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생각을 꼬투리 잡아

뼈를 추리고 살을 붙이면

그럭저럭 문장 하나.

 

스치는 상념이든 어지러운 사설이든

말 안 되는 궤변이든 갈고 닦은 성찰이든

어떻게든 한 단락.

 

내 생각을 내 눈으로 보며

내 손으로 내보내니 즐겁다.

그래서 쓴다. 좋아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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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리서치 기업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에 의하면

2018년을 기준으로 인류가 지금까지 생산해 낸

모든 데이터의 총 합이 33제타바이트(Zettabyte)를 넘겼으며,

2025년까지 175제타바이트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다.

 

컴퓨터 데이터 기준으로 1 ZB = 1021bytes 이니

= 1,000,000,000,000,000,000,000 bytes .

이렇게 말하면 잘 감이 오진 않는다.

 

케비넷  2,000개가 들어찬 4층 짜리 데이터 센터 한 동이 1EB라면

이런 데이터 센터가 1,000개 정도 모여야  270인 제타바이트가 된다.

면적으로는 뉴욕 맨해튼의 20% 나 된다고 한다.

 

사실 이렇게 표현해도 잘 모르겠다.

그냥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보고 넘어가자.

이렇듯 많은 인류의 지식이 정보의 홍수를 이루며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의 클릭만을 기다리고 있는 인터넷 시대다.

 

과거엔 주로 문자로 기록된 인쇄물에 거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러하기에 정보를 얻기 위해선 십진분류법에 의한

기록물 보관 장소를 찾아가야 했다. 주로 도서관이나 서점이다.

 

다행히 거기까지 잘 찾아갔다 해도 내가 원하는 정보를 찾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수많은 기록물을 일일이 뒤적거려야 한다.

효과적인 검색 방법보다는 끈기와 지구력이 관건이다.

 

그런데 이젠 지식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넘쳐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원하는 지식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

 

이처럼 모든 지식과 정보가 이미 온라인에 존재하고

필요할 때 간단히 검색해서 사용하다 보니

온라인 공간을 마치 내 머릿속의 기억공간으로 착각하기 쉽다.

한 마디로 내 머릿속에 모든 지식을 보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그렇다면 인간의 뇌의 저장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미 노스웨스턴대 폴 레버 교수는 뇌의 데이터 용량은

페타바이트에 달할 것이라고 말한다.

1페타바이트는 MP3 음악을 2,000년 동안 계속 재생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공간이다.

5분에 1곡을 듣는다고 하면

1시간 12 ×24시간×365×2,000=210,240,000 곡이다.

 

효율성과 경제성을 극대화하려는 뇌의 가소성을 제외한

단순 계산이니 이것도 그냥 엄청난 양이라고 만 생각하자.

 

그런데 과연 우리 뇌는 저장 공간을 얼마나 채우고 있을까?

삶에 필요한 다양한 생활 기억을 제외한 추상적 지식의 양은 얼마나 될까?

우리 뇌의 기억 능력이나 보관 공간이 정보화에 발맞추어 늘어났을까?

수십 만 년 전 원시인의 뇌보다 현대인의 뇌가 더 진화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화의 발걸음은 그렇게 빠른 것이 아니니.

아마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시냅스 연결이 더 강화되고 복잡해졌을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 뇌는 여전히 어떤 정보를 내 머릿속에

입력해야 그걸 분석하고 결과를 내놓는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제 아무리 많은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내 머릿속에 없다면

무용지물이란 뜻이다.

 

내가 검색하기 전인 인터넷의 수억테라바이트의 지식과 정보보다

내가 검색해서 알고 있는 한 줄의 정보가 실제로 의미 있는 것이니

정보화시대와 동떨어져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착각에 빠지지 말자.

내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검색하든 과거와 똑같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정보를 얻든 일단 읽고 저장해야 한다.

 

제 아무리 정보 시대라도 우리는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내게 맞는 것과 아닌 것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오히려 더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단순한 정보를 내게 필요한 삶의 지혜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건 정보화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수동으로 해야 하는 과정이다.

 

정보는 디지털화되어 무한정 저장할 수 있지만

우리의 뇌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선택적 지식을 효율적으로 저장하여

잘 사용해야 한다.

 

하드디스크는 무한정 늘어날 수 있지만

그걸 이용하는 소프트웨어는 아직도 선택이다.

그러니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마치 내가 그런 것인 양 착각하지 말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땀 흘리며 공부하자.

 

그렇지 않으면 묘목을 곳간에 산더미처럼 쟁여놓고

뿌듯해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다를 바 없다.

묘목을 심지 않는다면 어찌 열매가 열리겠는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은

첨단 과학 시대에도 여전히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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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세상은 초연결사회라 한다.

