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스케치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에 지루한 과정이 있었다.

바로 선을 긋는 연습이다. 상하로 좌우로 비스듬하게 선을 긋는다.

사실 그림이란 결국 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시작하여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 스케치다.

 

어반스케치는 펜이 주인이다. 물감은, 색은 그저 거들 뿐.

수채화와 다른 점이다. 심지어 펜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래서 초보 땐 펜으로 그리기 전 연필로 먼저 밑그림을 그린다.

아무래도 지울 수 없는 펜으로 바로 그리는 건 전문가나 가능하다.

 

처음엔 선을 긋는 것도 일이다. 손이 발발발 떨려 삐뚤빼뚤 나간다.

지루한 선 긋기를 끝내고 나니 나뭇잎을 그리라 한다.



 

 

나뭇잎 몇 장 그리고 나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언제나 그림 같은 걸 그려 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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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리잔이다.

 

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고 조금만 부주의하면 깨져버리는

약하디약한 유리잔

 

바닥에 떨어져도 깨지고, 어딘가에 부딪혀도 깨지고, 다른 잔에 부딪혀도 깨지고

심지어 같은 유리잔과 부딪혀도 깨지고 마는 유리잔이다.

 

어쩌면 마치 깨지려고, 깨지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다.

왜 난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레스잔처럼 강하게 태어나지 못했을까?’

유리잔은 한없이 그들이 부러웠다. 그에게 강함이란 결국 생명의 길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옆자리에 대충 여러 개로 포개져 있던 밥그릇이 말을 건넨다.

유리잔아 내 꼴을 봐라. 난 사기그릇이라 잘 깨지진 않지만

너처럼 이쁘진 않단다. 그저 밥이나 담고 말지.

 

아무도 우리에게 다른 걸 요구하진 않는단다.

그렇지만 넌 뭔가 우리보다 더 특별해 보여.

넌 파티 같이 특별한 날에만 등장하잖아

먼저 투명한 유리잔은 내용물이 훤히 보이기에 좋잖아.

아름다운 색깔의 음료를 담고 있는 유리잔의 영롱함이란 얼마나 환상적인가

 

또 잔을 부딪칠 때 쨍! 하고 울리는 소리가 좋아서 건배용으로 좋고

유리잔 특유의 얇으며 차가운 감촉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

또 유리잔이 주는 다양한 디자인의 예술적 자태도 장점이잖아.

 

밥그릇의 말을 들은 유리잔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내가 비록 약하지만 좋은 점도 많아

저 밥그릇은 튼튼하지만 그저 밥만 담고 말잖아.

난 특별한 존재야.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 날 찾잖아

 

유리잔은 평생 한탄만 했던 자신의 인생에도 특별한 점이 있다는 걸 깨닫고

삶에 대한 욕구가 불끈 치솟았다.

 

그래,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난 특별한 유리잔이야

유리잔은 새삼 자신의 삶을 다시 새롭게 보기 시작했고

비관으로 일관했던 과거를 잊고 앞으로 행복할 날만 꿈꾸었다.

 

그러던 며칠 후 유리잔은 평생을 노심초사 그렇게 조심했건만

결국 안주인의 부주의로 깨지고 만다.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린 유리잔 조각의 눈에 

저 멀리 밥그릇이 혀를 차는 게 보였다.

그게 유리잔 조각이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세상이었다.

 

 

유리잔만이 가지는 존재의 의미가 충분하기에

약하지만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유리잔은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고 이뻐서 살아남은 것이다.

 

나는 유리잔이다.

약하게 태어났고 언제 깨져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위태한 인생이지만

그 특유의 감성과 미적 자태로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담고 있는

그래서 특별한 날에 사람들이 사랑하는 유리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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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에 대한 결과가 저절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문제나 사건이라는 원인이 있고 그에 대한 대응이나 분석이 있은 다음에야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정()이라면 그에 대한 반()이 있어야 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인생에 어떤 전기가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

현재를 깨뜨리는 뭔가가 없다면 현상 유지만 될 뿐 발전이 없는 것이다.

