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래 나온 시간의 역사를 좀 더 줄인 것으로 일반인들이 읽게 쉽게 만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렵다. 여기서 말한 시간이 우주를 말한다면 공간은 시간속에 포함된다. 다른 과학서보다 비교 우위에 들만한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소 실망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두께가 얇아 읽기는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시계공 사이언스 클래식 3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용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금세기 진화생물학의 최고 권위자며 공격적인 무신론 전도사인 ‘리처드 도킨스’의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고전이 된지 30년이 넘었다. 하도 유명한 책이라 10년 전에 구입했건만 몇 페이지 못보고 지금까지 보관만 해왔는데, 정작 더 나중에 나온 이 책 ‘눈먼 시계공’을 먼저 보고 말았다.

 

독서도 인연과 운명이 있는 것인지 이기적 유전자보다 더 두껍건만 요새 과학에 필이 꽂혀서 그런지 별 부담 없이 읽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 몇 가지를 빼고 예나 논증의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눈으로 넘겨 버렸으니 부담과 이해도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철학책을 보며 경험했던 한글의 외국어 화를 또 경험하고 있다. 철학은 어려워서 이해를 못하고, 과학은 몰라서 이해를 못하는 차이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분야에 정통한 학자가 쓴 책엔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른다. 비록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다고는 하나 과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하다면 안타깝지만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흐름으로 중요한 몇 가지를 집어 낼 뿐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외국어를 읽는 듯 고된 시간의 결과는 그럭저럭 달다.

 

진화론의 양대 산맥이자 학문적 라이벌이었던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미 2002년에 사망했기에 창조론이라는 철갑을 두른 신과의 전쟁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그의 아우라는 눈이 부시다. 책 제목인 ‘눈 먼 시계공’ 의 시계공은 원래 ‘윌리엄 페일리’ 라는 신부가 쓴 ‘자연신학’에서 유래한 말이다. 만약 땅에 시계가 떨어져 있다면 절대 우연히 아니라는 것이다. 바위는 우연히 떨어져 있을 수 있지만 복잡한 시계는 분명 만든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시계공은 창조주를 말한다. 진화론에 반대하고자 든 예인 시계공을 역으로 도킨스는 자연선택에 빗대어 눈먼 시계공이라 말한다. 일정한 의도가 배제된 자연의 선택을 ‘눈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2가지다. 창조론의 신화적 공격에 대한 진화론의 과학적 반박과 ‘굴드’가 주장했던 단속평형설에 대한 점진적 ‘자연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재미있는 예로 자연선택 과정을 설명한다. 가령, 원숭이에게 모니터와 자판을 주고 글을 치게 한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다.」

원숭이가 무작위로 자판을 두들겨 이와 똑 같은 문장을 우연히 칠 확률은 우주가 몇 번 다시 만들어질 만큼 어려운 일이다. 확률적으로 거의 0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우연히 덩기 길던사. 그야 저 놀가. 기르러 살치게. 」이런 문장을 치는 날이 올 수 있다. 그러면 위 문장을 기본으로 놓고 다시 자판을 두들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덩기 길던사. 그야 저 놀가. 르러 살치게. 」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문장을 다시 시작으로 또 수천번 치다 보면 우연히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있다.

길던사. 그야 저 놀가. 르러 살치게. 」 또 치고

원숭이 길던사. 그야 저 놀가. 르러 살치게. 」 계속 치고

길던사. 그야 저 놀가. 사고러 살치게. 」 또 치고

원숭이 사. 그야 저 놀가. 사과치게. 」 다시 치면

원숭이 엉덩이는 사. 그야 저 놀가. 사과러 살치게. 」

 

이렇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히 나온 것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언젠가는 원하는 문장이 나올 수 있다.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돌연변이로 진화한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기초로 아버지는 다시 변이를 보태고 내게 전해준다. 이 과정의 끝없는 반복이 진화의 내용인 것이다.

