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은 어린이 날이지만, 우리 아이들을 다 키운 내게는 박경리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일 뿐.
박경리 선생님은 2007년 7월말 폐암이 발견됐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였고, 2008년 4월 4일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 2008년 5월 5일 오후 2시 45분 경 숨을 거두셨다.
선생님 돌아가신 다음 해 2009년 8월 16일,
나는 원주에 사는 조카네 아기 첫돌을 핑계로 오랫동안 갈망했던 박경리 문학공원에 찾아갔었다.
이곳은 토지문학관으로 불렀었는데, 토지문화관과 명칭이 비슷하여 찾는 이들에게 많은 혼돈이 있어 유족과 협의하에
2008년 8월 14일부터 박경리문학공원으로 변경 사용하게 되었다.
박경리문학공원에서는 토지 완간일(1994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소설 토지의 날'을 통해 작가의 자취와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눈다. 내가 갔던 날은 8월 16일이라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박경리 문학공원 관리사무소,
1층에는 공원나들이에 필요한 자료가 준비돼 있고, 2층에는 소설 토지의 작품소개를 위한 전시물이 있다.
선생님 사진을 바라보며 흠모의 눈길을 보냈고...
선생님 시를 음미하기도 하고...
박경리 선생님은 1980년 서울 정릉집을 정리하고 원주에 정착해 텃밭을 가꾸고 일구며 이곳에서 토지 4부와 5부를 집필하셨다.
18년간 살면서 손수 가꾸셨던 단구동 자택 대문을 들어서면...
선생님은 안 계셔도 꽃밭은 철에 맞춰 온갖 꽃들을 피워올렸다.
봉숭아, 해바라기, 칸나, 다알리아...
정원에서 바라본 박경리선생님 옛집
손수 가꾸셨던 텃밭, 나무와 꽃을 보존하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쉼터를 새로 만드는 등 공원화를 위해 옛 모습과 바뀐 곳이 있다. 건물은 원형 그대로 내부 및 외벽을 보수하였으며, 1층은 선생이 생활하던 자취를 볼 수 있도록 가구나 집필도구를 기증받아 전시관으로 조성하고 2층은 문학 및 예술동호인들의 사랑방으로 활용하고 있다.
선생님은 이곳에서 원주의 흙과 바람과 하늘을 벗 삼아 글을 쓰셨다. 집을 나서지 않고 글만 쓰셨던 사연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갈 데 다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어떻게 토지를 쓸 수 있었겠어요....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는 26년에 걸친 집필기간 끝에 완성된 5부 21권의 대하소설이다.
소설 토지의 첫 장면은 1897년 8월 15일로 시작된다.
1897년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토지1, 1부 1권, 39쪽)
소설 토지의 마지막 장면은 1945년 8월 15일이다.
"어머니! "
양현은 입술을 떨었다. 몸도 떨렸다. 말이 쉬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 이,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뚝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끝) -토지 21, 5부 5권 395쪽-
소설 토지 21권의 집필을 마친 날은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였다.
단구동 옛집 집필실 시계는 지금도 2시에 멈춰있다.
선생님이 앉아 글을 쓰시던 자리도 그대로 보존하고...
선생님은 저 창으로 밖을 내다 보셨겠지...
거실에서 내다 보면 이렇게 정원이 보인다.
집을 나와서 본 거실 창문 밖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옛집 왼쪽에 자리잡은 텃밭에선 고추가 자라고 가지도 자라고 오이와 여러가지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텃밭 윗쪽에는 홍이동산이 조성되었다.
홍이동산을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용두레벌이 나온다.
토지 속의 이국 땅인 간도 용정의 이름을 낳은 용두레 우물과 간도의 벌판에서 연유한 이름이며, 일송정, 용두레 우물, 돌무덤 풍경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관리사무소 앞쪽에 펼쳐 놓은 평사리 마당~사진으론 알아보기 어렵지만, 토지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고향 평사리의 들녁이 연상되도록 섬진강 선착장, 둑길 등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다.
해바라기와 능소화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원주 흥업면 매지리에 위치한 토지문화관.
토지문화재단에서 학술 문화행사 및 연구.창작. 집필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회의실. 세미나실. 집필실. 숙박시설 등을 건립하여 문화활동을 하고자 하는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전체를 한컷에 담지 못할만큼 규모가 상당히 크다.
본 건물에는 선생님의 유품과 기념물들이 전시되었고...
박경리 선생의 어머님과 어린시절, 그리고 재봉질하는 젊은 날의 선생님
뒤에는 문화행사에 참여한 분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건물이 나란히 있다.
토지문화관 옆에는 소박하게 지어진 박경리 선생님의 새집이 있다. 단구동 옛집을 떠나 이곳에서 사셨다.
손수 가꾼 채소와 직접 담근 장으로 작가들을 먹이셨던 선생님의 장독대~~~
작가들의 집필실로 쓰는 오른쪽의 토지관
왼쪽에는 매지관이 있고....
선생님은 2007년 소설 토지의 날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 박경리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작가는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작가가 마지못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후학들을 위한 의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전에 모습을 뵈었던 2001년 11월 11일은 내게 영광스런 날이었다.
평사리 최참판댁을 복원하고 제1회 토지문학제에서 축사하시는 선생님
토지세트를 사놓고도 2년이 지난
2004년 1월 20일 ~2004년 3월 10일까지 40일만에 읽은 <토지>는 10년 주기로 다시 읽을 작정이다.
해마다 선생님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 선생님을 추모하고 기억하렵니다.
토지가 청소년용으로 압축해서 나오고 뒤이어 만화로 나온 것도 썩 좋게 생각지 않는데, 어린이를 위한 만화로도 나왔다.
글쎄, 26년에 걸쳐 작가의 전생애를 걸고 쓴 작품을 서둘러 이른 나이에 읽히려고 압축하는게 과연 옳은 일인가?