불과 몇십 년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IT 기술은

전 지구를 단일 인터넷망으로 네트워크화하여

지리적으로 수 억만리 떨어져 외모, 생활, 가치관 등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자유롭게 연결하여 공동의 문제를 모의하고

감정을 교류하며 소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세상이다.

 

인간이 연결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건 집단생활을 시작한 후였을 것이다.

생존을 경쟁하던 다른 동물에 비해 불리한 신체조건을 가진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협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연결은 붉은 여왕 효과이다.

경쟁을 통한 상호 변화와 다양성 획득으로

결국 자연이라는 큰 틀에서 함께 생존에 유리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

 

개인적 의미로서 연결은 고독으로부터 탈출, 협력을 통한 생존의 안정성 획득으로 생존과 행복을 얻기 위함이다.

 

사회적 의미로서 연결은 집단지성을 통한 수평적 상호 협력으로

위기에 공동 대응하여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정치적 의미로서 연결은 사회적 연결이 시작이나

변질되어 수직적 위계를 바탕으로 한 일방적인 연결이 되었다.

 

문명의 발달은 결국 연결 체계의 고도화와 같은 맥락이니

이처럼 연결을 생존전략으로 택한 인류의 선택은 사회적 동물로 진화를 거듭하였고 성공적으로 지구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다.

 

그러나 연결이 항상 선은 아니었다.

연결은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였고

때로는 권력의 수탈과 탄압을 위한 연결고리로 이용당하기도 한다.


일부의 이익을 위한 연결엔 늘 소외가 필수였다.

자연을 소외시키며 인간 이외의 생물을 소외시켰고

인간 내에서도 나머지 인간을 배제하였다.

자유로운 연결이 아닌 강요에 의한 일방의 연결이 있었고

개방적인 연결이 아닌 폐쇄적인 연결이 있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삶의 환경과 조건이 변해도

인간은 인간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인간은 연결 없이 존재하기 어렵다.

인간이 선택한 숙명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연결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연결이 우리만의 우리를 위한 연결에 불과했다면

이제 끊어진 인간과 지구를 다시 연결해야 한다.

 

지구와의 연결이란 자연과의 관계이며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지구가 인간에게 주는 신호를 포착하고 해석하며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미래 인류의 존망과 밀접한 일이기에 가장 의미가 크다.

 

또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연결도 진행되고 있다.

AI의 발달로 인간과 기계의 연결이 가시화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기계적인 형식의 연결이지만

미래엔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연결을 모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결대상과 별도로 연결하는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

원시시대의 몸짓, 단순한 음성과 그림에서 말과 글로 진화했고

기술의 발달로 전기와 통신을 이용한 놀라운 소통이 일어났고

미래에는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의사소통 기술이 나올 수 있다.

 

어떠한 연결이든지 획일화, 단순함으로 연결되는 것은 연결이 아니다.

모든 연결이 하나로 수렴하는 순간 그 연결은 잘못된 연결이다.

뇌의 전기신호처럼 사방팔방으로 연결되는 게 바람직하며

일정한 방식으로 규칙적으로 일방으로 연결되는 건 위험하다.

단방향의 수직적 연결이 아니라 사방팔방 위아래의

비규칙적인 다중연결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에게 연결이란 다름을 전제로

다양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무질서하지만 정연하며

시끄럽지만 조용하고

다르지만 같은 방향이며

모순 같지만 논리적이고

불가능하더라도 끝까지 안고 가야 하는

 

그런 유토피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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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열심히 그려 본다.

모르시는 분들이 보기에는 조잡하고 어설프게 보이겠지만

이 정도 그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 무려 2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인 결과다.

 

눈으로 보는 것과 손으로 그리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눈으로야 고흐 같은 거장의 그림도 감상하고 비평까지 할 수 있겠지만

직접 그려 보라고 하면 불가능하지 않은가?

 

칸트나 헤겔같이 지독히 어려운 철학도 읽고 뭐라 할 수는 있겠지만

막상 내가 쓰려면 개똥철학도 쉽지 않다.

남이 하면 쉬워 보이지만 내가 하면 어렵다는 건 진리다.

 

그래서 난 늘 어려운 길로 간다. 내가 직접 하는 걸 즐겨한다.

난 수많은 구경꾼 중 한 사람보다 누구 하나 본 사람이 없어도 주인공이 

좋다내가 배우고 내가 관객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가수의 노래를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손도 안 따라주고 목도 제멋대로여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실망하지만 직접 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램브란트의 그림엔 관심이 없다.

조잡하더라도 내가 직접 그린 그림에 포만감을 느낀다.

 

아마도 인생에서 원한 만큼 성취하지 못한

자아의 열등감 표출일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끊임없이 뭔가에 도전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감히 시늉도 할 수 없는 건 아예 관심을 꺼버리는 부작용도 있다.