 

보통 인간의 수명은 100년이 안 된다. 우리는 길어야 100년의 시간을 살기에 당연히 이 시간만을 기준으로 진화해왔다. 당연히 사고의 폭도 100년 미만이다. 그러나 진화의 시간은 짧게는 수백만년, 길게는 35억년이다. 이 긴 시간의 폭을 우리는 가볍게 무시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침팬지를 아무리 관찰한다 한들 100년의 시간으로는 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물론, 아무리 긴 시간 본다 한 들 침팬지가 인간으로 진화하진 않을 것이다. 침팬지와 인간은 먼 옛날 같은 조상으로부터 이미 분화되어 각자 다른 종으로 진화의 길을 걸었으니까)

 

왜 우리는 진화론을 당연한 과학으로 인정하는 듯 말하면서 끊임없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신은 가깝고 과학은 멀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것은 간단하다. 믿는 자의 말로 ‘하나님을 영접’ 하면 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이다. 어차피 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에 더 가까운 동물이니까.

과학은 다르다. 이성이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납득이 돼야 믿는다.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보통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그 어려운 이론들을 이해하고 검증하겠는가?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과학들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데 왜 유독 진화론만 공격의 대상이 되는가?

우선, 우주의 기원 같은 물리학은 감히(?)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음에 비해 생물학인 진화론은 왠지 만만해 보인다. 수학으로 시작해 수학으로 끝나는 물리학에 비해 미생물에서 점점 발전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쉽게 들린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음에도 모두 알고 있는 듯 착각을 하는 것이 진화론이다. 빅뱅설 또한 창조론에 반대하기는 마찬가지만 그것을 반박하기란 과학자가 아닌 이상 힘들다. 하지만 생물학은 이론의 접근 가능성의 용이함 때문에 다윈 시대부터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로부터도 공격이 대상이 되곤 했다. 물리학이 지동설로 거시적인 탄압을 받았던 반면에 과학적 사고가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나온 진화론은 어중이떠중이까지 건드리는 만만한 이론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학적 이론보다 진화론이 일반인에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종교와 가장 극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동설도 충격적이긴 하나 추상적임에 비해 인간이 원숭이와 같은 종류라는 말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관심을 가질 만한 구체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천인공노할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이 6일 만에 천지창조를 하신 후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며 만족해하셨는데, 설마 하나님이 아메바나 침팬지를 보시고 “좀 있으면 이것들이 인간이 될 것이야” 하시면서 만족해하시진 않았을 것이다.

 

억지를 부린다면 이 모든 진화의 과정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성서에 나와 있는 말씀을 과학으로 일일이 검증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짓임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의심하지 말라 하셨잖은가?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법칙으로 삼고 산다. 모든 일은 원인이 있기에 그에 따른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뭔가가 생겼다는 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처럼 납득하기가 어렵다. 진화의 과정도 과정이지만 이 우주가 태어난 이유도 따로 없고 그 우주에 생명까지 나타난 별다른 이유 또한 없다는 것은 참 허무한 일이다.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늘 발생과 기원에서부터 찾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없는 이유를 기어이 만들면서까지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에 더더욱 이유 없음의 생명기원과 시간의 흐름에 맡긴 진화의 과정에 표를 던지려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장장 2주에 걸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완독한 대가치고는 참 보잘 것 없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냥 진화론은 과학적이고 진짜이니 어설픈 창조론에 혹하지 말라는 의미로 만족할 밖에. 그렇지만 광대무변한 우주의 경이로움과 생명의 신비로움을 접할 때마다 문득 문득 드는 이 영적인 느낌을 어찌할 것인가?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 꿇고 기도할 신을 버리고 전기로 움직이는 컴퓨터나 로봇을 택하는 것 같은 껄끄러운 이 느낌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의 모든 존재의 역사 양자형이상학
이성휘 지음 / 고즈윈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거창한 과학적 존재론이다. 그것도 본인 자량을 곁들인. 굳이 돈을 주고 구입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읇는 분야는 이제 과학이 차지한 것 같다. 철학의 형이상학을 과학이 한다. 그럼 철학은 이제 존재라는 거창한 주제보단 소소한 생활로 직업을 바꿔야 할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5-11-21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철학이 소소한 마음의 위안에 힘쓰고 있는거 같습니다.
 