 

내가 처한 현실()이 공고하면 할수록 그걸 부수는 전기()도 충격이 커야 될 것이고 정과 반의 충돌이 클수록 그 결과인 합 역시 의미 있는 결과가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살면서 겪는 수많은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내가 얻는 깨달음의 크기도 비례한다고 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어설프나마 일말의 위안이 될까?

 

뒤집어 말하면 나같이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통한 반의 작용도 약하기에 그 결과인 합의 크기도 미미해 시시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고난을 겪고 성장하는 신화 속 영웅의 삶보다 일상이 반복되는 

그저 그런 범부의 삶이 내 길이지만 별 불만은 없다.

 

영웅의 삶이 아니어서 깨달을 가능성이 작은 인생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반의 작용을 부지런히 만들면 미미하나마 조그만 합의 결과라도 더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독서, 취미, 여행, 인간관계 등 사소하지만 내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열심히 연마하는 것이 반의 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인생의 정반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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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년 동안 인간의 유전자는 생존의 유불리를 계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환경을 탐색하며 그 대응 방식을 개선하였다.

 

그런데 최근 채 백 년도 안 되는 동안

인간의 문명 발전 속도는 너무 급작스러워

유전자의 진화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게 되었다.

 

현재 지구 환경의 변화는 거의 빙하기의 도래만큼이나

인류의 생존에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상황이다.

 

기존 진화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새롭고 파격적인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도 인류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응책을 논하기보다

제각기 자신들의 입장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옛날처럼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인데

이미 머리가 클 대로 커버린 인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단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능력을 극대화하는 수 밖에 없다.

과학기술을 최고로 발전시켜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 말이다.

인간에겐 자연스러운 것보다 과학적이고 인위적인 방법이 더 쉬울 듯 하다.

 

그냥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면 될 것을

온갖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해결하려는 어려운 길을 택한 지구인들

 

과연 초지능의 AI가 우리의 생존을 설계해줄까?

슈퍼컴퓨터나 양자컴퓨터가 우리의 밝은 미래를 계산해줄까?

우주선을 개발하면 지구를 버리고 도망이라도 갈 건가?

생명공학으로 100세를 넘게 산 들 지구가 없다면 어디에서 살까?

아예 가상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영혼으로 존재하려나?

 

세상을 바꾸고, 미래를 바꿀, 혁명적인, 꿈의 기술들이 곧 도래한다는데

도대체 바꿀, 도래할, 사용할 사람과 무대가 사라진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지구의 자연이 사라질 시간과

인류의 기술이 해결할 시간 중

누가 더 먼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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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란 드넓은 대양의 바람과 파도에 흔들리는 돛단배와 같다.

아무리 그 자리에 있으려 해도 파도에 바람에 흔들린다.

 

그 옛날 누군가는 어차피 흔들리는 거 운명이라 생각하며 

버티려 애쓰지 말고

그냥 바람 부는 대로 파도치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게 상책이라 말했다.

 

그때는 바람을 잘 이용하여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게 최선이었고

거대한 파도와 세찬 바람에 대항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순리(順理)를 따르는 게 과거의 자연관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인간에겐 자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자연은 두려운 존재에서 정복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돛단배에 엔진을 달아 바람을 거스르고 파도를 헤치며

언제든지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이젠 역리(逆理)의 시대다.

내가 갈 길은 내가 정하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간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거스르며 

돛단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했고 인간은 주인인 마냥 자연에서 마음대로 갖다 썼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자연을 소비했고

자연을 거스르고 극복하려다 자연을 파괴했다.

오만한 인간의 끝없는 착취에 지쳐 분노한 자연은

우리를 선택의 갈림길에 서도록 했다.

 

이제라도 자연에 순응하며 공생의 삶을 살 것인지

지금처럼 자연을 소비하며 그 끝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모험의 길을 계속 가보든지

 

어차피 자연의 입장에서

공생이란 인간이 계속 살아남는 것이고

공멸이란 인간이 멸종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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