에서 보면 귀신이란 존재는 인간 무의식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이런저런 제약으로 이룰 수 없는 수많은 관계와 사건은 귀신이란 무형의 그림자를 대리자로 내세우곤 한다. 현실에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무기력을 공동의 해결사로 해결하고자 하는 집단 무의식의 발로일 수 도 있는 것이다.

 

저자는 증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사례를 흘러넘칠 만큼 제시하지만 증명 불가하니 흔히 치부하듯이 사이비 과학이다. 예술과 문화로 사용하지 않고 실재하는 것으로서의 죽음은 생각만큼 아름답지도 않으며 조잡하고 께름칙하다.

 

저자가 교수임에도 영매로 활동하며, 죽음을 문화나 종교가 아닌 과학으로 연구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저자는 심지어 양자역학까지 꺼내 들며 다중우주론을 들먹인다. 저세상을 또 다른 차원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으로서는 거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 부으며 읽는 이를 긴가민가하게 만든다. 이걸 믿고 안 믿고는 아무도 결정해줄 수 없다. 개인의 문제다. 하지만 교수라는 학문적 신분은 독자의 판단을 호도할 여지가 다분하다.

 

정 저자의 권유대로 사자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실체로 인정하고 그들과 교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이 책에 나와 있는 과학적(?)이며 이성적(?)인 방법으로 영혼을 불러 볼 일이다. 그러나 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럴 용기도 없다(진짜 나타나면 어떡해^^;).

 

저세상의 존재유무를 떠나서 난 아직도 이세상과 저세상은 별도의 세계로 구분되어 있고 서로의 경계를 지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분신사바’로 귀신과 이야기한 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도 소통이 안 되는데 저 세상의 존재까지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사후세계의 따분한 사례의 나열에 질려 절반도 못 읽고 그저 그런 잡서로 치부하고 덮었지만 왠지 석연찮은 것 하나. 이성의 힘으로 무시하면서도 늘 일어나는 불길한 호기심인 죽음에 대한 비밀은 어쩌면 살아서는 얻을 수 없는, 죽어야만 공유할 수 있는 영원한 인간의 숙제다. 삶과 죽음의 질서를 우리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내세에 대한 주제넘은 관심보다 현세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죽음의 비밀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대응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런 책에 솔깃해서 펼쳐보는 나는 무엇이 그토록 궁금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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