아인슈타인 & 보어 : 확률의 과학 양자역학 지식인마을 5
이현경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양자역학은 과학혁명 이후 뉴턴에 의해 세워진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대상과 방법만 알면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는 고전역학적 세계관은 과거를 기반으로 이어지는 현재를 거쳐 예정된 미래로 흐르는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주장한다.

 

그러나 확고부동의 기계식 미래관은 양자역학에 의해 흔들리고 말았다. 관찰대상과 관찰자의 이분법은 촌스런 이야기가 되었으며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쏘아댄 광자의 운동에너지에 의해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며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기를 거부하는 전자의 이야기는 내게 ‘불확정성의 원리’ 대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양자역학은 기존 고전역학의 과학관만 혼란시킨 것이 아니다. 이제 과학은 철학이 되었다. 과학과 철학은 더 이상 별개가 아니다. 헤겔, 하이데거같은 철학자들은 오로지 인간의 이성만으로 사유의 극한에 다다른 인식론을 펼쳤다. 그러나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의 힘은 이 세상을 단순히 추상적인 사유로 규정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계의 비밀을 새롭게 벗겨가고 있다. 이제 세계관은 철학이 아닌 과학으로 세워야 하는 시점이 된 듯하다.

 

과거 한 두 명의 천재적인 사유가 검증할 수 없는 존재론을 펼쳤다면, 현재는 다수의 훌륭한 과학자들이 가설과 실험을 통한 검증으로 무장한 과학적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의 존재론을 제시하고 있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因果)의 법칙에 따른 시공간의 엄격한 분리에 기반을 둔 과거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여전히 몸과 마음을 의탁한 채 살고 있는 내게 확률과 우연의 불연속적인 양자 세계는 낯설고 어색하다.

 

철학적 존재론도 이해 못하는 내가 양자론적 형이상학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과학에 문외한인 내가 수식으로 이해할 순 없다. 과학자들이 쉽게 풀어 쓴 내용에 담긴 핵심적이며 개괄적인 표어에서 흐름을 알고 내 사고에, 내 인생에 적용할 수 있는 실마리를 몇 가닥 정도 끌어 낼 수 있는 것만으로 그 어려운 지식을 끙끙대며 읽어낸 보람이 있을 듯하다.

 

비록 전부는 아니더라도. 설사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왜곡된 결과를 얻었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예술가가 무언가 특이한 것에서 영감을 얻어 본인의 작품에 반영하듯이 나도 무언가 생소한 것에서 내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감을 얻는다.

 

그것이 어렵지만 과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과학은 내게 미지의 영역이고 신세계다. 과학은 우주탄생과 진행의 신비, 생명의 탄생과 진화, 시공간의 정의와 다차원의 세계, 상대성이론의 거시물리학에서 원자 같은 미시물리학, 하다못해 사후세계의 영적 소통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내 호기심에 어느 정도 근사치의 해답을 줄 수 있는 소중한 무엇이다.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자연을 배제하며 고독한 진군을 거듭한 인간의 절대정신은 이미 최고점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이제 더 이상 수퍼맨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대신 우리는과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고의 세계를 열어 나가야 할 것 같다.

 

누가 물었다. 과학에 가치가 있는가?

난 대답하고 싶다. 가치가 과학에 있다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5-11-03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전 여전히 철학이 과학을 이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과학이 더욱 발전하고 도움될 수 있다고 믿는 일인입니다. ^^

책을베고자는남자 2015-11-05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날엔 수학자가 철학자였습니다. 근대 이후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걸은 것이 너무 멀리 간거죠.
저도 철학이 과학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지만 녹록치 않아 보이더군요. 사실 철학은 어렵긴 하지만 누구나 접근 할 수 있지만 과학은 따로 공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더라구요. 학교를 벗어나면.
 
다윈의 서재 - 진화하는 지식의 최전선에 서다
장대익 지음 / 바다출판사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한 과학대중서에 대한 소개. 거의 고전의 반열에 들만한 책들이다. 다 읽어보고 싶은 욕심은 굴뚝같지만 대중서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만만치 않은 책들이 많다. 과학에 문외한이라면 호흡을 길게 하고 읽어야 할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