 

주제도 모르고 모든 것에 질투심을 갖고 다 잘하고 싶은 게

어리석은 마음의 소치일지라도 그게 나라면 어찌하겠는가?

그렇게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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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시민 2024-05-2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재미있으신데 그림도잘그리시니 블로그 ? 볼맛이 나는군요 저는 허지웅작가의 글을 좋아하는편인데 좀 닮으신거 같기도 하루에 다보지않고 틈틈이 아껴서 보고싶네요
그림보는것도 좋아하고 잔잔한 글을 읽는것도 좋아하는데 좋은 아지트입니다 ㅋ
 
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 10주년 기념판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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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끝이다. 그 뒤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과학적으로 거론할 가치도 없는 영혼, 영생을

인간은 버리지 않으려 한다.

 

인간의 뇌는 이율배반적이고 모순투성이다.

이성적으로 아닌 걸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독특한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나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은 다음에 달라진 게 있던가?

남는 건 그저 슬픔이나 사라진 것에 대한 허무 같은 감정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영혼의 존재를

만들어 내고 믿으려 한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죽음 이후의 삶(?)을 논한다면 2가지다.

영생과 환생이다.

환생은 영혼은 지금 그대로의 나이지만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리셋되기에

결과적으로 나지만 내가 아니다.

윤회의 업을 해결하려는 과정으로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면에서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죽음의 극복이다.

비록 육체는 소멸했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해줄 수는 있는

모든 기억이 담긴 영혼이 그대로 천국에 존재하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에 정확히 부합한다.

 

문제는 영생의 가능 여부인데 현재까지 존재한다는

객관적인 근거나 증거는 당연히 없다.

오직 성서의 하나님 말씀과 따르는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이 전부다.

 

그래서 영혼 등 사후 세계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500페이지가 넘는 지루한 논리 전개 끝에

인간에게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나쁜 이유는 살면서 누리는 혜택을 더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영생보다 더 낫다 외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다.

 

철학은 죽음을 그저 생물학적 종말로 치부하며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죽음이 두려운 건 우리의 감정이지 이성이 아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죽음을 철학적으로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무거운 담론을 이성으로 정리하는 게 가능할까?

애초에 죽음이 너무 무서워서 결국 종교를 만든 게 인간이지 않은가?

영혼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따져서 없다고 한들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사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에 그 정체 모를 경험이 두려운 것이고

나라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무게에 무섭다는 것이다.

 

살아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더는 못하기에 두렵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서 무섭기도 하지만

내가 사라짐으로 나의 세계가 소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더 두려운 것일 수 있다.

기나긴 인생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담긴

허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죽음이라는 게 참 낯선 일이기도 하다.

공평하게도 이 세상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아쉽게도 그 누구도 진짜 죽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기에

죽음이란 내 옆의 누군가 죽는 간접적인 경험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땐 나는 어떤 감정을 가지지만

정작 내가 죽었을 땐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 방법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그 느낌을 알겠는가?

다른 누군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죽음에 어떤 감정을 가질 뿐.

 

존재가 소멸하면 그 존재의 세계도 소멸한다.

나의 죽음은 내가 소유한 세계가 사라짐을 의미하지만

그걸 인지할 난 이미 사라졌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다.

 

즉 죽음 이후는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논리와 상관없이 살아 있는 내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사이에서

남은 삶과 죽음의 공포를 반비례로 느끼며 산다.

 

평범한 인간이 평균의 이성을 가지고 죽음을 극복하는 건

애초에 가당치도 않다.

극복은 고사하고 논하는 것도 불편하고 힘들다.

과연 누가 죽음을 직시할 수 있겠는가?

 

두렵고 불편하고 피하고 싶고 아니 그냥 생각도 하기 싫은데..

그래서 죽음은 그냥 묻어 놨다가 때가 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그냥 잊어버리고 즐겁게 살다가 순서가 되면 가는 것.

죽을 때 고통스럽더라도 내 생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다고 생각하고

꾹 참고 갈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한 대처방안이다

더는 전부 가식이고 거짓이라 생각된다.

 

난 죽음이 무섭다.

사는 게 행복하고 좋아서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고

죽기 전에 병들어서 고생하는 게 싫고

내가 차가운 시신으로 변한다는 게 어색하고 징그럽다.

 

오죽하면 죽은 자에 대해 삼일장, 천도제, 사십구재가 있고

이집트 사자의 서’, ‘티벳 사자의 서등 영혼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방법까지 적어 놓은 매뉴얼까지 있겠는가?

 

사실 영혼이 없다면 이미 죽은 자에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정작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남은 자를 위로하려는 게 진짜 속내가 아니겠는가?

 

결국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성찰의 동력으로 삼으며

앞서간 망자(亡者)로 인해 내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를 추스르고

내 차례가 될 때까지 죽음에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내가 결론 내린 산자의 죽음에 대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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